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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덕유산 방향으로 북진하기 위해 온 것이다. 지난 번 안개와 비로 시야가 막힌 답답함 속에 산행을 시작하였지만 오늘은 하늘이 도와 맑고 상쾌한 기분으로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덕유산! 덕이 크고 넉넉한 기품이 여려있어 덕유산이라 했다. 덕유산은 면적도 넓고 길이도 길어 우리는 3개 구간으로 나누어 종주를 할 것이다. 오늘은 육십령에서 월성치까지 운행할 것이고 다음엔 신풍령, 그 다음엔 덕산재까지 갈 것인데 진행 방향과 일자는 상황에 따라 변동될 것이다.
육십령 휴게소 주차장에서 터널을 통과하면 경남 함양군 서상면 지역이다. 한 총대장의 “여자 먼저!” 선언을 필두로 45명의 대간팀들은 출발했다. 어제 비가 내렸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아 길이 뽀송뽀송하다. 산새도 즐겁게 노래하고 바람마저 시원하다. 연두색과 연한 녹색의 향연은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임을 알려준다. 국어 교과서에서 우리는 <신록예찬>을 읽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후략)’
산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니 길옆으로 둥글레와 은방울꽃이 수줍게 맞고 있다.
길 오른쪽 서상면 방향에 살이 파인 듯 모습의 채석장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봉우리가 뾰족해서 촛대바위처럼 보이는데 실은 산을 파다가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백두대간의 채석장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거창하게 백두대간 트레일이라 명명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한 쪽에서는 토목과 건설 대국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큰 돌이 많은 길을 만나 위를 쳐다보니 '할미산성'이다. 할미봉을 가기 위한 관문이라고 보면 되는데 앞선 일행들이 쉬고 있다. 출발한 지 30여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후미는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초반부터 무리가 아닐까 생각이다. 백두대간 종주는 어느 정도 산행의 이력이 붙은 사람들의 도전 대상이다. 사람마다 경험과 체력의 정도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한나절을 걸어야 한다면 그 경험과 체력이 어느 정도 일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꾸준한 체력단련과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쩌다 어른이 된 것처럼 어쩌다 산행 가지고는 고통만 따를 뿐이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밧줄을 잡고 겨우 겨우 할미봉을 올랐다. 특징이 없는 능선 길에 나타난 잘생긴 바위 봉우리다. 왜적으로부터 장수군 장계를 지키기 위해 어느 할머니가 쌓은 성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5월 덕유'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신록이다. 드문드문 철쭉이 활짝 피어 객들을 반기고 있다. 하늘도 맑아 사방 천리이다. 어느새 서봉이라 부르는 장수덕유산과 동봉이라 부르는 남덕유산이 푸른 하늘 아래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남쪽으로는 걸어온 연두색 능선이 층층이 모이고 시원한 조망이 펼쳐졌다. 연분홍과 흰 철쭉이 그늘진 숲에서 만개하고 있다. 느닷없이 입에서 <봄날은 간다> 노래가 나온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할미봉 정상석이 아담해서 꼭 허리가 약간 굽은 할머니 등 같다. 사람들은 간편하게 폰으로 인증샷을 날리고 있다.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들이 찍은 사진은 과연 어디로 보내질 것인가?
장계의 반송마을과 왜군이 대포로 오인하여 도망갔다는 대포바위(남근석)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장쾌한 남덕유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누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그 다음엔 80도 절벽, 가파른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기어내려 가야한다. 오래된 나무계단은 썩어서 오금이 저리다. 국립공원 관리구역이 아닌가? 관리가 허술하다.
부드러운 능선 숲길의 어느 안부, 다 같이 모여 점심 식사를 했다. 숲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 우리는 두 가지 이득을 얻게 된다. 타인과 관계를 좁힐 수 있는 친분의 역할과 숲이라는 정서의 역할이다. 거기에 각자 사연이 있는 밥과 반찬은 이야기가 가미되어 그 간극을 좀 더 좁히는 역할이 되고 있다. 이로써 산에서 식사시간은 항상 기다려지는 것이다.
혼자 하는 행위를 우리는 고독하고 외롭다고 표현한다. 또 남들을 의식하며 비참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물론 고독해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정신적 질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혼자 있어도 당당하다면 문제가 될 일이 없다.
최근 일본의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가 인기다. 한국에도 매니아층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회사원 이노가시라 고로가 동네 맛집을 다니며 혼자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표현한다는 줄거리인데 나는 단순한 먹방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절대 남의 눈치를 보지않고 오직 음식의 맛에만 탐닉을 하며 그 요리에 대한 이야기까지 가미하여 독백을 하는데 식당을 나올 때면 포만감의 기쁨과 하루를 멋지게 마쳤다는 행복감이 있다. 이것은 시청자들도 공감하는 분위기다.
혼밥에 대하여 사회는 부정적 시각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혼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시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밥을 먹어야 힘을 낼 수 있고 다음을 준비해야 하기에 혼밥을 하는 것이다. 바깥에서 보는 고독? 외로움? 저리 가거라.
걷기는 혼자일 때가 적정이다. 필요에 따라 무리를 지어 걷는 상황도 있지만 구도와 마음챙김이라는 관점이라면 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럿이 걷다보면 개인의 생각과 정신은 배제된다. 산 속에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또렷해서 오히려 듣게 되는 내가 민망해진다.
그 사람의 가정, 사업, 자녀, 부동산, 돈 이야기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기 때문이다. 나와는 관계없는 그의 것들이 내 귓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산속의 바람, 새 소리, 느낌들이 온전히 지나가고 사라져 버린다.
가까운 북한산에서 조차 우연히 마주친 그 사람들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을까? 그 안에는 원한, 서러움, 복수, 억울함 등이 절절히 맺혀있다. 그 사람은 푸는 행위지만 듣는 자는 정말 공감하는 것일까?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예찬>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혼자서 걷는 것은 명상, 자연스러움, 소요의 모색이다. 옆에 동반자가 있으면 이런 덕목들이 훼손되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의사소통의 의무를 지게 된다. 침묵은 혼자 떨어져 있는 보행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 바탕이다’
길은 원추리 군락지다. 경상남도 덕유교육원 삼거리가 나타났다. 할미봉에서 보았던 숲속의 건물이 그곳인가 보다. 이정표가 세워있다. 남덕유산까지 3.6Km. 식사를 마치고 1시간 여 걸어 바야흐로 서봉으로 오르는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철쭉의 색은 의외로 진홍색으로 바뀌고 맑은 하늘 아래 빛나고 있다. 덕유산 철쭉은 다른 유명 산처럼 온 산이 만개하기보다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해맑은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 토종철쭉이라 화려함보다 은은함과 순박함을 지니고 있다.
전망바위가 나타났다. 시야는 남덕유산과 서봉이 근접하여 넓어졌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된비알을 올라가는데 ‘졸방제비꽃’이 다소곳이 피었다. 꽃 색깔이 흰색이라 ‘흰제비꽃’이라 치부할지도 모르는데 잎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암릉을 따라 올라가는데 땀이 눈 속으로 들어와 눈이 따갑다. 앞선 일행 두 사람이 쉬고 있다. 그 배경으로 보이는 능선길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오후 3시, 장수덕유산이라 부르는 서봉(1,492m)에 도착했다. 오른쪽으로 남덕유산이 불뚝 솟아있고 정면인 북쪽으로 거대 산군인 덕유산이 펼쳐지고 있다.
다음 코스는 남덕유산 방향으로 내려섰다가 월성치라는 고개로 향하는 것인데 남덕유산 정상을 밟아 보기로 했다. 하산 비탈길에 ‘양지꽃’이 무리로 피었다. 3월의 꽃인데 고지대이니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늦게 태어났으니 더 화려하다. 흰 꽃인 ‘매화말발도리’도 나무줄기에 총총히 피었다. 사람 발에 치일라 자주색 ‘벌깨덩굴’이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심하게 지나치지만 내 눈은 이 소박한 화려함에 그냥 지날 수가 없다. 가지가 처진 ‘귀룽나무’에는 벚꽃과 비슷한 흰색 꽃무리가 화려하다. 커다란 타원형 잎이 돋보이는 ‘박새’는 길 옆으로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이제 여름이면 100㎝ 높이의 줄기를 올리고야 말 것이다.
사람들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남덕유산으로 오르는 삼거리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봉우리까지는 100m, 다들 배낭을 벗어놓고 된비알을 올랐다.
2017년 2월에 눈꽃을 보기위해 올랐던 남덕유산(1,507m).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남북 주능선이 약 30km에 이르는 덕유산의 남쪽 맹주이다. 향적봉이 있는 북덕유산이 육산이라면 이곳 남덕유산은 골산(骨山)이다. 우람하며 둔중한 자연석들이 남성미를 나타내는데 그 봉마다 피어난 눈꽃이나 상고대는 겨울 산행지의 최고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 오후가 되니 하늘은 뿌옇게 변해 원경의 조망은 충분치 않았다.
월성치로 내려가는 길에 열대식물같은 ‘관중’이 손가락을 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풀 속에 ‘숙은처녀치마’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치마를 오므리고 있고 흰 수술대가 살짝 삐져나온 모습이 귀엽다. ‘처녀치마’는 분홍색이나 이 꽃은 보라색이다. 돌계단을 내려와 월성치에 도착했다.
월성치에서 삿갓골재로 진행하려 하였으나 현재 시각 오후 4시40분으로 시간상 무리라 판단되어 황점마을로 하산하기로 했다. 하산 길은 남덕유산으로 오를 때 주로 오르는 등산로로 이용하는데 이정표상 거리는 3.8Km다. 월성치 주변은 등산객들의 식사장소이자 쉼터로서 ‘참취’와 ‘벌깨덩굴’의 군락지다. 간혹 ‘쥐오줌풀’도 보였다.
20분 정도 돌계단을 내려가니 작은 샘이 나타났고 곧이어 계곡이 시원한 물소리를 내고 있다. 오후 6시 황점마을에 도착하여 오늘의 산행을 마쳤다. 황점마을은 거창군 월성군에 속해 있으며 덕유산 동쪽 자락의 오지다. 그런 만큼 주변에 담이나 계곡 등 아름답고 볼거리가 있는 ‘북상13경’이 있다고 마을 안내판이 알려주고 있다.
덕유산에서 만난 꽃 : 위로부터 시계바늘방향으로 벌깨덩굴, 매화말발도리, 숙은처녀치마, 졸방제비꽃, 양지꽃, 관중.
철쭉의 여러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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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성스럽게 써 놓으신 산행후기 잘 읽었습니다.
산행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이 글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구간 구간 다시한번 떠올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대간길 다녀온지 1주일이 넘었는데 읽어보니 또 감회가 새롭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시원한 바람에 섞여 등줄기를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주던 그 산행길을 자세히 그려주셨네요. 연재소설처럼 산행 다녀오면 기다려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색다른 기록을 접하니 잠자는 세포가 일어납니다.
다음 기록은 어느 장르가 차지할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