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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宗[頓] |
北 宗[漸] |
① 깨침의 강조[頓悟] ② 깨침이란[本來無一物]인 자성에 눈뜸이 며 그것은 돈오이다. ③ 닦음이란 자성의 펼침이며 돈수일 뿐이 다(一行三昧). ④ 自性三學 ⑤ 大根之人을 위한 길 ⑥ 중국적 |
① 닦음의 강조[漸修] ② [거울 닦는] 닦음은 점차적인 것이다. ③ 깨침이란 그러한 닦음을 통하여 가능하 다. ④ 隨相三學 ⑤ 小根之人을 위한 길 ⑥ 인도적 |
〈표1〉
아무튼 남북돈점의 기본적인 차이는 각기 돈오과 점수의 강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의 돈점 논의는 남북종 간의 많은 논란이 되어 오다가 징관(澄觀, 738-839)과 종밀(宗密, 780-841)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체계를 지어 구분하였다. 지눌의 {절요}에는 이들 징관과 종밀의 돈점의 구분에 관하여 자세한 고찰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돈오점수설을 확립하기 전에 기왕에 있어왔던 돈점설을 얼마나 신중히 검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지눌이 그만큼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을 탐구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눌에 의하면 징관과 종밀은 각기 7종 혹은 5종의 돈점을 분류하거니와 징관은 깨침[悟]을 닦음[修]에 종속시켜 점의 문을 세웠고 종밀은 닦음을 깨침에 종속기켜 돈의 문을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이 같은 돈오점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점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징관은 점문의 입장에서 수를 강조하는가 하면 종밀은 돈문의 입장에서 오를 강조하는 돈오점수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징관과 종밀의 입장을 섭렵한 다음에 지눌은 그들의 돈과 점을 아울러 그 자신의 돈오점수설을 확립하고 있다.
2. 지눌의 돈오점수
이제 지눌이 지도체계로 수립한 돈오점수의 내용을 알아보자. 먼저 돈오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허덕이며 헤매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를 받고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지혜의 본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고 한다.]
돈오란 [心卽佛]이라는 사실에의 눈뜸이며 자기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다. 돈오가 있기 전에 [나]에 대한 인식은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미혹이다. 그 존재에 대한 미혹의 결과가 부처를 찾으면서 마음 밖으로 추구하는 이른바 [外求]이다.
그러던 것이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일념회광(一念廻光)하여 마음을 반조(返照)했을 때 존재의 실상은 밝게 드러난다. 그 드러난 모습은 ① 본래 번뇌가 없으며[本無煩惱] ② 무한한 지혜가 본래부터 갖추어져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본래 번뇌가 없다는 사실의 발견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투철한 앎이 없을 때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오는 본래 번뇌란 실체가 없고 따라서 끊어야 할 대상이 있음도 아니라는 사실에의 눈뜸인 것이다. 이 눈뜸은 일념회광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한 생각의 돌이킴으로 하여 견자본성(見自本性)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념회광과 견자본성은 하나이며 동시이이다. 그러므로 [頓]인 것이다. 지눌은 반조자심(返照自心), 회광반조(廻光返照) 등의 표현을 함께 쓰기도 한다. 일념회광은 단순한 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실상을 확실히 아는 생생한 체험이며 그것은 미(迷)에서 오(悟)로의 질적인 전환을 말한다. [내가 부처]라는 말은 바로 이 때에 터지는 탄성이다.
이렇게 자성의 참모습을 분명히 깨쳐 아는 돈오는 수행의 구극이며 완성인가? 지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눌에 의하면 돈오란 불과(佛果)를 증득한 최후의 완성이 아니라 처음으로 마음의 실상에 눈뜨는 체험이며 따라서 완성을 위해서는 점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음의 성상(性相)을 확실히 아는 것이 구태여 완전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오는 수행의 완성이 아니라 참다운 닦음의 출발이며 진정한 의미의 신(信)의 확립인 것이다. 조문의 신은 외적인 불법승 삼보에의 귀의라는 차원을 넘어 심즉불의 확신에 이르러 완성되며 그러기에 이러한 신은 진리를 밖으로 찾는 일의 종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은 자기존재의 실상에 대한 확실한 눈뜸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점수란 무엇인가?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習氣)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공이 이루어져서 성인의 태를 길러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처음 낳을 때 갖추어진 모든 기관이 어른과 다를 것이 없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 세월이 지난 뒤에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깨침은 아는 것이며 닦음은 실천이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분명히 깨치는 것이 돈오이다. 그러나 그 깨친 것을 그대로 생활 속에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닦음의 중요한 문제이다. 지눌에 의하면 깨친 즉시로 행동이 깨침과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므로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깨친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가? 지눌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길들어 온 습기(習氣) 때문이라고 한다. 미혹한 채 몸, 입, 생각[身口意]으로 익혀온 습성이 돈오로 일시에 완전히 소멸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친대로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닦음이 필요한 것이다. 돈오가 迷에서 悟로의 전환이라면 점수는 凡에서 聖으로의 실천행이다. 돈오를 통하여 자성을 깨친 사람이 그대로 성인은 아니다. 그는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깨침과 성인의 차이는 理와事, 가능성과 완성의 차이이다. 점수란 바로 이 가능성을 완성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며 노력이다. 지눌은 돈오와 점수를 어린 아기와 어른에 비유하고 있다. 어린 아기가 금방 태어났을 때 팔다리며 모든 기관이 어른과 다름없이 다 갖추어 있지만 세월이 가고 자라나야 어른처럼 팔다리를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돈오가 아기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그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이며 개발과정이다. 그러므로 돈오만으로는 모든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어른행세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지눌은 또 점수의 필요성을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아직도 침노한다]고 인증한다. 바람이 그치는 것은 일시에 될 수 있으나 출렁이는 물결이 자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치로 뿐만이 아니라 침노하는 망념을 대치할 수 있는 실제의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출렁이는 물결을 재우고 망념을 대치하는 공들임이 다름 아닌 점수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닦음은 망념을 끊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지혜로서 닦는 것이다. 망념이 일어나면 바고 그 정체를 비추어 알 수 있는 닦음이 필요하다. 비추는 밝음 앞에서 망념은 본래 공한 성품을 들어낼 수밖에 없다. 경계를 따라 망념이 일적마다 지혜로 비추어 살피는 일을[照察] 꾸준히 계속하여 크게 쉰 완전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깨친 후의 점차로 닦는 것이다. 크게 쉰 완전한 경지[大休歇之地]는 무위(無爲)의 경지며 그것은 덜고 또 덜어 나아갈 수 없는 구극을 말한다. 바로 여기서 덜고 또 덜어 쉬는 공부가 오후에 필요한 닦음이다. 지눌은 이 오후의 닦음을 목우행(牧牛行)으로 비유한다. 스스로의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한 것도 그가 소치는 공부인 점수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가를 가리키는 일이다. 지눌은 이렇게 오후의 닦음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지눌의 깨침과 닦음의 과정을 알기 쉽게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깨침[頓悟] + 닦음[漸修] = 완성[證] : 佛, 聖人
앎[凡夫] = 佛 + 실천 = 앎과 실천의 일치[智慧와 慈悲]
〈표2〉
3. 점수의 내용 :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지눌에 있어서 닦음은 깨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닦음은 항상 깨침을 전제로 하는 오후의 수이다. 그러면 깨친 후의 닦음의 원리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 혹은 정혜등지(定慧等持)이다. 선정(禪定 ; Dhyana)과 지혜(智慧 ; Prajna)는 본래 계, 정, 혜 삼학의 덕목으로 일반적으로 닦아 이루는 것이며 단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계율은 신구의의 삼업을 잘 지키어 방비지악(防非止惡)하는 것이며 선정은 산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여 조용하게 하고 지혜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셋은 단계적인 것으로 계에 의하여 선정을 얻고 선정에 의하여 지혜를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가 삼학의 일반적인 이해이며 {단경}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수의 북점종이 가르치는 삼학이다. 이러한 삼학은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닦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마음을 깨끗이 하는 닦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거울에 앉은 먼지를 닦아 내듯이 마음의 때를 부지런히 없애는 것이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이것이 신수 북점종의 마음 공부의 요체이다. 지눌은 이러한 삼학을 수상삼학(隨相三學) 혹은 수상정혜(隨相定慧)라고 부른다. 상을 따라 닦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하여 지눌은 훨씬 다른 차원의 삼학을 말한다. 그것은 자성삼학(自性三學) 혹은 자성정혜(自性定慧)라 불리는 것으로 지눌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 잘못 없음이 자성계(自性戒)요, 마음에 산란함 없음이 자성정(自性定)이며, 마음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혜(自性慧)이다.]
이는 혜능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의 삼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며 하나인 마음 그 자체의 작용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씩 분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것이다. 한마음의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지눌이 보는 선정과 지혜도 혜능에서처럼 마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선정과 지혜는 바로 마음의 성상(性相), 즉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두 바탕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마음의 공적한 본체를 말하며 지혜란 마음의 영지한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선정과 지혜는 마음의 본체와 작용으로 분리되어질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본체가 있으면 작용이 있고 작용이 있으면 본체가 있듯이 선정이 있으면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선정 또한 있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한 마음이이 때문이다. 지눌이 말하는 정혜쌍수니 정혜등지니 하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본래 성품을 기본으로 하여 나오는 자연스런 표현인 것이다.
삼학에 관한 신수와 혜능, 점문과 돈문의 차이는 지눌의 표현대로 하면 바로 수상삼학과 자성삼학의 차이이다. 전자가 단계적이며 닦음이 있는 유위의 노력이라면 후자는 마음의 본래 모습을 가리킬 뿐이요 무위의 수인 것이다. 지눌은 혜능과 마찬가지로 수상삼학은 열등한 닦음으로 깨침이 없는 점문의 것이라 하고 자성삼학은 깨침이 있은 뒤의 삼학이라고 구분한다. 즉 깨침 이전의 정혜는 정과 혜가 쌍수가 못되고 선후가 있는 닦음이며 깨친 이후라야 비로소 쌍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닦음은 깨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닦음은 정과 혜가 등지요 쌍수인 닦음이다.
隨相定慧― 漸門의 修 : 有爲有心 : 相을 따르는 禪定과 智慧 : 선정과 지혜가 선후가 있음 : 깨 침을 통하지 않은 닦음.
自性定慧― 頓門의 修 : 無爲無心 : 마음에 卽한 선정과 지혜 :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 : 깨침 을 통한 닦음.
지눌의 오후수인 점수는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자성정혜의 수라야 한다. 그는 돈문의 입장에 서 있고 점수가 오후의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후수인 점수에 자성정혜돠 수상정혜를 함께 포용하는 원융성을 보인다. 그 까닭은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도 수승한 근기의 사람은 자성정혜로 닦을 것 없는 닦음[無修而修]이 있을 뿐이나 그렇지 못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은 오후에도 대치하는 수상문 정혜의 원용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성정혜를 닦는 사람은 돈문에서 노력 없는 노력으로 병운쌍적(?運梔寂)하여 자기의 성품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수상문 정혜를 닦는 사람은 깨치기 전의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대치하는 노력으로 마음마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은 돈과 점이 각기 다르니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나 깨친 후에 닦는 문에 수상문의 대치함을 아울러 논한 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닦는 것을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임시로 쓸 뿐이다. 왜냐하면 돈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사람과 근기가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가지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는 것이야말로 지눌의 원융한 자비 방편문으로 원효 이래 통불교적인 전통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수상정혜를 닦으며 또 어떤 사람이 자성정혜를 닦을 것인가? 먼저 수상정혜를 닦아야 할 경우를 보자.
[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번뇌의 습기는 무거워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어 선악의 경계를 대하여 동요함과 고요함이 서로 엇갈림을 면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번뇌를 버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육근이 대상세계를 거두어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모두 공하여 비추어 보아도 미혹이 없음을 지혜라 한다. 이것이 비록 수상문의 정혜로써 점문의 하등한 근기의 수행이나 대치함에 있어서는 이들이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들뜨는 마음이 심하면 먼저 선정으로 이치 그대로 산란함을 거두어 잡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합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심하면 지혜로써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고 비추어 보아 미혹이 없게 하여 본래의 지각에 합하게 해야 한다.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기(無記)를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상태가 없어지고 대치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대상을 대하여도 생각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합하여 그러한 대로 두 가지를 닦아야 바로소 모든 것을 깨달아 무사인(無事人)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수상문의 정혜를 닦아야 할 사람은 첫째 번뇌의 업장과 습기가 두텁고 무거운 반면, 관행은 약하고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들떠 있는 사람, 둘째 무명은 깊고 지혜는 적어서 선하고 악한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담담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람, 즉 이러한 사람들은 수승한 근기가 못되는 사람으로 반연을 잊고 마음을 쉬는 수상정혜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이 수승한 근기인양 모든 노력을 하지 않는 일은 만용이며 과대망상으로 지눌은 특히 이러한 사람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닦음에 자상한 것이다. 실로 혜능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을 제시치 않고 있으나 지눌이야말로 혜능의 돈문에 서면서도 열등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점문의 닦음까지도 차용하는 방편을 시설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오후(悟後)의 수상문 정혜는 비록 점문의 수행을 차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전(悟前)의 단순한 점문의 수행과는 전연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돈오후의 닦음인 것이므로 깨침을 즉한 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기 이전의 수와는 달리 자성에 대한 의심이 없는 진수(眞修)이며 단지 점문의 수를 일시적인 방편으로 쓸 뿐인 것이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를 빌려서 잠깐 습기를 다스리지만 이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는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물들은 수행[汚染修]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이 깨치기 전에 있으면 비록 잊지 않고 노력하여 생각 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 의심을 일으키어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언제나 앞에 나타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치하는 노력이 익으면 몸과 마음과 객관대상이 편안한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하다 하더라도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음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한다.]
깨침 이전의 닦음과 이후의 닦음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지눌에 의하면 깨침 이전의 닦음은 물들은 닦음, 즉 오염수라는 것이다. 오염수란 무엇보다도 깨침이 없으므로 근본적인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는 닦음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하여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에 빠져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깨침은 마음의 근본 바탕을 투철히 보는 것이므로 그럴 때 의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바로 부처요, 번뇌란 본래 자성이 없는 것임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침이 부재할 때 근원적인 의심은 계속 남아 있게 마련이고 이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은 채 닦는 것이 오염수이다. 잘못된 [나]라는 생각으로 물들었고 닦는다는 생각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념(無念) 무심(無心)이 될 수 없고 항상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 불안한 채로의 닦음이다. 이러한 닦음은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이 기껏해야 임시적인 치유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치유가 못된다. 그러므로 지눌은 이런 오염수는 참다운 닦음이 못된다고 힘주어 말하다.
그러나 깨친 후의 닦음은 비록 점문의 닦음을 빌려쓰더라도 그것은 깨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참다운 닦음[眞修]이다. 비록 산란과 혼침을 대치하는 노력의 방편으로 빌려쓰지만 깨친 뒤의 닦음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침이 있으므로 의심이 없고 따라서 [나]라는 생각에도 물들음이 없다. 또한 이러한 닦음은 번뇌의 실체가 본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쳤으므로 번뇌를 끊되 끊음이 없는[無斷而斷] 무위의 닦음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지눌은 오전의 수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오후수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후의 닦음에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수상정혜를 살펴보았거니와 대근지인(大根之人)을 위한 자성정혜란 어떠한 것인가?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고 여덟 가지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세 가지 느낌[三受]까지도 빈 사람은 자성정혜를 의지하여 자유롭게 함께 닦으면 천진하여 조작이 없으므로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이어서 자연한 이치를 이룰 것이니 어찌 수상문 정혜의 대치하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깨친 후에 ①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며, ② 이로움과 이롭지 못함,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꾸지람,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여덟 가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고, ③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세 가지 느낌에도 마음이 조용한 사람은 수승한 근기로 자성정혜를 닦을 뿐이다. 자성정혜란 본래 마음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일여(一如)한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일상생활 그대로가 닦음일 뿐 특별한 시간과 장소, 노력이 필요한 닦음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혜능이 말하는 돈수며 일행삼매와 다르지 않다. 혜능의 특성이 [頓悟頓修 亦無漸次]로 점문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면 지눌의 특성은 오후 수에도 각인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닦음의 길을 제시함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점수의 두 가지 형태인 수상정혜와 자성정혜, 그리고 어떠한 근기의 사람이 그들 수행을 각기 필요로 하는가를 고찰하여 보았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지눌이 말하는 점수가 자리행(自利行)에만 그치고 마는가 하는 것이다. 지눌은 오후의 닦음이 결코 자리행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함께 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오후 점수의 문은 다만 더러움을 닦는 것만이 아니요 다시 만행을 겸해 닦아 자타를 아울러 구제하는 것인데 지금의 참선하는 이들은 모두 "다만 불성만 밝게 보면 이타의 행원(行願)은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목우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성을 밝게 본다는 것은 다만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고 나와 남의 차별이 없음을 보는 것이니 거기서 다시 자비와 서원의 마음을 내지 않으면 한갓 고요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화엄론에서도 "지혜의 성품은 다만 고요함이기 때문에 서원으로 지혜를 보호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기 전의 미혹한 자리에서는 비록 어떤 서원이 있어도 마음의 힘이 어둡고 약하기 때문에 그 서원을 성취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깨달은 뒤에는 차별지로 중생들의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자비와 서원의 마음을 내어 제 힘과 분수를 따라 보살의 도를 행하면 각행(覺行)이 점점 원만해지리니 어찌 기쁘고 유쾌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지눌의 오후수가 적정에 떨어지는 안일한 것이 아니라 세찬 이익중생(利益衆生)의 보살행을 겸하는 자타겸제(自他兼濟)의 실천임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수의 두 가지 수행 즉 휴헐망심(休歇妄心)하는 자리행과 중선(衆善)을 실천하는 이타행을 수심의 정(正)과 조(助)로 함께 겸해야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진심직설}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오후 이타행은 모든 생명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며 건지려는 자비행이며 이는 대소 모든 근기의 사람에게 두루 통하는 실천이며 닦음이다. 지눌이 보는 닦음을 깨침을 중심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전의 修 : 점문 |
깨침 |
: 돈오 이후 : 돈문의 점수[眞修] | ||
隨相定慧[汚染修] |
① 自利行 |
自性定慧―수승한 근기 | ||
隨相定慧―열등한 근기 | ||||
② 利他行 |
모든 근기 |
〈표3〉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는 사실상 단순한 체계가 아니라 대소근기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돈오+자성정혜의 수승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체계는 사실상 혜능이 강조하는 돈오돈수와 다름이 없다. 이때의 돈오점수는 돈문이 가장 높은 길이며 따라서 [돈오]는 단순한 해오(解悟)의 경지가 아니라 증오(證悟)의 차원에로까지 승화된다. 반면에 돈오+수상정혜 지도체계는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접화하는 길로서 이때의 점수는 점문의 수행을 가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돈오 역시 해오에 가까운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에 있어서 돈오를 일괄해서 해오로 규정하는 것은 구체적 내용을 무시한 무리한 평가이다. 이 대목은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지눌이 {절요}에서 징관과 종밀의 돈점문을 고찰하고 나서 [만일 그 깨침이 철저한 깨침이라면 어찌 점수에 걸리겠으며 또 그 닦음이 진실한 닦음이라면 어찌 돈오를 떠나겠는가? 그러므로 문자를 떠나고 이치를 잡아 이름과 말에 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설파한 깊은 뜻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돈문과 점문에 방해되지 않는 융통성을 가졌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각기 다른 근기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려는 그의 위인문의 충정에서 체계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는 문자 자체에 구애되기보다는 중인을 인도하기 위한 그의 산 정신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그의 돈오점수 사상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돈오점수를 택하는 이유
지눌은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체계인 돈오점수를 채택하고 그것은 [천성궤철(千聖軌轍)]이라고 까지 강조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돈오점수를 자신의 지도체계로 채택하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돈오점수 사상이 무엇을 위한 체계였던가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지눌은 {절요}에서 이렇게 분명히 하고 있다.
[청컨데 마음을 닦는 여러 선비들은 깊히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라. 내가 지금 먼저 깨닫고 그 뒤에 닦는[先悟後修] 본말의 이치를 구구히 분별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굴하지도 않고[不自屈] 교만하지도 않아[不自高] 스스로 그 곡절을 환히 보아서 마침내 혼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초심 공부인으로 하여금 부자굴 부자고 하도록 하기 위하여 깨침과 닦음의 본말을 밝힌다는 것이다. 부자굴 부자고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지눌이 {수심결}, {결사문}, {절요}등 주요 저술을 통하여 누누히 지적하고 있는 선·교가의 병통에 대한 그의 처방이다. 먼저 자고란 무엇인가? 이는 스스로를 턱없이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선학자에 있기 쉬운 병이다. 그는 이 병을 이렇게 말한다.
[말법시대의 사람들은 다분히 지혜는 깊으나 아직도 온전한 법성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괴로운 윤회를 면하지 못하므로 마음만 내면 곧 허망한 것을 받들고 거짓에 의탁하며, 말을 내면 곧 그 분수에 넘치고 지나 지견이 편고하고 행과 앎이 고르지 못하다. 요즘 선문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흠이 많아 모두 말하기를 "우리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유에도 무에도 속해 있지 않거늘 무엇 때문에 몸을 수고로이 하여 억지로 수행 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한다. 그러므로 걸림 없이 자유로운 행을 본받아 진정한 수행을 버리고 다만 몸과 입만이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구부러져 전연 깨닫지 못한다.]
이는 본래 청정한 마음에 대한 올바른 체험적 파악이 아니라 그저 지적인 알음알이로 참다운 닦음까지를 불필요한 것인양 하는 좋지 않은 병이며 이러한 병은 특히 선학자에 있기 쉬운 자고의 병인 것이다. 지눌은 이런 선학자의 병이야말로 닦음을 무시하는 만용이며 그 폐혜는 스스로를 망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까지도 악영향을 주는 악성의 것이므로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다가 조그마한 지견만 생겨도 마치 모든 것을 돈필(頓畢)한 양 닦음을 소홀히 하는 무리들로 지눌이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이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전처럼 유랑하여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염려하는 어려운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고의 병에 걸린 선학자에게 지눌은 돈오가 진정한 닦음의 시작일 뿐이라는 오후점수(悟後漸修)의 처방을 내리고 있고 부자고하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반면에 자굴의 병은 교학자에게 있기 쉬운 것으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겠는가]하는 법에 대한 현애심(懸碍心)을 내며 급기야는 퇴굴하고마는 병이다. 자기를 수준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것이 병이라면 수준이하로 과소평가하는 것 또한 큰 병이다. 이것은 자기가 본래부터 갖춘 가능성의 상실이며 따라서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불교본연의 이상의 포기인 것이다. 이들에 관하여 지눌은 {절요}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보건데 교학자들이 권교(權敎)의 말에 걸리어 진실과 허망을 따로 따로 집착하므로써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며 혹은 입으로 "事事無碍"를 말하면서 관행을 닦지 않으며, 제 마음이 깨달아 들어가는 비밀한 법이 있음을 믿지 않고 참선하는 이들의 견성성불이란 말을 들으면 곧 말을 떠난 돈교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면서, 그 가운데 뚜렷이 깨달은 본 마음의 불변수연(不變隨緣)과 성상 체용과 안락 부귀가 모두 부처님과 같다는 뜻을 알지 못니 어찌 그들을 지혜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만일 이뜻을 안다면 不自屈 不自高 해야 비로소 뜻을 얻은 마음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즉, 이 자굴벙의 근원은 자기비하요 [心卽佛]이란 말에 대한 불신이며 그 결과는 퇴굴이다. 이러한 병에 걸린 교학자를 그는 담마기금(擔麻棄金), 즉 금을 버리고 삼[麻]을 짊어지는 사람에 비유한다. 이러한 사람에게 지눌은 깨침은 모든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라는 돈오의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눌은 [나는 못났다]하는 자굴심에 떨어진 사람에게 [네가 바로 부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이만하면 됐다]하고 자만심에 찬 사람에게는 수심은 이제부터라는 겸허한 자세를 가르치어 不自屈 不自高 하도록 깨우치고 있다. 돈과 오만을 전부로 아는 선학자에게 점수의 용공(用功)을 권하며 관행을 게을리하는 교학자에게는 마음의 성상을 먼저 분명히 보아야 한다고 권하는 응기설법(應機說法)의 지도체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눌이 해결하려고 일생동안 진력한 선과 교의 융회정신이다. 즉 그의 돈오점수는 不自屈 不自高의 원리에 입각하여 각기 교학자와 선학자의 병을 치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선교간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려 시도하고 있다.
5. 돈오점수와 경절문(徑截門)
{불일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지눌은 성적등지(惺寂等持), 원돈신해(圓頓信解), 경절(勁截)의 삼문을 시설하여 중인(衆人)을 제접(提接)하였다고 한다. 이 삼종문을 깨침과 닦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첫 두 문은 돈오점수의 지도체계에 포섭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절문은 다른 바가 있으니 그 내용은 무엇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해온 돈오점수의 체계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돈오점수설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
경절문이란 무엇인가? [경절]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으로 경절문이란 소위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단도직입적인 길을 말한다.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 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지눌은 돈오점수를 일반적인 사람들을 위한 깨침과 닦음의 길로 제시하면서도 다시 경절문을 시설하여 특수한 근기의 사람들을 또한 포용하고 있으니 그의 저술 가운데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절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경절문의 특성을 지눌의 말을 통하여 직접 들어보자.
[원교(圓敎)에서 십현(十玄)의 무애한 법문을 말한 것은 비록 그것이 부사의(不思議)한 경지에 오른 보살을 두루 보는 진리의 경계이긴 하지만, 오늘의 범부들이 관행하는 문에는 듣고 아는 언어의 길과 이치의 길이 있어서, 분별없는 지혜를 얻지 못하고 모름지기 보고 듣는 것과 이해하고 행하는 과정을 지낸 뒤에야 증득해 들어가니, 증득해 들어가서는 선문의 무념으로 역시 상응하는 바이다. 그래서 논에 이르기를 "먼저 듣고 아는 것으로 믿어 들어가고 다음에 생각없는 마음으로써 계합해서 같게 된다"하였거니와 선문에 바로 뛰어들어 증득해 드는 이는 처음에 이치와 뜻을 듣고 아는 생각을 상대함이 없이 바로 자미 없는 화두를 붙들어 깨달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 길과 뜻 길의 알음알이로 생각하는 경계가 없으며 또한 보고 듣고 이해하고 수행하는 등의 과정도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대번에 한번 깨치고 나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은 일심의 법계가 훤하게 뚜렷이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자와 선문의 한번 깨치는 자를 비교하면 교내(敎內)와 교외(敎外)가 뚜렷이 같지 않아서 시간적으로도 더디고 빠름이 또한 다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외별전의 선문은 교종에 널리 뛰어났거나 얕게 아는 자가 능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즉, 여기서 지눌은 두 가지 길을 상론하고 있으니 ① 먼저 듣고 아는 것으로 믿어 들어가고[先以聞慧信入] 다음에 무사(無思)로 계합[後以無思契同]하는 길과, ② 처음부터 이치와 뜻을 듣고 아는 어로, 의로 심식 사유함이 없이 바로 몰자미한 화두를 들어 깨치는 길의 두 가지가 그것이다. 전자가 교가 혹은 인교오심(因敎悟心)하는 관행자를 위한 것으로 교와의 융회를 기본으로 한다면 후자는 경절득입(徑截得入)의 문으로 선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향한 그야말로 교외별전하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지눌의 돈오점수의 체계는 전자 즉 인교오심의 관행자를 위한 일반적인 지도체계라는 점이다. 거기에 비해 경절문은 인교오심이 아니라 오히려 인교오심의 약점인 지해(知解)의 병을 파하기 위한 직접적인 길로써 시설하고 있으니 이는 선종이 과량지기(過量之機)를 위한 화두선이다. 이 단도직입적인 경절문의 시설이야말로 선이 교를 바탕으로한 융선(融禪)의 입장뿐만 아니라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면목 또한 잃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IV. 결 어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의 내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이제 지금까지 살펴 본 바를 바탕으로 돈오점수 사상의 특성을 정리하여 보고 한국불교 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결어에 대신 하려고 한다.
먼저 선오후수의 지도체계인 돈오점수는 묘합회통이라는 구조적인 특성을 가진다. 각기 다른 전통이나 흐름에 대하여 배타적이거나 획일적이기보다 조화로운 만남을 통하여 종합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원효가 여러 갈래의 불교를 무리 없이 회통, 하나로 통하게 한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전통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돈오점수 사상에 나타난 묘합회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첫째 돈문과 점문의 원융한 회통이다. 깨침을 강조하는 돈문과 닦음을 강조하는 점문은 {단경}이래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진리를 연설할 때에는 반드시 {육조단경}에 뜻을 두었다][立法演義則意必六祖壇經]는 지눌은 혜능과 같이 돈문의 입장에 섰다. 이는 그가 창평 청원사에서 증입의 첫 종교적 체험을 {단경}을 통하여 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혜능이 돈오돈수, 역무점차를 내세워 점문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점문의 닦음을 오후수의 방편으로 포용하고 있음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러한 지눌의 입장은 징관과 종밀의 돈점설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비판과 주체적인 자세를 잃지 않은 점을 통하여도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오와 수의 묘합이다. 돈점이 각기 대립, 분리될 때의 문제는 오와 수의 유리이다. 그러나 지눌에 있어서 오와 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오를 통한 수, 수를 게을리 하지 않는 오의 체계가 바로 돈오점수의 묘합이며 회통인 것이다. 셋째 선과 교의 융회요 묘합이다. 지눌에 있어서 [교는 불어요 선은 불심]으로 선교는 대립, 갈등이 아니라 표리를 이루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는 선학자의 문제와 교학자의 문제를 함께 해소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는 체계이다. 즉 돈오를 강조하면서 열등감으로 관행을 게을리 하는 교학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점수를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자고병에 떨어진 선학자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처방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이러한 묘합회통을 기본으로 하는 돈오점수 사상의 근저에는 모든 사람의 능력과 소질을 최대한으로 살리려는 국사의 근기설법의 자비가 흐르고 있다. 오후수에서 각기 능력에 따라 수상, 자성의 두 가지 정혜를 시설하는 것이나 삼종문을 열어 과량기(過量機)의 선학자에게 단도직입의 경절문을 권하는 것도 위인문(爲人門)의 자비심어린 방편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단경}의 혜능이 대근지인을 위한 돈문의 길만을 내세웠다면 대근지인은 물론이요 소근지인까지도 버리지 않는 원융한 위인문을 시설한 것이 지눌이었다. 자성정혜문이나 경절문에서부터 점문열기(漸門劣機)의 수인 수상정혜까지를 시설하고 있음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근기에서부터 최하근기이 사람까지를 포용하고 있는 지눌의 폭 넓은 수기설법(隨機說法)의 가르침을 잘 보여준다. 이는 대소승의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위하여 각기 다른 입문과 수행의 길을 제시한 불타 본연의 가르침의 방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요즈음 지눌의 돈오돈수설에 대한 비판을 볼 때 과연 이렇게 중인의 근기를 존중하는 그의 가르침의 입장을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서언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사람을 일률적으로 불타의 혜명을 단절하는 자로 몰아부침은 성급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선문정로}에서 이성철 종정이 밝히는 이른바 선문의 정로는 ① 돈오=견성=구경성불, ② 오후수란 따라서 자재해탈의 경지일 뿐이며, ③ 견성의 방법은 화두의 참구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돈오후에 점수가 필요하다는 돈오점수는 이단사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의 깨침과 닦음의 체계로 볼 때 성철 종정의 입장은 경절문이나 자성정혜와 다를 것이 없고 그 점 {단경}의 돈오돈수적 견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미 고찰한 것을 통하여 볼 때 지눌은 그러한 순선적(純禪的) 입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별도의 문으로 잘 살리면서 또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방편의 문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돈오점수라는 지도체계를 수립하게 되는 고려불교의 역사적인 배경과 지눌의 깨침과 닦음에 관한 입장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심도있는 통찰이 있은 연후에 내려질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특성을 가진 돈오점수 사상의 한국불교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첫째 탈중국적인 한국선 전통의 확립이다. 선과 교, 돈과 점, 오와 수를 하나로 보는 회통적 선전통이 비로소 그에 의하여 이 땅에 수립된 것이다. 이는 외래사상의 주체적이고도 독창적인 수요의 한 훌륭한 예이다. 이러한 지눌의 회통적 전통은 원효이래 한국불교가 가꾸고 꽃피워 온 전통의 재확인이며 지금까지도 면면히 계승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둘째 돈오점수의 체계야말로 지눌이 타락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바로잡기 위한 방법의 제시로 깨침과 닦음이라는 불교 본연의 이슈에 착안, 수심의 본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셋째 수심인의 나침반으로서 돈오점수는 결국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에 대한 명쾌한 제시이다. 진리가 먼 곳이 아니라 각인의 존재의 원천에 있으며 그 원천으로 돌이킴을 통한 눈뜸과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지눌은 수심의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후수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타행을 강조하고 있음도 바로 이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눌은 고려불교가 안으로 선교간의 심한 대립, 갈등과 밖으로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형식화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의 생애는 이러한 고려불교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법을 구현하려는 그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정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깨침과 닦음의 본말을 밝히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그의 삶 자체가 그대로 깨침과 닦음을 향한 것이었다.
깨침과 닦음의 정로를 밝히기 위하여 그는 선사이면서도 그 당시까지의 모든 이론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도지종(惟道之從)하였을 뿐 어느 한 사를 맹종하자 않았다. 조계를 따르면서도 점수를 버리지 않았고 규봉종밀을 가까이 하면서도 대혜를 좋아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교를 멀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해종도임을 알면서도 신회의 오해(悟解) 고명함을 높이 평가하였고 정통과 거리가 먼 이통현의 {화엄론}을 남달리 귀하게 여겼다. 이는 다 사람을 쫓는 것이 아니라 법을 따를 뿐인 그의 진실됨을 말하는 것이다. 창조적 전통의 형성은 이러한 주체적인 자세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의 돈오점수 사상은 탈중국적인 한국선의 방향제시였으며 동시에 타락된 고려불교를 일신하려는 그의 처방이기도 하였다. 돈오점수에서 우리는 독특한 지눌 사상 내지는 지도체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선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교를 버리지 않고 돈문에 서면서도 점문을 포용하며, 오를 강조하면서도 수를 게을리 하지 않는 묘합회통의 정신이 그것이다. 이 묘합회통정신의 근저에는 각기 다른 근기의 사람들을 능력과 소질에 따라 제도하려는 이익중생의 자비가 살아 있음을 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