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삼국 실록(궁예와 견훤 그리고 왕건)
[옮긴 글]
1. 풍전등화의 천년왕국 신라
신라 문무왕(제30대)이 668년 9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한 지역을 통일한 이후, 신라왕조는 창업 이후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삼한통일이라는 국가적 소망을 이룬 신라 왕실은 강력한 지지기반에 힘입어 전제왕권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그에 따라 정치, 사회, 군사, 문화 전반이 매우 안정되어 이른바 ‘황금시대’ 를 구가한다.
반면에 통일 이전에 조정을 주도했던 귀족 세력의 입지는 한층 약화되어 성덕왕(제33대)에 이르면 전제정치는 극점에 이르게 되고, 그 정치적 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경덕왕(제35대) 대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난다. 경덕왕은 귀족들의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시하지만 권력 집중화에 실패하여 왕권은 급속도로 약해졌고, 혜공왕(제36대) 대에 와서는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과 친위 쿠데타가 잇따르게 되면서 신라 조정은 친왕파와 반왕파로 갈려 피비린내 나는 정권다툼에 휘말린다. 그리고 급기야 상대등 김양상(선덕왕, 제37대)이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 조정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기로 치닫는다.
선덕왕이 아들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자, 신하들이 그의 족질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선덕왕과 함께 반정을 일으켰던 김경신(제38대 원성왕)이 폭우를 핑계 삼아 조정 대신들을 조종하여 왕위에 오르면서 조정은 또 한 번 파란을 겪어야 했고, 애장왕(제40대)은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숙부 김언승(제41대 헌덕왕)의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김언승이 섭정의 신분을 망각하고 왕위를 탈취하는 바람에 귀족들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조정이 정권다툼으로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822년에 웅천(공주)도독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다. 그는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선덕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왕권에 눈먼 권신들 탓이라고 비판하고, 지방 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국호와 연호를 만들기까지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전역은 점차 지방 세력의 힘이 강화되어 궁복(장보고)과 같은 독자적인 거대 해상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헌덕왕은 가까스로 그들을 무마하여 정권을 유지했으나, 그가 죽고 난 뒤부터 조정은 한층 혼란에 빠져 헌덕왕의 아우 흥덕왕(제42대)이 사망한 뒤에는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정권다툼이 발생한다.
흥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종제 김균정과 오촌 조카 김제륭(제43대 희강왕)이 왕위 다툼을 벌이다가, 김제륭이 김균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김명(제44대 민애왕)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측근들을 살해하자, 김제륭은 그들에게 살해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함으로써 왕위는 김명의 차지가 되었다.
그 무렵,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제45대 신무왕)은 당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군사 5천을 빌려 서라벌을 공격하였고, 결국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신무왕은 즉위 5개월 만에 등에 종기가 나서 죽었고, 그의 아들 문성왕(제46대)이 왕위에 올랐으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켜 조정을 위협하였고, 장보고의 난이 수습된 뒤에는 청해진 세력인 양순과 흥종의 반란이 있었으며, 연이어 김식과 대흔이 반란을 일으켰다. 문성왕은 잇따라 일어난 세 건의 반란 사건을 경험한 뒤에야 가까스로 청해진을 해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해진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지방 세력은 한층 힘이 강해졌고, 조정은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문왕(제48대)과 헌강왕(제49대)이 왕권을 회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미 지방 세력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정강왕(제50대)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제51대)이 즉위했을 땐 조정의 힘은 거의 무기력한 상태였고, 국가 재정은 파탄지경이었다.
더구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즉위 전부터 각간 김위홍과 간통하고 있던 그녀는 왕위에 오르자 김위홍을 궁중 요직에 앉혀 정사를 돌보게 하였고, 그가 죽은 뒤에는 절망에 빠져 몰래 궁중으로 불러들인 젊은 청년들과 음사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진성여왕의 총애를 입은 그들은 조정 요직을 독식하며 뇌물을 일삼고 상벌을 함부로 내려 국가 기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무렵, 관청 거리에 여왕과 조정을 비방하는 방이 나붙었다. 조정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나섰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그때, 왕의 측근 하나가 방을 붙인 범인으로 대야주(합천)의 학자 왕거인을 지목했다.
왕거인은 당대의 대학자로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뭇 백성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진성여왕은 그런 헤아림도 없이 무턱대고 그를 서라벌로 압송하여 문초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한 왕거인은 시절을 한탄하며 감옥 벽에 시를 썼는데, 『삼국사기』에 그 내용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공이 통곡하니 삼 년이나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오월에도 서리 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옛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도 없이 창창하기만 하구나
이 시에 언급된 우공은 전국시대 연나라 태자이며, 추연 역시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두 사람 모두 시절을 한탄한 인물들이다. 거인이 그들에 빗대어 시를 지은 그날 밤, 묘하게도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진성여왕은 그런 하늘의 변고를 두렵게 여기고 곧 거인을 석방하였고, 공포에 질려 병을 얻기까지 했다.
그해 여름, 신라 전역이 지독한 가뭄에 시달려 백성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기왕에도 텅텅 비어 있던 국고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진성여왕은 전국 각처로 사신을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왕의 독촉을 이기지 못한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자, 전국 각처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산마다 도적이 들끓었다.
그런 가운데, 사벌(경북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내마 김영기에게 병력을 내주고 사벌의 반군을 체포하려 했지만,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김영기는 사벌 진입에 실패했고, 그 사이에 사벌 촌주 김우연이 반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 진성여왕은 김영기를 참수하고 갓 열 살이 된 김우연의 아들을 사벌 촌주로 임명하여 출전시켰으나 반란군 진압에는 실패하였다.
결국 사벌 봉기의 성공은 민심 저변에 깔려 있던 불만을 폭발시켜 천년왕국 신라의 쇠망을 재촉하는 혁명의 들불로 작용하게 된다.
2. 군웅할거와 후삼국의 성립
신라 조정이 사벌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사건이 잇따랐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우후죽순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방법으로 군벌로 성장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들을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이들 외에 초적의 무리를 형성하여 그야말로 도적질을 일삼는 무리들 중에도 제법 큰 세력을 형성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붉은 바지를 입고 도적질을 일삼던 ‘적고적’ 이었다.
군벌은 비단 이런 형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정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관리들마저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여 지방 군벌로 대두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다 보니, 조정에선 반란군을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방의 군대를 차출하여 그들을 진압해야 했지만, 지방 관리들이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서라벌 경군으로 반란군을 모두 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지역 군벌이 활개치기 시작한 뒤로는 조정의 힘은 겨우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지방 군벌들은 한층 세력을 확충하며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 신훤 등의 중부 세력은 거의 기훤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으며,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들 중 서라벌의 토벌군과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인 쪽은 사벌의 아자개 군대였다. 사벌은 원래부터 군사 요충지인 데다 서라벌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그들은 신라 조정에 가장 위협적인 무리였던 것이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며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했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의 품을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고,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전남 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기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그의 독단적인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뛰어난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하여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한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상도 북부 일대와 충청도,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않은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런 상황에서 남쪽으로 진출한 견훤은 892년 완산(전주)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받은 궁예는 894년에 명주(강릉)를 장악하고,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여 양길로부터 독립한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및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는다.
궁예는 895년에 휘하 부장들을 중심으로 관직을 설치하여 창업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고,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륭을 받아들여 태수로 봉하고, 898년 7월에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양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궁예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양길을 물리친 궁예는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 중북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901년에 고구려(후고구려)를 세워 왕위에 오름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후삼국 구도가 확립되었다.
3. 견훤과 궁예의 세력 확대
후삼국 초기의 주도권은 견훤의 백제에게 있었다. 백제는 궁예의 고구려보다 거의 10년이나 먼저 세워진 데다가, 견훤이 장수 출신인 까닭에 많은 관군들이 그 휘하로 찾아들었다. 또한 백제가 장악한 전라도 일대는 한반도 최대의 곡창 지대로서 물자가 풍부하였고, 산악 지형이 적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통치가 용이한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견훤은 발빠르게 국가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그가 백제를 부활시킨 뒤, 북방의 신진 세력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리는 여유를 보인 것도 자신의 입지가 튼튼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궁예는 창업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그가 양길 휘하의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힘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양길의 경계 어린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 탓에 쉽게 창업 의도를 드러낼 수 없었다. 895년에 이미 철원을 도읍으로 삼고, 관제를 마련하여 국가의 초기 형태를 갖춘 상태였지만, 그가 왕을 칭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898년에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성 30여 개를 더 확보했지만 그는 여전히 창업을 선언하지 않았다. 세력상으로도 이미 양길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양길과 전면전을 치를 경우에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궁예의 창업을 반대한 무리는 비단 양길 세력만이 아니었다. 기훤 휘하에 있다가 그와 함께 양길에게 투항했던 청길, 원회, 신훤 등도 궁예의 배반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한 거대 세력이었고, 그들이 양길과 손을 잡고 협공을 가해올 경우 궁예는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 일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899년에 양길은 그들 세 사람과 힘을 합쳐 궁예를 공격해왔다. 그들에 밀려 궁예는 한때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반전의 기회를 마련하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것은 그의 세력 확대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패퇴한 양길의 세력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900년에는 청길, 신훤, 원회마저 모두 궁예에게 투항함으로써 양길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 이듬해인 901년에 궁예는 비로소 창업을 공포하고 견훤보다 9년이나 늦게 어렵사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견훤과 궁예가 세력을 확대해갈수록 신라의 힘은 점점 쇠락했고, 급기야 서라벌 주변의 성들조차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정의 힘이 너무 미약하여 지방의 성들을 통괄할 수 없었기에, 각 성주들은 스스로 자기 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각 서라벌 북쪽과 남쪽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신라 왕실을 위협하였다.
견훤은 901년에 서라벌로 가는 길목인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였고, 이에 실패하자 서라벌 남쪽으로 진출하여 부근을 휘젓고 다녔다. 그 무렵, 궁예는 주로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의 신라 잔존 세력들을 아우르며 국가 기강 확립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이듬해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에 본격적으로 신라에 대한 공략을 전개했다.
905년 8월에 궁예는 군대를 몰아 죽령을 넘어 단숨에 경상 북부 지역을 장악하였다. 견훤 역시 경상 지역으로 진출하여 일선(경북 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손안에 넣었다. 후삼국시대를 세 나라가 쟁패를 다툰 시대라고 알고는 있지만, 사실 신라는 그저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궁예와 견훤의 성장을 두려운 눈으로 구경만 하고 있는 입장이었고, 나머지 두 나라가 점차 서로 영토를 다투는 양상이었다.
견훤과 궁예가 성장을 거듭하며 신라 땅을 나눠 먹고 있는 동안 서라벌(경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897년에 진성여왕이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고,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제52대)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효공왕은 겨우 열다섯 살의 소년이었고, 조정은 그의 장인 박예겸에 의해 좌지우지됨으로써 그는 이름뿐인 왕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은 효공왕 사후에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등의 박씨 왕조가 들어서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① 풍전등화의 천년왕국 신라, 군웅할거와 후삼국의 성립, 견훤과 궁예의 세력 확대|작성자 여름을청하다
4. 궁예와 견훤의 주도권 다툼
신라의 힘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자연스럽게 마진과 백제는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간에는 서로 남쪽과 북쪽에서 세력 확충에만 열중하던 두 나라는 잦은 충돌 끝에 영토를 다투는 처지에 놓였고, 결국 국운을 거는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주로 접경 지역인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국지전을 벌이던 두 나라가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된 것은 궁예가 수군을 이용하여 백제의 금성(나주)을 함락한 뒤부터였다.
한반도 북부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백제의 강성을 막기 위해 903년에 수군 장수 왕건에게 수천의 병력과 함대를 안겨 나주를 공격토록 했다. 송악(개성) 바닷가 출신으로 해상전에 능한 젊은 장수 왕건은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 나주를 급습했고, 10여 개의 군현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나주는 백제의 도읍 완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그야말로 견훤의 턱밑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왕건의 나주 장악은 견훤의 턱밑에 칼을 꽂은 격이었다. 거기다 왕건이 이끄는 막강한 고구려 수군에 밀려 해상권마저 내주고 만 처지였다.
왕건의 활약은 비단 해상전에 한정되지 않았다. 903년에는 양산 장수 김인훈의 요청을 받아 출병하여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906년에는 장군 금식과 함께 군대 3천을 거느리고 상주 시화진에서 견훤과 맞붙어 몇 번이나 이겼다. 909년에는 견훤이 백제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사신을 오월로 보냈는데, 왕건은 그들을 붙잡아 철원으로 압송하는 등, 곳곳에서 견훤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 가운데 견훤은 910년에 나주 수복전에 나섰다. 당시 왕건은 철원에 머물고 있었고, 견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주의 마진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견훤이 기병 3천을 이끌고 나주성을 급습하여 포위하자, 나주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다. 나주 앞바다를 백제 수군이 장악하는 바람에 나주와 개성 간의 뱃길이 끊길 정도였다.
그 소식을 접한 궁예는 급히 왕건에게 나주를 구하도록 명령했다. 왕건이 풍덕 앞바다에서 출정식을 거행하고 함대를 이끌고 남해 진도로 나아갔다. 왕건이 첫 공격지를 진도로 삼은 것을 보면, 당시 백제의 수군 본부가 진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도에서 한 차례 격전을 벌인 왕건은 백제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이내 나주 앞바다로 거슬러올라 고이도에 진을 쳤다. 그 무렵, 나주 앞바다는 백제 수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견훤은 자신이 직접 수군을 지휘하였고, 백제 전함은 목포에서 덕진포 앞바다까지 종횡으로 늘어선 채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세로 보나 병력으로 보나 단연 백제군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왕건의 해상 전술은 확실히 탁월했던 모양이다. 백제군은 함선과 병력이 모두 앞선 상황이었으며, 더구나 왕이 직접 지휘를 맡은 상태라 백제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고, 마진군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겁을 먹은 상태였다. 왕건 휘하의 장수들까지도 두려운 낯빛을 드러내며 은근히 물러날 것을 청했다. 그런 부하들에게 왕건은 이렇게 말한다.
”근심하지 마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의 힘이 일치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그 수가 많고 적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왕건의 눈에 비친 백제 수군은 수만 많을 뿐 대오는 허술하고, 전술도 엉성했던 게 분명했다. 왕건은 그 허술한 대오를 무너뜨리며 무섭게 저지선을 돌파하였고, 결국 견훤에게 또 한 번의 대패를 안겨주었다.
왕건이 이 때 썼던 전술은 빠른 배를 이용하여 적의 대오를 무너뜨린 뒤,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견훤은 왕건의 전술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하고, 5백여 명의 병력과 많은 전함을 잃고 물러나야만 했다.
이 싸움을 정점으로 하여 궁예는 영토와 병력 면에서 모두 견훤을 앞지르게 되었다.
5. 궁예의 개혁정책과 호족들의 반발
궁예는 세력이 확대되자,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왕권 확립에 주력한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911년에 국명을 태봉(泰封)으로 개칭하고,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호족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단행한다.
궁예의 중앙집권화와 개혁정책에 대한 내용은,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내린 다음과 같은 조서에 일부 드러나고 있다.
”이전 임금(궁예)은 우리 나라 정세가 혼란할 때에 일어나서 도적들을 평정하고 점차 영토를 개척하였으나,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섣불리 혹독한 폭력으로 하부 사람들을 대하며 간사한 것을 높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위압과 모멸로써 요긴한 술책을 삼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과세가 과중하여 인구는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하였다. 그럼에도 궁궐을 크게 짓고, 제도를 위반하여 이에 따르는 고역이 한이 없어서 드디어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켰다.”
이 내용은 순전히 반정을 도모한 왕건과 호족들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궁예가 중앙집권화와 개혁정책을 실시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혹독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통일이라는 과제가 앞에 놓여 있는데 지나치게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며, 세금이 과하다는 것은 국고 확충을 위해 애썼다는 뜻이며, 궁궐을 크게 짓고 제도를 위반하였다는 것은 왕위 위상을 높이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국가의 세금 수입은 대개 토지에서 온 것이므로 세금을 과하게 징수했다는 것은 토지소유제도를 개혁하고, 그에 따른 세금법을 손질할 것을 의미하며, 혹독한 폭력은 곧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파들을 가차없이 제거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군사제도에 대한 개혁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당시 병력관계를 담당하는 순군부라는 관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태봉 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병부보다 상위의 부서였다. 원래 궁예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는 병부에서 국가 병력에 관한 소임을 맡았으나, 그 뒤 어느 시기부터 순군부가 생겨 병부는 그저 병력에 관한 행정 업무만을 담당하는 보잘것없는 부서로 전락하게 된다. 순군부에 지방 병력에 대한 감찰권과 지휘권이 부과된 사실로 미뤄볼 때, 이것은 궁예가 지방 호족들의 병력을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말하자면 순군부는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지방 병력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설치한 부서였던 것이다.
당시 호족들은 자신의 사병을 거느리고 전쟁에 참여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력을 평정하고 있었는데, 그들 사병을 모두 순군부에 예속시켜 지휘 감독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호족들의 힘을 엄청나게 약화시키게 된다. 그들 사병은 평시에는 호족들의 땅을 일구고 농지를 개간하는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순군부에 예속되어 조정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되면 호족들의 경제는 심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궁예의 순군부 설치는 이렇듯 호족들의 군권과 경제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추진된 강력한 개혁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순군부 설치는 호족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앙집권화 의욕이 강화된 궁예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궁예와 호족들 간의 힘겨루기 양상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궁예는 이처럼 토지, 군사, 관제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고, 호족들은 그에 반발하여 왕과 한판 힘 싸움을 전개했다.
『고려사』에 궁예가 숱한 신하들을 죽여 천하에 둘도 없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바로 왕과 호족 간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이 죽음을 당한 것을 왕건의 입장에서 왜곡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예는 자신의 부인 강씨와 두 명의 자식까지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호족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였을 것이다.
후에 고려왕조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바로 고려 제4대 왕 광종이 ‘노비안검법’ 과 ‘과거제’ 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호족들을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태자까지 죽이려 한 예가 그것이다. 광종의 비 대목왕후도 호족들 편을 들어 노비안검법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는데, 그 때문에 광종과 대목왕후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진다. 대목왕후와 광종이 이복남매라는 것을 감안할 때, 호족 출신인 궁예의 부인 강씨는 한층 강력하게 궁예의 개혁정책에 제동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사형에 처한 것은 바로 호족들에 대한 궁예의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가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한 것도 백성들에 대한 사상적인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광종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정책이 호족들에겐 심한 반발을 샀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크게 환영받은 점으로 볼 때, 궁예의 개혁정책 또한 일반 백성의 호응 속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궁예가 개혁을 위한 사상적 기반을 미륵불 신앙에서 찾은 것이 그 증거이다.
미륵불 신앙은 계층을 불문하고 당시 사회에 가장 넓게 퍼져 있던 사상이었고, 궁예는 이것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예의 개혁은 다소 섣부른 감이 있었다. 왕건의 표현대로 통일이라는 대과업을 앞두고 호족들을 지나치게 자극한 것은 확실히 실책이었다. 비록 쓰러질 날만 기다리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신라 왕실이 유지되고 있었고, 강력한 경쟁자인 견훤이 칼을 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는 너무 빨리 중앙집권화에 집착했고, 그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몰락에 이르게 된다.
6. 왕창근의 거울과 왕건의 반정
호족들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궁예는 반발 세력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일삼았고, 그에 따른 불안감도 깊어져 자연스럽게 역모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그가 죽인 숱한 신하들 중에 역모 혐의를 쓰고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듯 궁예가 역모에 대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918년 3월, 왕창근이라는 상인이 묘한 내용의 글이 새겨진 거울을 들고 궁예를 찾아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삼수 가운데와 사방 아래 상제께서 아들을 진마에 내려보냈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칠 것인즉, 이를 일러 운수가 일삼갑에 찼다고 할 것이다. 어둠이 하늘에 오르고 밝음이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이 되면 대사를 이루리라. 종적과 성명이 혼돈을 이루나니, 혼돈 속에서 누가 진실로 성스러운 일을 일으킬 줄 알리요. 법을 움직여 뇌성을 일으키고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며, 사년 중에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난다. 하나는 청목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의 동쪽에 모습을 나타내리. 지혜로운 자는 볼 것이나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거느리며 사람들을 일으켜 정벌하리라. 때로는 성하고 때로는 쇠할 것이니, 성쇠가 모두 악의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니라. 이 한쪽 용의아들 서넛이 서로 대를 바꾸어가며 여섯 갑자를 계승하리라.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고 바다를 건너와 융성하리니 반드시 유를 기다려라. 이 글을 만약 현명한 임금에게 보이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제왕은 길이 번창하리. 나의 기록은 모두 일백사십칠 자이니라.
왕창근은 제법 글줄이나 읽은 선비를 찾아가 그 글을 해석케 했는데, 선비가 거울을 왕에게 바치면 크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왕창근이 궁예에게 그 거울을 바치러 온 것이다. 궁예가 글귀를 유심히 살폈지만, 쉽게 그 뜻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창근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이 거울을 얻었느냐?”
왕창근이 웬 노인이 팔고 갔다고 설명하자, 궁예는 그에게 병사를 붙여주며 그 노인을 찾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왕창근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노인을 찾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달포 만에야 한 거지로부터 노인에 관한 말을 듣게 되었다. 그 거지는 노인에게서 쌀을 얻은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노인이 쌀을 나눠주면서 ”나는 발삽사 여래불이 보내서 왔다.” 고 하더라는 것이다.
왕창근이 그 말을 듣고 발삽사로 찾아갔더니, 그곳 여래불상 앞에 토성을 맡은 신상이 있는데, 영락없는 그 노인의 형상이었다. 토성신상의 왼손에는 세 개의 도마가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거울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창근은 거울을 들고 왔던 노인이 토성신의 환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궁예에게 알렸다.
창근의 보고를 접한 궁예는 그 거울에 적힌 내용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선뜻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은밀히 송사홍, 백탁, 허원 등의 당대 석학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글귀를 해석토록 했다.
세 학자가 거울에 새겨진 글귀를 해석해보니, 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들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삼수중과 사유 아래 옥황상제가 진마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 땅에 아들을 내려보냈다는 뜻이 아니겠소? 또한 사년에 두 용이 나타나서 그 하나는 청목 속에 모습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 동쪽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은 청목은 곧 소나무니 송악을 일컫고, 흑금은 철을 이른 것이니 철성에 기반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송사홍이 먼저 그런 해석을 내리자 백탁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두 용이란 송악 출신의 왕건과 철성에 머물고 계신 폐하를 일컫는 것 아닙니까?”
”그렇소이다.”
”어허, 이거 또 한 번 피바람이 일게 생겼소이다.”
”특히나 이 글에 따르면 ‘축(丑)’ 이 멸하고, ‘유(酉)’ 가 일어난다고 했으니, 이는 정축년에 태어난 폐하가 멸하고, 정유년에 태어난 왕대인이 일어난다는 뜻 아니오이까? 이 내용을 폐하께서 아시면 당장 왕대인을 죽이려고 들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세 학자는 논의 끝에 해석을 적당히 꾸며 왕건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궁예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이미 역모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궁예는 아무래도 왕건을 불러 다짐을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건을 불러 이렇게 다그쳤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이 말에 왕건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왕건은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궁에는 이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렀다. 이 때 장주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이 말을 듣고 왕건은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왕건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궁예는 기꺼워하며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왕건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고려사』는 왕건이 이렇듯 거짓으로 모반 계획을 인정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계획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왕건을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궁예는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궁예의 행동은 왕건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고, 역모의 뜻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왕건이 군사를 몰고 왕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변복을 하고 왕성을 몰래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산야를 전전하다가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
918년(무인년) 6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 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 라고 하였다.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② 궁예와 견훤의 주도권 다툼, 궁예의 개혁정책과 호족들의 반발, 왕창근의 거울과 왕건의 반정|작성자 여름을청하다
7. 왕건의 반정에 반발한 인물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마군장군 환선길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인물이었는데, 아내의 제의에 따라 왕권을 노리고 반란을 도모하게 된다.
환선길의 역모 계획은 마군장 복지겸에 의해 발각되어 왕건에게 보고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 하여 무마시킨다. 그 틈을 노려 환선길은 5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내전에 침입하여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있던 왕건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왕건이 태연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결국 그는 근위병들의 추격을 받아 잡혀 처형당하고, 그의 동생 환향식도 같은 혐의로 잡혀 죽었다.
이들 형제 이외에도 청주 출신들이 역모를 도모하기도 했다.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을 비롯하여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청주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계획이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역모혐의가 탄로나자 이들은 모두 도망하였는데, 배총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붙잡혔다. 왕건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지만 청주 출신 수하 현율이 왕건을 만류했다.
현율은 역모 일당 중 경종은 매곡(청주)성주 공직의 처남이라고 밝히면서 만약 그를 죽이면 매곡성이 반기를 들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따라서 공직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모 혐의자들을 죽이지 말고 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왕건은 현율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놓아주려 하였다. 하지만 마군대장군 염상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선다.
염상은 경종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종이 최근에 자신의 조카를 청주로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당시 지방 성주들은 자신의 아들을 도성에 볼모로 남겨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궁예의 반란 방지책이었다. 매곡성주 공직의 아들 역시 이런 이유로 도성에 머물렀는데, 공직의 아내는 이 때문에 항상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동생 경종에게 은밀히 아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했던 모양이다.
볼모를 데려간다는 것은 곧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종이 조카를 데려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모를 계획했다는 것을 뜻한다. 왕건은 염상의 주장을 듣고 결국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
왕건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웅주(공주)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웅주성주를 포기하고 철원으로 상경한다. 이 때문에 웅주는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흔암은 원래 궁예 집권 말기에 장수가 되어 웅주를 점령하고 그곳 성주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궁예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고, 궁예 역시 그를 매우 총애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그는 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왕건을 용납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왕건의 신하로 머물러 있기를 거부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웅주성을 버리고 상경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이흔암의 그런 태도가 무척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왕건은 그가 웅주성을 포기한 것에 대해 문책하지는 않았다. 한때 같은 장수였던 그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내리기엔 명분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그때 이흔암의 이웃에 살던 수의형대령 염장의 고변이 있었다. 이흔암이 역모를 도모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이 말을 듣고도 쉽사리 이흔암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염탐꾼을 보내 이흔암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곧 이흔암의 역모와 관련한 염탐꾼의 보고가 들어왔다.
염탐꾼의 말에 따르면 이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나오면서 한숨 섞인 어조로 ”남편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을 텐데.”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왕건은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 바닥에서 목을 베게하고, 그의 자산을 몰수하였다.
이흔암 역모사건은 조작된 흔적이 역력하다. 이흔암이 역모 계획을 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왕건은 궁예의 측근인 그가 철원에 머무르면 민심이 동요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보는 저잣거리에서 그의 목을 베게 했다. 이흔암의 입장에서 보면 왕건은 섬기던 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역적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왕건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이흔암이 웅주성을 포기하고 철원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진정 역모 계획이 있었다면 차라리 웅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편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안전지대인 웅주성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가 전혀 역모할 뜻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흔암 사건은 철원 지역의 정서가 왕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왕건이 도성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간 것도 바로 이러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 외에도 명주(강릉)의 김순식, 명지성(경기도 포천)의 성달, 문소(경북 의성)의 홍술 등이 왕건의 휘하에 들기를 거부하였고, 웅주성과 그 주변의 홍성, 서산 일대의 성주들이 대거 견훤에게 투항해버린다. 이로 인해 왕건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8. 고려와 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 1월 도성을 송악(개성)으로 옮긴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성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입지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태봉은 궁예를 구심점으로 이뤄진 호족연합국가였는데, 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호족들 간의 결집력이 약해졌다. 왕건은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고, 외부적으로는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다행스럽게도 왕건은 특유의 유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이러한 내외적인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해 나간다.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건의 유화정책에 견훤도 호의를 보였다.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 간의 교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견훤은 내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한편 신라도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 신라 장수 출신인 까닭에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을 더 믿을 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뜻을 내비쳤다.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2년 동안은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920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을 침범함에 따라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합천의 대야성이 무너지자 신라의 진주, 거창, 산청 등의 경상 서부와 북부 지역이 위협을 느껴야 했고,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 때문에 경상 북부 지역의 호족들이 불안을 느낀 나머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던 고려는 925년 드디어 조물성(경북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후백제 견제 전쟁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전쟁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려와 후백제는 휴전을 선언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 조건으로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 견훤은 처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동생인 왕신을 후백제에 보냈다.
그러나 두 나라 간의 화의조약은 이듬해 고려에 갔던 진호가 병으로 죽자 깨지고 만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왕신을 죽인 후, 공주성을 기습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고려를 응원했다.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 이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고려와 후백제가 막 전쟁 상태에 돌입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침입하여 발해를 멸망시켰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내려온 덕분에 왕건은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한편, 전쟁 과정에서 견훤이 경주를 침범함에 따라 신라 백성들의 감정은 고려에 더욱 우호적으로 변한다. 927년 9월 견훤은 경상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를 기습한다. 경주를 장악한 그는 경애왕과 많은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힌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고려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만 것이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게 되는데, 퇴각하던 중 공산에서 고려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견훤은 공산싸움에서 고려군을 대파한다. 고려군은 이 싸움에서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잃는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송악으로 돌아가 부하들을 잃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공산싸움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인다.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한동안 열세에 놓여 있던 고려는 경상도 고창(경북 안동) 병산싸움을 계기로 전세를 바꿔놓는 데 성공한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하던 고려군은 한때 완전히 수세에 몰리지만 유금필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병산싸움 이후 백제군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진다.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서해안 일대를 공략하지만 유금필에게 길이 막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회군한다. 그러는 가운데 양국 간의 전쟁은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때를 이용하여 왕건은 고려에 투항해온 재암성(경북 진보) 장군 선필의 주선으로 경주를 방문하는 성과를 올린다.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자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 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에 따라 강릉의 김순식, 의성의 홍술, 포천의 성달 등이 투항하고, 울산과 그 주변의 110여 성도 고려에 예속됨으로써 왕건은 공산전투 이후 처음으로 승기를 잡게 된다.
하지만 기고만장해 있던 왕건은 932년 9월에 예상치 못한 급습을 당해 큰 피해를 입는다. 고려의 용장 유금필이 정쟁에 휘말려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견훤이 수군대장 상귀에게 병력을 안겨 개성 해안을 공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고려는 염주(황해도 연안), 백주(황해도 배천), 정주(풍덕) 해안에 정박해두었던 함선 1백 척을 잃고, 저산도 목장에서 기르고 있던 군마 3백 필을 약탈당했다. 또 10월에는 해군 장군 상애가 고려 북방의 섬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격하여 또 한 번 고려 조정을 흔들어놓는다. 왕건은 대광 만세 등에게 해군을 내주고 상애를 저지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만세가 상애에게 밀려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에 왕건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그때 다행히 곡도(백령도)에 귀양 가 있던 유금필이 스스로 병력을 조직하여 상애를 퇴각시켰지만, 해군력만큼은 백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랑하던 왕건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934년 9월에 운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기점으로 자신감을 되찾았다. 견훤과 직접 맞붙은 왕건은 유금필의 대활약에 힘입어 대승을 낚았고, 그 결과 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되찾는 한편, 견훤의 수족 같은 장수들을 대거 포로로 잡았다.
운주성전투 패배 이후 견훤은 심한 패배감에 젖어 지냈으며, 설상가상으로 태자 책봉 문제로 내분을 겪으며 백제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태그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③ 왕건의 반정에 반발한 인물들, 고려와 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작성자 여름을청하다
9. 국운을 건 명승부들
대야성전투(927년 7월) ㅡ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견훤의 20년 공든 탑
925년 10월, 고려와 백제는 화친조약을 맺고 견훤의 사위 진호와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을 서로 인질로 삼아 교환했다. 덕분에 양국은 오랜만에 평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4월에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진호가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 조정이 자신의 사위를 죽였다고 대노하며 왕신을 죽인 뒤, 군대를 이끌고 공주 방면으로 진격해왔다.
당시까지 왕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던 왕건은 그의 안전을 위하여 부하들에게 일체 백제의 공격에 대응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왕신이 견훤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왕건은 분을 참지 못하고 927년 정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용주(경북 용궁)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분풀이를 하였다.
막상 왕건이 전면전 태세로 나오자 견훤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왕신의 시신을 고려에 보냄으로써 은근히 화해의 손짓을 내민다. 그러나 왕건은 오히려 군대를 몰아 운주성(충남 홍성)을 공격하여 긍준의 군대를 격파하고, 다시 군대를 몰아 근품성(경북 문경 산양면)을 무너뜨렸으며, 이내 공주성으로 병력을 몰아갔다.
공주는 군사 요충지로서 태봉 시절에는 궁예에게 예속된 땅이었다. 하지만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울 때, 그곳 성주로 있던 이흔암이 성을 버리고 철원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곳 군현의 장수들이 모두 견훤에게 바치고 백제에 투항해버린 곳이다. 왕건은 그 점을 안타까워하며 항상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백제 또한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공주에 왕건이 대병을 이끌고 공격을 가해왔으니, 백제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건이 공주를 공격한 것은 백제군의 시선을 그곳에 묶어놓기 위한 성동격서의 전략으로 보인다. 왕건이 진짜 노리고 있던 곳은 대야성이었다. 그러나 대야성이 워낙 견고한 데다, 그곳을 노리고 있다는 낌새를 주게 되면 견훤의 방비가 강화될 것이므로 공주를 먼저 친 것이다.
그 속내도 모르고 견훤은 공주성 방비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은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백제군을 공주성에 묶어두고, 한편으론 영창과 능식에게 수군 수천을 내주고 남해를 돌아 강주(진주)에 잠입토록 하였으며, 김락에게 보병과 기병을 맡겨 육로를 통해 강주로 향하게 했다. 물론 목표는 대야성이었다.
대야성은 견훤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성이었다. 그는 창업 이래 누차에 걸쳐 대야성 공략에 나섰는데, 901년 8월에 처음으로 공격하여 함락에 실패했고, 916년 8월에도 재차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대야성은 삼국시대 때도 백제군이 누차 공격하여 얻으려 했던 곳인데, 성이 워낙 견고한 데다 전략적으로 쓸모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형적으로 보자면 대야주는 동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남동쪽으로 남강이 흐르며, 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버티고 있고, 북쪽으로는 수도산, 가야산, 오도산 등을 잇는 가야산맥이 막고 있다. 이에 따라 교통상으로는 서쪽으로 거창을 거쳐 육십령을 넘으면 전주에 이르고, 북쪽으로 낙동강을 거슬러오르면 성주, 구미, 선산, 상주 등지에 이른다. 또한 남으로 남강을 타고 흐르면 강주를 거쳐 남해에 이르고, 진주를 거쳐 하동에 이르면 섬진강 건너 구례 땅을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대야성을 얻으면 서부 경남은 물론이고 경북 지역의 요충지까지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의미였고, 결국 경주까지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견훤이 대야성 확보를 숙원 사업으로 여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920년 10월, 견훤은 대야성 공략 20년 만에 그 숙원의 한을 풀었다. 대야성을 장악함으로써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진주, 고성, 산청, 함양, 하동, 거창, 성주, 구미, 선산, 칠곡 지역의 대부분이 백제의 지배 아래 놓였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대야성이 느닷없이 무너진 것이다. 왕건의 공주성 공략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견훤은 그해(927년) 4월에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접한다. 영창과 능식이 이끄는 고려 수군 수천이 강주 앞바다를 유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서야 견훤은 왕건이 대야성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영창과 능식이 강주로 짓쳐들어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김락의 수천 병력이 강주로 밀려들었다.
당시 강주는 왕봉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원래 강주성은 신라 장수 윤웅이 지키고 있었으나, 920년에 대야성이 견훤에게 무너지면서 윤웅은 고려에 투항해버렸다. 말하자면 그때부터 강주는 고려 땅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윤웅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는 924년에 왕봉규를 천주(경남 의령) 절도사라고 하면서, 독자적으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고, 927년 3월에 후당의 명종이 권지강주사 겸 회화대장군으로 삼았으며, 4월에는 왕봉규가 임언이라는 인물을 후당에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왕봉규가 924년에는 의령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927년에는 강주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독자적으로 후당에 조공을 할 정도로 거의 국가 형태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왕봉규는 원래 의령의 절도사로 있다가 주변 지역을 장악했고, 이어 강주 장군 윤웅을 제거한 뒤, 강주 전역을 손안에 넣고 다스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927년 4월 기사가 끝이다. 묘하게도 그것은 영창과 능식이 이끄는 고려 수군이 강주를 공격하고 남해 연안의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 등지를 장악한 시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3개월 뒤인 7월엔 김락이 이끄는 고려군이 추허조 등 백제군 30여 명을 포로로 잡고 대야성을 수중에 넣었다.
이런 내용에 근거해볼 때, 왕봉규는 927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고려군에게 강주를 빼앗기고, 그 와중에 전사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고려군이 강주를 공격한 점으로 미뤄 왕봉규는 견훤과 결탁을 맺었으며, 백제군의 대야성 확보와 수성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군의 수륙 양동 작전으로 강주가 무너지자, 대야성의 백제군은 우군을 잃고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결국 수성전 끝에 패전하여 장군 추허조를 비롯한 30여 명을 고려군에게 내주고 달아난 것이다.
견훤은 왕건의 전술에 휘말려 그토록 아끼던 대야성과 군사적 요충지 강주를 하루아침에 잃고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야말로 20년 공든 탑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공산대첩(927년 9월) ㅡ 피눈물을 흘리며 달아나는 왕건
대야성 함락의 분통함을 이기지 못한 견훤은 보복을 다짐하며 환갑에 이른 노구를 이끌고 출정식을 거행했다.
보복전에 나선 견훤은 그해 9월에 근품성을 회복하고, 신라 고울부(경북 영천)를 습격하였으며, 이내 북상하던 진로를 바꿔 서라벌로 군대를 몰았다. 신라의 경애왕(제55대)은 다급한 마음으로 장군 연식을 고려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서라벌에 입성한 견훤은 곧장 신라 궁성으로 달려갔다. 그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있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견훤이 바로 코앞에까지 쳐들어왔던 당시 정황으로 봐서 일리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백제군이 출현하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우왕좌왕하던 경애왕과 왕비는 궁성 남쪽 별궁으로 몸을 숨겼다가 붙잡힐 것을 염려하여 자살하였다(고려측 기록에는 견훤이 경애왕을 찾아내어 자살을 강요하고, 왕비를 강간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에는 경애왕이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측 기록은 견훤을 부도덕한 인물로 몰아세우기 위해 견훤의 행위를 왜곡시켰을 것으로 판단되어 견훤의 해명을 더 존중했다). 그러자 견훤은 신라 국상 김웅렴을 잡아죽이고,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를 왕(제56대 경순왕)으로 세웠다. 또한 그의 아우 김효렴과 재상 김영경을 포로로 잡아 귀환길에 올랐다(견훤의 서한에 따르면 견훤이 정작 죽이고자 한 인물은 국상 김웅렴이었다. 김웅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국상이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봐서는 그가 신라의 실질적인 통치자이고, 경애왕은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의 구원군 1만 대군이 서라벌에 도착했을 땐, 견훤의 군대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그 소식을 접한 왕건은 백제군이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좌우에 신숭겸과 김락을 앞세우고 자신이 직접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 동수(대구 근방)로 달려갔다.
왕건은 견훤이 공산 길을 택해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급습을 가할 요량이었다. 휘하 병력을 모두 기병으로 구성한 것을 볼 때, 왕건은 매우 급하게 달려갔음이 분명하다. 공산에 먼저 도착하기만 하면 견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서두른 것이 문제였다. 길목을 막고 백제군의 머리를 치겠다는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머리를 맞은 쪽은 고려군이었다.
선봉대를 이끌고 달려갔던 김락이 견훤의 전술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나자 고려군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고, 급기야 이리저리 달아날 길을 모색하다가 백제군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린 왕건이 사색이 되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을 때, 신숭겸이 다가와 자신이 왕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울 터이니, 그 사이에 빠져나가도록 간한다.
왕건은 눈물을 머금고 신숭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왕건이 변복을 하고 단신으로 백제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 신숭겸은 어차를 타고 견훤을 향해 돌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신숭겸의 외모가 왕건과 흡사했고, 또한 그가 왕건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있던 탓에 백제군은 왕건의 목을 얻은 줄로 알았다.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5천의 정예 병력과 수족처럼 여기던 두 장수를 잃은 왕건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공산대첩 이후, 고려군은 여러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이듬해인 928년 정월에 강주를 구원하러 가던 원윤 김상이 백제 장군 흥종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5월에는 강주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강주 원보 진경이 죽고 장군 유문이 항복하였으며, 8월에는 어렵게 얻었던 대야성이 백제 장수 관흔의 수중에 들었고, 죽령 또한 백제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11월에는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으며,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5천 병력을 이끌고 와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했다.
이 때 성주 장군 홍술이 전사했는데, 홍술은 왕건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고려에 등을 돌렸다가 왕건의 끈질긴 설득과 회유를 받고 922년에 마음을 돌린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의 남진정책의 교두보 역할과 신라와 고려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건은 ”내가 좌우 손을 잃어버렸다.” 고 울부짖었다.
병산싸움(930년 1월) ㅡ 낙동강에 한을 뿌리고 돌아서는 견훤
여기저기서 고려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기세를 올린 견훤은 북진을 계속하여 경상도 지역에 있어서 고려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고창(안동) 공략을 준비한다. 이를 위해 견훤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죽령을 장악하고, 문경과 상주에 주둔한 고려군의 발을 묶었다.
견훤이 안동을 공격할 의도를 드러내자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죽령 길을 뚫고, 경북 영주와 풍기 등을 순시하며 견훤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백제군의 기세가 워낙 날카로워 왕건은 이내 죽령을 넘어 퇴각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929년 12월, 견훤이 마침내 고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고창의 고려군 3천이 이미 견훤의 대군에게 포위당한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왕건은 쉽사리 고창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고창 주변은 완전히 백제군이 장악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대응책에 부심하던 왕건은 여러 방책을 강구했으나 뾰족한 타개책을 찾지 못했다.
왕건은 발만 동동 구르며 휘하 부장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홍유와 공훤이 왕건의 출전을 강력하게 만류했다. 죽령을 넘어갔다가 패배하는 날엔 돌아올 길을 잃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미 공산 동수에서 크게 당해 신숭겸과 김락을 잃은 경험이 있던 터라 왕건 또한 그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출전을 포기하려 하는데, 유금필이 강력하게 출전을 건의했다.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고, 전쟁이 위험한 것은 당연합니다. 때문에 살고자 하기보다는 죽자는 결심을 해야만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싸우기도 전에 패배부터 염려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의 3천여 아군을 고스란히 적에게 내주는 것이니, 어찌 절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건은 유금필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여 결국 죽령을 넘었다.
그때, 그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재암성(경북 진보)의 신라 장군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온 것이다.
고려군에게 선필의 귀순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홍술이 전사한 뒤로 고려군은 주변 지리에 밝고 그곳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장수가 없었다. 때문에 전술적인 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때마침 선필이 귀순해온 것이다.
선필을 얻은 왕건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세를 세우며 고창으로 진입했다. 고창에 진입한 왕건은 병산에 진채를 내리고 대오를 형성하였고, 견훤은 그곳에서 5백 보 떨어진 석산에 주둔했다.
기세로 보나 병력으로 보나 한 수 위에 있던 견훤이 드디어 말을 몰아 병산을 덮쳤다. 그러나 고려의 선봉장 유금필의 위용에 눌려 백제군은 패퇴를 거듭해야 했다. 거기다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끌던 신라군까지 가세하여 협공을 가해왔다.
싸움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과는 견훤의 참담한 패배였다. 시랑 김악이 포로로 잡히고, 병력 8천을 잃는 대패를 당한 채, 견훤은 낙동강을 넘어 퇴각해야만 했다.
대승을 거둔 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경순왕에게 승전보를 알렸고, 경순왕 또한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자 강릉에서부터 울산에 이르는 신라의 110여 성이 투항해왔다. 그 여세에 힘입어 왕건은 대목(경북 칠곡), 인동(경북 구미)을 순시하며 그 주변 호족들의 인심을 얻었다.
임진해전(932년 9월) ㅡ 백제 수군, 개성을 안방처럼 드나들다
병산에서 대승한 뒤로 왕건은 공산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고 자부했다. 반면에 견훤은 그 뒤로 좀체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왕건은 그 기회를 이용해 서라벌로 가서 경순왕을 만나 동맹을 맺었다. 왕건의 이런 조치는 서라벌 주변의 민심이 여전히 신라 왕실에 호의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왕건은 신라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여 신라의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 상황에서 932년 6월에는 백제 장군 공직이 투항해왔고, 그 여세를 몰아 왕건은 7월에 직접 일모산성(충북 청주 문의면)을 정벌하였다. 일모산성은 북진책을 구사하던 백제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곳이라 견훤의 충격은 컸다.
하지만 한동안 견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고려의 허를 찌를 요량으로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 9월, 견훤은 마침내 그 품고 있던 창날을 드러냈다.
견훤의 공격은 엉뚱하게도 수군을 통해 이뤄졌다.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해상전에서 왕건을 이겨보지 못한 그가 수군을 이용하여 개성 앞바다를 치고 들었던 것이다.
이 무렵, 나주 지역이 거의 백제군 수중에 들어 있었음을 감안할 때, 견훤은 나주 회복을 위해 그동안 수군의 강화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게 분명했다.
일길찬 상귀가 이끄는 백제 수군은 서해를 거슬러올라와 예성강으로 짓쳐들었다. 이 예상치 못한 공격에 우왕좌왕하던 고려군은 졸지에 예성강 주변의 염주와 백주, 정주에 정박해뒀던 함선 1백여 척을 잃고, 왕궁으로 밀려드는 백제군을 맞아 고전을 거듭했다.
이미 함대를 모두 잃은 터라 물위에 떠 있는 백제군을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다. 상귀는 유리할 땐 배에서 내려 육지로 치고 들고, 불리하면 배로 들어와 바다로 나와버리는 전술을 구사하여 개성 주변을 마음대로 유린하였다.
상귀의 전술에 휘말린 왕건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고, 그러는 동안 상귀는 저산도에 상륙하였다. 저산도는 고려군의 군마를 양성하는 곳이었는데, 상귀는 고려군이 애써 길러놓은 군마 3백 필을 싣고 유유히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해군 장군 상애의 함선이 들이닥쳤다. 상애는 개성 앞바다를 거쳐 북쪽으로 거슬러올라 고려의 최북단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격하였다. 왕건이 대광 만세에게 수군을 내주고 대우도를 구원토록 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고려 수군으로선 상애의 함선과 대적이 되지 않았다.
만세가 패전하여 후퇴하자, 상애의 함선은 대우도에 머물며 육지로 상륙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려군은 그저 해안선을 지키며 그들을 구경만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일로 왕건이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문득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백령도에 귀양 가 있던 유금필의 편지였다. 유금필은 대우도가 약탈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령도와 그 주변의 어부들을 모아 수군을 조직하고 상애의 함대를 공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유금필과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린 상애는 함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하지만 상귀와 상애의 해상을 통한 공략은 왕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육군에선 밀리더라도 해군만은 항상 우위에 있다고 자부해온 왕건은 그토록 위용을 자랑하던 고려의 해군이 무력하게 무너지고 안방마저 유린당했으니,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견훤의 입장에서 보면, 왕건의 해군에 밀려 턱밑의 나주를 내주고 20년간 절치부심 강력한 해군 만들기에 주력하여 얻어낸 회심의 역습이었다. 건국 이래 대야성을 줄기차게 공략하여 20년 만에 그 숙원을 이뤘던 사실에서 보았듯이 임진해전은 견훤 특유의 끈질김과 무인 정신이 만들어낸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운주전투 ㅡ 견훤, 양팔을 잃고 허탈감에 빠지다
934년 9월, 왕건은 해상전에서 당한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충남 홍성) 정벌에 나섰다. 운주는 궁예시대에는 태봉의 땅이었으나 왕건이 반정을 일으키자 그에 반발하여 공주와 함께 백제로 투항한 땅이었다. 백제는 이곳을 거점으로 932년에 당진과 아산 일대를 공략하여 지속적으로 유린해왔다. 당진과 아산은 지형상으로 해군 기지가 되기에 충분한 곳이었고, 왕건이 만약 이곳을 잃을 경우 백제 해군의 개성 침투는 아주 손쉬워진다. 왕건이 운주 정벌에 나선 것은 당진과 아산이 크게 위험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이뤄진 조치였다.
왕건이 운주로 진출하자, 견훤도 갑사 5천 명을 직접 이끌고 달려왔다. 그러나 견훤은 굳이 왕건과 싸울 마음이 없었다. 견훤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말로 화친을 제의한다.
”양군이 서로 싸우면 두 쪽 모두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무지한 병졸들만 수없이 살상될 것이다. 화친을 맹약하고 각자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견훤의 화친 제의를 받고 왕건도 은근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휘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묻는데, 유금필이 나서서 결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결국 유금필의 주장을 받아들인 왕건은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 유금필이 정예기병 수천을 이끌고 급습을 가하자, 견훤은 그 기세와 용맹에 눌려 달아나고 말았다. 유금필이 그 뒤를 쫓아 백제군 3천 명을 죽이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의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포로로 잡힌 종훈을 술사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뤄, 필시 백제 병력의 전술을 담당하는 견훤의 모사일 터이고, 의사 훈겸은 견훤의 늙은 몸을 돌보던 측근이었을 것이다. 또한 상달과 최필에게 용장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봐서 견훤이 아끼는 장수들임에 분명하다. 견훤의 지척에 있어야 할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견훤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 내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금필에게 일방적으로 몰려 달아나기에 바빴다는 뜻이다.
유금필의 대활약으로 고려군이 운주를 장악하게 되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그 위세에 눌려 스스로 항복해왔다.
왕건은 이런 기세를 몰아 몇 달 뒤에는 유금필을 앞세워 나주 탈환 작전에 나선다. 나주는 이미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나주의 일부가 산성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긴 했지만, 거의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나주 탈환 작전에 대한 결과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후에 견훤이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한 것으로 볼 때, 유금필의 나주 탈환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운주전투의 대승은 나주 탈환으로 이어질 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운주를 장악한 즉시, 나주 탈환을 계획했다는 것은 운주가 고려 해군의 거점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운주에 백제 수군이 머물러 있었다면 나주 탈환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건이 운주 공략에 집착한 진짜 이유는 바로 나주 탈환이었던 것이다.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④ 국운을 건 명승부들|작성자 여름을청하다
10. 신검의 왕위 찬탈과 백제의 몰락
운주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고려에 뺏긴 백제 조정은 935년 무렵부터 심한 내분을 겪는다. 견훤은 이미 69세의 노인이었지만, 아직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서 10여 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해 금강을 태자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운주전투에서 패배한 후에야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절감하고 금강에게 양위하려 했다.
하지만 금강의 왕위 계승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권자는 신검이었고, 많은 신하들이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견훤은 금강을 태자로 지명했다. 신검을 위시한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버렸다.
반정을 주도한 인물은 이찬 능환이었다. 당시 견훤의 차남 양검은 강주에 도독으로 가 있었고, 3남 용검은 무주 도독으로 가 있었다. 능환은 이들 둘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반군을 형성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완산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의 반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견훤은 창졸지간에 들이닥친 반란군에 의해 붙잡혀 금산사에 갇혔고, 금강은 죽임을 당했다.
사건의 전후 관계로 볼 때 신검과 금강은 배다른 형제이다. 신검은 적출로서 장자였고, 금강은 서자였던 셈이다. 즉, 견훤이 서자이자 이복동생인 금강을 태자에 앉히자, 적자 세력들이 대거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반정을 주도한 사람은 능환이었다. 이 능환이라는 인물은 어떤 세력일까? 단순히 신검을 왕위에 앉히기 위한 신검의 수족일까? 후에 고려에 의해 백제가 무너진 뒤에 그가 반정의 주동으로 지목되어 사형당하는 것을 감안할 때, 그는 단순히 신검의 부하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왕위를 탐내고 있던 신검 못지않게 적자의 즉위를 갈망하는 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신검의 외가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하자면 능환은 견훤의 외척 중 한 명일 것이며, 그것도 견훤의 첫부인과 형제관계에 있는 인물일 것이다.
견훤은 원래 상주 사람인데,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를 세웠다. 농경사회가 타지인에 대한 배척이 매우 심한 것을 감안할 때, 상주 출신의 견훤이 완산에 도읍하여 백제를 재건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호족 세력이 호응하지 않았다면, 견훤의 백제 건국은 심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견훤의 부인이 여러 명인 것은 그들 호족 세력의 저항을 무마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건이 그랬듯이 견훤도 호족들과 친족관계를 맺고, 혈연을 기반으로 국가를 안정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신검과 금강의 부딪힘은 바로 그런 호족들 간의 세력다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견훤이 완산에 도읍을 정했다면, 신검의 어머니는 완산의 힘 있는 호족 출신일 것이며, 능환 역시 마찬가지다. 즉, 견훤이 지지기반이 약한 금강을 태자로 세우자, 조정을 상당수 장악하고 있던 완산의 호족이 난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신검을 왕위에 세운 것이 신검 반정의 실체라는 뜻이다.
능환과 함께 거사에 동참한 신덕, 영순, 흔강, 부달, 우봉, 견달 등 40여 명의 반정 주도 세력은 모두 완산의 호족 출신이며, 견훤은 그들의 반대로 금강을 태자로 삼지 못하다가 만년에 독단적으로 금강을 태자로 삼았다가 반정의 화를 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검은 반정 이후에 견훤의 측근과 금강의 비호 세력들을 대거 척살한다.
한편,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고, 그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가 왕건에게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자신도 고려에 투항할 뜻을 비친다.
그런 가운데 신검은 그해 10월에 왕위에 오른다. 반정을 일으킨 지 무려 8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즉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저항세력이 많았다는 뜻이다. 8개월이라는 기간은 그들을 무마하거나 척살하는 데 소요된 세월인 것이다.
신검이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 달에 신라의 경순왕은 스스로 신하들을 이끌고, 개성으로 가서 왕건에게 투항했다. 대세는 그렇게 왕건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신검 정권은 안정되지 못했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하는데, 이는 신검이 자기 세력이라고 규정한 친척들에게조차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에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다. 이 대열에는 물론 견훤도 합류했다.
출병한 왕건의 군사를 세분화해보면 고려군 4만 3천 명과 지방 호족 및 발해유민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 4천 명으로 명실공히 민족 연합군이었다.
고려 연합군과 신검 부대가 처음 싸운 곳은 일선(경북 선산)이었다. 이곳에서 신검은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하여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백제군이 견훤에게 항복하여 싸움을 포기하는 가운데, 연합군이 추격을 계속하여 황산(논산)의 탄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검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신검이 투항할 뜻을 전해오자, 왕건이 완산주로 가서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11. 후삼국시대를 풍미한 인물들
후삼국시대는 한국 역사의 유일한 전국시대이자, 잊혀진 영웅시대이다. 약 50년 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웅들이 명멸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기록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나라를 세운 궁예와 견훤에 관한 기록조차 변변치 못한 처지다. 그런 까닭에 고려측 인물들, 그것도 극히 일부에 한해서만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현실 탓에 백제나 태봉 인물들의 면면을 여기에 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궁예, 견훤, 왕건, 유금필 네 사람의 생을 개인의 태생과 성장, 성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한다. 궁예, 견훤, 왕건은 나라를 세워 후삼국시대를 엮어간 인물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다뤘고, 유금필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택했다(고려 개국의 4대 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에 관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따로 실었다).
비운의 혁명가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김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重午)에 태어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것은 궁예의 출생과 관련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 내용으로는 궁예의 태생 연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918년 3월에 왕창근이 궁예에게 바친 청동거울에 새겨진 글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사유에서 기필코 축을 멸하리니 바다를 건너와 융성할 유를 반드시 기다려라.
이 글은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내용상 축(丑)은 궁예를 지칭하고, 유(酉)는 왕건을 지칭한다. 왕건을 유(酉)라고 한 것은 그가 877년 정유년 닭띠 태생이기 때문이고, 궁예를 축(丑)이라고 한 것은 궁예가 축년, 즉 소띠라는 의미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가 태어나던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이미 왕의 신분이었다. 그가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1년)의 아들이 확실하다면, 궁예는 헌안왕 재위 연간에 태어났다. 헌안왕 재위 기간 중 축년은 857년뿐이므로, 그는 857년 5월 5일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하는 불운한 몸이었다. 단오날같이 양기가 겹친 날에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있고, 지붕 위에는 상서로운 광염마저 생겼다는 것이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아이를 죽여야 하는 이유치고 너무나 설득력이 없다. 양기가 겹친 날에 아이가 태어났다면 의당 그것은 좋은 징조요, 지붕 위에 상서로운 기운마저 뻗쳤다면 그것 역시 나쁠 것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헌안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둘 있었다. 한마디로 양기가 겹친 날에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후계자를 얻었는데, 일관의 말 한마디에 자식을 죽일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이 의문은 헌안왕에 이어 경문왕(재위 861~875년)이 즉위하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김계명의 아들이다. 희강왕의 이름은 김제륭으로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왕위 계승권 다툼이 있었는데, 그 정적이 조카인 김균정이다. 김제륭은 계승권을 다투던 김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신라 왕실은 혈육 간에 혈전을 치렀다. 김제륭은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김명(민애왕)에게 쫓겨나고, 김명은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신무왕)에게 죽었다. 헌안왕은 김우징의 이복동생이므로 헌안왕 또한 김균정의 아들이다. 김균정이 경문왕의 할아버지에게 목숨을 잃었기에, 헌안왕과 경문왕은 원수지간인 셈이다.
그런데 헌안왕은 경문왕을 사위로 맞아들였고, 또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말하자면 원수의 자식을 사위로 삼고, 또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 셈이다. 경문왕이 즉위하면 김균정 계열의 정치 세력이 대거 척결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헌안왕은 왜 그런 경문왕을 사위로 삼고 왕위를 넘겨줬을까? 더구나 멀쩡하게 태어난 아들까지 죽이면서 그런 엉뚱한 짓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뭔가 정치적 결탁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즉, 헌안왕에겐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손자를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헌안왕은 조카인 문성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문성왕의 후손임을 감안할 때 문성왕에겐 분명히 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이미 늙은 이복삼촌인 헌안왕이 왕위를 이은 것은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헌안왕이 왕위를 가로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헌안왕은 왕위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경문왕 집안과 결탁했을 것이다. 헌안왕의 어머니는 민애왕 김명과 남매지간이고, 김명은 김제륭(희강왕)을 받들어 왕위에 올렸다가 그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리고 민애왕은 헌안왕의 이복형인 신무왕(김우징)에게 죽었기 때문에 신무왕은 헌안왕 모계 쪽의 원수인 셈이다. 당시 신라 사회가 친가 쪽보다는 모계 쪽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헌안왕과 신무왕은 결코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었다. 헌안왕은 이렇듯 묘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경문왕 집안과 결탁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헌안왕과 경문왕 집안 사이에 정치적 결탁이 이뤄졌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경문왕 세력은 헌안왕의 즉위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다음 왕위를 보장받은 것은 아닐까?
헌안왕이 자신의 씨를 받고 태어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경문왕 집안과의 약속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 왕을 경문왕에게 넘겨주기로 하고, 그를 사이로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뒤늦게 젊은 후궁의 몸에서, 그것도 5월 5일 길일에 때아닌 구름 띠와 함께 상서로운 조짐을 보이며 후계자가 태어난 것이다.
그 아이는 왕위를 넘겨받기로 한 경문왕 집안에겐 대단히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헌안왕은 아들이 태어났는데도 아이를 직접 찾아보지 않았다. 단지 일관의 말만 듣고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는 아들이 태어나는 경우엔 죽이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거나, 그와 유사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런 추론에 바탕할 때, 궁예는 단지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궁예는 죽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 때문에 그는 한쪽 눈이 멀었다.”
이 대목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헌안왕이 결코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죽이는데 굳이 다락 밑으로 던져 죽여야 할 필연성도 없고, 그 아래 유모가 아이를 받기 위해 몰래 숨어 있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물건이 아닌 바에야 은밀히 숨어 있다가 던지는 사람 몰래 밑에서 받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인데, 친모도 아닌 유모가 그런 무모한 모험을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이 기록에서 아이를 죽이는 척하고 유모로 하여금 몰래 빼돌린 흔적이 역력하다. 비록 정치적 결탁에 밀려 아이를 왕자로 키우지는 못할지언정 아비된 자로서 차마 아들을 죽일 수 없어 헌안왕은 유모를 시켜 아이의 목숨만이라도 보전케 했던 것이다.
궁예는 이렇듯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하지만 다락 아래에서 받다가 유모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바람에 그는 한쪽 눈을 잃은 채 살아야 했다.
유모는 몰래 숨어 살며 어렵게 궁예를 키웠다. 하지만 궁예는 다소 불량스럽고 거칠게 행동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유모는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때, 결국 그의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 행동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채 궁예는 세달사라는 절로 출가한다. 그의 출가는 불가에 몸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분이 밝혀져 경문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사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궁예는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을 얻고 장성할 때까지 스님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승려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계율에 구애받길 싫어했으며,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다. 거기다 유달리 활에 집착하여 궁술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재를 올리러 가는데 까마귀가 뭔가를 물고 가다가 그의 바리때에 떨어뜨린 것이다. 그가 그것을 살펴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일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혼자만 알고 지냈다.
그 무렵, 신라 조정은 오랜 정쟁으로 제구실을 못했고, 왕은 권위를 잃어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거기다 가뭄으로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백성이 많아 국고가 텅텅 비었다. 하지만 왕족의 사치와 향락은 오히려 심해져 조정은 강제로 지방에 세금을 징수했고, 그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도적 떼가 들끓었다. 그럼에도 조정은 힘이 닿지 않아 구경만 하였으며, 그런 와중에 지방 호족들이 군대를 일으켜 세력을 형성했다.
궁예가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반란군 대열에 합류한 것은 이 때쯤이다. 『삼국사기』에서 진성여왕 5년(891년)에 그를 양길 휘하에서 기병 1백여 명을 몰고 다니는 장수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궁예는 적어도 진성여왕 즉위 초기에 반란군 속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반란군에 처음 가담할 때는 죽주(안성)의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훤은 부하들을 잘 품어주지 못하는 권위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탓에 궁예는 기훤 밑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기훤 휘하에 함께 있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함께 양길 밑으로 가버렸다. 청길, 원회, 신훤이 나중에 청주와 충주, 괴산의 세력가로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궁예를 포함한 그들 넷은 기훤 휘하에서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들이 대거 양길 밑으로 가버린 뒤, 기훤의 이름이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훤은 이 때 제거되었거나 자멸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훤이 오만무례하고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궁예가 양길 휘하로 옮긴 사실을 감안할 때, 양길은 포용력이 넓고 인재를 알아주는 성품이 아닌가 싶다.
양길 밑으로 들어간 궁예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891년에는 기병 1백여 명을 이끌던 정도였지만, 894년에는 휘하에 3천5백 병력을 거느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이 때부터 그는 부하들을 14개 대오로 편성하는 등 지휘 체계를 확립했는데,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 등 네 명의 부장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비록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궁예의 성장과 창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로 궁예의 세력은 성장을 계속한다. 895년에는 강원도 북부 일대와 경기 지역을 거의 장악했고,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가 형태를 갖췄으며, 896년에는 송악(개성)의 호족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신하로 맞아들이는 것으로 봐서 경기 북부와 황해도 일부를 손안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98년에는 패서도(황해도 평안도 일대)와 한산주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군에 도읍을 정해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궁예가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우려 하자, 양길은 청주, 충주, 괴산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힘을 합쳐 궁예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패배하여 무너졌고, 궁예는 그 여세를 몰아 양길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청길, 원회, 신훤 등도 굴복시키고, 901년에 마침내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창업한 뒤로 궁예는 꾸준히 땅을 넓혀가며 당시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견훤의 후백제와 영토를 다툰다(‘궁예와 견훤의 주도권 다툼’ 편 참조). 그러면서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로 바꾸고, 905년에는 철원으로 환도했다.
이 때 궁예는 관제를 대폭 개혁했다. 신라 관제를 버리고 독창적인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광평성을 설치하여 광치나(시중), 서사(시랑), 외서(원외랑) 등의 관원을 두었고, 병부, 대룡부(창부), 수춘부(예부), 봉빈부(예봉성), 의형대(형부), 납화부(대부시), 조위부(삼사), 내봉성(도성), 금서성(비서성), 남상단(장작감), 수단(수부), 원봉성(한림원), 비룡성(태복시), 물장성(소부감), 사대(외국어 학습 기관), 식화부(과수재배 기관), 장선부(성황수리 기관), 주도성(기물제조 기관) 등을 설치했다(괄호 안은 고려 관제).
당시 철원은 백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궁예는 청주의 민가 1천 호를 이주시켜 도읍을 형성했다. 그리고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고 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궁예와 신하들 간에 알력이 생긴다. 궁예가 많은 신하들을 죽인 사실로 미뤄 궁예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 때에 개혁정책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907년에 당나라가 망하면서 당에 유학해 있던 많은 인재들이 한반도로 돌아왔을 터이고, 궁예는 그들 인재를 등에 업고 개혁정책을 시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궁예의 개혁정책과 호족들의 반발’ 편 참조).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항했고, 궁예는 전횡과 독재로 맞섰다. 그런 와중에 왕창근의 거울 사건이 일어나 왕건과 불화가 생겼으며, 결국 918년 6월에 그토록 믿고 신임했던 왕건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었다. 궁예의 죽음에 대해 『고려사』는 그가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남의 논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먹다가 부양(강원도 평강)의 농부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 인물열전에서도 부양의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경명왕 2년 기록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쪽 기록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왕건의 무리에게 피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옳을 것이다.
궁예는 여러 행동에서 드러나듯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과감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불리할 땐 내심을 숨겨 때를 기다리고, 유리할 땐 가차없이 속내를 드러내 위용을 과시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뛰어난 사람에겐 매우 너그럽고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반면, 일단 능력 없는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면 무섭게 짓밟아버리는 경향도 있었다. 그는 형세 판단이 매우 빠르고, 모든 일을 신속히 처리하는 능력도 있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질긴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은 때로 모나고 급한 행동으로 드러나,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몰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불행한 운명을 안고 태어나 평생 부모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그는 죽음마저도 불운하여 무덤조차 없고, 그 시체는 버려져 필시 까마귀밥이 되었을 터이니, 혁명을 꿈꾸던 한 시대의 영웅이자, 나라를 세워 20여 년이나 왕으로 지냈던 인물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참담하고 서글픈 종말이 아닐 수 없다.
궁예에게는 부인 강씨와 청광과 신광 두 아들이 있었으며, 부인 강씨와 함께 궁예에게 죽임을 당한 두 명의 자식이 더 있었다.
태봉의 도읍지였던 철원에는 궁예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궁예가 망할 때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통곡을 했다는 명성산(鳴聲山, 울음산) 전설과 궁예의 한탄이 서려 있다는 한탄강 전설이 전한다. 그 외에도 철원 주변에는 궁예와 관련된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인목면 승양리 성산에 길이가 약 4백 미터쯤 되는 산성이 있고, 내문면 마방리에는 길이 7백 미터 가량의 토성이 있으며, 북면 원리와 어운면 중강리에 걸쳐 있는 풍천원도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 둘레가 약 6천 미터, 내성 둘레가 약 4백 미터에 이르렀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⑤ 신검의 왕위 찬탈과 백제의 몰락, 후삼국시대를 풍미한 인물들(궁예)|작성자 여름을청하다
12. 불세출의 영웅 견훤(867~936년)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 본전에 적힌 견훤의 출생 관련 내용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또한 『이제가기』라는 책을 인용하여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의 시호는 백승부인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은 파진간 선품이고,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로 삼아 각간 원선을 낳았으니, 이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이니, 그들에게서 아들 다섯, 딸 하나를 얻었다. 그 맏아들이 상보 훤이요, 둘째 아들이 능애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요, 넷째 아들이 보개요, 다섯째 아들이 소개요, 맏딸이 대주 도금이다.”
『삼국사』와 『이제가기』의 기록에 따르자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진흥왕의 왕비 혈통이다. 하지만 이씨 성을 쓴 것으로 봐서 진흥왕의 자손이 아니라 진흥왕이 죽고 난 뒤에 백승부인이 이씨에게 재가하여 낳은 셋째 아들 구륜공의 후손이다. 하지만 아자개가 농부로 살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구륜공의 후손은 몰락하여 귀족 신분을 유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여하튼 농부로 살던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난 견훤은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견훤은 자라서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잘 때에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비장으로 지내던 견훤은 아자개가 상주성을 장악하고 군벌을 형성하자 상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돕는다. 그러나 이내 경주 주변에서 많은 군대를 일으켜 아버지보다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890년에는 무리 5천을 이끌고 무진주(전남 광주)로 내려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신라 서면 도통 지후 병마 제치 지철 도독 전무공 등 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 호’ 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892년에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창업 이후 견훤은 날로 성장하였고, 백제는 궁예가 나라를 세우던 901년까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하지만 903년에 왕건에게 나주를 빼앗기고, 905년에 궁예가 충청도에서 평안도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면서 궁예의 세력이 더 커졌다( ‘궁예와 견훤의 주도권 다툼’ 편 참조).
하지만 918년에 왕건이 반란을 일으켜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개국하자, 태봉에 속해 있던 공주와 홍성, 청주 일부 지역이 귀순해옴에 따라 견훤의 세력이 고려를 압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918년 9월에 견훤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직면한다. 상주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순해버린 것이다.
왜 아자개는 견훤에게 의지하지 않고, 견훤의 난적인 왕건에게 가버린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줄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아자개의 부인이 둘이었고, 견훤이 장남이었다는 사실로 미뤄 견훤은 첫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분명하다. 그 아우들이 능애, 보개, 용개, 소개 등으로 같은 항렬의 이름을 쓰고 있는 데 비해, 견훤만 전혀 딴판의 이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견훤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아자개의 둘째 부인 소생으로 판단된다. 견훤은 계모와 이복형제들 속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견훤이 소년 티를 채 벗지 않았을 때 군대에 지원하여 경군 시위대가 된 것도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 적을 둔 뒤로 그는 자질을 인정받는 군인이었고, 그 덕에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나이에 비장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는 별수 없이 어렵게 진급한 비장 벼슬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관한 기록 중에 상주에서 활약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고, 아자개와 연관된 기사도 전혀 없다는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아버지 때문에 비장 벼슬을 버리고 반란군이 되긴 했지만, 아버지 아래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견훤의 이런 행동은 어쩌면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해버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즉, 견훤은 소년 시절부터 계모와 이복형제들과 좋지 않은 관계가 형성됐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다가 해결책으로 경군을 자원하여 집을 떠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장으로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던 그는 아버지가 난을 일으킨 사실 때문에 장수의 길을 포기하고 반란군의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다. 그가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집을 떠났다면, 아버지의 반란 또한 그에게 심한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수 있다. 견훤이 반란군이 되긴 했어도 상주로 가지 않고 경주 주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견훤이 고향인 상주에 나라를 세우지 않고 굳이 낯선 전라도 지역까지 내려가서 창업의 터전을 삼은 것도 가급적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후에 아자개가 아들인 견훤의 나라로 가지 않고, 아들의 최대 난적인 왕건의 품으로 간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한 918년 당시에 상주는 고려와 백제의 접경 지역이었고,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906년에 견훤은 상주를 장악하기 위해 대병을 투입했고, 궁예는 왕건에게 대병을 안겨 그를 저지했다.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이후에도 이곳을 놓고 궁예와 견훤 간에 혈투가 벌어졌을 법하다.
그 과정에서 아자개와 견훤은 부자 간에 심한 갈등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견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머무는 땅이니 상주가 당연히 백제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을 테지만, 아자개의 다른 아들들, 즉 견훤의 이복동생들은 거기에 반대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견훤과 이복동생들 간에 한판 혈전이 벌어졌음 직하다.
특히 918년에는 그들의 갈등이 극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우자, 궁예 아래 있던 많은 성주들이 견훤에게 투항했다. 특히 충청도와 경북, 강원 동부 지역의 성주들이 대거 왕건에게 반발했다. 군사 요충지인 상주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견훤의 이복동생들은 백제 치하에 들어가길 거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때문에 견훤은 무력으로 상주를 장악하려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불미스럽게도 이복동생 한두 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 있다.
아자개가 친아들인 견훤에게 등을 돌리고 왕건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그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궁예와 마찬가지로 견훤도 부모형제 복은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918년 9월 갑오일에 왕건은 아자개를 맞아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하였고, 심지어 문무백관이 모여 그 의례를 연습하기까지 했다. 그 연습장에서 광평낭중 유문율과 직성관 주선길이 자리를 다투다 왕건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왕건이 아자개 환영 행사에 얼마나 공을 기울였는지 알 만하다.
아자개가 왕건의 품에 안겼다고 해서 위축될 견훤이 아니었다. 오히려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며 통일의 꿈을 일궈나갔다. 그런 그의 대범한 면모는 고려 개국 후부터 신검의 왕위 찬탈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백제가 줄곧 국력 면에서 고려보다 우위를 점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고려와 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 편 참조).
게다가 그는 중요한 전쟁은 항상 자신이 직접 나섰다. 환갑이 넘었을 때도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용맹을 떨칠 정도로 그의 장수다운 면모는 대단했다.
정치적으로도 그는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궁예가 호족들의 입김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앙집권화를 꾀하다 호족의 대표하고 할 수 있는 왕건의 칼날에 목이 달아났던 때도 백제의 정국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견훤은 이미 즉위 초부터 중앙집권적 권력 체계를 이뤘고, 중요한 지역엔 자신의 아들이나 사위를 보내 다스리게 함으로써 반란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전쟁에서는 탁월한 장수로서, 정치에서는 강력한 왕으로서, 그는 신하들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지나치게 자신의 힘을 믿었던 것일까? 만년에 그는 적장자인 장남 신검을 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신하들의 중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넷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는 무리한 행동을 강행한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935년 3월에 신검이 반정을 일으켰고,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고 만다.
금산사에 유폐된 뒤로 그는 신검과 그 무리들에게 이를 갈았을 것이다. 급기야 그런 분노는 그해 6월에 금산사를 빠져나가 나주의 고려군에 투항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왕건에게 투항한 뒤로 견훤은 신검을 응징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 왕건은 때를 더 기다렸다가 신검을 칠 요량이었으나, 견훤의 강력한 요청을 듣고 힘을 얻어 936년 2월에 일단 병력 1만을 천안부에 배치하고, 9월에 8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마침내 신검을 무너뜨린다.
신검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견훤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견훤은 자신이 직접 병력 1만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섰는데, 그가 선봉에 섰음을 안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고 칼날을 돌려 신검을 공격할 정도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신검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졌다. 그러나 스스로 일군 나라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려 왕건에게 안긴 일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한 모양이다. 통일 전쟁을 끝낸 며칠 뒤에 그는 등창으로 황산의 절에서 일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스물을 갓 넘은 나이에 대군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점으로 보아 꿈이 원대하고 용맹이 뛰어났으며, 항상 미래를 계획하는 성품이었다.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는 것으로 봐서 임기응변에 능하고, 적을 칠 때는 먼저 적을 안심시킨 다음 치는 것으로 보아 다소 음흉하여 그 속내를 읽기 힘든 면이 있었으며, 빠른 시일 내에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형성한 점으로 미뤄 과단성 있고, 남다른 주변 장악력을 소유했던 게 분명하다. 또 자기 손으로 열었던 후삼국시대를 스스로 끝내는, 그래서 왕건에게 통일이라는 대업을 선물로 안기는 영웅의 면모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외적으로 보면 장수로서, 또 왕으로서도 아무 흠잡을 데 없는 그였지만,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과 권력관게를 구분하지 못해 몰락에 이르렀으니, 결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러 명의 부인에게서 10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 적장자인 신검은 왕건의 배려에 따라 멸망 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양검과 용검은 처형을 당했다.
견훤과 관련해서는 강원도 원성에 견훤성이 있고, 상주에도 같은 이름의 산성과 견훤의 영령을 모시는 사당이 남아 있으며, 영동 황간을 본으로 하는 황간 견씨는 견훤을 시조로 하고 있다.
친화력의 승부사 왕건(877~943년)
아버지 왕륭이 송악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에 의해 139권으로 편찬된 『고려사』의 ‘태조실록’ 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를 세운 후 왕건은 증조부를 원덕대왕, 증조모를 정화왕후, 조부를 의조 경강대왕, 조모를 원창왕후, 부친을 세조 위무대왕, 모친을 위숙왕후로 추존했다는 내용이 그들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다만 고려 의종 때의 인물인 김관의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그들에 얽힌 민담들이 함께 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왕건의 탄생설화도 실려 있는데, 이 이야기에는 신라 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 도선(道詵)이 등장하고 있다.
왕건의 아버지 용건(『고려사』에 기록된 정식 이름은 왕륭이다)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곳은 송악산 남쪽 기슭이었다.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들 부부에게 도선이 찾아들었다.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고승 일행에게서 풍수지리법을 익힌 후 귀국하던 중이었다(도선의 당나라 유학설은 현재 정설로 인정하지 않는다).
도선은 용건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용건의 아내는 서둘러 남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도선의 말을 전하자 용건은 급히 도선의 뒤를 쫓았다.
용건이 자신을 쫓아오자 도선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얻으면 이름을 건이라고 하십시오.”
도선은 그렇게 말하고 봉투를 만들어 겉에 간단한 글귀를 적어넣었다.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일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
용건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아 백 번 절하고, 그가 지시하는 대로 집을 짓고 살았더니, 그 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보였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용건은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었다. 이때가 877년 1월이었다.
이 이야기는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기록된 내용을 『고려사』에 옮겨 적은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왕건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왕이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운명론은 대개의 인물설화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형식으로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왕건의 탄생설화에 도참사상으로 유명한 도선을 끌어들인 것은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편자의 극적 장치로 판단된다. 도선이 신라 말기에 살았던 실존인물인 점을 부각시켜 왕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이끌어가려는 의도가 짙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도선과 왕건의 관계는 비단 탄생설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민지의 『편년강목』에는 왕건이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도선이 다시 송악산을 찾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왕건을 찾아온 도선이 말했다.
”당신은 혼란한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창생들은 당신이 구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선은 이렇게 말하면서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적당한 시기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해서 도선은 왕건의 스승이 된 셈이다.
이 기록 이외에 왕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고려사』 태조 편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널찍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고려사』의 표현대로 그의 탁월한 기상과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은 청년 시절부터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스무 살 되던 896년에 아버지와 함께 궁예 휘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뛰어난 장수이자 현명한 관료로서 명성을 떨치며 성장한다.
궁예의 신하가 된 왕건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왕륭의 추천으로 송악 성주가 되었고, 898년에 궁예가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 송악성을 쌓은 공에 힘입어 정기대감의 벼슬을 받았다. 900년에는 경기도 광주, 충주, 청주, 괴산 등을 정벌하여 궁예의 영토 확충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아찬 벼슬에 올랐다. 903년 3월에 수군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군현을 장악한 뒤 개선하면서, 그는 궁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기에 이르렀다.
906년부터 궁예는 신라의 잔여 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서라벌(경주) 공략에 매진하게 되는데, 백제의 견훤 또한 서라벌 주변 땅을 장악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궁예군과 견훤군은 경주 근처에서 잦은 충돌을 일으켰고, 906년에는 견훤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상주 시화진을 장악했다. 궁예는 곧 왕건을 앞세워 견훤을 대적케 했는데, 왕건은 견훤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영토 확충에 크게 기여했다.
909년부터 궁예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여 신하들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신하들이 죽거나 유배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지역 호족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백제 땅 한 모서리에 자리 잡은 나주가 몹시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 궁예는 나주를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가장 신임하던 왕건을 그곳으로 보냈다. 이 때 궁예는 왕건의 관등을 한찬으로 높이고, 해군 대장군의 직위를 부여하였다.
당시 나주는 백제군의 지속적인 공략으로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나주 근해는 백제 수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나주와 개성 간의 뱃길이 끊긴 상태였고, 그 때문에 그의 부하들은 나주로 가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왕건은 특유의 전술과 용맹을 앞세워 전남 영광 해안까지 진입했다. 거기서 왕건은 기대치 않은 수확을 얻었는데, 견훤이 오월국에 보낸 사신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왕건은 일단 그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돌아오니, 궁예가 몹시 기뻐하며 표창을 내렸다.
왕건은 910년에 다시 나주 진입을 시도하였다. 개성 풍덕 앞바다에서 전함들을 수리하여 알찬 종회와 김언을 부장으로 삼고 병력 2천5백과 함께 서해를 타고 내려가 백제 해군 기지인 전라도 진도를 먼저 공략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다시 북상하여 나주 앞바다의 섬 고이도를 차지하고 진을 쳤다. 그리고 이내 나주로 진입하였다.
나주 앞바다는 견훤이 직접 지휘하는 선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견훤의 함대는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이어지는 대단한 병력이었다. 그 형세에 겁을 먹고 부하들이 퇴각할 것을 간언하자, 왕건은 그들을 다독이며 독특한 전술을 구사하여 견훤 함대의 대오를 무너뜨렸다.
왕건의 독특하고 치밀한 공략에 말린 견훤은 병력 5백을 잃고 패주하였고, 이내 왕건은 나주로 상륙할 준비를 하였다. 왕건은 한동안 나주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 점을 눈치 챈 김언을 비롯한 부장들이 불만을 늘어놓자 왕건이 이렇게 타일렀다.
”그런 일로 해이해지지 말게나. 오직 힘을 다해 복무하고, 다른 마음을 먹지 않으면 복 받을 날이 있을 걸세. 지금은 폐하가 혹독하여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음해를 일삼고 있는 시절일세. 때문에 중앙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자기 신변을 보전하지 못하는 형편일세. 이럴 땐 차라리 정벌에 종사하고 왕실을 위해 전력함으로써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사실, 왕건은 자원하다시피 해서 나주로 내려왔다. 그는 빠르게 출세했고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신하들을 자극하여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다. 궁예가 중앙집권화에 너무 집착하여 많은 신하들을 죽이자, 자연히 곳곳에서 역모설이 고개를 들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가 부지기수였다. 왕건은 결코 그런 희생의 대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왕건의 말을 옳게 여긴 부장들은 차라리 변방에 머무는 편이 목숨을 보전하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 뒤로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부장들을 다독거린 왕건이 나주로 진입하려 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 무렵, 나주 연안에는 능창이라는 유명한 해적이 있었는데, 그는 뱃길을 잘 알고 해전에 능하여 ‘수달’ 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능창은 나주 앞바다의 작은 섬 압해도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는데, 궁예에게 등을 돌린 자들을 포섭하고, 때론 백제군과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나주 병력을 괴롭히고 있었다. 심지어 망명자들이 모여 사는 갈초도의 반란군 세력과 힘을 합쳐 왕건의 함대를 공격하고, 왕건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짤 정도였다.
비록 『고려사』는 그를 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궁예의 나주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군 같은 부류였던 모양이다. 그는 나주에서 망명하는 세력들과 힘을 결집했고, 때론 백제군과도 연계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왕건이 나주로 진입할 때 급습을 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주 앞바다는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있었고, 그 사이로 좁은 해협이 형성되어 있었다. 왕건이 나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섬들 사이의 해협을 거쳐야 했고, 필요하면 섬에 머무르며 함선을 수리해야 할 입장이었다. 능창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치밀한 계획을 짜두었다.
하지만 왕건은 능창의 공격이 있을 것이란 예상을 하고, 부하들을 풀어 밤늦게 갈초도 근처를 오가는 배들은 무조건 붙잡아오도록 했다. 능창이 왕건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왕건 함대의 형세를 염탐하고 함대 근처에 다가와야 했다. 그 일은 낮에는 용이하지 않은 일이라 밤에 이뤄졌는데, 그 점을 간파한 왕건은 적진이 형성된 갈초도 근처에 병력을 숨겨뒀다가 거기서 나오는 배는 모조리 잡아들였다. 필시 그 속에 능창이 타고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왕건의 예상은 옳았다. 잡혀온 자들 중에 능창이 있었던 것이다. 능창은 곧 철원으로 압송되었는데, 궁예가 그를 직접 신문하며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능창은 나주의 궁예 병력에겐 대단한 위협이 되던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듯 나주 앞바다의 반군 세력을 제압한 왕건은 913년에 파진찬 관등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광치나에 임명되어 철원으로 돌아왔다.
막상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재상 자리에 오르고 보니 왕건은 몹시 부담스러웠다. 우선 자리자 자리인 만큼 탄핵받을 우려가 많았고, 당시 상황이 곳곳에서 역모설이 나돌던 때라 참소 사건도 많아 그 처리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왕건은 탁월한 관리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참소 사건들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난히 해결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호족과 신하들이 호감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늘어났다.
왕건은 그럴수록 몸을 사렸다. 혹여 궁예의 눈에 자신이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까 겁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914년에 자청하여 다시 나주로 내려갔다.
그 무렵부터 궁예의 독단과 전횡은 한층 심해졌다. 이는 궁예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호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때문에 역모설이 끊일 날이 없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도 수백 명씩 되었다. 또한 궁예는 점차 의심이 많아져 주변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외척들과의 갈등 끝에 부인 강씨와 두 명의 자식까지 죽이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왕건은 다시 철원으로 호출되었다. 왕건이 철원에 돌아왔을 땐,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이른바 관심법(觀心法), 즉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행한다 하여 마치 신통력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호족들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발을 누르기 위한 자구책 차원이었겠지만, 궁예의 행동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왕건에게도 의심의 눈길이 돌려지는 날엔 그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건이 잔뜩 몸을 사리고 있는데, 918년 3월에 왕창근의 거울사건이 터졌다. 송사홍과 백탁, 허원 등의 노력으로 별일 없이 지나가는 듯했지만, 의심이 많아진 궁예는 왕건을 불러 역모를 꾸미지 않았냐고 몰아세웠다. 왕건은 장주 최응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졌지만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등의 마군 장수들이 반정을 건의했고,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개국 후에 왕건은 남아 있던 궁예 세력과 그의 즉위를 반대하던 자들로부터 막강한 저항을 받았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승부사 근성을 발휘하여 치밀하고 끈기 있게 해결해 나간다.
안으로는 정략 결혼을 통해 호족들의 결속을 다지고, 바깥으로는 신라와 공조하며 백제에 대항했다. 때로는 백제와 화의조약을 맺어 평화를 유지하기도 했고, 상황이 급변하여 화의를 유지할 수 없을 땐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 질곡 같은 세월은 개국 후에도 18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936년 9월에 백제를 무너뜨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이른다.
스무 살 이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그는 몸으로 승부사 기질을 익혔다. 무장 출신에게서 단점으로 드러나기 쉬운 과감한 측면은 온화한 천성과 유화적인 성품으로 상쇄시켜 나가고, 위기에 몰리거나 난처한 지경에 처하면 단호하고 신속한 행동으로 타개해 나갔다. 휘하의 호족은 물론이고 신라의 잔존 세력, 그리고 나중에는 백제의 견훤과 그 휘하의 신하들까지 품는 등 나약한 듯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친화력을 발휘하는 한편,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운 사실과 견훤을 상대로 집요한 공격을 퍼붓는 모습에서 보듯 과감한 승부사 기질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의 승리는 바로 이런 친화력과 승부사 기질의 조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⑥ 후삼국시대를 풍미한 인물들(견훤, 왕건)|작성자 여름을청하다
13. 승리의 화신 유금필(?~941년)
왕건이 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유금필이다. 그는 왕건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여지없이 난관을 타개하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승리를 이끌어낸 고려 병사들의 수호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평주(평산) 출신인 그가 언제부터 무장으로 활동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왕건이 고려를 세웠을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는 궁예의 개국 초기부터 장수로 활동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려사』는 고려 개국 이전의 그의 기록은 남기지 않고 있다. 개국공신 대열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개국 시의 조정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감안할 때, 그는 왕건의 반정을 비판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강릉의 왕순식이나 의성의 홍술 같은 인물들처럼 지역에 세력을 형성한 명망 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명성을 얻어 왕건의 눈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개국 초기에 왕건은 곳곳에서 일어난 민란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특히 골암성(안변) 주변의 여진족들이 고려인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염려했다. 결국 누군가를 골암성으로 보내 여진족들을 무마시켜야 했는데, 적임자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왕건이 떠올린 인물이 유금필이었다.
이 무렵, 유금필은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건이 유금필을 천거할 당시 그의 관직명이나 호칭 같은 것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금필은 왕건의 반정 이후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머물러 있다가 왕건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고려 조정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그는 왕건의 부탁에 따라 병력 3천을 이끌고 골암성으로 떠났다. 그는 골암에 도착한 후, 그곳에 성을 쌓고 주변 여진족 추장 3백여 명을 불러 큰 잔치를 베풀어 일단 그들을 달랬다. 그리고 그들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게 되었을 때, 그들을 위협하여 복종할 것을 강요했다. 술에 취한 상황이라 추장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유금필에게 복종을 맹세했고, 유금필은 곧 그 사실을 각 마을에 알려 이렇게 말했다.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
추장들이 붙잡혀 있는 상태라 그들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투항해왔는데, 그 숫자가 약 1천 5백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고려인 3천여 명도 돌려받았다.
기록에는 추장들을 위협한 것으로 적혀 있지만, 그들을 위해 잔치를 마련했다는 것으로 보아 위협한 것이 아니라 회유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회유 과정에서 만약 화의하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엄포도 곁들였을 것이다.
어쨌든 유금필이 싸우지 않고 쉽게 북방을 안정시키자, 왕건은 몹시 기꺼워하며 그에게 표창을 내렸다. 유금필은 그 후에도 여러 해 동안 골암에 머물렀고, 그 덕분에 북방은 평안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금필의 진면목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마음껏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925년 연산진(충북 청원 문의면)전투 때부터였다. 그는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연산진을 공격하였는데, 이곳은 원래 태봉의 땅이었다가 왕건이 반정을 하자 공주, 홍성, 예산 등과 함께 백제에 귀순한 곳이었다. 또한 고려의 군사적 요충지인 청주를 위협하고 있는 곳이라 항상 왕건이 되찾기를 갈망하던 요새였다.
연산진을 치고들어간 유금필은 그곳 장수 길환을 죽이고, 다시 임존군(충남 예산)을 공격하여 백제군 3천 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뒀다.
그해 10월에는 조물군(경북 안동 근처)에서 왕건과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한판 승부를 벌였는데, 양쪽 군대는 팽팽한 접전을 벌이며 어느 쪽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지구전을 펼쳐 적이 피로에 지치기를 기도리고 있었다. 임존성을 무너뜨린 유금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세하여 전세는 단번에 고려군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견훤이 불리함을 인식하고 서로 화친할 것을 제의하자 왕건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때 유금필은 화의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공격할 것을 요청했지만, 왕건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여 서로 인질을 교환했다.
유금필은 이처럼 장수로서의 용맹과 기상을 중시하고, 싸움에 임하면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이후에도 그는 928년에 백제 장군 김훤, 애식, 한장 등이 3천여 명을 이끌고 청주를 침범한 것을 대파했고, 930년에는 병산전투에 선봉장으로 나서서 견훤이 이끄는 백제군을 대파하고, 고려의 교두보인 고창(경북 안동)과 그 주변 지역을 지켜냈다.
이 싸움 당시, 홍유와 공훤 등의 주장들은 패배할 시에 죽령으로 돌아오는 퇴로를 잃을 것을 염려하여 병산을 포기하자고 했지만, 유금필이 강력하게 밀어붙여 백제군 8천을 죽이는 대승을 낚았다. 병산싸움에 승리한 후 왕건은 유금필을 치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승전은 오직 그대의 힘이다.”
왕건이 그런 찬사를 늘어놓을 정도로 그는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총신이란 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마련인 모양이다. 931년에는 참소에 휘말려 곡도(백령도)로 유배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유금필의 유배는 고려에 치명타를 안겼다. 견훤이 해군 장군 상애와 상귀를 동원하여 고려의 경도 개성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저산도 목장에서 키우고 있던 군마를 대거 약탈해갔다. 또한 대우도(평북 용천)를 습격하여 고려의 후방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왕건이 대광 만세를 시켜 그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유금필은 곡도와 포을도의 장정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고 백제 해군을 공략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왕건은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쫓은 것은 나의 불찰이다.” 라고 하면서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그리고 사신에게 전하는 말로 이렇게 위로했다.
”그대는 실로 죄 없이 귀양을 살게 되었건만, 원한을 갖거나 울분을 토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일만 생각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된다.”
이듬해 유금필은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어 의성부를 지켰는데, 그때 왕건이 급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부탁했다.
”나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일찍이 대광 능장영과 주렬, 궁총희를 파견하여 진수토록 하였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진(충남 당진), 탕정(충남 아산 일대)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신라 경도까지 침범할까 우려된다. 그대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
당시 백제는 충청도 서해안 지역과 경북 지역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는데, 빈 껍데기나 다름없던 경주는 신검이 이끄는 백제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왕건이 그 점을 염려하여 급히 유금필을 경주로 파견하고자 보낸 서찰이었다.
명령을 받은 유금필은 그날로 경주로 달려갔다.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그는 별동대 80명만 선발하여 이끌고 갔다. 그만큼 경주는 시각을 다투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경주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백제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유금필이 부하들에게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가지 못할 것인바, 그대들이 나와 함께 죽을 것이니 각자 살 도리를 강구하라.”
그러자 휘하 장수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을 홀로 죽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병사들의 전의를 확인한 유금필은 불과 80명으로 백제의 대군을 뚫고 달려갔다.
백제군은 유금필이 달려오고 있다는 말만 듣고도 겁을 먹고 움츠렸다. 그의 명성은 그토록 대단했다.
마침내 저지선을 뚫고 경주에 도착하자, 신라 백성들이 모두 성밖으로 나와 눈물로 그를 맞이했다. 유금필은 그곳에 7일간 머물면서 신검의 군대와 싸웠는데, 몇 번이나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군 금달과 환궁 등 7명을 생포하기까지 했다.
승전보를 받은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주위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유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왕건은 유금필이 돌아오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
”그대 같은 공훈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 일을 마음에 새겨두고 결코 잊지 않으리다.”
그러자 유금필이 대답했다.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위기에 직면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 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께서는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
왕건의 지나친 찬사에 대한 따끔한 충고였다. 그 소리를 듣고 왕건은 더욱 그를 아꼈다고 한다.
934년에는 왕건이 운주(충남 홍성)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전쟁에 나섰는데,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달려왔다. 견훤이 고려군의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화의를 요청하자, 왕건은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의 중론은 화의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유금필은 이번에도 싸울 것을 주장했다.
왕건이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자, 유금필은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백제 군대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3천여 명의 목을 베고, 백제 장군 상달과 최필을 비롯한 견훤의 여러 측근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쟁의 승리로 고려군은 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얻는 쾌거를 올렸고, 백제는 기세가 꺾여 내분에 휘말리게 된다.
935년에 그는 나주 회복전에도 나섰다. 929년에 백제는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나주를 거의 장악했고, 남아 있던 고려군은 뱃길이 끊겨 고려 조정과 통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왕건은 견서, 권직, 인일 등을 보내 여러 차례 나주 회복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다시 신하들에게 장수를 천거토록 했는데, 처음에는 홍유와 박술희가 자청하였으나 왕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훤과 제궁 등이 유금필을 천거하자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벌써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자에 신라의 길이 막혔을 때 그가 가서 열었는데, 나는 그 수고를 생각하고 감히 다시 명령하지 못하고 있다.”
유금필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아뢰었다.
”저는 이미 늙었으나 이번 일은 국가 대사인데,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에 왕건이 기꺼워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가 만일, 이번 명령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칭송을 뒤로 하고 유금필은 나주로 떠났다. 그리고 공략에 성공하여 뱃길을 열고, 나주의 상당 부분을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그의 일대기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승리의 화신이요, 고려군의 수호신이었다. 전쟁에 나가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고,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백제군은 그의 모습만 보여도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뺄 정도였다. 『고려사』는 그런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유금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였고, 집에 들러 잔 적도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해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이다. 성종 13년에는 태사 벼슬을 추증받았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에게는 유긍, 유관유, 유경 등의 아들이 있었고, 태조의 제9비 동양원부인 유씨는 그의 딸이다.
[출처] 후삼국실록 ㅡ ⑦ 후삼국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유금필)|작성자 여름을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