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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재휘애비 추천 0 조회 34 11.07.31 2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채석용 지음

소울메이트 / 2011년 4월 / 352쪽 / 14,000원

▣ 저자 채석용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전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국립중앙도서관 객원해제위원으로서 모두 408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고문서를 해제했으며, 지금도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정약용의 학문과 삶을 총망라하는 대규모의 『다산학사전』 편찬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대전대학교 부임 후 줄곧 학생들과 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수업을 진행해왔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문학의 사명이 다름 아닌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고 그 본격적인 첫 시도로 『철학개념어사전』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 Short Summary

저자가 제시하는 재미있는 독서법의 핵심은 ‘소통’이다. 책과 줄기차게 소통하고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면 책 읽기는 더 이상 지루한 의무가 아닌 재미난 놀이가 될 수 있다. 내용을 파악하려 낑낑거리기보다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어디 한번 제대로 대답하나 보자” 하는 식으로 책을 대해야 책이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된다.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책 속에서 발견하고자 애쓰는 ‘책과의 소통’ 작업이 끝났으면 그다음 반드시 ‘책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독후감을 써야 한다거나 논술문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형식적인 작업은 책 읽기와 글쓰기를 놀이가 아닌 의무로 만들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정말로 놀이하듯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글을 써보자. 친구에게 ‘이 책 짱이야’라는 간단한 문자를 날려보자.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좋고 인터넷 독서클럽이나 온라인 서점도 좋다. 블로그는 더더욱 좋다. 자신이 책을 읽고 무언가 느낀 게 있고 배운 게 있다면 그걸 다른 사람에게 어떤 형식으로든지 알리는 것이 좋다. 책을 친구처럼 대하는 ‘소통의 독서법’을 실천하면 이런 마음이 저절로 속에서 끓어오른다. 그런 마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분노하거나, 혹은 화끈하게 싸우자. 독서 신동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이 취했던 방법이 바로 이런 소통의 독서법이었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언제나 아버지 제임스 밀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을 즐겼다. 그의 천재적 두뇌는 흉내 낼 수 없지만 그가 느낀 독서의 즐거움은 우리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책과의 소통’ 및 ‘책을 통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독서란 결코 골방에서 진행되는 외로운 작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독서는 책과 대화하는 능동적인 작업이며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개그콘서트〉와 월드컵은 여럿이 함께 봐야 제맛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혼자 읽으려고 애쓰지 말고 골방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건강하고 오래 살듯이 많은 사람과 책에 대해 생각을 나눠야 마음이 성장한다. 이 책을 통해 책 읽기의 재미를 발견하고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차례

지은이의 말_ 책과의 소통, 책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

1부 나를 성장시키는 소통의 독서법

1장 독서란 무엇인가?

책과 소통하고,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라 /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자

책꽂이를 없애라 /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방법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글을 써라 / 책 읽기, 글쓰기, 말하기 / 미네르바 사건의 교훈

2장 소통의 독서법

짧은 글을 읽고 요약한 뒤 비판하는 훈련 / 식스센스 유령과 같은 독서 습관을 버려라

책을 지저분하게 읽어라 / 책의 빈 공간은 독자의 몫이다 / 때로 책을 찢고 불태워라

서점과 도서관을 활용하자 / 토론 없는 독서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다

독서클럽에 가입하거나 인터넷을 누벼라 / 논리적 독서를 위해 상상력을 극대화하라

결론은 정독이다

3장 즐거운 독서를 위해

어느 천재 남매의 경우 / 인터넷은 독서의 동반자인가, 훼방꾼인가? / e-book의 축복

멀티미디어는 책 읽기의 진정한 친구 / 독서와 수업 / 편식을 두려워하지 말자

2부 나를 성장시키는 분야별 독서법

4장 문학책 읽는 법

책 선정은 외부 권위에 의존하고 재미없으면 덮어라 / 반복 독서가 진리

독자가 저자보다 작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고전과 현대작품, 외국작품과 국내작품을 번갈아 읽어라

문학이론서가 주는 신선한 자극을 즐겨라 / 시는 음악이다

〈TV쇼 명품 한시〉가 방영된다면 /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점쳐보자

5장 역사책 읽는 법

역사서는 2차 문헌만 읽어도 된다 / 『열국지』와 『로마인 이야기』는 반드시 읽어라

연표를 늘 곁에 두고 읽어라 / 역사학계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즐겨라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선입관을 명확하게 하라

?역사에 ?만약?이란 말은 없다?는 말은 거짓말 / 역사책 이외의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하라

민족주의라는 화두를 가슴에 품자

6장 철학책 읽는 법

고전만 고집하지 말고 해설서에 눈을 돌리자 / 문제는 번역이다

한문을 전혀 몰라도 읽을 수 있는 동양철학책을 골라라 / 한글 세대를 위한 동양철학의 고전들

『주역』은 가급적 읽지 마라 / 한글 세대를 위한 한국철학 분야 추천도서

한글 세대를 위한 서양철학 분야 추천도서 / 목차를 복사해 책갈피에 꽂아두어라

사전을 늘 곁에 두어라 / 구체적인 질문을 미리 마련한 후 읽어라

철학책을 당신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비서로 활용하라

나를 성장시키는 독서법

채석용 지음

소울메이트 / 2011년 4월 / 352쪽 / 14,000원

1부 나를 성장시키는 소통의 독서법

독서란 무엇인가?

책과 소통하고,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라:

 

책 읽기란 ‘소통하기’다. 이것이 이 책 전체의 주제다. ‘책 읽기’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책과 소통하기이자 책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책과 소통하기’는 책의 내용 및 책의 저자와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손에 쥔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낑낑거리는 수동적인 책 읽기 습관은 버려야 한다.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저자와 대화하고자 하는 태도로 책을 읽어야 한다.

인간관계와 책 읽기는 소통의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똑같은 행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만 하고 다른 한 쪽은 일방적으로 말을 듣기만 하는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관계라 할 수 없다. 서로 귀를 열고 말문을 트고 지내야 진정한 관계가 성립된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일방적으로 책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하는 수동적 태도로 책을 읽는다면 결코 진정한 의미의 책 읽기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끊임없이 책에게 질문을 던지고 저자가 제공해주는 지식과 지혜에 열광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혹은 책의 내용에 딴죽을 걸고 저자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공격적인 자세가 갖춰져야 한다.

비싼 돈 주고 산 책인데 내가 그 주인이 되지 못하고 책에게 휘둘린다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저자의 권위에 눌리고 책이 제공하는 방대하고 복잡한 이야기에 휘둘리는 건 제 돈 내고 머슴살이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책의 주인이다. 내 돈으로 책을 샀으니 책에게 당당하게 요구하라. “도대체 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저자, 당신의 이야기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앞뒤가 맞지 않는 거 아니냐”라며 따져라. 그리고 그에 대한 정당한 답변을 접할 경우 미친 듯이 열광하라. 이것이 책과 소통하는 진정한 독서법이다.

예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형제와 아버지가 신경전을 벌이는 내용이 있던데, 요즘 우리나라 막장드라마 스토리와 다를 게 뭐냐?”, “스메르자코프가 자살한 게 마음에 들지 않거든”, “도스토예프스키 당신은 드미트리요, 아니면 알로샤요?? …….

스토리를 따라가는 수동적 책 읽기, 책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급급한 책 읽기로는 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다. 책과 소통해야 한다. 줄기차게 의심하고 줄기차게 박수를 보낼 때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책이 당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또한 책 읽기는 ‘책을 통한 소통하기’이어야만 한다. ‘책을 통한 소통’은 ‘책과의 소통’과는 달리 손에 들고 있는 책을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면, 즉 그 책과 소통했다면 당신은 모종의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 전개 솜씨에 감탄할 수도 있고, 이야기에 잠재된 종교적 색채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다. 아무리 저자와 책에게 질문을 해도 마땅한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이야기라며 허벅지를 내려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책과의 소통’을 통해 얻은 당신의 결론을 세상과 나누어야 한다. 자기 마음속에만 간직한 감동은 진정한 감동이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만 웅크린 궁금증은 진정한 궁금증이 아니다. 세상에 드러내놓고 다른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이 느낀 감동의 진면목과 자신이 제기한 의문의 어리석음, 혹은 날카로움을 깨닫게 된다.

흔히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써야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헌데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독후감 쓰는 걸 너무나 싫어했다. 책을 읽으면 읽는 거지 왜 꼭 독후감을 써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느낀 바를 끄집어내려니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없었다. 누군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책 읽기가 곧 소통하기라는 걸 알려줬다면 책과 대화하고 책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 가운데 나도 모르게 연필을 쥐고 원고지에 글을 끼적거리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책과 대화를 나누는 법도 모르고 책을 통한 소통의 의의도 모른 채 독후감을 쓰라고 강요받는 것은, 수학공식의 원리도 모른 채 무턱대고 공식을 암기해 수학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이다.

책을 수단으로 하는 세상과의 소통은 ‘책과의 소통’ 과정이 충실히 진행될 경우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책을 통해 느끼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게 될 때 책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 시작된다. 혹은 책에게서 느끼는 배신감과 실망감이 절절해질 때 역시 세상에 대고 자기 생각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럴 때 참지 말고 내지르는 것, 그것이 ‘책을 통한 소통’의 시작이며 제대로 된 책 읽기가 무르익어가는 출발점이다.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때 우리는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작품에 열광했지만 어느 누군가는 냉소를 보낼 수도 있다. 이 뜻밖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묻게 된다. “왜 나쁘다고 생각하죠?”

때로는 상대가 휘두른 공격의 부당함을 냉철하게 지적해 승리감에 도취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책에 대해 갖게 된 느낌의 얄팍함이나 경솔함을 깨닫고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혹은 별다른 성과 없이 두 가지 주장이 평행선을 달릴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책을 통한 소통의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성숙하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방법:

무라카미 하루키는 의도적으로 일본 작가들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으면서도 최고의 일본 작가가 되는 역설을 현실로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일본 작가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일본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일본 작가들이 구사하는 문체와 구성의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할 수 있이 않았을까? 하루키에게 있어 일본 작가의 작품은 오히려 독이었던 셈이다.

하루키의 경우처럼 우리 누구에게나 독서가 때로 독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책, 자신을 더 벼랑으로 떨어뜨릴 책이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낫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즐겁게 읽을 때라야 책 읽기는 즐겁고 유익한 작업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맞는 책은 어떻게 해야 고를 수 있을까? 죄송스럽게도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여기에서 알려줄 수는 없다. 이 책의 독자가 최고의 소설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인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흠모하면서 독재를 꿈꾸는 수구 꼴통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공산혁명을 꿈꾸는 극좌파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만드는 책 읽기에 도전하라!’는 것이다.

하루키는 일본 작가들의 책을 멀리하는 대신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그것도 헤밍웨이나 포크너처럼 최고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작품이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나 트루먼 카포티처럼 상대적으로 다소 덜 알려진 인물들의 작품들이었다. 잘 알려진 작가들에게선 새로운 것을 얻기 힘들다. 덜 알려진 궁벽한 곳에서 오히려 새로운 소재와 방법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전적으로 하루키에게만 유효하다. 최고의 한국 작가를 지망한다고 해서 하루키처럼 한국 작가의 작품을 외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하루키가 일본 작가의 작품을 외면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감행하게 되었던 동기 자체다. 최고의 한국 작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은 하루키의 독서 목록을 보지 말고 그가 그런 독서 목록을 작성하게 되었던 동기에 눈을 돌려야 한다.

하루키가 일본 선배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면 그는 평범한 작가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꼭 그렇게 단정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가 만약 일본 선배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는 대신 다른 방식의 ‘경계 무너뜨리기 독서’를 했다면 지금의 하루키와는 다르겠지만, 또 다른 아름다운 작품을 선사하는 하루키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일본 문학계 최고의 평론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본 작가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경계를 무너뜨리는 독서를 감행했다는 동기 자체다.

반면에 히틀러와 스탈린은 철저히 아집에 빠진 책 읽기에 열중했다. 그들은 플라톤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이데아 정신을 구현하는 철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를 읽으면서 살육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발견했을 수도 있으며, 아퀴나스(T. Aquinas)를 읽으면서 그 탄탄한 종교 교리의 논리를 가차 없이 분쇄시키는 독단적 혁명의 논리를 구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책 읽기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아집에 찬 행위였으며, 오히려 경계를 강화하는 독선적 행위에 불과했다. 그들이 읽었던 책들 가운데 왜 살육과 전쟁을 거부하고 선한 인간의 본성을 역설하며 공동체 사회의 협력을 도모하는 책들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도 철저히 경계 속의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것을 왜곡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소통이 없는 닫힌 책 읽기에 머물렀던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불교 서적을 읽어라. 한국인이라면 아랍의 역사책을 읽어라. 무신론자라면 성경을 읽어라. 과학도라면 철학책을 읽어라. 문학도라면 기술 서적을 읽어라. 역사학도라면 판타지 소설을 읽어라. 무엇이든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라. 그리고 소통하라.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책, 자기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저자가 지은 책, 자신과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지은 책만 읽으면 히틀러가 되고 스탈린이 될 뿐이다. 소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미로에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책은 오히려 독이 된다.

 

소통의 독서법

책의 빈 공간은 독자의 몫이다:

책을 지저분하게 읽음으로써 우리는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권의 책에 지나치게 몰입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편견에서 빠져나올 여지를 많이 가지게 된다. 그리고 책을 지저분하게 읽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책의 빈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책과 소통하기’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해보자. 대화를 하는 상대방이 하는 말을 끝까지 경청하기만 하고 자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끈기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작심을 하고 책에 달려들지만 효과적으로 독서를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실패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책과 효과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글만 따라가면서 읽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설교나 훈계가 대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책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지은 사람을 직접 불러다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책의 여백에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내용의 글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읽다가 의문이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밑줄을 진하게 긋고, 간략하게 빈 공간에 의문이 나는 내용을 적으면 된다. 혹 읽다가 공감하는 부분이 나오면 ‘Good?이라고 표시를 하거나 하트 모양을 그려넣어도 좋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온다 싶으면 큼지막하게 가위표를 그려도 좋고 거기에 이유를 적어넣으면 더 좋다. 그렇게 빈 공간을 자신의 견해 및 저자와 나누는 대화로 가득 채우다 보면 어느새 책은 저자만의 책이 아닌 독자 자신의 책으로 변모해 있을 것이다.

특히 의문 사항을 빈 공간에 적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책을 읽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거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그런 의문을 미심쩍은 채로 그냥 넘겨버리다 보면 나중에 저자의 본의를 오해하게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책에 대한 부당한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의문이 나는 곳에는 표시를 하고 의문점을 간략하게나마 적어두어야 한다.

책은 하나가 커다란 주제를 갖고 집필된다. 그러나 책 전체로 보면 일관된 논조이지만 부문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성급하게 책을 덮어버리면 소중한 내용을 놓칠 수 있다. 일단 읽기로 작정한 책이라면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저자에게 물어야 한다. 앞에서 의문이라고 생각하고 책의 여백에 기록해놓은 적이 있다면 언젠가 뒷부분을 읽으면서 앞부분의 그 의문 내용을 다시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때 앞에서 가졌던 의문이 시원하게 해소된다면 책을 통해 저자와 매우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셈이 된다. 아마 대부분의 경우 앞부분에서 가졌던 의문이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앞부분에서 가졌던 의문을 효과적으로 해소해주는 내용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책은 일관된 논조로 서술된 좋은 책이라 말할 수 없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식의 독서법을 매우 중시했다. 경전을 읽을 때 생기는 의문을 경전 자체의 맥락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이경해경(以經解經)이라고 한다. 바로 고전판 ‘책과 소통하기 독서법’인 셈이다.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들은 경전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수준까지 경전과 대화하면서 철저히 읽어야 한다고 늘 주문한다. 성글게 읽다 보면 마치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의 전체 맥락을 송두리째 이해하게 된다면 경전의 한쪽 부분이 경전의 다른 부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단계의 소통의 책 읽기에 도달하게 되면 그 경전 전체의 내용을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전체 경전이 하나의 통일된 진리를 설파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옛 선비들이나 승려들은 진정한 이경해경에 도달하기 위해 경전들을 아예 암송하는 수준에 이르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래야 경전의 특정 부분에서 발생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경전의 다른 부분에서 즉각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에 대해 아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책과 하나가 되는 수준, 즉 책이 사람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수준의 독서만이 진정한 독서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러기 쉽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책만 읽을 만큼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다. 대신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의문을 그때마다 책의 여백에 기록해놓으면 된다. 우리 선조들에게 책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었다. 함부로 책에 낙서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책 하나를 자기가 읽은 다음 동생이 읽게 하고 자식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겐 그런 부담이 전혀 없다. 아까워하지 말고 책의 여백에 마구 자신의 의문과 견해를 끼적거려야 한다. 앞에서 적었던 내용이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하는 부끄러운 경험을 해야 책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혹은 자신의 지적이 결국 책 전체의 논리적 맹점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었다는 환상적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소통을 통해 책과 대화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독서는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되며 또 다른 독서로 안내받게 된다.

 

즐거운 독서를 위해

편식을 두려워하지 말자:

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너무 한 분야의 책만 편식해서 읽으면 좋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억지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느니 차라리 한 분야의 자신이 읽고 싶은 책만 읽으라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으면서 소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한 분야의 책만 줄기차게 읽는 편식 독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역사소설에 빠져 박종화와 조정래의 대하역사 소설만 줄기차게 읽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한 분야의 책에 빠지는 것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문제는 편식독서를 하는 과정에서 소통의 책 읽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줄기차게 책을 읽으면서 소통한다면 적당한 기회에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의 책으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어 있다. 애초부터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분야에 몰두하는 편식독서를 해야 오히려 관심을 확장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이 편식독서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독서에 관한 전문가들이요, 책 읽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책을 읽고 너무나도 많은 분야를 접했기 때문에 한 분야만 편식하고 다른 분야를 놓치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러는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문가들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결론적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예컨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다고 하자. 과연 우리들 가운데 전문 헬스 트레이너 수준으로 근육을 키울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전문가들은 근육을 골고루 키우기 위해 이두박근을 키우는 운동, 삼두박근을 키우는 운동, 활배근을 키우는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제안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방식의 운동을 따라 할 수 없다. 그저 헬스장에서 가볍게 러닝머신 위를 뛰고 적당히 땀을 흘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지나치게 여러 근육들은 골고루 발달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앞서다 보면 운동하는 재미 자체를 놓치게 되고 만다. 책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 읽는 것은 일단 재미난 작업이어야 한다. 골고루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재미난 독서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기 쉽다.

박태환이 하루는 농구를 하고 하루는 육상을 하고 또 하루는 수영을 했다면 과연 올림픽을 제패할 수 있었을까? 박태환은 수영만 하는 편식 운동선수이지만 수영 하나에만 몰입한 덕분에 탁월한 운동신경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도 어느 한 분야에 몰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고력을 충분히 증진시킬 수 있다. 무엇이든 일단 한 가지에 충실해야 재미를 느끼면 된다. 처음부터 다양한 분야에 손을 대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역사소설이 끌리면 미친 듯이 역사소설만 읽자. 웬만한 역사소설을 다 읽고 나면 흥미가 떨어져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흥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소설만 탐독함으로써 얻게 된 독서력과 통찰력은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두려워 말고 편식독서를 하자. 억지로 관심도 없는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부담을 느끼지 말자. 단,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는 유령과 같은 짓은 하지 말자. 줄기차게 편식독서를 하면서 줄기차게 자신의 편식독서 습관을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리고 치고 박고 싸우자. 수시로 공지영 소설을 읽고 공지영에 대한 찬사를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 반응할 것이다.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생면부지인 네티즌일 수도 있다.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 없는 개인적 체험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상술에 놀아난다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나은 작가를 제시하며 비교를 강요할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이 몰입해 있는 작가보다 더 나은 작가가 있다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를 깎아내린다면, 더 낫다고 추천하는 작가의 책을 한번쯤 읽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골방에 처박혀 스스로 유령이 되어가는 줄도 모른 채 편식독서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자신이 편식독서를 한다는 점을 늘 자각하면서 자신의 편식독서 습관을 드러내는 소통의 독서를 하는 사람은 결코 위험하지 않다. 어느 순간 하나의 편식에서 벗어나 또 다른 편식에 돌입하게 될 것이고, 이런 편식독서가 누적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전인적 능력을 갖춘 인간으로 변모해갈 것이다. 자신에게 한 번씩 물어보자. 과연 지금 편식독서를 할 만큼 관심이 있는 분야가 있는지를.

2부 나를 성장시키는 분야별 독서법

문학책 읽는 법

반복 독서가 진리:

재미없는 책은 한번 덮으면 그만인가? 아니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고전작품이라면 언젠가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 이는 내 경험을 통해 절실히 느낀 진리다. 나는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당시 독문학도들에게 카프카의 작품은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작품의 숨은 의미를 가려운 곳 긁어주듯이 밝혀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읽으면 뭔가 상식의 벽을 깨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특별하게 여겨졌다. 누구나 도전하지만 어느 누구도 푹 빠지지 못하는 일종의 거리감이 늘 독자와 작품 사이를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2학년 1학기 어느 독문학 강좌에서 나는 친구들과 조를 이루어 카프카의 작품을 분석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조가 맡은 작품은 「싸구려 관람석에서」라는 아주 짧은 단편이었다. 지금은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당시만 해도 번역본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독일어 원문과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가떨어졌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일주일 내내 이 작품만 읽고 또 읽었다. 고작 한 페이지 남짓하는 짧은 작품이었지만 2학년이 소화하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주일을 씨름하니 문장 구조가 보이고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내내 뿌연 안개 속을 헤매다가 갑자기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고양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 테다. 작품을 두 번, 세 번 읽을 때까지만 해도 과연 내가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지만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을 지나 열 번이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작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순간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아하, 카프카! 이제 알겠어!” 나는 의기양양하게 조원들을 모아놓고 내가 이해한 내용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맞장구치며 호응해주는 소리들이 들렸다. “아, 그렇구나.” “난 왜 그걸 몰랐을까?” 친구들이 쏟아주는 칭찬을 들을 때의 쾌감은 느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물론 미약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이런 기분은 아마도 연예인들이 인기를 누릴 때 느낀다는 바로 그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과 비슷할 종류의 것일 테다. 덕분에 나는 조장이 되어 우리 조의 발표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비록 매우 짧은 단편 작품이었지만 그 작품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카프카를 나름대로 이해하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싸구려 관람석에서」를 읽어보았다. 아쉽게도 그때 깨알 같은 글씨로 촘촘하게 메모를 적어넣었던 텍스트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인터넷을 통해 독일어 원문과 번역본을 함께 읽어보았다. 그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왜 이 작품을 그토록 어렵게 느꼈을까?’ 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작품을 가지고 이해했답시고 의기양양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이다. 그래도 이런 남다른 추억 덕분에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니 소중한 추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한 작가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그 작가의 작품 다섯 편을 읽는 것보다는 하나의 작품을 다섯 번 읽는 것이 훨씬 낫다. 뷔페음식점을 나설 때는 음식 맛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포만감만 들 뿐이지만, 한 가지 음식만을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일급 음식점을 나설 때는 그 음식의 맛이 혀끝에서 가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원칙을 꼭 기계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의 독서로 그 작품의 의미를 깊이 있게 감상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최소한 책을 읽는 데 단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작품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 그 작품이 갖고 있는 은근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쉬운 상황을 빚지는 말자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수학으로 치면 공식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과 같다. 수학공식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암기하게 되면, 그 공식을 응용한 문제 수십 가지를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다. 그러나 공식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대강 암기만 한다면 한두 문제는 풀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응용된 문제가 나오면 풀지 못한다. 문학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흥미를 끄는 작가가 있다면 작품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하자. 그러면 그 작가의 나머지 작품들을 읽을 때 흥이 절로 나고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대화하는 느낌을 강하게 느껴 마치 작가와 친구가 된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특히 작품이 읽기 어렵다고 소문난 작가의 작품일수록 한 편만 집중 공략하는 것이 좋다.

 

철학책 읽는 법

철학책을 당신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비서로 활용하라:

이제 철학책 읽는 방법을 정리하고 핵심을 이야기할 순서다. 나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철학책을 공부해야 할 부담스런 과제로 받아들이지 말고, 즐겨야 할 게임의 도구이자 궁금증을 해소해줄 비서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철학책의 각 챕터별로 구체적인 질문을 한 가지씩 던지면서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신이 원한 답을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 답은 한 문장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바로 그 핵심적인 문장을 찾는 과정이 철학책을 읽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된다. 철학책 읽기는 목차라는 지도와 철학사전이라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독자가 궁금해 하는 비밀을 찾아나서는 술래잡기다.

너무 억지로 힘들여 책을 통째로 완벽히 이해하려 하면 지칠 수 있다. 철학책 읽기를 마치 보물찾기나 다른 그림 찾기, 혹은 퍼즐 맞추기처럼 생각하자.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핵심 문장을 찾아 나서면, 이 세상에 그것보다 재미난 일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책의 내용을 전부 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책이 대답하도록, 즉 책을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비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책 전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자. 일반 독자들은 책을 통해 자기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해답만 쏙쏙 뽑아내면 그만이다. 이런 이기적인 독서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책 자체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부수적 효과까지 거두게 될 것이다. 요컨대 철학책을 재미난 지적 게임의 도구로 활용하면 책은 당신에게 ‘핵심 내용의 이해’라는 뜻밖의 선물을 안기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철학책 읽기를 게임처럼 즐기는 과정이 반복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식이 쌓이고 지혜가 샘솟는다. 어떤 어려운 책을 접하더라도 반드시 그 안에서 비밀 한 가지는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다. 이런 자신감은 사회생활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재미나게 수행해나간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토대로 사회생활 가운데 부닥치는 문제에 대해 창조적인 해결책을 스스로 발견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찾는 과정 자체도 즐기게 된다. 철학책 읽기의 효용성, 나아가 인문학의 유용성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철학 해설서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확보된 개인들의 체험이 쌓여 저술된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작품을 읽는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국가』를 가장 재미나게 읽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철저한 계급의식을 발견하고 치를 떨 수도 있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환호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플라톤의 주장은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독서 경험 가운데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경험을 전문가들이 선발해 그 사상의 핵심으로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철학 해설서가 선보이는 철학의 모습은 그 진면목이 아니라 가장 대중적인 모습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철학 해설서가 제시하는 대중적 모습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파악한 모습을 서로 대조해보는 재미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재미가 얼마나 크면 밥벌이도 시원찮은데 철학책 읽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까지 하겠는가? 독자 여러분들도 이 재미에 동참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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