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감옥에서 위로자이신 마리아
엄청난 홍수를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테조 강 중반, 암초 위에 세워진 바라의 성 율리안 감옥 성채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감옥은 빛이라고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18세기 중반, 중세시대의 수감자들이 17년이란 긴 세월을 참고 견디었던 곳입니다.
선교지역 남미에서 활동적인 선교로 꽃을 피웠던 예수회는 어느 날 포르투갈의 수상이었던 폼발에 의해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극단적인 행정으로 잔인하고 무자비한 독재로 선교사들을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선 수도원 장상이지만 포르투갈 사람이 아닌 예수회 신부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의 그곳의 생활은 끔찍했습니다. 벽들은 습기가 조금씩 듣는 것이었고, 주변 모든 것은 곰팡이가 슬든지 녹이 슬어 부스러지고 있었지요.
홍수가 났다 하면 감옥은 고약한 냄새와 진흙으로 범벅인 된 수렁이 되었습니다. 누더기를 입은 채, 빛이 전혀 없고 빛이라고는 작은 기름 등잔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근근이 이어가는 예수회의 그곳의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심한 고통은 정신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우울과 억눌림에 의한 것들로 몇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흐려져 갔지만, 그곳에서 자유로이 나갈 수 있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본인의 허원을 깨거나 수도회에서 탈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미사를 할 수 없어 성체에 의한 위로였습니다. 그 때문에 부탁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코웃음 치는 조롱뿐이었지요. 그렇게 법적인 재판도 없이 수많은 날과 달들이 흘러갔습니다.
감옥에 갇힌 예수회원 중에 오버팔츠 지방의 암베르크 출신의 마틴 슈바르츠라는 회원이 있었지요. 그는 오랫동안 교도소의 고통 중에서도 참고 살아남은 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이에른 지방 고향 집에서 기념으로 “머리를 갸웃이 숙이신 어머니”라는 작은 성모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성모상은 원래 빈-되블링의 맨발의 카르멘 수도원의 성화 복사본으로 동판화였습니다. 그는 엄격한 물건 검색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감옥까지 용케 가지고 들어와 숨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수색과 통제에서도 그 성화는 많은 존경과 위로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 성화에는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고, 더 좋은 전환점이 오지 않는 처지를 위한, “절망하는 자의 위로자이신, 모든 위험의 도피처이신 분”이라는 (베른 성에서 페. 마이스터브룩의 1762년 9월 8일 사랑하는 성모님 생신 축하를 위해 지은) 라틴어 기도가 있었습니다. 178의 2행 구절로 마리아를 영원하신 아버지의 딸로, 사랑하는 아들의 어머니로, 성령의 순결한 정배로 칭송하는 기도였습니다. 페. 마이스터브룩은 하늘의 여주인이신 무한한 신뢰와 모든 고통받는 자들, 또한 권력으로 내친 자들, 거룩한 희생자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식량으로 성사와 위로를 줄, 또한 견디어낼 수 있는 징표로 노자성체를 청하였습니다. 결국, 마리아께서는 도와주실 것으로 구성되었지요.
정말 곧바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조용히 수용소 안에서 미사를 교대로 집전하였고 생명의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살아있는 무덤 속에서, 단지 걸레 같은 옷을 입었지만, 가끔은 지저분한 진흙탕 물속에 서 있는 채로 그들은 희생제물을 들고 미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슈바르츠의 동판화 “머리를 갸웃히 숙이신 어머니”를 들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들은 위로와 기쁨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방문에 환호하였습니다.
그들의 고통속의 삶은 속죄로, 그리고 죽은 회원들은 성인처럼 영원한 천국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는 갑자기 또는 눈에 띄게 병에서 회복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요새의 주무관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비웃듯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이 감옥 안에서는 모든 것이 썩어나가고 있는데, 예수회 사람들만 이 감옥에서 썩지 않고 있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1777년 포르투갈 왕 요셉 1세가 사망하면서 수상인 폼발은 권력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예수회원들은 드디어 구덩이에서 바깥세상에 나와 대낮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눈이 낮의 빛에 익숙하고 폐가 바깥 공기에 익숙할 때까지 몇 주일이 걸렸습니다.
예수회원 중 37분이 사망했고, 45분은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사실은 통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감자들은 중세 감옥에서 수개월 안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생존자들은 성모님의 중재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노라고 증언합니다. 페. 슈바르츠는 그동안 감옥의 습기에 젖어있는 “머리를 갸웃히 숙이시는 어머니”의 성화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선종 후 그 성화는 아이히 슈테트, 레겐스브룩, 페트킬쉬, 그리고 쾰른을 거쳐 에센으로 옮겨졌으며 1936년 이후에는 성 이그나시오 성당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루르 공업지구 도시의 교회들은 끔찍한 페허와 잿더미로 변해 버렸으나 성 이그나시오 성당만은 항상 미사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성모상은 새로 지어진 성당의 둥근 지붕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꽃과 촛불이 켜져 있는 그 성화 앞에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위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Inge Kowal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