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보는 원종찬 님의 편저 『권정생 문학과 삶』(<창비>, 2008)에 실린 이기영 님의 글입니다. 이기영 님은 (사)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활동하였고, 지금은 똘배어린이문학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요청에 따라 복사, 재배포가 안 되는 점, 이해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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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은 1937년 8월 18일일본 토오꾜오(東京) 시부야(澁谷) 하따가야(幡ケ谷) 혼마찌(本町) 3쬬오메(丁目) 595방(番)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권유술(權有述)과 어머니 안귀순(安貴順) 사이에서 태어난 5남 2녀중 여섯째다. 어릴 때는 권경수로 불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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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7년 뒤인 1936년 가을에 아버지를 찾아가는데, 이때 여권이 여섯 장 필요했으나 넉 장밖에 나오지 않아 어머니는 첫째형과 둘째형을 떼어놓고 갔다. 첫째형(19세)은 친구와 함께 만주로 갔다가 일본으로 가기로 했고, 둘째형(15세)은 할머니 집에 맡겨 두었다가 어머니가 일본에 닿는 대로 아버지를 보내어 데려가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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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오후 9시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9번지에서 둘째형 목생이 세상을 떠났다. 공사장에 나갔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져서 돌에 치인 것이다. 권정생은 「목생(木生) 형님」(『새 생명』 1978년 3월호)이란 글에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형님, 그러나 그 만남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더 귀중한 형님을 만나보게 된지도 모른다’며 ‘목생 형님은 끊을 수 없는 반려자이며 내 사랑하는 소년’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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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들이 친구들과 머리에 가시관을 쓴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을 얘기하는 걸 듣고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된다. 이때 환상으로 본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은 어린 권정생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핏기 없이 검푸른 얼굴에 붉은 피를 흘리며 공중에 높이 매달린 남자가 무섭기보다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평생 예수님을 믿고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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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는 쓰레기더미에서 헌 책을 가려내어와서 뒤란 구석에 쌓아두었다가 고물 장수에게 팔았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이솝이야기』 『그림동화집』,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 오가와 미메이(小川未明)의 『빨간 양초와 인어(赤い蠟燭と人魚)』, 미야자와 켄지(宮r賢治)의 『달밤의 전봇대(月夜のでんしんばしら)』 같은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읽으면서, 혼자 글을 익히고 세상을 배웠다. 저녁때면 5전짜리 동전을 쥐어준 어머니 심부름을 하면서 따뜻한 사람들을 만났다. 극장에 가면 고구마튀김을 수건에다 겹겹이 싸서 품속에 넣어두었다가 영화 중간쯤에 꺼내어 손에 쥐어주던 히데꼬 누나, 아버지는 조선인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으며 고아원에서 온 노리꼬, 칸또오 대지진(關東大震災)때 부모를 잃고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처럼 얹혀살던 경순 누나 등을 그때 만났다. 『슬픈 나막신』은 그 이야기를 쓴 동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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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오꾜오 시부야 혼마찌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해 8개월을 다녔다. 이 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습이 있었다. 12월, 토오꾜오의 폭격으로 집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셋집을 잃어버린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군마껜(群馬縣) 쯔마고이(妻戀)라는 시골로 이사했다가 거기에서 해방을 맞는다. 군마껜 우에하라(上原) 소학교에 6개월을 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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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맞아 후지오까(富岡)로 이사했다. 이때 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큰형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밥집을 했는데 좌익 사람들이 많이 왔다. 처음에는 그저 심부름이나 하다가 자연스럽게 총련계와 가까워졌다. 조선인연맹에 가입한 두 형은 식구들이 귀국할 때 일본에 남아 다음에 귀국하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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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8년 6개월동안 어려웠지만 정든 일본 땅을 떠나 3월에 귀국했다. 식구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형수는 친정으로 가고, 아버지와 작은누나는 안동으로, 권정생과 어머니·큰누나·동생은 청송 외가로 갔다. 청송군 화목면 장터마을에서 1년 반 남짓 살면서 여섯 번 이사를 했다. 청송군 화목국민학교를 5개월 다녔다. 어머니는 약초를 캐서 팔고 여름에는 품을 팔았다. 일이 없는 겨울에는 자루 하나를 메고 동냥을 나갔다. 열흘씩 보름씩 돌아오지 않으면 권정생은 누나와 동생 셋이서 귀리나 호밀 가루로 끓인 죽을 먹으며 기다렸다. 이때 이야기를 쓴 것이 동화 「쌀도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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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생활 터전을 찾다가 12월,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이 모였다. 아버지의 고향인 안동 일직에서 소작 농사를 짓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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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여덟 살인 동생과 함께 안동 일직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담임은 권정생이 2학년일 때는 3학년으로, 3학년일 때는 5학년으로 월반할 것을 권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했다. 상급반은 학교를 늦게 파해서 집안일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소작 농사만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어머니가 행상을 나섰다. 권정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와 동생이 먹을 밥을 짓고 살림을 했다. 어머니는 닷새 만에 돌아오는 장날에 와서 다음날이면 또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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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권정생을 중학교에 보내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면서 앞으로 1년 더 고생하면 될 것 같으니 그 때까지만 그냥 학교에 다니는 걸로 해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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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 전쟁이 났다. 어머니가 행상으로 모은 돈(소 세 마리를 살 수 있었던 돈)은 화폐가치가 백분지 일로 떨어져 염소새끼 한 마리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나자 식구들은 뿔뿔이 헤어져 생사도 모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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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 동갑내기 양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검정 물감을 들인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소녀였다. 이런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늘이 엿보였기 때문에 양자에게 마음이 끌렸던 권정생은 편지를 썼다가 소문이 나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 겨울에 처음으로 지게를 만들었다. 산에 가서 솔가리를 긁어다 장에 내다 팔아 중학교에 갈 학비를 모았다. 동생에게도 지게를 만들어주어 둘이 같이 두 번을 내다 팔면 암탉 한 마리를 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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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안동 일직국민학교 제30회 졸업식에서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과 청송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안동에 와 다시 입학하여 다니는 바람에 1953년 3월에야 졸업했다. 나무를 해다 팔아 암탉을 산 권정생은, 중학교는 1년 뒤에 가기로 하고 암탉을 키웠다. 암탉이 다섯 마리가 되고 여름까지 백 마리가 훨씬 넘게 되었지만 중학교는 들어가지 못했다. 전쟁과 함께 닭 전염병이 덮친 것이다. 백 마리가 넘는 크고 작은 닭이 일주일도 못 가서 모조리 죽었다. 키우던 닭이 모두 죽자 여름부터 객지 생활을 했다. 집을 나가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점원 노릇을 했다. 고구마장수를 할 때 주인이 무게를 속여 팔게 했는데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다가 결국 양심을 속이게 되었다. 어머니께 고구마 두 관을 팔면서 여느 사람 대하듯이 속일 뻔한 날, 밤을 지새우다시피 울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랫마을 예배당에서 하는 야간학교에 나가 영어 알파벳도 배우고 수학도 공부했다. 수업료로 한 달에 한 번씩 나무를 해다 주었다. 겨울, 고학으로 상급학교에 갈 생각에 또다시 집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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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부산에서 재봉기 상회 점원으로 일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던 오기훈과 최명자는 외로운 객지 생활에서 만난 친구였다. 이북 피난민이었던 오기훈과 함께 용돈이 생기면 초량동에 있는 ‘계몽서적’이란 헌 책방에서 책을 빌려다 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 이광수의 『단종애사』, 월간 잡지 『학원』 등을 사서 읽었고, 「굳세어라 금순아」 「슈샤인 보이」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쓸쓸함과 슬픔을 함께 달랬다. 늦은 여름, 오기훈이 자살했다. 권정생은 깊은 슬픔에 빠졌고 월간 잡지 『학원』 1955년 8월호를 끝으로 보지 않았다. 시와 소설을 써보던 것도, 서점을 가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만두었다. 충청도가 고향인 최명자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메리야스 보따리 장사를 따라다니던 명자는 늦가을, 서울로 떠나 어느 윤락가에서 웃음을 파는 여자가 되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오기훈과 최명자를 모델로 쓴 동화다. 권정생은 ‘갑돌이와 갑순이는 절대 유행가 제목에서 따온 것이 아니며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즐겨 붙여주던 겨레의 상징적인 가장 정다운 이름인데 그것을 유행가에서 오용했기 때문에 천하게 되어 버린 것’이라 했다. 그러나 끝내 동화 제목으로 쓰지 못하고 「별똥별」로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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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을 앓기 시작한다. 아무에게도 아프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으며 1년을 버티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늑막염에 폐결핵이 겹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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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집 떠난 지 5년 만에 어머니에게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소변 보는 횟수가 잦아지고 통증이 뒤따라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열일곱 살이던 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힘겨운 노동을 했다. 권정생은 동생이, 한창 공부하고 배움길에서 자라야 할 나이에 평생 노동으로 시달려온 부모처럼 고생할 것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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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집을 나갔다. 동생은 돈을 벌기 위해서 강원도로 서울로 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늑막염과 폐결핵에서 신장결핵 방광결핵으로 온몸이 망가져갔다. 어머니는 약초를 캐고 메뚜기, 뱀, 개구리를 잡는 등 권정생의 병세 호전을 위해 애썼다. 동생이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병 치다꺼리에 여념이 없자, 농사는 아버지 혼자 지었다. 권정생은 집나간 동생과 부모에게 도저히 그 이상 고생을 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밤마다 교회당에 가서 밤을 지새우며 하느님에게 고통을 눈물로 부르짖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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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세가 차츰 호전되었다. 건강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죽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게 되고 얼마동안 행복을 느꼈다. 신문도, 라디오도, 책 한 권 빌려 볼 수 없는 산골에서 성경은 권정생의 마음을 무한히 넓고 깊게 가르치고 일깨워 주었다. 고향집에 돌아온 지 6년 만에 교회학교 교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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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눕기 전날까지도 고개 너머 저수지 공사에 일을 갔던 어머니가 누운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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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과 셋째형은 일본에 있고, 둘째형 목생은 죽었고, 넷째인 권정생은 10여 년째 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나마 가계를 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권정생에게 어디 좀 갔다 오라고 권유했다. 4월 중순, 동생에게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와 S기도원으로 갔다. 간 지 열흘 만에 기도원을 나와 그날 밤부터 권정생은 철저한 거지가 되기로 결심한다. 3개월 남짓하게 거지 생활을 했다. 대구, 김천, 상주, 점촌, 문경을 떠돌았다. 8월 초순, 권정생이 자신도 모르게 고향에 가까운 예천 지방으로 갔을 때 갑자기 온몸에 열이 오르고 걸음을 옮겨놓기 힘들 만큼 아랫배의 국부가 아팠다. 이튿날 한밤중에 몸도 못 가누고 쓰러지며 집으로 갔다. 이때부터 부고환결핵을 앓게 되었다. 방에 불을 환하게 밝혀두고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에 이따금 나들이를 하는 듯하더니 다시 자리에 누운 뒤 결국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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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콩팥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다. 12월에는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다. 하나 남은 콩팥도 병이 들었지만 다 들어내면 안 돼서 바깥으로 소변 주머니를 다는 수술을 했다. 퇴원할 때 의사는 2년을 살 테니까 2년만 견디라고 했고 간호원은 6개월도 못 살 것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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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결혼을 해서 따로 나가 살았다.권정생은 동생의 결혼을 참으로 감사해하며 자신이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을 하느님이 베풀어준 최대의 은혜라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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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일직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 건물의 흙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나았다. 그 조그만 방에서 권정생은 글을 쓰고 아이들을 만났다. 「깜둥바가지 아줌마」를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보냈는데 예심에 올라갔다 떨어졌다. 「깜둥바가지 아줌마」는 『새벗』 8월호에 실린다. 세상에 태어났다가 그냥 죽는 게 억울해서 글을 쓴 권정생은 「강아지똥」을 동시로 썼는데 만족스럽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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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 모집에 「강아지똥」을 동화로 고쳐 써서 보냈다. 권정생은 마감 50여 일 동안 원고지의 앞면 뒷면을 메워가면서 열에 들뜬 몸으로 동화를 썼다. 50일간의 고통 끝에 「강아지똥」은 완성되었다. 「강아지똥」 응모 당시 원고 매수 때문에 덜어냈던 감나무 가랑잎 장면은 2003년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고 2004년 『동화읽는어른』 7월호에 동화가 실리면서 살아났다. 시한부 인생과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쓴 감나무 가랑잎 장면이 더욱 절실했던 권정생은 『동화읽는어른』에 원고를 보내면서 ‘이제 겨우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5월 12일쯤 당선 통지가 배달되었고 상금 1만원을 받았다. 그 상금에서 5천원을 떼어 새끼 염소 한 쌍을 사고, 나머지 5천원으로는 쌀 한 말을 사며 조금씩조금씩 썼다. 『기독교교육』6월호에 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했다. 『횃불』 11월호에 동화 「찔레'꽃잎과 무지개」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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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 6월호에 동화 「눈이 내리는 여름」을 발표했다. 『성탄에 들려줄 동화집』(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 동화 「눈꽃송이」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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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가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상금은 2만원이었다.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약칭, 안동문협)가 9월 16일 창립되었다. 안동문협은 1969년에 출발한 ‘글밭동인회’를 모체로 설립된 기구다. 이 무렵 글밭동인회 활동을 하던 권정생, 이오덕은 아동문학부문 창립회원이 되었다. 권정생은 회비를 내고 월례회 모임에는 가끔 나갔다. 『기독교교육』 7·8월호에 동화 「떠내려간 흙먼지 아기들」을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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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감기가 들어 누워 있던 권정생에게 집배원이 와서 「무명저고리와 엄마」 신춘문예 당선 쪽지를 주었다. 결핵환자에게는 어떤 것이든 흥분은 금물인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흥분했다. 그날 밤 심한 각혈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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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조선일보 1월 7일자에 실린 당선 소감에서 권정생은 “산골 마을, 음산하고 추운 나의 오막살이 방 안에도 오늘은 때 아닌 봄빛이 활짝 퍼진 것만 같습니다. 병고에 시달려온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밝은 낮보다 어두운 밤하늘이 더 좋았습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고운 별빛을 벗하며, 길고긴 병상 생활에서 그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렸습니다. 나의 어머니이자, 5천만 우리 민족의 슬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꼭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동화로 엮어나가기란 어려웠습니다. 50장의 원고를 3년 만에 탈고했습니다. 저승에 계신 어머니께서도 함께 기뻐해주세요”라고 했다. 상금은 8만원이었다. 이오덕은 『기독교교육』 1969년 6월호에 실린 「강아지똥」을 읽고 권정생을 알게 되었다. 197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발표가 났을 때 권정생의 주소가 시골교회로 되어 있어서 마음이 끌렸는데 한 번 만나지도 못하고 편지도 못 하고 몇 해를 지냈다. 그러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명저고리와 엄마」를 읽고 놀라움과 기쁨에 곧바로 권정생을 찾아가서 처음 만난다. 이오덕은 권정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권정생은 글을 쓰는 대로 이오덕에게 보냈다. 권정생의 주옥같은 작품은 이오덕을 만나 세상에 나왔고 평생 이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왕래했다.
이오덕이 이현주에게 “일 년에 총수입이 이천칠백 원이라 합디다” 하며 권정생을 소개했다. 이현주는 권정생에게 엽서를 보냈다. 이때부터 권정생과 이현주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은 친분을 갖는다. 이현주는 권정생 동화를 잡지에 발표하도록 해주었고, 권정생은 이현주 동화집 『알 게 뭐야』를 읽고 교회 중등부 어린이들에게 얘기해주었다. 아이들이 무척 흥미를 가졌다. 이오덕의 권유로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 가입했다. 협회에서 회비 천오백 원과 기타 책값을 요구하자 이오덕은 권정생처럼 병들고 가난한 회원에게 회비를 받는다면 회를 탈퇴하라고 한다. 이름만 올려놓고 회비만 걷는 단체가 아니라 이념이 같은 사람끼리 모이는 단체를 만들고 싶어했던 이오덕은 권정생을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 가입하도록 한 것을 후회했다. 이오덕이 원고지 60장짜리 동화 「토끼나라」를 소년조선, 소년한국, 대구 매일신문 등에 실으려고 섭외를 했지만 원고지 매수 때문에 거절당했다. 권정생은 매수 때문이 아니라 이때 써놓았던 작품 「어느 주검들이 한 이야기」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오누이 지렁이」 「장대 끝에서 웃는 아이」 「금복이네 자두나무」 「보리방아」 「코스모스와 사마귀」 「슬픈 여름밤」 들 모두 당시 동화계에서 환영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여름성경학교 교본』(대한기독교교육협의회)에 동화 「선물」을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6월호에 동시 「매미」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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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열심히 글을 쓰면 사흘째는 열에 시달리며 앓으면서도 글쓰기와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밥벌이를 하려고 안동 시내에 있는 성경고등학교에 가서 기독교교육, 동화교육을 몇 시간 맡아 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전임으로 수고해달라고 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죽을 지경으로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8월에 첫 단편동화집 『강아지똥』(세종출판사)을 펴냈다. 출판사 사정이 좋지 않아 원고료는 원고지 한 장에 백 원을 받았고 판권은 출판사로 넘어갔다. 원고료가 적은 대신 책을 50권 받았다. 받은 책은 선물을 하거나 팔아서 생활비로 썼다. 이오덕은 책 출판뿐만 아니라 권정생 작품을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데 앞장섰고 원고료 받는 것도 꼼꼼히 챙겨주었다. 안동문협에서 『강아지똥』 출판기념회를 하겠다고 해서 권정생은 지부장에게 기념회를 취소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기어코 했다. 『신앙계』 3월호에 동화 「버들강아지야 어서 피어라」를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4월호에 「교사의 노래」 노랫말을 발표했다. 「애독자 여러분께―좋은 곡을 붙여 보내주십시오」라는 글이 함께 실렸다. 5월호에는 「우리 집」이란 노래의 작사를 했다. 작곡은 오소운이 했다. 『풀과 별』 8월호에 안동지역 문단과 문인들의 활동을 정리한 글 「안동의 시단기상도(詩壇氣象圖)―외로우나 보람 찾으며」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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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복이네 자두나무」로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서 제정한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이오덕은 상금에 세금이 나오면 내지 말라면서, 병들고 가난하게 겨우 목숨 이어가는 작가에게 국가가 밥 한 그릇 먹여주지 않으면서 걷는 세금은 거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상금은 10만원이었다. 박경종이 시상식 때 입으라고 양복을 보냈지만 검정 골덴 바지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갔다. 수상소감으로 교회의 가난뱅이 아이들 얘기를 하며 울었다. 이현주가 며칠 묵으며 서울구경을 하고 가라니까 열다섯 살 정신박약아인 칠복이에게 일에서 십까지 가르치고 이름쓰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 아이가 기다린다며 바로 돌아갔다. 시상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영주에서 만난 거지를 생각하며 더 이상 동화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일본에 사는 형에게 『강아지똥』을 보냈다. 형은 쇼오가꾸깐(小學館)에서 간행된 55권 세계명작 가운데 여섯 권과 코오단샤(講談社)에서 나온 장편소년소설 『천사가 천지에 가득하다(天使で天地はいっぱいだ)』를 보냈다. 그 후에도 형과 조카는 미야자와 켄지 전집 등의 책을 보내주었고 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형은 30년 만에 조총련 고국방문을 하고 싶어했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원하면 형이 초청하여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 권정생은 안동 일직에 사는 정든 아이들과 사람들 때문에 가지 않았다. 『소년』 5월호에 동화 「보리방아」를 발표했다. 『새가정』 6월호에 동화 「보리이삭 팰 때」를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7·8월호에 동화 「여름 그림책」을, 9월호에 동화 「멍쇠네 부엌솥」을, 10월호에 동화 「고추짱아」 「두꺼비」 「소낙비」를 발표했다. 『새가정』 11월호에 산문 「그해 가을」을 발표했다. 장편동화집 『꽃님과 아기양들』(새벗문고)을 펴냈다. 「겨울 망아지들」이란 제목으로 손보고 다듬었던 동화인데 등장인물의 일본이름은 모두 한국이름으로 고쳐 출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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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정』에 2월호부터 6월호까지 5회 동안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를 연재했다.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서평 「두 권의 동화집―이원수 동화소설집 『호수 속의 오두막집』, 조대현 창작동화집 『범바위골의 매』」를 발표했다. 『아동문학평론』 여름호(창간호)에 산문 「나의 작품세계―위선에서 진실을 일깨워 주는 일」을 발표했다. 『소년』 10월호에 동화 「달개미꽃들이 읽은 편지」를 발표했다. 『아동문예』 11월호 ‘특집 아동문학시대를 위한 광장’란에 아동문학가 임신행은 「만남이라는 것―권정생씨에게」를, 권정생은 「하늘에 부끄럽지 않는―임신행씨께」란 편지글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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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교회문간방에서 이사했다. 조용히 글을 쓰고 싶어 부모와 함께 살던 농막집 앞에 있는 조그만 집을 샀다. 『창작과비평』 1976년 여름호에 쓴 서평 「두 권의 동화집」에서 『범바위골의 매』에 대해 쓴 서평에 대해 김상남이 『아동문예』 1977년 1월호에 「아동문학계에 휴업계를 내며」란 글을 썼다. 이에 권정생은 『아동문예』 2월호에 「김상남 씨의 글을 읽고―더 넓은 안목을」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권정생은 “하찮은 서평 몇 줄에 그토록 이성을 잃게 되다니”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면서 동심부재와 인간부재에 대하여 논평하고, “까닭 없이 시비조로 나오는 아동문인과 아동문단을 생각하면 가슴을 치고 싶다”고 했다. 조대현의 『범바위골의 매』는 권정생에 이어 제2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기독교교육』 3월호에 동화 「굴뚝새」 「부엉이」 「아기 산토끼」를 발표했다. 『소년』 7월호에 소년소설 「아버지」를 발표했다. 『소년』 10월호에 동시 「달님」을 발표했다. 권정생, 손춘익, 이영호, 이현주, 정휘창 등이 5인 동화집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창비)를 펴냈다. 권정생 작품은 「무명저고리와 엄마」 「강아지똥」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금복이네 자두나무」 등 네 편이 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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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1월호에 소년소설 「초가삼간 우리 집」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는 1980년 7월까지 했다. 연재할 당시 제목은 ‘초가삼간 우리 집’이었던 것을 1985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초가집이 있던 마을』(분도출판사)로 바꾸었다. 『새생명』 3월호에 산문 「목생 형님」을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6월호에 동화 「어느 종치기 아저씨가 울리는 새벽 종소리」를 발표했다. 동화집 『벙어리 동찬이』(웅진출판 1985)에는 「새벽 종소리」로 실린다. 『아동문예』 7월호에 소년소설 「순자 이야기」를 발표했다.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동화 「똬리골댁 할머니」 「들국화 고갯길」 「해룡이」를 발표했다. 12월에 단편동화집 『사과나무밭 달님』(창비)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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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정호경 신부에게 끌려 칠곡군 지천면 연화요양원에 입원한다. 이 요양원은 독일인 신부가 창설한 것으로 독일인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며 의사도 수녀도 모두 독일인이다. 약이며 먹을거리며 모든 것이 외국산이고 그즈음 재정권 다툼으로 경영 질서가 엉망이었다. 가난하고 병들었어도 따뜻한 피가 통하는 우리 것을 그리워한 권정생은,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종합검진을 받은 결과 입원 1개월 반 만에 병이 악화되었다. 요양원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기약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괴로워하면서 거의 반년 동안 요양원 생활을 했다. 『기독교교육』 2월호에 동화 「아기 새앙쥐와 황소 아저씨」를 발표했다. 동화집 『벙어리 동찬이』(1985)에는 「황소 아저씨」로 실린다. 『안동문학』 제4집(3. 1)에 동화 「달맞이산 너머로 날아간 고등어」를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12월호에는 「즐거운 겨울학교」란 노래의 작사를 했다. 작곡은 정인호가 했다. 단편동화집 『까치 울던 날』(제오문화사)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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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동문학가협회 월보는 부끄러운 휴지조각”이라며 소극적이고 무사안일하며 비겁한 문인들의 태도에 분노한다. ‘어두운 시대에 비굴한 글쟁이이기보다 차라리 침묵하고 있는 쪽이 당당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리끼(M. Gor’kii)의 『어머니 Mat’』를 아이들에게 조심조심 얘기해주면서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진리를 깨닫는다”고 한 예수님의 말을 믿었다. 『교사의 벗』 2월호에 동화 「외딴집 감나무 작은 잎사귀」를 발표했다. 『안동문학』 제5집(4. 10)에 시 「소 1」 「소 2」 「소 3」을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4월호에 동화 「새끼 까치와 진달래꽃」을 발표했다. 이 동화는 1979년 요양원에서 지낼 때, 함께 요양 생활을 하던 환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별로 꾸미지 않고 그대로 쓴 것이다. 『샘터』 12월호에 산문 「새벽종을 치면서」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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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 3월호에 동화 「두민이와 문방구점 아저씨」를 발표했다. 『교사의 벗』 4월호에 동화 「눈 덮인 고갯길」을 발표했다. 『소년』 6월호에 미야자와 켄지의 동화를 번역한 「옷페루와 코끼리」를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12월호에 연작동화 「사랑이 꽃피는 언덕(2)―뚱순이의 편지」를 발표했다. 울진에 있는 조그만 시골교회 청년회지에 소년소설 「몽실 언니」 연재를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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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 언니」 연재를 『새가정』으로 옮겨 1월호부터 시작하여 1984년 3월에 끝냈다. 인민군이 나오는 이야기가 문제가 되어 1982년 12월과 1983년 2월에는 연재가 중단되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삭제하기로 하고 연재는 재개되었다. 『교사의 벗』 1월호에 동화 「어느 섣달 그믐날」을 발표했다. 『월간목회』 8월호에 「다시 김 목사님께(상)」을, 9월호에 「다시 김 목사님께(하)」를 발표했다. 1986년에 펴낸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에 실린 「다시, 김 목사님께」와 다른 글이다. 『기독교교육』 11월호에 동화 「어느 추수 감사절에 있었던 일」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12월호에 단막 무언극 「묶여 있는 하느님」을 발표했다. 『길을 밝히는 사람들』(김봉균 엮음, 한샘)에 산문 「순정이, 영아와 깨끼산 앵두꽃과」를 발표했다. 이 글은 『죽을 먹어도』(아리랑나라 2005)에 재수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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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배산 아래 빌뱅이 언덕에 동네 청년들이 지어준 여덟 평짜리 작은 흙집으로 이사했다. 11월 4일 이오덕에게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 이사 간 집이 참 좋다고 편지를 썼다. 『경향잡지』 7월호에 동화 「새들은 날 수 있었습니다」를 발표했다. 『기독교교육』 7·8월호에 동화 「밀짚 잠자리」, 12월호에 동화 「빌매산에 눈이 내리던 날」을 발표했다. 『교사의 벗』 10월호에는 동화 「승규와 만규 형제」를 발표했다. 『살아있는 아동문학』 제1권 12월호에 동시 「민들레 이야기」 「외딴집 대추나무」 「토끼 1」 「토끼 2」 「토끼 3」 「토끼 4」 「하루살이」 「엉머구리」와, 평론 「오늘의 농촌을 우리 문학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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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 1월호에 교사칼럼 「어린이를 하나님의 품에 안기자」를 발표했다. 『경향잡지』 6월호에 산문 「인간이 인간으로서 만났을 때」를 발표했다. 『새가정』 7·8월호에 동화 「종지기 아저씨―높은 보좌위의 하느님」을 발표했다. 단편동화집 『하느님의 눈물』(인간사)을 펴냈다. 장편소년소설 『몽실 언니』(창비)를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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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지키는문학인모임’에서 펴낸 『지붕 없는 가게―이 땅의 어린이문학 1』(지식산업사)에 동극 「팥죽할머니」를 발표했다. 「팥죽할머니」는 청송 화목마을 장터에서 동네머슴으로 일하던 외숙부에게 열 살 때 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다. 『신앙세계』 6월호에 꽁뜨 「회개」를 발표했다. 단편동화집 『달맞이산 너머로 날아간 고등어』(햇빛출판사)를 펴냈다. 단편동화집 『벙어리 동찬이』(웅진출판)를 펴냈다. 연작동화집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분도출판사)를 펴냈다. 장편소년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분도출판사)을 펴냈다. 1980년 7월 연재가 끝나고 바로 출간하려 했으나 뒤늦게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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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집에 전기가 들어왔다. 1983년에 이사해서 3년 동안 전기 없이 유리병에 심지를 꽂아서 만든 석유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안동문협 최유근의 도움으로 전기가 들어왔다. 권정생은 3월 29일 보낸 답례 편지에서 “아직도 고무신과 호롱불이 생리적으로 제겐 어울린다는 진부한 생각을 합니다. 전기불빛 아래에서 과연 동화가 씌어질 수 있을지 무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라고 썼다. 『교사의 벗』 5월호에 동화 「늦가을 소나무와 굴뚝새」를 발표했다. 『샘이 깊은 물』 5월호에 산문 「올봄의 농촌 통신」을 발표했다. 『안동문학』 제9집(9. 25)에 시 「빌뱅이 언덕」 「민들레꽃」 「느티나무 안집 강아지들」을 발표했다. 『생활성서』 11월호에 산문 「꾸밈없이 산 예수의 말」을 발표했다. 『고신』 11월호에 「30억의 잔치―빌뱅이 이야기」를 발표했다. 11월에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종로서적)를 펴냈다. 동화, 동시, 소설, 동극, 수상, 수기, 편지 들과 권정생의 문학과 삶, 독자편지들을 모아 엮었다. 5월에 발표한 「올봄의 농촌 통신」도 함께 수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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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이오덕 등과 함께 대구경북민족문학회 창립 고문이 되었다. 이 단체는 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로 이름이 바뀐다. 불교잡지 『해인』에 1987년 3월호부터 1989년 1월호까지 소년소설 「점득이네」를 연재했다. 『공존』이라는 팸플릿에 몇 번 연재하다가 『해인』으로 옮긴 것이다. 『우리 모두 손잡고―이 땅의 어린이문학 2』(지식산업사)에 시 「달팽이 1」 「달팽이 2」 「달팽이 3」 「고무신 1」 「고무신 2」 「고무신 3―재운이네 동무들에게」 「진달래꽃 꺾어 들고」 「우리 동무들」을 발표했다. 이 책에는 권정생이 1985년 5월 22일에 『지붕 없는 가게』를 읽고 이오덕에게 쓴 편지도 함께 실렸다. 『경향잡지』 1월호에 산문 「평화란 고루고루 사는 세상」을 발표했다. 『새가정』 5월호에 동화 「연이의 5월」을 발표했다. 김용락 시집 『푸른별』(창작사)에 발문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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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안동 가톨릭농민회관에서 이오덕, 권오삼, 전우익, 이현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의 출판기념회를 했다. 『빛』 4월호에 산문 「그릇되게 가르치는 학부모들」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5월호에 시 「휴전선 비무장지대 한 늙은 소나무의 노래」를 발표했다. 『교사의 벗』 11월호에 동화 「오두막 할머니」를 발표했다. 이 동화는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1996)과 동화집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2000)에 실렸다.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을 펴냈다. 단편동화집 『바닷가 아이들』(창비)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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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정』 7·8월호에 동화 「수박밭에 떨어지신 하나님」을 발표했다. 1991년 12월까지 2년 반 동안 27회를 연재한 이 동화는 1994년에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산하)로 출판된다. 연재 당시에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고, 장편의 소제목이 그달의 동화제목이 되었다. 첫 장 「하느님이 세상으로 내려오다」는 연재되지 않았고 2장부터 연재되었다. 『종로서적』 3월호에 「우리 아이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를 발표했다.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이하 『안동』) 가을호에 머리글 「안동 톳제비」를 썼다. 6월부터 민들레교회 주보 『민들레교회이야기』에 ‘권정생의 구전동요’를 연재했다. 1990년 10월 7일까지 총29회 연재되었다.(별첨 목록 참조 바람) 『날자, 깃을 펴지 못한 새들이여』(김정한 외, 사계절)에 「열여섯 살의 겨울」을 발표했다. 『감자씨와 볍씨의 통일 이야기』(교육출판기획실 엮음, 푸른나무)에 「서로가 쉽게 만나면 그게 통일이지」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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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년소설 『몽실 언니』를 MBC에서 36부작 드라마로 만들었다. 1990년 9월 1일부터 1991년 1월 5일까지 방영되었다. 『경향잡지』 1월호에 산문 「성(聖)과 속(俗)을 함께 하신 예수」를 발표했다. 『밀알』 3월호에 산문 「고아소녀 명자의 10시간」을 발표했다. 이 글은 『죽을 먹어도』에 재수록되었다. 『종로서적』 3월호에 소년소설 「돌다리」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8월에 펴낸 『한국의 동화문학』(친구)에도 실렸다. 『교회와 세계』 7월호에 칼럼 「흑인 노예선과 하나님」, 9월호에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권두칼럼 「옥이의 편지」, 12월호에 권두언 「내가 나 되기 위하여」를 썼다. 장편소년소설 『점득이네』(창비)를 펴냈다. 단편동화집 『할매하고 손잡고』(올바름)를 펴냈다. 첫 동화집 『강아지똥』에 실린 동화 11편에 새로운 동화 7편을 더해서 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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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성서』 1월호에 산문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발표했다. 『우리교육』 3월호에 산문 「우리는 둘 다 승리해야 합니다」를 발표했다. 『어머니』 5·6월호에 특별기고 「강물을 지키는 어머니」를 썼다. 『우리교육』 8월호에 산문 「팥빙수 한 그릇과 쌀 한 되」를 발표했다. 『문학』 11월호에 동화 「우리들의 고향」을 발표했다. 『생활성서』 11월호에 산문 「침묵하는 하느님 앞에서」를 발표했다. 『나의 길 나의 삶』(동아일보사출판부 엮음, 동아일보사)에 「유랑걸식 끝에 교회문간방 정착」을 발표했다.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에는 「유랑걸식 끝에 교회문간방으로」로 실린다. 단편동화집 『짱구네 고추밭 소동』(웅진출판)을 펴냈다. 『벙어리 동찬이』(1985)에서 동화 7편을 빼고 다시 펴낸 것이다. 장편동화집 『팔푼돌이네 삼형제』(현암사)를 펴냈다. ‘남북 어린이가 함께 읽는 전래동화’ 씨리즈(사계절) 6∼10권을 이현주와 함께 엮었다. 인간사에서 펴냈던 단편동화집 『하느님의 눈물』을 산하에서 다시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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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육』 1월호에 산문 「남북의 아이들아, 밤새 잘 잤니?」를 발표했다. 『한국논단』 6월호에 「구릿빛 총탄이 날아오던 날」을 발표했다. 『녹색평론』 3·4월호에 산문 「제 오줌이 대중합니다」를 발표했다. 『복음과 상황』 9월호에 「우리들의 하나님」을, 『녹색평론』 11·12월호에 산문 「우리들의 하느님」을 발표했다. 제목은 달라도 같은 글이다.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사과나무밭 달님』 『바닷가 아이들』에서 가려 뽑아 권정생 선집 『무명저고리와 엄마(木綿のチョゴリとオンマ)』를 일본 소진샤(素人社)에서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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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정』 2월호에 「버려지고 있는 작은 것들」이란 글을 발표했다. 『계몽문화』 5·6월호에 산문 「쓰레기를 만드는 사람들」을 발표했다. 『해인』 7월호에 산문 「아름다운 우리 당산나무」를 발표했다. 『녹색평론』 7·8월호에 산문 「녹색을 찾는 길」을 발표했다. 『시와 사회』 9월호에 산문 「시를 잃어버린 아이들」을 발표했다. 『새가정』 9월호에 산문 「가난한 예수처럼 사는 길」을 발표했다. 『우리 어린이문학』에 평론 「아동문학이 외면했던 고난 속의 동심」을 발표했다. 그림책 『훨훨 날아간다』(김용철 그림, 국민서관)와 『눈이 되고 발이 되고』(백명식 그림, 국민서관)를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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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소식』 1월호에 동화 「아버지의 마음」을 발표했다. 『살림』 1월호에 산문 「십자가 대신 똥짐을」을 발표했다. 『살림』 3월호와 『녹색평론』 5·6월호에 산문 「세상은 죽기 아니면 살기인가」를 발표했다. 『생활성서』 8월호에 「엄마, 통일은 왜 해야 하나요?」를 발표했다. 『효선리 농부의 세상 사는 이야기』(김영원, 종로서적출판)에 「효선리 농부의 참된 농촌 이야기」를 썼다. 『우리들의 하느님』(1996)에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라는 맨 마지막 문장만 빼고 그대로 실렸다. 단편동화집 『무명저고리와 엄마』(다리)를 펴냈다.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산하)를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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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로 새싹회(회장 윤석중) 제정 제22회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권정생은 “우리 아동문학이 과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상을 주고받습니까. 아동문학만이라도 상을 없애야 합니다” 하고 수상을 거절했으나 문단 원로들이 안동까지 직접 가서 상을 주었다. 다음날 상금과 상패를 우편으로 되돌려 보냈다. 『새가정』 1월호에 산문 「하나님을 가두어버린 세상」을 발표했다. 『녹색평론』 5·6월호에 산문 「꽃을 꽃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이」를 발표했다. 『역사비평』 여름호에 수상 「영원히 부끄러울 전쟁」을 발표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 서평 「세상살이의 고통과 자유―전우익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를 발표했다. 이반 창작희곡집 『샛바람』(종로서적출판)에 해설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연극」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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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 1·2월호에 산문 「쥐주둥이 찧는 날」을 발표했다. 『(초등)우리교육』(이하 『우리교육』) 3월호에 산문 「아이들이 알몸으로 멱 감던 시절」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4월호에 동화 「까치골 다람쥐네」를 발표했다. 『대구예술』 5월호에 칼럼 「새소리가 드리던 시골 오솔길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한겨레시읽기운동연합회) 제1권 3호, 7월호에 시 「돌담이 나직나직나직한 집들이 있던 마을」을 발표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 산문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슬픔마저도」를 발표했다.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을 펴냈다. 인물이야기 『내가 살던 고향은』(웅진출판)을 펴냈다. 그림책 『강아지똥』(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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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동화』 가을호(창간호)에 동화 「물렁감」 「강 건너 마을 이야기」를 발표했다. 대구 매일신문 1997년 4월 16일자에 특별기고 「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를 발표했다. 이 글은 『녹색 평론』 5·6월호에도 실렸다. 『사람의 문학』 가을호에 시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1」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정축년 어느 날 일기」를 발표했다. 그림책 『오소리네 집 꽃밭』(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을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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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1월호에 「내 동화를 읽는 아이들과 어른들께」를 발표했다. 『야곱의 우물』 1998년 2월호부터 1999년 4월호까지 「밥데기 죽데기」를 연재했다. 강문필 에쎄이 『하느님, 개구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늘푸른소나무)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세상」을 썼다. 소설 『한티재 하늘 1, 2』(지식산업사)를 펴냈다. 단편동화집 『깜둥바가지 아줌마』(우리교육)를 펴냈다. 장편소년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나까무라 오사무 옮김)을 12월 일본 테라인꾸(てらいんく)에서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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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1월호에 산문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좋은 동화를」을 발표했다. 『작은이야기』 1월호에 산문 「경순이의 아름다운 한 그루 나무」를 발표했다. 『어린이문학』 연수회에서 가졌던 권정생 강연을 김회경이 정리한 글 「‘사람’으로 사는 삶」이 『어린이문학』 2월호에 실렸다. 『시와 동화』 3월호에 유년동화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를 발표했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4월호에 권정생과 이오덕이 전화통화한 것을 이오덕이 기록한 글 「이걸 어떡해요? ‘감자꽃’도 다 잃어버리게 되었으니……」가 실렸다. 5월호에 「무너미 다녀와서 쓴 글」, 9월호에 「따뜻한 세상을 기다리며」, 11월호에 「옛 어린이 노래 두 가지」를 발표했다. 『동화읽는어른』 7·8월호에 「생각을 깊게 하는 동화들」을 발표했다. 『샘』 겨울호에 산문 「지난여름은 참 더웠습니다」를 발표했다. 『시와 동화』 겨울호에 「목숨에 대한 사랑의 문학」을 발표했다. 단편동화집 『먹구렁이 기차』(우리교육)를 펴냈다. 장편동화 『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를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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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월호에 「우리 옛 어린이들」, 4월호에 「걱정스런 교실 안」, 6월호에 「그저께 시내 장터에서」, 9월호에 「쪽저고리와 잇저고리」, 11월호에 「말을 만드는 사람들」을 발표했다. 『아름다운 사람』 7월호에 산문 「만주댁 할머니」를 발표했다. 『샘』 여름호에 「밤이면 빨갛게 높이 빛나는 십자가가 진정 교회의 빛인가」를 발표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을 발표했다. 『시와 동화』 겨울호에 동화 「깔따구 아기 메기들」을 발표했다. 『마음의 풍경』(이해인 외, 이레)에 산문 「그때 참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를 발표했다. 단편동화집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웅진닷컴)와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를 펴냈다. 『몽실 언니』를 일본 테라인꾸에서 재일교포 동화작가인 변기자(卞記子)가 번역해서 펴냈다. 그림책 『강아지똥』(변기자 옮김, 헤이본샤平凡社)을 일본에서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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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그림동화 「강아지똥」(정승각 원화)을 무대에서 공연하였다. ‘예술의 전당’과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 주최했다. 『어린이문학』 1월호에 동시 「물총새」를 발표했다. 『샘』 봄호에 「교회와 예배」를 발표했다. 『녹색평론』 5·6월호에 산문 「분단 50년의 양심」을 발표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 산문 「제발 그만 죽이십시오」를 발표했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월호에 「나리꽃」, 4월호에 「헬렌켈러」, 6월호에 「김경희 선생님께」, 9월호에 「밥데기네 할머니」, 10월호에 「미국에도 눈물이 있었는가」, 11월호에 「오니와 도깨비」를 발표했다. 『작은이야기』 4월호에 산문 「새야 새야」, 5월호에 「자유로운 꼴찌가 되기 위하여」, 6월호에 「민들레 꽃씨라 불러주세요」, 7월호에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사람들」, 8월호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발표했다. 동화집 『비나리 달이네 집』(낮은산)을 펴냈다. 그림책 『황소 아저씨』(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와 『아기 너구리네 봄맞이』(송진헌 그림, 길벗어린이)를 펴냈다. 그림책 『오소리네 집 꽃밭』(변기자 옮김, 헤이본샤)을 일본에서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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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강아지똥」을 한일 양국어로 낭송하여 CD로 만들었다. CD 제목은 ‘피아노와 낭독을 위한 강아지똥’으로 일본어 번역은 변기자가 했다. 녹음은 성우 김세원(金世媛)과 일본의 인기배우이자 가수인 사이또 유끼(齋藤由貴)가 맡았다.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피아노곡은 일본인 작곡가 테라시마 리꾸야(寺嶋陸也)가 작곡하고 재일교포 피아니스트 박구령(朴久玲)이 연주했다. 『민들레교회이야기』 제510호(3. 3)에 시 「임오년의 기도」를 발표했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월호에 「잎싹이의 눈물」, 4월호에 「걱정스런 글쓰기회」, 6월호에 「용들의 전쟁」, 9월호에 「왜 나는 웃는가」, 11월호에 「평화를 지키는 일」을 발표했다. 『어린이문학』 5월호에 산문 「함께 살아갈 어린이문학」, 8월호에 산문 「우리 삶과 함께하는 동화」, 12월호에 서평 「소중한 그림책 한 권」을 발표했다. 장편동화 『슬픈 나막신』(우리교육)을 펴냈다. 이 책은 1975년에 펴낸 『꽃님과 아기양들』의 제목을 바꾸고, 등장인물의 이름을 처음의 일본이름으로 고쳐 펴낸 것이다. 『권정생 이야기 1, 2』(한걸음)를 펴냈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를 다시 펴낸 것이다. 창비아동문고 200번 기념 ‘오늘의 동화 선집 1’(『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창비)에 동화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밤 다섯 개」를 수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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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 권정생과 이오덕이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집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한길사)가 출판되었으나 저작권 문제로 책은 나온 지 며칠 만에 판매 중지되었다. 「강아지똥」이 클레이 애니메이션(점토를 이용한 만화영화)으로 나왔다. (주)아이타스카 스튜디오에서 만들었고 감독·각본은 권오성이 했다. 제작비 10억 원을 들여 만든 30분짜리 작품이다. 영화에 사용된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OST 음반은 따로 발매되었다. 토오꾜오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파일럿부문에서 ‘Doggy Poo’라는 영어이름으로 출품하여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일직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며 「안동 시민 여러분께」란 글을 썼다. 이 글은 8월 1일에 안동가톨릭농민회 강성중의 홈페이지(http://www.seokmins.pe.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월호에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다」, 4월호에 「우리는 결국 비겁해지고 말았다」, 6월호에 「검정소 누렁소」, 7월호에 「최교진 선생님께」를 발표했다. 『우리교육』 4월호에 산문 「초록색 벙어리저금통의 추억에서」를 발표했다. 『어린이문학』 4월호와 『풍경소리』 5월호에 「이창동 문화부장관님이 동화 같은 세상을 만들어줄까?」를 발표했다. 『녹색평론』 5·6월호에 산문 「백성들의 평화」를 발표했다. 『창비어린이』 가을호에 동시 「알리」 「바그다드」 「하느님」을 발표했다. 『어린이문학』 9월호에 「생전에 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하며」를 발표했다. 1993년에 나왔던 그림책 『훨훨 날아간다』가 『훨훨 간다』(국민서관)로 새로 나왔다. 김용철이 그림을 새로 그렸고 권정생은 그림에 맞춰 글을 다듬었다. 그림책 『또야와 세발자전거』(뱅상 그림, 효리원)를 펴냈다. 『몽실 언니』가 대만에서 출간되었다. 문화관광부의 ‘우수도서 번역출판 지원사업’에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가 선정되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림책 『황소 아저씨』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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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3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 때 ‘북녁 용천에 새 희망을’ 범국민 캠페인에 성금 10만원을 냈다. (한겨레신문 4월 30일자)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 12월 4일부터 31일까지 장편소년소설 『몽실 언니』를 연극으로 공연했다. 권정생은 『몽실 언니』의 진짜 재미가 뭔지 생각해달라며 작품을 맡겼다. 원고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원고료를 주고 싶으면 권정생 이름으로 하지 말고 극단 이름으로 북한어린이돕기에 성금을 내달라고 했다. 『녹색평론』 1·2월호에 「새야 새야」를 발표했다. 한겨레신문 3월 4일자에 칼럼 「신음하는 국민에게 꿈을」을 발표했다. 『녹색평론』 7·8월호에 「골프장 건설 반대 깃발이 내려지던 날」을 발표했다. 『작은 책』 8월호에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를 발표했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9월호에 「이오덕 선생님 1주기를 맞아 들려주고 싶은 옛날이야기 하나」를 썼다. 『개구리랑 같이 학교로 갔다』(밀양 상동초등학교 어린이 시 모음, 보리)의 서문 「자연이 키운 아이들의 시」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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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유언장을 미리 썼다. 최완택 민들레교회 목사, 정호경 신부, 박연철 변호사에게 인세 관리를 부탁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8월 5일 서울 레이디스싱어즈와 우쯔노미야 레이디싱어즈의 조인트 콘서트에 축사를 보냈다. 권정생은 축사에서, 1944년 여름 공습이 없는 달밤에 토오꾜오 시부야 하따가야 혼마찌 3)오메 빈터에서 「첫째별 봤다(一番星みつけた)」를 부르며 놀던 이야기를 쓰면서 “이번 여름에 일본과 한국의 음악인들이 작은 음악회를 함께 가진다니 60년 전 달밤에 일본아이 조선아이 함께 어울려 놀던 생각이 떠올랐”다며 “비록 1회 만으로 끝나는 연주회지만 이 소박한 음악이 세상의 빛이 되어 평화로 이어지기를” 빈다고 했다. ‘일제 징용 조선인 마을 우토로 살리기’ 캠페인에 10만원을 냈다. (한겨레신문 8월 24일자) 『동화읽는어른』 5월호에 축하글 「어린이도서연구회 25주년에」를 썼다. 『녹색평론』 7·8월호에 「아홉 살 해방의 기억들」을 발표했다. 『시와 동화』 가을호에 동화 「엄마하고 수진이의 일곱 살」을 발표했다. 『민들레교회이야기』 제592호(11. 20)에 ‘명시 3편’(「한 인간과 하늘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기도」 「가을 하늘」)을 발표했다. 어린이잡지 『개똥이네 놀이터』 12월호(창간호)부터 2007년 2월호까지 모두 15회 동안 동화 「랑랑별 때때롱」을 연재했다. 『콩알 하나에 무엇이 들었을까』(이현주 외, 봄나무)에 서문 「고마운 목숨들 이야기」를 썼다. 이오덕 시집 『무너미 마을 느티나무 아래서』(한길사)에 서문 「이오덕 할아버지의 노래」를 썼다. 『어린이병원에서 만난 작은 천사들』(미야모또 마사후미 글, 황소연 옮김, 한울림어린이)에 추천의 글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를 썼다. 1월에 『밥데기 죽데기』가 일본에서 『귀신의 똥(おばけのウンチ)』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림책 『아기너구리네 봄맞이』와 장편동화 『슬픈 나막신』이 일본에서 번역되었다. 글모음 『죽을 먹어도』(아리랑나라)를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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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현장미술가 최병수에게 『목수, 화가에게 말걸다』(김진송·최병수, 현실문화연구)를 받고 답장 편지 「병수는 광대다」를 써 보냈다. 최병수가 그 편지를 출간될 책에 넣어도 되겠냐고 하자 “보탬이 된다면 편지가 아니라 다른 것도 얼마든지 해줘야지”했는데 2007년 6월에 출간된 『병수는 광대다―얼음 같은 세상, 마음을 녹이는 현장예술가 최병수』(박기범 외, 현실문화연구)를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 때 걸렸던 권정생 얼굴이 최병수 작품이다.
『문학동네』 가을호에 「토종 씨앗의 자리」를 썼다. 동화작가 김진경이 『문학동네』 여름호에 기고한 ‘권두에쎄이’에서 “콩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지 않았다”고 쓴 대목과 관련하여 다른 의견을 써서 보낸 것이다. 씨앗장수들의 기술에 꼼짝없이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농민들 처지를 들춰내면서 식량을 얻기 위한 농사가 돈을 얻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일로 전락하고만 현실을 아프게 꼬집었다. 그림책 『길 아저씨 손 아저씨』(김용철 그림, 국민서관)를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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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오후 6시 10분에 정호경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글을 썼다.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5월 17일 오후 2시 17분 대구 가톨릭대학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림책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이담 그림, 보리)가 출간되었다. 『몽실 언니』가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멕시코에서 출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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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추모 1주기에 맞춰 ‘재단법인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개관되었다. 권정생이 유언장에 사후를 부탁한 최완택 목사와 정호경 신부, 박연철 변호사가 논의를 거쳐 재단을 설립해 유산을 관리하고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재단의 대표이사는 최완택 목사, 사무처장은 안상학 시인이 맡았다. 창립 이사는 최완택 목사와 박연철 변호사, 강정규 아동문학가, 이현주 목사, 최윤환씨 등 5명이다. 재단 사무실에는 고인이 남긴 동화책과 만년에 투석을 한 의료기구 등 유품을 전시한 전시실이 있다. 『권정생 이야기 2―밭 한 뙈기』(아리랑나라)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권정생의 시, 동화, 동극, 산문 들이 실렸다. 구전동요 그림책 『꼬부랑 할머니』(강우근 그림, 한울림어린이)가 출간되었다. 동화 『랑랑별 때때롱』(정승희 그림, 보리)이 출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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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재단법인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인가를 마치고 출발을 알리는 현판식을 했다. 옛이야기 『닷 발 늘어져라』, 『똑똑한 양반』(김용철 그림, 한겨레아이들)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03년 ‘남북 어린이들이 함께 읽는 통일문고’ 사업으로 쓴 것인데,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사업이 중단되어 출간되지 못했다. 권정생 추모 2주기에 맞춰 남쪽 단독으로 출간했다. 『아기 소나무』(김세현 그림, 산하), 『학교놀이』(윤정주 그림), 『아기 늑대 세 남매』(권문희 그림), 『아름다운 까마귀 나라』(김용철 그림)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91년 출판된 『하느님의 눈물』(산하)을 4권으로 나눈 것이다. 저학년 아이들을 위해 글과 그림을 새로 편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