새해가 밝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23년 영화인데 23년 12월 31일 시청을 완료했다.
유망한 영화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내가 신뢰하는 몇 몇 평론가들이
올해의 최고 수준의 영화로 선정하는 것에 고무되어 바로 시청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한 영화이다.
이성적이고 단단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근자감을 가진 나의 알량함을
여지 없이 드러내게 한 작품이다.
영화를 그저 관객 시점에서 보는 수준에서 벗어나
특정 배역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스스로 깊은 자각과 자성을 갖게 하는
특별한 경험까지 하게 하는 작품이다.
나쁜 말로는 관객을 농락하는 정도의 영화라고 표현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는 가치중립적인 것이지만
자본주의라는 것을 앞에 두고 과도한 욕망과 과도한 생존경쟁으로 얼룩진 세상.
특히 대한민국에서 얼룩진 자본주의의 표상은 부동산, 똘똘한 아파트 한 채로 치부된다.
아파트가 그의 인생을 규정하고, 물질적 풍요를 좌우하고
인격과 대우를 달리한다.
그런 아파트가 천재지변으로 모두 사라졌다.
요행히 단 한 개의 아파트만 남았다.
변변치 않은 영세민 아파트였던 그 아파트만이 이제는 현재의 강남 한강변 아파트처럼
특권과 기득권을 부여받는다.
그 아파트 주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아파트의 외부인들은
생존을 위해 그 아파트에 거주하고자 희망하지만
그 아파트의 주민들은 자신들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인을 거부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점점 배타적이 되고 이윽고 외부인을 남에게 기생하는 바퀴벌레로 칭하며 매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아파트를 얻기 위해 투사했던 노력들을 정당화하면서
또 생존을 위한 불가피성을 내세우며 치열하고 잔인하게
거주권을 주장하고 외부인을 배척한다.
그들의 안정성과 생존본능을 내세워 외부세상에 남은 자원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획득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일들이 점점 붉어지자, 아파트 주민 사이에서도
소수이지만 회의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생겨난다.
소수의 그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 인도주의적이고
신앙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외부에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적인 상황 설정과
위협들이 속속 표현되기에 관객을 고민하게 만든다.
나도 가치를 앞세우는 사람이지만,
이번 만큼은 나의 연약한 가치관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소수 사람들이 너무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 느꼈던 논리와 감정이 아마도 지금 우리가
다소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강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논리와 감정,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그 논리와 감정을 영화를 통해 십분 경험해 보고
심지어는 두둔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치관의 아노미를 경험하게 된다.
와,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한동안 가치 갈등을 겪겠구나!
그러나 영화 말미 한 번의 결정적 격량을 겪고 나서
소수의 일원이었던 박보영이 아파트를 벗어나 정처없이 있다가
어떤 곳에 배타적이지 않게 수용적으로
소박하게 생존해 가는 사람들의 거주지역에 다다르게 된다.
물론 박보영도 그가 거주하던 그 배타적인 아파트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새로운 거주민을 보면서 매우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그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
이 장면에서 관객의 한 명인 나는 매우 세게 뒤통수를 맞은 경험을 하게 된다.
블랙아웃처럼, 내가 평소에 가졌던 가치관이 소실되었었는데
그 장면에서 초라하게 Knock-down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
'그렇지! 저런 세상은 분명 소실되지 않지, 저런 세상은 분명 존재하는 거야.
저런 세상이 사라진 것은 내 왜곡된 가치관과 욕망, 편견 속에서만 사라지는 거야!'
영화의 연출력에 의해서 나는 욕망덩어리인 기득권 자본주의자들 속으로
녹아들었다. 초라한 내 모습, 발가 벗겨진 내 모습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몇 분 안에 내 초라한 모습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작가, 그리고 연출가는 매우 능수능란한 사람들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창조적 작품을 만들면서 엄청난 주제의식과 흡인력을 발휘했다는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문화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좋은 의미에서) 개인의 욕망을 분출시키는 행위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제약과 한계를 극복 또는 넘어서는 것이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게
함으로써 나와 세상을 점검하고 사장되어 가서는 안 되는 어떤 가치들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표출되는 자유로운 상상,
그것이 현실과 괴리되지 않고 마음껏 현실의 모순을 다룬 것,
그리고 처절하게 관객의 더러운 옷을 벗기는 능수능란함.
이 영화 참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