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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0년 5월 24일 일반법회
> 제목: 팔정도 (八正道) I – 정견 (正見)
> 김제원 교무님 설법
> 타이핑: 백도원
반갑습니다. 오늘이 기도 8일 째입니다.
지난주에는 제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원을 다 모아 버리면 총원(總願)이라고 했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일원상서원(一圓相誓願)이고, 두 가지로 표현하면, 성불제중(成佛濟衆)이고, 네 가지로 표현하면 사홍서원(四弘誓願)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인간은 욕심으로만 동물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서원을 가지고 사람으로써의 가치를 바라고, 성불을 하고 성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이익을 주면서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삶이고, 그것이 바로 성불제중이고, 그것이 알고 보면 가장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보배 중의 보배이다.
1. 석가모니의 일생
부처님께서는 세세생생 인연을 짓기를 욕심이나 정으로만 짓는 게 아니라 교화의 인연을 지었습니다. 부처님은 지은 복이 있어서 2559년 전 카빌라국의 가빌라성에서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 (도솔내의; 兜率來儀). 복이 있으셨고 다 갖추셨습니다. 그래서 축하를 받고, 왕자로서 무술도 공부하고, 학문도 공부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큰 제왕이 되던가 아니면 출가해서 큰 사문이 된다. 그러니 아버지가, 출가를 못하게 하도록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해서 외부 접촉을 끊어 버리고 제왕으로서의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키고, 결혼도 시키고, 또 여러 가지 즐거움도 맛보게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마음 속에 항상 전생에 닦았던 게 있죠. 대종사님도 정산종사님도 그러셨죠. 어렸을 때 항상 마음속에 기도하는 마음이나 진리를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정산종사님은 마음이 붕새가 새장에 갇힌 것과 같다고 표현하셨었죠.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도, 아버지 왕이 환경을 조성 했습니다마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하죠. 동서남북 성 밖을 나가서 생로병사를 목격하게 됩니다. 성 밖을 갈 때도, 이승만 대통령이 시내에 나갔을 때 가격도 조정하고 했듯이, 왕이 사람들의 안 좋은 모습들을 제거하고 그랬다고 그래요. 그래도 부처님은 슬쩍 빠져나가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목격하게 됩니다.
노병사(老病死) 라는 것은 고통이라는 겁니다. 늙어가는(老) 고통. 늙어가면 빳빳하는 몸이 서서히 굽어집니다. 병(病)은 고통 중에 최고라고 합니다. 병고가 지옥고라고 그래요. 때로는 죽여달라고 그럽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 다음 사(死)입니다. 모든 인연과 이별해야 하고, 그 동안에 자기가 쌓았던 거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고통도 있습니다. 이 고통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에 유성출가 (踰城出家), 성을 넘는다는 말입니다. 시자를 데리고 성을 넘어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아버지 모르게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나중에 같이 따라 왔던 사람에게 말이랑 다 주고, 그리고 길을 가던 사람에게 왕자로서 입었던 금으로 장식된 옷을 주고 그대로 수도인으로서 살게 됩니다.
불교 이전에 많은 수행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개로 나누자면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입니다. 인류 역사가 이 두 가지를 왔다 갔다 했어요. 쾌락주의로 가다보니까 이거 아닌 거 같다 해서 금욕 고행주의로 가고, 금욕 고행주의로 갔다가 이것도 아닌 거 같다 해서 다시 쾌락주의로 가고. 지금도 인도 자이나교 같은 데서는 금욕 고행주의 수행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걸 해봤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봤죠. 쾌락주의도 해보고 선정주의도 들어가 봤습니다. 그런데 육년간 그 수행을 하시면서 깨친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면 중도다. 쾌락주의도 아니고 금욕주의도 아니다. 그래서 젊은 수자타라는 여인에게 우유죽 한 그릇을 얻어먹었는데, 같이 수행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불가촉 천민과 접촉할 수 있으며, 수행자가 우유를 먹을 수 있냐 하고 너는 배신자라고 하며 떠나버립니다. 부처님은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다시 기력을 회복해서, 보리수 아래에서 (수하항마; 樹下降魔) 내가 확실하게 깨닫기 전까지는 이 자리를 뜨지 않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생사의 여러 이야기도 있지요. 인욕선인이라고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왕가에 태어나셨고, 아버지가 반대했어도, 왕 자리, 이쁜 마누라 등 모든 쾌락을 다 던져 버리고 출가하신 것입니다. 전생부터 닦은 바 있어서. 그 생에 수행에 정진한 것도 전생에 닦은바 행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깨달음을 먼저 누구와 함께 할까 하다가, 녹야원에 찾아갔지요 (녹야전법; 鹿園轉法). 내가 인도에 가보니까, 수자타에게 우유죽을 받은 곳에는 탑이 세워져 있고, 녹야원이라는데가 별로 멀지 않아요. 그런데 녹야원에 가니까 교진여 등은 ‘저기 석가 배신자 온다 우리 모른 체 하자’ 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피골은 상접했지만 깨달은 이후 모든 것이 광채가 나게 바뀌어 버려서, 이 사람들이 모른 채 하려다가 알아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법문을 청하게 됩니다.
2. 사제법문 (고집멸도; 苦集滅道)
그때 했던 법문이 뭐냐, 사제법문(四諦法門)이었습니다. 사제 (諦; 변하지 않는 진리) 는 네 가지 진리를 말합니다. “사제, 팔정도, 십이인연” 이라 하는데, 사제 안에 팔정도 십이인연이 다 들어 있습니다.
(1) 고(苦)
사제의 첫째는 뭐냐. ‘고(苦)’ 다. 현실을 보니까 고통이더라. 지금 뭐 사람들이 안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이민 가고 싶다.. 그게 다 고죠. 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 고이고 하나는 인위적 고이다. 자연적 고라는 것은 생로병사 (生老病死)의 고통이다. 어쩔 수 없는 고통이지요. 고가 힘드시지요? ‘生’ 애기 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태어나는 아이도 힘들어요. 옛날에는 다시 저 신발을 신을 까 못 신을까 하고 들어갔다고 하잖아요. 아이는 엄마보다 고통이 열 배가 심하데요. ‘老’ 나이가 인제 4-50 넘어가고 5-60 넘어가면 젊은 애들이 부럽지. 저 때가 좋았지 하지요. 왜 부러워해요? 내가 고통스럽다 그 소리죠. 옛날 같으면 뛰어갔을 텐데. 저거 옛날 같으면 할 텐데.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나. 머리카락은 가늘어지고 빠지고 하얘지고, 피부는 탄력이 없어지고, 기억력은 없어지네. ‘病’ 그래도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서 낫잖아요.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20세인 때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30대에 다 갔어요. 영조 이런 사람들이나 오래 살았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병으로도 그랬습니다. 유럽은 흑사병이 휩쓸어서 1/3이 죽기도 했고, 조선도 전염병이 돌면 전 인구의 10~20%씩 죽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고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쪽에 앉아 계신 분들은 약봉지 하나씩 있지? 혈압약, 고지혈, 관절약, 당뇨 여러 가지.. 보톡스 필라. 그래 봤자 목주름은 어떻게 못하고, 기력이 없는 건 어떻게 하지 못해요. 그런데 그 두려웠던 때가 온다. ‘死’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건 순서가 없죠. 자식이 먼저 가기도 하고, 아이가 아직 어린데 부모가 일찍 가버리기도 하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적 고다. 자연적 고의 해결은 뭐냐. 받아들이는 겁니다. 물론 인위적 노력에 의해서 조정할 수 있지만, 이치이고 순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인위적 고통이 있어요. 첫째는 애별이고(愛別離苦)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연인과 헤어짐이요, 나이든 사람들은 인연과의 헤어짐입니다. 또는 가족 친척과의 헤어짐 입니다. 그 괴로움은 참 힘들죠. 그 괴로움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다음에 원중회고(怨憎會苦)다 그럽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게 보통이다. 회사에, 집안에 동서간에, 친구간에, 꼭 꼴불견 하나씩 잇습니다. 어디나 있지요? 본인은 문제아인줄 몰라요. 문제안줄 알면 그건 문제아가 아닙니다. 문제안줄 모르니까 문제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고 같이 일을 해야 하고, 때로는 그 고통이 괴롭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가면 세상엔 그렇게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죠. 젊을 때는 회사를 바꾸던가 사람을 바꾸던가 마누라를 바꾸던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세상이라는 것은 이렇게 나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면서 받아들이게 되죠. 그 다음에 구부득고(求不得苦)라고 그럽니다. 구하는데 얻어지지가 않아. 젊을 때는 본인이 대통령이 된다. 장군이 된다. 큰 회장의 사장이 되고 연예인이 된다며 큰 소리 빵빵 쳐요. 더구나 그 부모는 더 헤매요 자기 자식이 다 천재인줄 알아. 천만의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얻어지냐. 그 꿈이 점점 짜부라들잖아요. 대통령 된다 했다가 뭐 된다 했다가 뭐 된다 했다가… 시험 보는 사람도 고시 본다 했다가 7급 본다 했다가 9급 본다 했다가 어디 기간제라도 들어간다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냐 이 말이여. 자기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 명일 꺼 같아.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거 같아.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걸 그대로 취미나 활동이나 직업이나 일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구부득고란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온성고(五蘊盛苦)다 그럽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을 말합니다. 즉 색(色)은 우리의 몸이요 형상 있는 것이며, 수상행식은 우리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오온이 치성한 고통이다. 계속 색은 찬란하고 예쁘고 편안하고 즐겁고 부드러운걸 원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계속 충족을 원하고, 쾌락을 원하고, 편안함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갈애라고 표현하죠. 갈증, 욕탐, 욕망 이렇게 표현합니다. 끝이 없어요. 대학만 들어가봐라. 취직만 해봐라. 석사만 따봐라. 박사만 따봐라. 교수만 돼바라. 총장만 돼봐라. 장관만 돼봐라. 계속 요구합니다. 끝없는 갈증이요,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결국 그 갈증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이 고를 어떻게 잊어버릴까 하다가, 쾌락주의로 가서 잊어버리고 싶고, 또는 금욕주의로 가서 잊어버리고 싶은 거에요.
(2) 집(集)
그런데 그 원인은 뭐냐? 그 고의 원인은 집이더라. 집은 갈애. 탐진치, 삼독오욕이더라. 집은 꽉 뭉쳐있는걸 집이라고 합니다. 업이 많은 사람은 기운을 봐도 알아요. 기운이 욕심 기운으로 꽉 뭉쳐있어. 교당에 와도 그런 사람은 아주 힘들어요. 신기하게 총알을 막아내는 방패 같아. 법문이 들어가면 탁탁 튕겨내버려. 그래서 계문을 잘 어기고 계문을 우습게 알고, 자기라는 것에 똘똘 뭉쳐 있고. 욕망으로 똘똘 뭉쳐 있다. 고와 집은 비례합니다. 똘똘 뭉칠수록 고통스럽습니다. 또 고와 집과 번뇌는 다 비례합니다. 욕심이 많을 수록 머리가 복잡하고 번뇌가 많습니다. 머리가 터질라고 그러죠. 좀더 들어가보면 욕심만이 아니라 무명이더라. 무명은 본래 있는 게 아니라 업이 지혜를 탁 막아 버리는 게 무명입니다. 본래 우리는 무명이 아니에요. 본래 우리는 일원상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요. 마치 구름이 해를 가린 것 같이 가려버리니까 무명이 되는 거에요.
(3) 멸(滅)
그래서 이것을 ‘멸’! 없애버리자. 어떻게 없애냐. 그것은 바로 고와 낙이 없는 극락자리로 들어가면 된다. 대 적멸공 자리, 멸의 자리. 진경에 합일한 자리, 이 자리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고도 없고 낙도 없는게 아니냐. 많은 사람들은 낙을 향해서 가요. 고는 싫어하면서.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진짜 멸자리는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그것을 대종사님께서는 유무를 초월한 자리라고 그랬습니다.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진경의, 자리 극락의 자리에 합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4) 도(道)
그 것이 마지막 도, 방법입니다. 어릴 적에 일기를 쓰면 다 ‘다음엔 잘해야겠다’ 입니다. 일생 다음엔 더 잘하겠데. 그런데 이 도제라는건 뭐냐면 HOW! 어떻게! 가 나와있는 거에요. 이게 불교입니다. 어떻게! 방법이 뭐냐! 마음 공부를 어떻게 할거냐. 어떻게 도를 깨칠거냐. 어떻게 진급할거냐. 어떻게 행복할거냐. 그냥 믿는게 아니고 이렇게! 하고 여덟까지로 표현해 주신게 팔정도 입니다. 원불교는 이것을 삼학이라고 표현합니다. 똑 같습니다. 즉, 수양, 연구, 취사요, 계정혜 입니다. 오늘은 이 내용을 다 못해드릴 것 같고, 하는데 까지 하고 내일 이어서 하겠습니다.
3. 팔정도 (八正道)
(1) 정견(正見)
① 고집멸도를 정확히 아는 것
거기 회보에 나와 있다시피, 제일 첫째가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첫째가 제가 아까 설명드린 고집멸도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는 것이죠. 정견을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다가 말거든요. 계속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가 막히게 부처님은 먼저 앎으로 출발합니다. 바르게 알아라. 바르게 봐라. 대종사님은 우리 사대강령에 정각정행이라고 하셨죠. 정각이 정견이지요. 그래서 제가 아까 기본적으로 정견에 대한 설명을 한 겁니다. 정견이라는 것은 먼저 바르게 본다는 거에요. 사실 그대로를 본다는 겁니다. 사실적 도덕. 사실 그대로. 빨간 건 빨간 것이고, 있는 건 있는 것이고, 없는 건 없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진관이 선 것이요. 가치관이 선 것이요. 인생관이 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보지요?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에 의해서 봐요. 똑 같은 것 보여주는데 다 달리 봐. 오늘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려도 다 달리 들어. 자기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서 걸러버려. 자기 안경으로 다시 걸러 버리고. 그 다음 중생은 또 자기의 이해관계에 딱 끌려 버립니다. 나는 그냥 말했는데 듣는 사람은 오늘 나 들으라고 그랬네 하고 꼴아 있어. 그대로 들어야 하거든. 그리고 또 중생은 저 사람이 나하고 가깝냐 안 가깝냐, 나를 좋아하느냐 안 좋아 하느냐 하는 친소로 판단합니다. 자기의 지식과 경험, 자기의 이해 관계, 자기와 가깝냐 하는 친소 관계에 의해서 판단을 하더라는 거죠. 회의를 해보면 신기하죠. 내 맘에 드는 사람이 의견을 내면, 안 맞는 내용이라도 찬성에 손들라면 들어버려. 그런데 나한테 서운하게 했던 사람이면 그 말이 맞아도 손이 안 올라가. 그것은 정견이 아닙니다. 올라가던가요? 그거 신기해요. 보세요. A라는 사람이 하나 잘못했다고 칩시다. 하나 잘 못 한 거지. 그런데 왜 딱 이렇게 색칠해 버려? 왜 부분을 전체로 보냐고? 이게 정견이 아니더라. 이 하나를 그대로 보면 돼. 빨간색을 빨간색이라고 보면 돼. 그 정견 중에 고의 원인이 집이더라. 그 해결은 술 먹는다고 해결 되는 거 아니고, 놀러간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고, 돈 번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고, 고행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고, 쾌락 쫓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고. 뭐다? 멸이더라! 극락자리에 들어가야 멸이 되더라. 그러면 쉽게 들어가 지냐. 여덟까지 수행 방법을 통해서 멸해 지는데, 그 첫째가 정견이더라.
불교는 별 생각 없고 감정적인 믿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이성에 바탕해서 딱 정확히 알고 출발하자. 뭣이여? 우리의 고통의 원인은 뭐여? 집착에 의한 것이다. 그 안에 여러분이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참 신기해. 놔버리면 세상 그렇게 편할 것을 그렇게 잡고 있으면서, 병 속에서 쥔 주먹을 빼지 못하지요. 그것을 놔버리면 될 것을 안빠진다고 안빠진다고만 그러죠. 그게 욕망에 의한 집착이라는 거에요.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살다 보면 이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는 것인데, 참 놓고 싶지 않거든요. 나는 이걸 놓기 싫어서 삼일 간 날을 새본 사람이에요. 내가 시험 볼 때도 날 안 새고, 대학 갈 때도 날 안 샌 사람인데, 출가할 때 삼일 간 내가 이걸 못 놔서 손을 못 뺐네. 내가 이 공부를 해보니까 너무 좋아. 인과. 그래. 내가 지은대로 받는구나. 그럼 이번 생에 뭘 지을까. 이번 생이 끝이 아니야? 그러면 나는 이왕이면 죽을 때 후회되지 않고 허망하지 않도록 하자. 죽을 때 후회스러우면 얼마나 분하겠냐. 죽을 때 후회스럽지 않도록 인과에 바탕 해서 영생을 잘사는 걸 해보자. 수양도 재밌고, 이 법을 공부하는 것도 재밌고, 그리고 이왕이면 내가 주위에 은혜를 베풀고 살면 나도 뿌듯하고 행복하고 좋아. 그래서 출가해서 한번 살아볼까 하는데, 그것은 좋기는 한데… 마음이 “나는?” 그래. 내 자유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내 부모님은? 집안 형제들에게 도움은 줄 수 있나? 나도 놀고 싶은 것도 있고, 나도 돈의 자유도 좀 있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음향기구도 사고 싶고..저는 고등학교 때 제산 1호가 음향기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강남에 가서 2억짜리 독일제 음향기구를 들어봤거든요. 환장하겠드만. 들어봤어요? 나는 들어봤어요. 가게에서 나오기가 싫더만. 제가 귀가 좀 먹었어요. 어머니가 TV를 보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하도 보니까 아버지가 TV를 팔아버렸어요. 내가 옆집에 TV를 보러 갔다가 우리 동네 선배가 장난으로 탁 때렸는데 고막이 터져버린 거에요. 그 뒤부터 제가 잘 안 들려요. 고등학교 때는 옆 친구가 뭐라고 하면 응응응 하고 못 알아들어도 알아듣는 척 해버렸어요. 그런데 음악 소리는 제가 다 들어요. 조금만 문제 있으면 다 알아요. 그렇게 민감합니다. 그래서 제가 출가를 하려고 했더니 세상에 그러면 음악기구도 못 살 것 같고, 세계 여행도 못할 것 같고, 집안에 돈도 못줄 것 같고. 못 놓겠더라구요. 아침에 선은 재밌긴 한데 푹 자는 재미도 있고. 제가 잘 노는 사람이에요. 운동하거나 잡기하는 것은 제가 다른 사람보다 열 배가 빨라요. 교무 안 했으면 제가 뭘 할지 다 보여요. 엊그제도 우리 어머니가 니가 교무하길 참 잘했다 그러세요. ㅎㅎ 잠이 안 와 삼 일간. 내가 이걸 죽어도 못 놓겠더라구. 그런데 신기한 것이 탁 놔버리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해 버려. 하아~ 내가 나중에 알았네. 정신수양에 보니까 요지의 핵심은 욕심이에요. 욕심을 못 놓기 때문에 정신수양이 안되는 거에요. 욕심 때문에 정신수양 안하고, 욕심 때문에 머리 아프고, 욕심 때문에 진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에요. 제가 원래 그 수양의 진경자리를 들어가서 군대 가서도 계속 선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래도 못 놓겠더라구. 그런데 확 놓고 나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할 뿐만 아니라 선이 자동으로 진경에 들어가 버려. 아하 이런 거구나.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얻어진다고 하더니 그것이 이것이구나. 이거는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안다고 되는게 아니야. 성불은 체험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성불이에요. 이해한 건 성불 아니에요. 초견성이나 그럴까.
② 사견을 버리는 것
근데, 이걸 또 이렇게도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거꾸로 아는 것이 있다. 광주 식당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밥을 공짜로 얻어먹고 온 적이 있어요. 식당에 갔더니 액자에 “常樂我淨 (항상상, 즐거울낙, 나아, 깨끗할정)” 라고 써 있어. 내가 주인아주머니한테 “저거 뭐에요?” 라고 누가 쓴 것인지 물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나도 저거 받아놓고 뭔 글씬지 모르겠소” 그래요. “하하. 그러면 이거 내가 알려드릴까요?” 했더니 “알려만 주면 내가 밥 공짜로 드리지” 그래요. “아따 오늘 밥 공짜로 얻어먹게 생겼네.” 밥 공짜로 얻어먹고 왔어요. 정견(正見)을 못한 건 사견(邪見)이지요. 천도 법문에 사견을 정견으로 바꾸라는 법문이 있어요. 죽어서도 제일 골치 아픈 게 사견이에요. 무거운 업도 지지만 사견도 그렇지요. 사견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정견과 사견은 천지 차입니다.
중생의 첫째 사견은 뭐냐. 상 (常)입니다. 항상상자지요. 뭣이 항상 한다는 거에요? 이 육신의 나가 항상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딱 숨 끝나면 바로 그 다음날 콧구명 귓구멍에다 솜 찡기구요. 바로 그 다음 날 화구 아니면 땅 속에 들어갑니다. 저는 화장이니까 화구에 들어가지요. 육신이 항상 있는 걸로 알아요. 그러니까 아이 태어나면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사실은 태어났지만 태어난 바가 없이 잠깐 나온 것일 뿐이에요. 육신을 常으로 아느냐 성품을 常으로 아느냐. 형상 있는 것은 전부 무상입니다. 일원상 서원문에 “무상(無常)으로 보면” 이라고 나오죠. 항상하지 않고 변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진짜 항상하는 것이 있지요? 우리 성품 자리이죠. 불생불멸하는 자리요. 그게 항상하는 자리이죠. 유상(有常)자리. 상은 유상과 무상이 있는데, 중생은 성품 유상은 알지도 못하고, 육신을 유상으로 알죠.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죠. 날마다 닦아주고 먹어주고, 날마다 아프면 병원 가고, 좀 좋은 거 먹을라고 건강식품 찾고, 명절이면 건강식품 선물하느라 바쁘고. 그런데 정말 항상한가? 조금 더 연장할 뿐이지 금방 화구 속에 들어가죠. 곧 들어갈 사람들 여기 있네요. 하하. 제 어릴 적 기억에 시골에 항상 골골대는 아픈 양반이 있었어요. 그런데 건강한 사람이 먼저 죽어버렸더라구요. 아하 이런 거구나. 관리하면 오래 살아요. 관리 안 하는 사람이 갑자기 가더라구요. 진짜 항상하는 것은 성품 자리이지 육신이라는 것은 항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이 드셔보니까 알지 않아요? 솔직히 그렇잖아요. 머리카락에 힘도 없잖아. 이걸 갈아가지고 와야지. 진짜 항상하는 것은 성품이고, 또 서원이다. 서원은 죽어서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수행한 마음의 힘 이것도 가지고 가죠. 그런데 가지고 가는 서원이나 마음의 힘은 챙기지도 않고, 가져가지도 못할 놈의 육신에다만 온갖 공을 들이고 있으니, 이것이 사견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낙 (樂) 입니다. 중생은 무엇을 낙으로 취하냐.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오욕락과 인간락. 중생은 사견 중의 또 하나는 이것이 진짜 낙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락이 다섯 가지이더라. 제일 첫째 낙이 뒤지게 퍼먹는 거에요. 맛있게 먹는거 (식; 食). 그 다음에 푹 자는거 (수; 睡), 그 다음에 나이가 좀 먹어서 열 대여섯 살 넘어가면 놀고 즐기는 것. (색; 色). 지금 이 세상에 나와있는 문학작품, 영화, 소설 보세요. 거의 다 색에 대한 내용이지요. 남녀의 사랑. 여기다 에너지를 다 쓰죠. 그 다음에 연애를 하려고 했더니 돈이 있어야 하죠 (재; 財). 어제도 열한 시 넘어서 상담 전화가 왔는데, 어떤 여자하고 연애를 하는데 차를 사달라고 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짤라 버리라고 했어요. 물론 유형의 세계에서 돈보다 가치 있는 거 있어요? 유형의 세계에서는 최고가 돈이에요. 우리 학년에 김도연 교무라고 있어요. 그 사람 아버지가 부산에서 자동차 운전학원을 하셨고, 형님은 의대 나와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자기도 가톨릭 의대를 나왔어요. 아버지가 아들이 졸업하면 병원을 차려주려고 준비를 다 해뒀어. 그런데 군의관 가서 대산종사하고 인연이 되어서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상사원에 대상종사님 뵈러 다니더니 출가를 했네. 출가해서 우리 학년 3학년으로 들어왔어. 부자집 아들이라 돈 무서운 줄 몰랐어. 서울대 약대 나온 여자하고 결혼까지 했어. 출가를 해버리니까 기숙사 들어오면 저녁에 못나가게 하고 전화도 없지요. 반백년 기념관 앞에 공중전화 하나 있는데, 거기서 맨날 마누라한테 전화해. 내가 옆에 있다가 골려먹지요. “뭐라구 그래?”하면, “마누라가 죽겄다고 그런다.” 합니다. 아버지는 성질나서 한 달에 딱 60만원만 줘. 그리고 부인은 시어머니 모시고 자식 키우고 생활하고 있고. 그리고 나한테 하는 말이 “제원이 내가 새삼 느끼는 것이 있어. 내가 돈의 위력에 대해서 몰랐었어.” 자기는 돈 없어 본 적이 없었는데 출가하고 쫄쫄이를 타보니까, 현실 세계에서 가장 위력 있는 게 돈 이더라. 도로에서 식당에서 손님들 돈 좀 낸다고 무시 받아 가면서 고개 숙이고. 돈 좀 낸다고 얼마나 자기 하인 부리듯 하는지 몰라. 음식점에서도 보면, 돈 낸 값 한다고 무시하고 다시 가져오라고 하는 거 보면 사람들 참말로.. 돈의 위력 앞에 꼼짝 못하고 고개 숙이잖아.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내가 고통을 없애고 즐겁게 살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돈을 향해 하게 되는 거지요.
이게 오욕락이죠. 식수(食睡), 그 다음 재색(財色). 청년 중 한 명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명예를 추구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니가 젊어서 그렇다. 나이 좀 먹어봐.” 했어요. 남자들은 직장에서 누가 진급하고 안 하고에 난리가 납니다. 어떤 교무님이 하도 보라 그래서 미생을 봤는데, 대우 건물 마당에 담배 피우러 오는 건, 다 옆에 놈이 잘 됐을 때죠. 옆에 놈이 상 받았다거나 인센티브 받았다거나 진급했다거나 하면 성질 나서 담배 피러 오죠. 앞에서는 ‘축하해’ 하고 나가서 술 마시지요. 저 놈이 나보다 못난 놈인데, 나보다 잘 살아. 혹은 나보다 진급을 먼저 해. 나가서 상 받아. 이번에 나는 진급 안됐네. 여자들은 좀 덜한데, 남자들은 목숨 겁니다. 제가 간사 때 종로에 살았고, 어린이집 차를 운전했어요. 어린이들 태우고 가다 보면, 제가 겁나게 빨리 갈 때가 있어요. 그 때가 언제냐면, 대통령하고 국무총리 출근할 때. 그 사람들은 브레이크를 안 밟아요. 코너 돌 때나 브레이크 살짝 밟지, 그 차는 설 일이 없어요. 계속 가도록 신호등을 조작해주고 줄을 서서 계속 인사를 합니다. 제가 이 안암교당 작은 거 하나 맡아도 바빠 죽겄는데, 그 사람들은 얼마나 바쁠까? 저렇게 바쁘니까, 나라를 위해서 했다고 한다면, “내가 이제 넘 힘등게 그만 좀 할라요” 그럴 것 같은데 안 그러죠. 고건씨는 그렇게 하더만, 옆에서 하라고 해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보면 어쩌든지 윗자리 한번 더 가볼라고, 전라도 말로 눈구녕이 빨개가지고, 어떻게든지 작전을 써서라도 그걸 해먹을라고 하는데...그게 명예욕이거든요. 정말로 국가를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건가. 어저께인가 노건평이, 노무현 아들이 여당 대표를 대놓고 해버렸데.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것이 누구를 이겨먹어서라도 내가 명예를 찾아야겠다는 거잖아요. 정당한 것에 바탕을 하냐 안하냐가 아니라, 정당은 던져 버리고 내가 이기냐 지냐. 내가 윗자리 올라가느냐 못올라가느냐.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거의 다 그랬어요. 정당성이 없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전부 권력을 쟁취했죠. 그게 다 명예욕이지요. 정말 국가를 위해서 그랬는가.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 그 사람들이 정말 마음이 즐거웠겠냐. 결국 내생에 어디로 갔겠냐. 그 업은 어떻게 받을 것이냐. 그런 지도자 밑에 있는 국민은 어떤 삶을 살거냐. 그래서 인간은 이 낙으로 온갖 에너지를 다 써요. 시간, 돈, 만나는 사람, 자기 계산 속에 이익 되는 사람만 쫓아다녀요.
그런데 불보살은 어쩌냐. 이것을 자동으로 오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천상락, 극락이더라. 그게 도락이더라. 이 말입니다. 천상락, 극락, 도락을 가지면 인간락은 알아서 와버린다.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와버린다. 내가 마음의 힘이 있으면 오는 것도 귀찮아서 털어내야 합니다. 다 못 받아요. 찾아 오는 사람들 다 못 만나 줍니다. 쫓아가면 여자도 돈도 도망가 버립니다. 오히려 그것을 탁 놓고 내 안에 도심을 갖추면 알아서 돈도 명예도 다 오더라. 그런데 사람들은 오욕락과 인간락만 낙인줄 알아. 천상락은 좌선하고, 기도하고, 불사하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바쁘다고 하면서 천상락을 안쫓고 오욕락과 인간락을 쫓아갑니다. 오욕락과 인간락만 쫓아가면 그게 결국 고통이에요. 저게 오냐고. 와요? 사람이 언제 행복하냐. 내가 설사 오욕락과 인간락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천상락 없이 얻으면 안이 허전합니다. 사람들이 왜 마라톤 하는지 아세요? 운동 할라고? 천만의 말씀이야. 안 에가 허전하니까 뭔가 달래려고 합니다. 사람이 30 km 정도 달리면 도파민이 분비됩니다. 마약 같은 게 분비돼서 엄청 행복해집니다. 자살을 해도요, 사람이 죽기 전에 거의 다 사정하고 죽어요. 마약 같은 게 나와요. 왜 술을 먹어요? 내가 안 이뻐. 내가 괴로워. 그러니까 마약을 해서 잊어버리고 싶고, 달리기를 해서 잊어버리고 싶고, 술을 먹고 잊어버리고 싶고, 멀리 관광지 가서 밖을 보면서 잊어버리고 싶고. 고통을 잊어버리고 싶은 거야. 여행을 다니면 내 안의 고통이 없어져요? 진짜 멸제는 고와 락은 떠나 버린 것이 진짜 멸제에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계속 낙을 쫓아서 가더라. 고와 낙의 초월한 자리를 쫓아서 가는 것 그것이 진짜로 정견이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아 (我). 몸을 나의 몸이라고 하지 나 자체는 아니야. 그런데 중생들은 사견으로 자기 몸이 자기로 아는 것. 그래서 무아 라고 그러죠. 아가 아니고 가아라고 하죠. 가아를 진아로 알면 안되지 몸은 뭐죠? 지수화풍 사대로 엮어졌을 뿐이야. 거기에 기운이 들어가서 운용할 뿐이야. 그것을 운용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들어서 영이 들어서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정 (淨)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이 되게 깨끗한 줄 알아요. 그래서 옛날에 불교에서는 부정관이라고 그럽니다. 부처님 당대에 한 여자가 병에 걸려서 곧 죽게 생겼어. 그런데 얼마나 이뻤던지 죽기 전날 봤는데도 제자가 잠을 못 자. 그 다음날 죽었는데, 부처님이 잘됐다 하면서 제자를 보내서 그 여자를 보게 합니다. 하도 이뻐서 정신 못 차리게 하던 여자가, 곧 썩어서 벌레가 나오는 것까지 보게 합니다. 그 이쁜 여자가 과연 깨끗하냐. 육신의 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성품의 나는 청정한 것이지. 중생이 정견을 못한 것은 뭘 보면 아느냐. 아까 상락아정이라는 것에다가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정견을 못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진짜 상락아정에다가, 즉 무상, 극락, 무아, 성품의 청정한 자리에 투자했다면 정견한 사람이다. 여기에 투자하지 않고 바쁘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견이 아니다. 출발도 못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 정견 하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