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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光州民衆抗爭의 背景과 新軍部의 動向
서울에서 급박한 상황의 반전이 거듭되고 있을 때 광주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먼저 학생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전남대학교의 동향을 살펴 보자. 전남대는 개학과 함께 '전남대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이하 학자추 : 위원장 철학과 4년 한상석)가 결성되었다. 학자추는 학내의 반민주적 세력 청산과 민주적 학생 자치기구의 창설을 추진했다. 또한 학자추는 종전의 학도호국단을 대신하여 학생들의 대표기관으로 활동했으며, 학원자율화공청회를 열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4월에 실시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선거에서 들불야학 출신의 박관현(법학과 3년)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들불야학은 광천동의 공단지역에서 활동중이었다. 들불야학을 이끌어가던 학생들은 대부분 전남대 재학생으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왔었다. 따라서 들불야학은 광주의 민주화 운동세력의 근거로서, 박관현의 총학생회장 당선은 광주의 사회운동 진영과 전남대 학생회가 결합할 수 있는 발판 구실을 하였다.
전남대에 총학생회가 결성되면서 학자추는 해산되었고, 총학생회가 학내 민주화 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5월로 들어서면서 총학생회의 활동은 학내에만 제한되지 않고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당시 정계의 상황이 시민 . 학생들의 기대와는 달리 반민주적 조짐이 곳곳에 나타남으로써 민주화 일정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5월 6일에 개최된 전남대 비상학생총회에서는 8∼14일을 '민족민주화성회' 기간으로 정했다. 이어 5월 8일에 열린 '성회'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는 공동 명의로 제1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 만약 휴교령을 내리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 양심있는 교수들은 적극 동참할 것' 등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5월 13일에는 전남대 교수협의회의 시국선언이 발표되었고, 일부 고등학생들의 시위도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자, 광주지역 학생들은 14일 오후 도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의 집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약 7천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인원은 곧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 날 집회에서는 광주지역 6개 대학(전문대 포함), 목포지역 2개 대학 대표들이 공동 서명한 제2시국선언과 15개항 강령이 발표되었다. 학생들은 만약 정부가 휴교령이나 휴업령을 내리면 우선 오전 10시에 교문 앞에서,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서 다시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5월 15일 오전 전남대에서 민족민주화대성회를 마친 전남대 학생 1만여 명과 조선대 . 광주교대 학생 1만여 명, 전남대 교수와 시민 등 수만명은 도청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16일에는 광주에 있는 대부분의 대학생 및 시민 등 5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렸다. 이들은 시내의 주요 도로를 따라 민주화성회를 마무리하는 횃불행진을 전개했다. 자신들의 의사를 내외에 천명하였다고 판단한 이들은 일단 당국의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만일의 경우 정부의 계엄확대나 휴교령 등의 조치가 내려진다면 19일부터 다시 집회를 갖기로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이상과 같은 광주에서의 시위는 다른 지역의 경우와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해 시위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으며,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별다른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특색이 있다. 다만, 서울을 비롯한 타 지역의 시위는 15일의 시위를 끝으로 가두진출을 자제키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신군부세력의 등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광주의 경우에는 정부의 강경조치가 이루어지면 시위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발견된다.
한편, 전두환 등은 정권장악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다. 각계각층의 민주화 열기가 높아진데다 학생과 시민들은 계엄령 해제 및 정치일정 발표를 강력히 요구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특히, 5월 14일에 신민당 소속의 모든 의원들이 연명으로 비상계엄 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도 이에 동조할 기미를 보였다. 이로써 5월 20일에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양당이 계엄해제안을 공동처리할 가능성도 커졌다. 심지어 유정회 의원들마저 이에 가세하려 하자, 계엄령 체제에서 정권장악을 도모하던 신군부세력은 정면돌파를 감행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던 5월 12일 이미 전군에 비상령을 내렸으며, 17일 밤 10시에는 국방부에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국민들의 기대나 요구와는 정반대로 비상계엄의 확대 . 각급 학교 휴교 . 국회 해산 .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 설치 등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최규하 대통령은 17일 자정부터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계엄당국은 17일 자정을 전후해서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학생 대표들을 연행했으며,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 수백명을 체포했다. 또한 김영삼 . 김종필 등 정치인들도 연금시켰다. 한편, 이들은 '계엄포고 10호'를 통해 모든 정치활동 중지, 대학 휴교, 옥내외 집회 . 시위 및 전 . 현직 국가원수 비방 금지, 직장 이탈 및 파업 불허,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국은 다시 얼어붙었다. 대통령은 꼭두각시가 되었으며 모든 권력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에 집중되었다.
2, 光州民衆抗爭의 展開過程
모든 대학에는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지고 계엄군이 교내에 진주했다. 광주에서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출동한 이들은 18일 자정부터 전남대에 진입하여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이 날 전남대 . 조선대 . 광주교대에서 연행된 학생은 모두 112명이었다. 북한군과의 비정규전을 수행하기 위해 훈련된 공수부대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는,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그토록 많은 희생자들을 발생케한 요인이 되었다.
계엄확대 소식을 들은 광주지역의 학생과 시민들은 크게 당황했다. 학생 지도부는 이 날 새벽 상당수가 연행되었으며, 검거되지 않은 학생들은 서둘러 피신했다. 계엄군과 학생들의 첫 충돌은 5월 18일 전남대에서 일어났다.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학교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학교 정문을 지키던 군인들은 귀가를 종용했지만 100여 명의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문 앞의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후 학생들이 2∼3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이들은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했는데, 학생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부상을 입고 쫓겨났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다시 광주역 광장에 모여 대열을 가다듬고 '비상계엄 해제' . '김대중씨 석방' . '휴교령 철회' . '전두환 퇴진' . '계엄군 철수' 등을 외치며 도청을 향해 시위를 시작했다. 이 날 점심시간에 약간 소강 상태에 들어갔던 시위는 오후 3시경부터 재개되었다. 인파는 수천명으로 불어났고 점차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에 대학구내를 나온 계엄군은 오후 1시경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했다가 3시경부터 시내로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공수부대의 잔인한 살상으로 말미암아 시내 곳곳에서 시민과 학생들의 희생이 속출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청년과 학생을 보면 총검과 곤봉으로 무조건 찌르고 구타하거나 연행하는 등 처참한 살륙극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학생과 시민들도 관공서를 습격하거나 경찰의 페퍼포그차에 방화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오후 5시경에는 이른바 농장다리 부근에서 시위대가 일부 경찰들을 붙잡아 인질로 삼기도 했으나, 곧바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아 도망치기도 했다. 오후 7시쯤 계림동에 위치한 광주고 부근에서는 시위대와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는 각목이나 쇠파이프 등으로 공수부대를 공격했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총검을 소지한 공수부대에 맞서 단순히 방어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치열한 접전 끝에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밀린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오후부터 산수동과 계림동 일대에는 들불야학과 전남대 학생들, 그리고 현대문화연구소의 '광대' 회원들이 제작한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이들이 뿌린 전단에 의해 공수부대의 학살과 만행 그리고 사태의 진상 등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이처럼 참혹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 소식은 외부로 전해지지 않았다. 모든 통신과 언론이 계엄군에게 장악되었고 도로마저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이 날 최규하 대통령은 '5.17'과 관련된 성명을 발표하고 계엄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방미 중이던 존 위컴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일정을 앞당겨 귀국했으나, 미국 정부는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이로써 광주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일단 후퇴한 공수부대는 전열을 가다듬으며 광주 지역 예비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했으며, 부대원의 야간배치까지 완료했다. 이들은 36개 지점을 선정하여 각 지점마다 계엄군 1개 지대(장교 1명, 사병 10명)와 경찰 2개 분대(24명)를 배치시켜 경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수뇌부는 제3 . 제11 공수여단과 육군 제20사단의 광주투입을 결정한 후 먼저 제11 공수여단을 광주로 급파했다.
이처럼 5.17 계엄확대에 맞서서 학생과 시민들이 봉기한 지역은 전국에서 오로지 광주뿐이었다. 다른 지역과 사정이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광주에서만 민중항쟁이 시작된 점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의 사주를 받았다는 계엄당국의 뒷날 발표는 일고의 가치도 없으나, 적어도 김대중의 연행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1979년 부 . 마항쟁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3김씨 가운데 유독 김대중과 그 측근들만이 연행된 사실이 광주 시민들의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김대중 개인에 대한 막연한 추종 때문은 아니었다. 김대중으로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의 수난, 그로서 상징되는 호남인 차별, 계엄확대로 말미암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의 상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수부대의 잔혹하고도 무차별적 진압이 사태를 악화시킨 가장 큰 요인이었다. 즉 초기의 학생 시위가 '민주'의 문제였다면, 이후 시민들의 가세와 격렬한 투쟁은 '생존'의 문제였다. 반면에 신군부세력은 갑작스레 돌출한 '광주문제'에 부딛혔으며, 향후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그들은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서 사태를 조기에 해결하려 했고, 그 때문에 무고한 학생과 시민의 희생이 더욱 커진 것이다.
5월 19일,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대학을 제외한 초 . 중 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와 기업체 등에서도 대체로 정상근무를 했다. 그러나 도심지역 상가는 대부분 철시했고 군인과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인해 긴장감이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삼삼오오 금남로로 모여들었으며, 오전 10시경에 2,000∼3,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군 . 경과 대치했다. 이들은 평범한 시민들로서 군인들의 잔인한 진압소식에 분노한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민들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10시 40분경 경찰이 최류탄을 발사했고, 시민들은 투석으로 대항했다.
그러자 11시 30분경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에 나섰다. 이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들의 진압의 대상이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건물과 주택에 난입하여 닥치는대로 무조건 연행했다. 이같은 무차별 진압은 도심뿐 아니라 광주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심지어 택시나 버스에 탄 승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한 과격한 진압을 통해 공수부대는 도심을 장악했다. 그러나 오후로 접어들자 시위대는 다시 시내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점심식사를 위해 공수부대가 조선대로 이동한 사이에 금남로에 모여들어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다. 화염병과 돌맹이, 최루탄이 난무했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경비를 서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에게 잡히기도 했다. 그리고 시위의 형태도 공격적인 형태로 바뀌었으며, 시위대의 지도부도 학생에서 시민으로 대체되었다.
시위소식을 접한 공수부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내로 돌진해왔다. 그들은 먼저 가톨릭센터에 진입하여 동료들을 구출한 후, 시위대의 해산에 나섰다. 이후 양측은 더욱 격렬하게 충돌함으로써 양측 모두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시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접전을 벌였다. 참상을 목격한 시내의 고등학생들도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나 농성에 동참했고, 이 과정에서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전남교육위원회는 시내 37개 고등학교에 20일 하루동안 휴교령을 내렸다.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선 시민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공용터미널 주변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병원마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너무나 많은 환자들이 갑자기 밀어닥쳤기 때문에 의료진이나 의료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더욱이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의해 크게 다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숨진 경우도 많았다.
격분한 시민들은 적극적인 자구책 마련에 부심하다가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계엄군의 책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다음 기록에서 보듯이 그들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해산보다는 체포 주안으로 협공, 소요진압 중 지역주민이 보는 가운 데 폭동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파괴, 가족위협에 대하여 시민들의 야만적 감정폭발 … 소요진압 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간 노상방치로 주민들 의 감정을 촉발({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이처럼 처참한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진압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원들을 계엄군으로 파견시킨 신군부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정권찬탈에 혈안이 된 그들에게 시민의 안전따위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 이들 공수부대는 형식상 광주의 3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조속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워 강력진압을 지시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군부는 19일 오전에 다시 3공수여단을 증파했다. 이로써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3,4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한편, 광주의 비극과 참상은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알려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광주로 통하는 모든 도로와 통신을 계엄군이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광주 시민들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최정예를 자랑하는 공수부대원들과 싸워야 하는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일의 시위에서는 사태진전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 있었다. 지도부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평범한 여성인 전옥주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녀가 가두방송에 나서서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것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큼 호소력이 뛰어났으며, 시위의 확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운전기사들을 중심으로 차량시위가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만행을 목격한 이들은 다음날 항의성 차량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미국, 그리고 언론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광주의 하늘에 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 20일 오전, 시민들은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를 맞으며 다시 시내로 모여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약속한 바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없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계엄군의 태도가 어제에 비해서는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광주역과 공용터미날 등을 경비하는 공수부대는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수만명의 인파가 금남로를 메웠다. 이무렵 {투사회보}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그 유인물은 광천동에 소재한 들불야학에서 윤상원을 비롯한 교사와 야학생들이 발행한 것으로, 정부와 언론의 흑색선전에 맞서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투사회보}를 읽은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잔악행위에 새삼 치를 떨며 분노하였다.
팽팽하게 맞서던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 서방삼거리에서 첫충돌이 일어났다. 또한 동명동과 외곽에서도 양측의 충돌이 있었다. 오후 3시경 금남로에 있던 경찰들은 모여든 시민들을 향해 최류탄을 난사했다. 이에 시민들은 금남로에 앉아 농성을 벌이며 경찰의 처사를 성토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공수부대가 경찰의 앞쪽에 배치되면서 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5시 50분경 충장로 입구의 시위대 5천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이 때 시민들은 저지하는 경찰들에게 '공수부대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으니 비켜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오후 3시경부터 무등경기장 앞에 택시들이 모여들었다. 세 시간이 흐른 오후 6시경에 차량은 200대를 넘어섰고, 운전기사들은 전조등을 켠 채 차량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오후 7시경 금남로에 도착했는데, 선두에는 12톤 트럭과 버스들이 앞장섰고 200여 대의 택시들이 뒤를 이었다. 금남로 주변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차량행진을 열렬히 환영하며, 자동차 행렬에 가세했다. 수백대의 차량을 앞세운 시위대는 도청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계엄군과 혈투를 벌였다. 이날 저녁의 차량시위는 시민들의 항쟁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 사이에도 시민들은 시내로 계속 몰려들어 20여 만명으로 불어났다. 결국 계엄군은 이날 밤을 고비로 점차 수세에 몰렸으며,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내권은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쟁에 의해 '해방'되었다. 시민들은 왜곡보도를 일삼아온 MBC와 KBS 방송국을 점령하였으며, 그 중에 MBC방송국이 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MBC가 특히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신군부의 입장만을 두둔하였기 때문에 성난 시민들이 방화한 것이다. 시내의 대부분의 파출소도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 4명이 돌진차량에 의해 희생되기도 했다. 또한 시민들은 시청을 장악하였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는, 정부를 상징하는 관공서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의 표시였던 것이다. 시위군중들은 광주역과 도청의 군 . 경 저지선을 향해 나아갔다. 이에 맞선 계엄군도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저지선이 무너질 상황에 놓이자, 계엄군은 신역과 도청 앞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시위군중은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총격을 두려워하여 해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장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무자비한 군인들로부터 자신과 광주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시내 곳곳에서 자발적인 전투부대가 조직되었고, 전투나 지휘 경험이 있는 시민들이 지휘부를 형성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총기로 무장한 것은 아니었다. 밤새 전열을 정비한 시민들은 21일 새벽에 공수부대와 충돌, 4시경에 마침내 광주역을 장악했다.
21일 아침, 시민들은 광주역 공방전에서 숨진 시신 2구를 손수레에 싣고 태극기로 덮은 채 시내로 행진해갔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는 10만 인파로 뒤덮였다. 이때부터 문화선전팀이 활동을 시작했으며, 길가에는 시민들의 주장을 담은 현수막과 벽보가 나붙었다.
이 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TV를 통해 처음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담화문에서 그는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 방화 . 선동'에 따라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라며 사건의 본질을 철저히 왜곡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광주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터졌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시위대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버스 . 트럭 등을 징발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식사를 시위대에게 제공한 것도 바로 이무렵부터였다. 10시 30분경 도청 당국은 철수결정에 따라 헬기로 무기와 서류를 실어날랐다. 도청 방어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은 이미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오후 1시경 그들은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에 맞추어 시위대를 향해 약 10분 동안 총기를 난사했다. 설마 또다시 발포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시민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으며 금남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분노한 일부 청년이 트럭을 몰고서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으나 집중사격을 받아 희생되기도 했다. 이 날의 발포책임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점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당시 신군부세력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다.
1988년에 국회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에 나온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시위대가 먼저 발포했고, 실탄은 31사단에서 제공했으며, 상부로부터의 발포명령은 없었고 대대장급 이상의 현장 지휘관들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정당방위 차원에서 누군가 먼저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는 달리 육군본부에서 편찬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1981)에는 시위대가 총기와 실탄을 입수한 것이 21일 오후 2시 30분경(나주경찰서 삼포지서 . 영광파출소 . 금성파출소 . 수안파출소)과 3시 50분경(화순파출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시위대가 적어도 21일 오후 1시경에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청문회에 출석한 11공수여단장 최웅은 21일 아침부터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실탄 지급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주장했으나, 윤흥정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당시 지휘체계에 있지 않았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청문회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 당시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이미 사실로 드러났다.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으며, 파출소나 예비군 무기창고를 공격해서 가져온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징발한 무기는 카빈소총 6백여 정, M1소총 200여 정, 탄약 5만발 등과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다이나마이트 등이었다. 이로써 무장한 시위대는 이제 시민군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광주공원의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고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계엄군의 불의의 총격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시민군은 오후 3시 20분경부터 무력항쟁에 돌입했다. 시민군의 활동은 항의성 시위에서 시가총격전 형태로 바뀌었다. 고도로 훈련된 공수부대와 맞서 싸웠으므로 시민군의 피해가 훨씬 컸다. 그러나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민군들은 대오와 편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오후 4∼5시경에 수천명의 시민들이 항쟁본부가 있는 광주공원으로 몰려와 무기를 지급받아 1조당 10여 명의 대오를 갖추었다. 이렇게 조직된 시민군은 처음에 약 3∼4백명이었는데, 이들은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되었다.
시가전이 한창이던 오후 5시경에 일부의 시민군은 전남대 부속병원의 옥상에 올라가 LMG 기관총 2정을 설치했다. 이들은 12층 높이의 병원 옥상에서 약 300M 떨어진 4층 높이의 도청을 향해 사격했다. 이에 당황한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경 도청에서 철수했다. 시민군에게 포위당한 계엄군은 장갑차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서 총기를 난사하며 조선대로 퇴각했다. 전남도경 간부와 경찰들도 각자 도청을 빠져나갔다.
계엄군과 경찰이 도청에서 철수했지만 시민군은 미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저녁 8시경에야 도청이 텅비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예의 군경을 몰아낸 시민군은 도청에 들어가 감격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이로써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의 주요 기관들을 모두 장악했다. 시민들이 항쟁에 나선지 나흘만에 계엄군을 물리침으로써 신군부가 의도했던 '조기해결'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한편, 미국측은 광주의 상황이 심상치 않자, 광주거주 미국인 약 200명을 서울로 피신시켰고, 광주 공군기지에서 보유한 미공군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의 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시민군은 승리하였으나 이미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병원마다 항쟁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가 밀려들었으나 의료진과 시설, 약품 등이 턱없이 부족했다. 혈액도 크게 모자랐으나, 순식간에 시민들이 몰려와 다투어 헌혈했다. 그런데 당시 계엄군의 철수는 시민군이 얻어낸 투쟁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전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즉 계엄군은 광주봉쇄 --> 내부교란 --> 최종진압이라는 단계적 작전일정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한편, 계엄군의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뿐 아니라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화순 . 나주 . 함평 . 영암 . 강진 . 무안 . 해남 . 목포 등지에서도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사실, 항쟁지도부는 처음에 항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전주와 서울로의 진출을 모색했었다. 그러나 계엄군이 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함으로서 좌절되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을 돌며 광주에서의 참상을 생생하게 알리며 동참을 호소했고, 그 결과 전남의 중서부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사례를 살펴보면 먼저 광주와 인접한 나주와 영산포에는 21일 오후 2시경 무기를 구하러 온 시위대에 의해 광주에서의 만행이 알려졌고, 이에 격분한 주민 500여 명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나주경찰서와 금성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총기와 탄약을 징발했다. 오후 5시경 그중 일부의 시위대는 광주로 돌아왔고, 나머지는 인근 지역을 돌며 동참을 촉구했다.
같은날 목포에도 시위대 200여 명이 내려와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과 시민의 처참한 희생을 알리는 가두방송에 나섰다. 이를 전해들은 목포 시민 2만여 명은 목포역 광장에 모여 오후 4시경부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날 밤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 KBS와 MBC 방송국 등의 기물을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밤 10시경 무안과 함평 등지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위대가 이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이튿날 새벽까지 관공서를 습격하며 자체적인 무장을 갖추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목포시장 . 경찰대표 . 정당대표 . 종교인 . 재야인사 등이 모여 원만한 수습방안을 논의했다. 이튿날 오후 2시경에는 시민민주투쟁위원회의 주최로 '제1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시민궐기대회'가 목포역 광장에서 열렸다. 위원장으로 추대된 안철은 무기를 위원회에 반납해달라고 제안하는 한편, 평화적인 투쟁을 호소했다. 이에 시민들은 기꺼이 무기를 반납했다. 23일에도 청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광주와 달리 목포에서는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없었으며, 전반적으로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한편, 광주도청이 진압된 27일 오전 11시경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제5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궐기대회'에서는 계속적인 항쟁을 다짐하며 시가행진을 벌였으나 더 이상 지속되지는 못했다.
함평에서도 21일에 광주로부터 시위대가 오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파출소를 습격하여 무장한 뒤 오후 8시경 광주로 진입하려 했으나 계엄군의 봉쇄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함평으로 돌아왔다. 22일에는 함평군민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군중들은 읍내를 돌며 시위를 벌이다가 오후에는 해남 . 영광 등지로 진출했다. 함평의 시위대는 23일부터 함평경찰서를 본부로 삼고 외곽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친 채 자체 경비에 나섰으나 계엄군과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무안에서도 21일 오후부터 투쟁이 시작되었다. 광주로부터 시위대가 들어와 항쟁을 촉구하자, 무안군민 역시 경찰서와 지서를 접수하고 무장했으나 역시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강진에서도 광주에서 온 시위대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항쟁을 펼쳤다. 특히 23일에는 주민 500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영암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22일부터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경찰지서를 접수하여 숨겨진 무기를 찾아내어 무장하고서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24일에 계엄군과의 교전중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장흥에서는 23일에 들어온 시위대와 함께 읍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일부는 보성까지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해남에서의 항쟁은 특히 주목된다. 해남청년회의소가 항쟁을 주도했는데, 이들은 21일 대흥사에서 모임을 갖고서 민주인사 석방 및 민주회복, 독재자 추방, 농어민 보호정책 활성화,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한 보상, 계엄해제 등을 요구했다. 그러던 중 광주에서 시위대가 내려와 광주의 참상을 알리자, 오후 3시경 약 3,000명의 주민들이 성토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당시 해남지역 시위대의 대표는 해남주둔 부대장과 평화적인 시위를 하기로 협약을 맺기도 했다.
해남시위대는 오후 10시경 완도까지 진출했고, 이튿날에는 강진 . 영암 . 무안 . 목포 등 전남 남부지역을 차례로 돌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들 역시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무장했으나 군부대와의 협상에 의해 자체적으로 수습하기로 하고 시위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반발한 일부 사람들은 23일 새벽 1시경 해남의 우슬재에 매복중이던 진압군과 교전을 벌이다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뒤에도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으며, 24일에는 완도에서 해남으로 오던 시위대가 진압군과 대치하다가 군부대장과 해남읍장의 설득으로 되돌아갔다.
화순의 주민들도 항쟁에 적극 동참했다. 21일 광주에서 시위대가 내려와 시위를 주도하자 열렬히 호응했던 것이다. 이들은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여 징발한 무기와 화순탄광에서 광부들의 협조를 받아 입수한 다이나마이트를 광주로 운반했다. 또한 이들은 벌교와 보성을 돌며 무기를 수집해서 광주로 가져왔다.
한편, 5월 22일에 광주는 그야말로 '빛고을'의 봄기운이 무르익은 햇살로 가득찼다. 어지러운 총격과 군화발자욱 소리, 그리고 섬찍한 핏내음과 신음소리 등이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특히 총검을 비켜메고 시내를 활보하던 얼룩무늬 공수부대원들이 보이지 않은 광주는 더욱 아름다운 '해방의 도시'였다. 시민들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는 중이었으며, 시민군은 조직 정비와 향후 대책을 협의하느라 바쁜 걸음을 옮겼다.
시민군은 도청에 본부와 작전상황실 등을 설치하고서 앞으로의 대책을 수립해갔다. 상황실에서는 출입증과 보급증을 발부하는 한편, 기동타격대를 편성하고 외곽경비를 맡던 시민군과 연락을 취하는 등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이무렵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계엄군은 광주와 연결된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서 주요 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시민군이 나타나면 총을 쏘아댔다.
이날 정오경 신부 . 목사 . 교수 . 변호사 . 정치인 등 20여 명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저녁에는 학생들도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전자는 계엄사측과의 협상을 맡았으며, 후자는 대민활동의 임무를 띠었다. 특히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장례반 . 홍보반 . 차량통제반 . 무기수거반 등을 편성해서 일의 효율성을 기하였다.
23일 오전 11시경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는 10여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여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날 모임에서 마지막까지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행사를 전후하여 시민들은 항쟁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시민들의 관이 안치된 상무관에 들러 분향하였으며, 병원 앞에는 헌혈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시민들은 어지럽혀진 거리를 청소했고, 시장 상인들은 시민군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했다. 상점도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으나 사재기를 하는 시민은 없었다. 범죄도 평소보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참여로 '해방 광주'는 점차 아름다운 무등산의 품안에서 질서를 회복해갔다.
이처럼 시민들의 성숙한 자세와 행동은 광주민중항쟁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만약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거나 약탈이 일상화된 암흑의 광주로 변했다면 신군부는 이를 악용해서 진압을 정당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의 의의도 그만큼 퇴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혼연일체가 되어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광주민중항쟁을 높게 평가받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계엄사에서 시민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수습위원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공수부대의 잔인무도한 살상을 목격한 일부 시민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무기반납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온건파는 더 이상의 큰 희생을 막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의도에서 무기반납을 주장했다. 결국 온건파는 배제되었고, 강경파가 두 개의 수습위원회를 모두 장악했다. 24일 오후, 항쟁지도부가 분열된 가운데 진행된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는 시민의 참여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투쟁열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이처럼 어수선한 틈에 정보요원들이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폈으며, 심지어 도청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25일에 이르러서도 시민군의 무장해제와 거부를 둘러싸고 항쟁지도부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고 더욱 첨예화되었다. 이날 열린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전날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도청의 항쟁지도부는 지금까지 집계된 사상자 수를 발표했는데, 신원이 파악된 주검 169구, 신원파악이 불가능한 주검 40여 구, 중환자 520명, 경상자 2,170명, 행방불명 2천여 명 등이었다. 이 숫자는 훗날 계엄사에서 발표한 것과 너무나 크게 차이가 나서 현재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를 알 길이 없다.
이날 밤, 도청에서는 최후까지 투쟁하기 위한 지도부가 결성되었다. 시민군 투쟁위원장 김종배를 비롯한 대변인 윤상원, 내무부 위원장 허규정, 외무부 위원장 정상용, 기획부장 김영철, 상황실장 박남선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와 함께 결사항전을 대비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이들은 계엄군의 공격시 도청에 설치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리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다이나마이트는 이미 뇌관이 제거된 상태였다.
3. 新軍部의 强硬鎭壓과 美國의 役割
신군부는 전교사의 책임하에 5월 27일 0시 이후에 진압작전을 실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계엄군은 26일 새벽에 봉쇄병력을 시내방향으로 전진배치하였다. 이날 밤 도청에는 150여 명이 최후의 항쟁을 준비했다. 이들 중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80여 명뿐이었고, 60여 명은 고등학생이거나 군대에 가지 않은 청년들이었으며, 여학생도 10여 명이나 끼어 있었다. 이들은 도청을 비롯한 인근 주요지점에 배치되었다. 그밖에도 광주시 외곽에는 상당수의 자체방어 병력이 있었다.
27일 0시 정각, 도청 상황실의 전화가 끊겼다. 이를 계엄군의 공격예고라고 판단한 항쟁지도부는 비상령을 내렸다. 그리고 홍보부에서 활동하던 박영순과 이경희 등은 홍보차량을 타고 새벽 3시까지 시내를 돌며 다음과 같은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 앞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말아 주십시오."
이무렵 광주 외곽을 완전히 봉쇄한 계엄군은 신군부가 수립한 '상무충정작전'에 따라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5단계로 진행된 충정작전은 경찰력에 의한 데모진압작전(5.17 이전), 계엄군에 의한 데모해산 및 진압작전(5.18~21), 도로차단 및 광주봉쇄작전(5.22~23), 선무활동 및 상무충전작전 준비(5.24~26), 상무충정작전 실시(5.27)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항쟁지도부가 있는 도청진압에 중무장한 3공수여단 11대대를 투입시켰다. 이들을 비롯하여 당시 상무충정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정상용 외, 『광주민중항쟁』, 1990, 305쪽)
4. 政府의 立場 變化와 光州民衆抗爭의 意義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대를 여는 민족 . 민주 . 민중운동의 단초이자 자양분이 되었다. 특히 해마다 5월이면 대학가에 항쟁의 물결이 일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군사정권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나아가 이 문제는 5 . 6공 군사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5 . 6공 군사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으로 일관했다. 즉, 먼저 5·17 비상계엄 확대의 정당성을 강조하였고, 유언비어의 난무와 불순분자의 개입을 사태악화의 요인으로 지적했다. 또한 그들은 '광주사태'를 소수의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주도한 폭동으로 규정하였고, 그 배후에는 김대중이 있으며 계엄군은 최대한 인내와 자제를 아끼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군사독재에 염증을 느낀 시민 . 학생들은 끊임없이 민주화를 주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른바 '6·29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어 출범한 노태우정권에서는 기존의 정부 입장을 바꾸었다. 정부당국은 1988년에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른바 '광주사태 치유방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80년 5월 상황 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는 정당했다. 당시 광주에서 사태가 확산된 원인은 불순분자의 책동과 함께 계엄 군의 과잉진압이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광주사태가 문제로 남은 것은 정부측에서 부상자와 유가족 에 대한 사후관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며 이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이 중요하다. 따라서 계엄군의 과잉진압과 정부측의 사후관리 소홀이라는 점에 대 해 국민에게 사과한다. '5.18'의 성격은 결과만으로 보면 '폭동'이라는 시각도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학생.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진상 조사나 책임자 처벌은 불필요하다. 이와 같은 내용은 과거의 전두환정권과는 다른 점이 있으나, '양비론'(兩非論)을 주장한 것으로서 광주시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광주민중항쟁을 여전히 '불순분자들의 책동' 때문에 일어난 '폭동'으로 보고 있으며,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없이 물질적 보상만으로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태우정권이 광주민중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것은 광주시민들의 명예회복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광주민중항쟁의 '망령'을 가능한한 빨리 떨쳐버리려고 보상을 서둘렀다. 1990년 당시 보상금 지급대상은 사망 154명, 행방불명 39명, 부상 후 사망 73명, 부상 1,900명, 기타 61명 등 모두 2,227명이었는데, 1992년까지 2,224명이 총 1,424억원을 수령했다. 또한 1993년에는 사망 16명, 행방불명 118명, 부상 1,478명, 연행 . 구속 1,138명 등 2,750명이 추가로 보상을 신청했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1988년에 광주청문회를 열었으나, 증인들의 상반된 주장과 가해 책임자들의 위증과 부인이 계속됨으로써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TV 생중계를 통해 국민들에게 그 날의 아픔을 일깨우고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김영삼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변화가 나타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담화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면서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민주정부"라고 발표했다. 아울러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그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이를 위해 광주시민과 온 국민이 기념할 수 있도록 광주시에서 기념일을 먼저 제정하기를 희망한다"면서,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을 위한 각종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밖에도 망월동 묘역의 확장과 기념공원 조성, 기념탑 건립 등을 추진하겠으며 아직 보상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신고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연행 . 구금되었다가 유죄판결을 받아 사면 . 복권된 사람들의 전과를 말소할 것이며, 지명수배를 공식적으로 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의 담화에 이어 정부에서는 광주민중항쟁 당시 유죄판결을 받았던 598명의 전과를 말소하고 16명에 대한 지명수배를 해제했으며, 81명을 특별사면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는,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광주시민과 야권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두 가지가 상처 치유의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약속을 추진하기 위해 광주시는 1993년에 공무원 . 언론인 . 단체대표 등 37명으로 '5.18 기념사업추진협의회'를 조직했으며, 다시 '5.18광주민중항쟁기념재단'을 출범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피해보상 신고와 함께 망월동 묘역의 성역화, 그리고 상무대에 기념공원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1997년에 망월동 묘역이 완공되었고 기념탑도 건립되었다.
끝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광주민중항쟁은 당시 신군부의 무한정한 권력욕을 저지하려는 유일무이한 저항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점만을 너무 부각시키는 것은 오히려 피상적인 분석일 수 있다. 오히려 미국과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초래한 지역차별정책의 피해자인 호남민중들이 신군부와 비타협적 투쟁을 최후의 순간까지 전개한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로써 역사상의 민중봉기의 전통을 계승 .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
또한 민중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는 전기를 이루었으며, 이는 1980년대 각 분야의 민중운동이 활성화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항한 무장투쟁이었지만 오히려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불의에 맞서는 무력은 정당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시켰다.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인의 대미인식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종래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흔히 '혈맹'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항쟁과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역할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미국을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반미운동의 고양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물론 그들이 자초한 것이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시민들은 주인의식을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주의식이 더욱 성숙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그리고 항쟁의 주체가 지식인이 아닌 일반 민중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비록 계엄군의 총칼로 말미암아 항쟁은 좌절되었지만 이들의 정신이 계승됨으로써 1987년의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5월정신을 어떻게 계승 .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과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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