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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4:1-16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범죄하여 징계를 받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평화가 찾아오는 싸이클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사사 드보라를 통해 그들을 건져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통치(1-3절)
(1-3)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에훗이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라는 단어는 ‘야샤프’라는 히브리어로 ‘다시 하다’라는 의미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 시대를 살펴보고 있지만 실은 이 불순종의 역사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부터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여전히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반복되는 표현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용서해주셨는데, 은혜도 모르고 또 저런 짓을 할 수 있냐?”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용서하고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십시다. 주님을 믿기 전, 또한 믿은 후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보다 더 세상의 것들을 사랑했으며, 흔들렸으며, 지금도 흔들리고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순간 넘어지고 실족했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자질의 성숙함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어린 자녀를 기를 때 부모가 방을 치워놓으면 다음 날 또 장난감과 여러 물건들이 온 방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날 또 방을 치웁니다. 다시 어지럽혀 질 것을 알고, 또 치우라고 해도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녀가 성장하여 스스로 방을 깨끗이 하고, 정돈할 수 있는 날까지 여전히 그의 곁에서 그가 성장하길 기다립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오랜 시간 그의 곁에서 한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길 기다려 줍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이 자녀와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넘어지고 또 실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며 우리 곁을 지키시고 성숙하기까지 함께 격려하며 주시고 훈련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빠지게 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함으로 보호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굴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번의 지배는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과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였지만 이번에는 자신들이 150년 전에 정복했던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야빈 왕에게는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군대장관 시스라가 있었고, 그 군대는 철 병거 구백 대를 기반으로 한 무장된 군사들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20년을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하다는 단어는 ‘라하츠’라는 단어로 ‘쥐어짜다’ 라는 의미로 힘으로 짓누르는 모양을 의미합니다. 첫 메소보다미아에게 압제를 당할 때 8년, 모압에게 압제를 당할 때 18년, 이번에는 돌이키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3번의 압제를 당하면서 점점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무뎌지고 둔해졌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잃은 사람을 단순히 흔들어 깨우는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야빈 제세동기로 이스라엘의 심장을 쥐어짤 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초신자 때에는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고, 나아왔는데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거룩해지기보다 오히려 죄 위에 주저앉아 주께 돌이키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느려지고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4-11절)
(4-5)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영적으로 무너진 사사시대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십니다.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로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름의 뜻은 ‘꿀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여선지자’였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녀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판결을 받을 정도로 지도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여성 정치지도자가 탄생하면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입지가 좋지 않았던 시대에 드보라는 정말 그 민족을 하나님께 이끄는 이로운 꿀벌처럼 훌륭한 리더의 삶을 살았습니다.
(6-7)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전쟁을 명하셨고 드보라는 납달리 게데스에 거주하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 직접적으로 야빈과 시스라와 공격을 많이 받았을 납달리, 스불론 자손 만 명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락의 손에 넘겨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락의 이름의 뜻은 ‘번개’입니다. 그러나 바락은 번개같이 신속하고 날쌔게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8-10)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하나님께서 바락을 선택하셨다면 그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용맹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을 것인데 그런 바락도 야빈 왕의 철 병거 구백 대의 위엄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에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본인도 가지 않겠다고 조건을 걸게 됩니다. 드보라는 자신이 같이 갈 것이나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붙이게 되어 바락이 적의 장수를 무찌르는 영광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실제로 시스라는 헤벨의 아내 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이 전투의 시작과 끝은 드보라에서 시작하여 야엘로 마무리됩니다. 물론 바락도 드보라와 함께 이 전투에 직접 나서는 공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바로 반응하지 못함으로 인해 야엘에게 큰 영광을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드보라와 야엘을 사용하신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남성들의 영적상태를 부끄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훗날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두려워 숨어있던 때에 소년 다윗을 사용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적 암흑기에 두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또한 신체적 약자였던 에훗처럼 오른손이 불편한 왼손잡이 사사를 사용하시고,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드보라와 야엘을 사용하시고, 기생의 자녀인 입다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약자를 통해 그 능력과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어떤 하나님의 자녀는 스스로 낮은 자존감으로 주저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집안이 흙수저라, 나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나는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등 등 여러 결핍들을 놓고 스스로의 한계를 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오히려 그런 우리의 모습이 더 사용하시기 좋은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약한 그 때 하나님의 강함을 더욱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아올린을 사용해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한다면 그것은 바이올린이 좋은 까닭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연습용 바이올린을 사용해서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 때 그것은 오로지 연주자의 실력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약함으로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강함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을 순종으로 맡겨보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12-16절)
바락은 드보라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볼 산에 오릅니다. 시스라가 그 이야기를 듣고 유인되어 철 병거 구백 대를 모아 기손 강가에 나아오게 됩니다. 이어 5장 21절에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를 보면 기손 강이 불어나 그 병거 부대를 덮어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병거부대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서 바락을 공격하러 쳐들어오도록 하였고, 그들이 함정에 빠짐으로 스스로 무너져 하나님의 칼날에 멸망하도록 하셨습니다.
(14-16)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드보라는 전투에 나가는 바락을 끝까지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아내가 믿음이 더 좋은 가정이 있습니다. 내 남편은 왜 이리 믿음이 없는지 한숨만 쉴 것이 아니라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또 같은 구역식구 중에 또 주위에 누군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낙망하여 넘어져 있다면 “일어나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이긴 싸움을 하고 있다”라고 격려하며 응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 어떠한 분이심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스라와 수백 대의 병거부대는 혼란에 빠져 하나님의 칼날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시스라는 병거타고 왔다가 두 발로 걸어 도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참한 그의 최후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당시 구백 대의 철 병거로 무장된 시스라와 군사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최첨단의 정예부대였습니다. 그래서 바락과 같은 용사들도 그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 앞에 세상이 이와 같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이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이끌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따라가기도 버거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 밖 구백 대의 철 병거같은 세속적 가치관과 철학과 문화와 기술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과 두려움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드보라를 찾고 계십니다. 결혼한 유부녀였고, 사회적 장애물이 가득한 여성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시대적 약점을 돌파하여 하나님의 강하심과 일하심과 승리를 노래했던 자신의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나의 한계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세상을 이길 수 없는 우리의 약점과 한계만을 읊어가며 포기해야 할 이유들만 열거하고 있다면 이제 그것들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세상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에 세상이 시스라의 철병거 부대처럼 크고 웅장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도 어느 틈에 위축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우상과 가치관에 매몰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또한 나의 한계와 약점들을 헤아리며 이길 수 없는 조건들만 나열하며 이미 진 사람처럼 불평과 원망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패잔병처럼 넘어져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 세상속에 주님을 선포하게 하시고, 세속적 가치관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도록 늘 깨어 주님 앞에 설 날을 기억하는 영적 긴장감을 갖고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의 일생이 하나님의 목전에 ‘또’ 범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묵상해 봅시다.
2. 바락이 시스라와 철 병거 군대와 싸우러 드보라 없이 가기를 주저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을 기억하기보다 세상의 모습에 위축되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이스라엘의 승리가 무엇에 달려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나의 약함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의 배경을 찾아보고 그들을 통해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해 봅시다.
4. 내 주위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며 드보라와 같이 주위에 다른 지체를 세워주는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