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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헵시바
2021년 가정세미나 (성장학교) 4
도은미 사모님
항문기에 대한 이야기를 배웠다. 항문기는 그 시기에 그 아이가 어떤 버릇을 가지고, 생활 습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가 결정되는 시기이다.
지금 모판 두개를 설명했는데, 기본, 신뢰를 얻어야 하는 구강기에 대해서 설명했고, 구강기의 기본 신뢰를 얻으면 그 사람 속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는 놀라운 캐릭터, 성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순종을 하면, 그 아이 속에 희망이 생기는 사건이 생긴다. 이것이 기본 신뢰이다. 기본 신뢰는 환경의 일관성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일관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왜 저 집이 저렇게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고, 안정되지 않을까? 기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순종하고 따라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희망, 소망도 없고,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작동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누군가를 의지해보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붙었다가, 여기저기서 뜯기고 상처만 입는 사건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입을 향한 중독, 알콜 중독이 전형적인 것이라고 했다. 의심병, 의처증, 의부증, 이것들이 다 구강기 때 이미 틀이 잡혀지는 것이다. 혹시나 그 사람이 커서 병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때이다
이 교회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새가족이 오면, 그 사람은 불안하다. 그러기에 지푸라기라도 붙잡자고 영접하느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그 사람에게 일관성있는 사람이 되어주어야 한다. 저희 교회도 새가족이 오면, 그 새가족을 이리가 양을 기다렸듯이, 딱 낚아채서 이용해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동네야 돈돈돈 하는 동네라, 교회에 왔는데, 그 사람이 양의 탈을 쓰고 있는 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건이 나서, 자기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어서, 그런 사건들이 터지면,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럴 수 있었지? 라고 멀뚱히 눈을 쳐다보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며, 당했네, 발등찍혔네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건들이 생기는데, 그런 일이 두 사람 사이만의 일이 아니라, 전체 교회를 몰락시키고, 전체 교회의 신임도를 떨어뜨리고, 사람들이 못 믿게 하는 일들이 생긴다
우리는 몸이기에,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이 교회가 잘되셔야 한다. 제가 이 교회에 왔잖는가. 이해가 되셨는가? 그리고 내가 왔기 때문에 잘되는게 아니라, 나도 밖에서 잘 해야 한다. 내가 여기 다녀갔지 않는가? 나는 제자비전교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가 잠깐 다녀가도, 그 교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받았다는, 선한 영향력을 받게 해야지, 남편 만나서 40년 사는데, 남편 만나고 지금이 당연히 좋아져야 하는 것이다. 남편이 저를 만나면, 나 때문에 좋아져야 하는가, 묵사발로 살고 있어야 하는가? 서로 40년을 투자했는데, 좋아져야하지 않겠는가? 둘이서 싸우면 잘 살자고 싸우는거 아닌가?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싸워야 한다. 목표를 바라보면서, 싸움도 잘 해야지, 싸움 하지 말라는게 아니다. 우리 집에서 배운 쌈닭같은, 너 죽고, 나 죽자 이런거 말고, 너 살리고, 나 살자,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지, 서로 죽이지 위해서 싸우는게 아니니, 왜 우리가 이런 이야기하고, 따지는지 알지? 한 발자국 나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운 줄 알지? 이 선에서 살기만 하는 사람들이 한 발을 내딛으려니, 힘, 에너지, 도전, 돌파가 필요하고, 모든 용기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 낯선 것에 발을 디딜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만 아니라, 용기도 주세요가 기도제목 아닌가? 믿음은 차고 올라서, 지금도 백두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으나, 용기는 없다. 미쳤다고, 이래도, 저래도 살텐데, 괜히 고생하며 살 필요 있는가란 생각이 있다. 믿음만큼, 믿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믿음을 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내서 기본 신뢰의 틀을 잡기를 축복한다.
저는 남편 만나서 매일 좋아지고 있다. 나를 믿어주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와서 무슨 말씀을 전할 때, 남편이 이거저거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한다. 제가 남편 흉도 얼마나 보는가? 웃통 벗고 설거지를 한다던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집에서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란 소리를 할까? 야단맞은 기억이 있으면,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못할 것이다. 한번도 한적이 없다. 나는 자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남편이 나를 야단치지 않을 것 말이다. 그리고 너무 좋았다. 벗고 설거지한다는게 히트였다. 자기의 챙피함도, 성도를 위한 꺼리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감사한가 생각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래서 제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게 기본 신뢰이다. 나는 남편에 대해서 흉을 보고, 집안 흉을 보고, 그것 때문에 화살이 날아올 것이다? 돈 벌어 먹고 살라면, 억지로라도 해야지? 라고 해본적이 없다.
이 교회가 자기 흠을 드러내고, 목장에서 이야기하는데, 엘티지라고 한다고 들었다. 나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게 창피하면, 두 번째 단계의 수치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룰, 규칙이 부적절하게 기대는 사람이 되면, 수치감이 만들어지는 사건이 된다. 오히려 그런 법을 안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는게 나은 것이다.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건강한 좋은 법들이 흘러다녀야 하고, 내가 좋은 말씀, 토라를 듣고, 양식을 먹어서, 열심히 주의 제자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주의 지성소가 되었다. 주님이 내 안에 살고 계시는데, 우리가 겁날게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항문기 이야기를 했다. 항문기에서는 반드시 자율성을 얻어야 한다. 자율성은 자유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자유와 조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놀이를 통해서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재미있어야 한다. 예수가 너무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가 놀이터여야 한다.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너무 재밌어서 어쩔 줄 몰라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배우니 너무 재밌어서, 말씀 안의 법이 당연히 생명의 법으로 내게 다가와서, 놀고, 신나서 땀을 뻘뻘 흘리고, 지치지 않고 또 놀고 싶은 자율성이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함 가운데 조절하는 능력이다
제가 십일조를 배웠다. 저희가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는데, 너무 졸리니까, 4시 반에 일어나고, 밤늦게 한시 반까지 바느질집에 가서 일을 했다. 그렇게 애쓰고 살았는데, 시험을 치면 7점이 커트라인인데, 남편이 7점을 못 맞고 조는 것이다. 공책을 보면 쓰다가, 다 글씨가 처진다. 일을 하니, 얼마나 졸린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이야기했다. 당신 목사되려면 공부해야하는거 아닌가? 내가 일할테니, 당신은 공부만 해라. 그래서 나 혼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제품은 너무 일이 많아서 못하니, 세일즈로 일을 바꾸기로 했다. 가게마다 들려서 주문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는 30장, 저기서는 100장, 3000장이 넘는 주문을 얻어서, 그 공장에 들어가서, 오늘 주세요 한다고 주지 않는다.
세일즈맨이 많이 있을 것이니, 이것을 받아나와야 하는데, 한참 걸리면, 나는 돈을 벌어야하니까, 가서 아줌마한테, 제가 다림질하고 개서, 제가 가지고나가도 되겠습니까? 다른 세일즈맨들은 나오는거로 하고, 내가 가져갈 것은 내가, 정리해서, 3000장 싸가지고 나가야겠다고 하니, 와서 일하겠다는데,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들어갔다. 땀을 흘리면서 3000장을 모아서, 폭스바겐 두꺼비 아주 오래된 차에 의자를 떼고, 운전석만 놔두고 나머지에 물건을 실으면 3000장이 들어간다. 운전도 한시간 배워서 해서, 뒤로 갈 줄 모른다. 그것도 차 면허증을 남편의 둘째 매형이 전화와서 하는 말이, 차 면허증 있냐고 묻더니, 내가 하나 보낼게 해주는 것이다. 이게 브라질이다. 40년 전 일이다.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 온 것 가지고, 면허증은 있고, 남편이 일일히 차 데려다주면 안되니까, 한시간 배운 것으로 앞으로만 배운 것으로 갔다. 있는 자리에 큰 자리에 들어가서 서겠는데, 후진해서 들어가는 것은 해본적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중주차하고, 큰 길 찾아서 세워야해서, 3000장을 나온 첫째 날이었다. 난 나와서 첫 집이 30장이었다. 차를 세워놓고, 30장 꼭대기를 뽑아서 갖다주고, 표를 받아서, 그 표가 발리, 영수증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받아서 나왔는데, 차가 없어진 것이다. 밑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는데, 못생긴 밤색 차였는데, 차는 있는데, 안에 물건이 하나도 없다. 딱 나오자마자 물건이 없으니까, 내 차 아닌가보다 하고, 왔다갔다 몇번을 했다. 없어졌다. 나중에 보니까, 30장 갖다주고 난 사이에 도둑이 훔쳐간 것이다. 더군다나 낡은 차니까 얼마나 가져가기 좋았겠는가?
나는 이 집에서, 우리 어머니, 남편, 주일날만 되면 헌금준비했냐,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는게 감사한데, 감사헌금 해야지. 선교사님이 오시면 한달에 한번씩 선교헌금은 해야한다. 십일조는 당연히 떼어놨겠지? 이야기하신다. 화가 막 나는 것이다. 이 집은 마이너스이다. 벌어도 안되는 집인데, 어떻게 헌금을 하는가? 십일조 떼는건 말도 안된다. 남아야 떼지, 어떻게 떼는가? 감사헌금은 줘야지 떼지, 선교헌금?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식 우유 값도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니, 주일날만 되면 화가 난다. 그러던 어느날 물건이 없어진 것이다.
제가 지금 십일조를 안 하겠다는게 아니다. 하나님도 사정을 아실거 아닌가? 하나님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이 집에 시집오게 한 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알아서 해줘야하는거 아닌가? 차를 운전하고 오는데, 만오천불정도인데, 무슨 방법으로 갚는가? 울고불고, 남편에게 이야기해야하는가, 안해야 하는가? 하면 학교 다닌다고 하겠는가? 그러니까 말을 못하는 것이다. 무슨 방법으로 말하겠는가? 공부하라고 하면서, 목사되야 한다면서, 무슨 방법으로 공부 안하고 되곘냐고 하면서, 내가 하겠다고 큰소리 치고 내가 일하기로 했는데, 처음 주문 받아서, 신나서 다림질해서 나갔는데, 이렇게 된 것이다. 삐쩍 마른 애가 얼마나 힘들게 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잃어버리게 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눈동자처럼 지키신다고 하더라. 그 눈은 어디가서, 뭘 했길래, 어떻게 내 것을 지켜야지, 내가 딴거 한다고 했는가? 남편이 당신 위해서 목사된다면서요? 왜 안 지키냐는 것이다. 너무 힘든 어느날, 다음주 주일날까지 수금해다 줘야하는데, 할 수가 없어서, 월요일날 갔다. 주일날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제가 찬양팀에 있었는데, 찬양곡이 내 사정 다 아시는 주님이란 찬양이었다.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진짜 잘 아는가? 그 노래 가사가, 은혜로 이 쓸데없는데, 왜 구원해서, 내가 저 사람 안 만나고 시집 안 가면 이렇게 안되지 않겠는가? 이 찬양을 부르는데, 눈물이 나서 도저히 부를 수가 없어서 주저앉아서 울었다. 예배가 끝났는데, 지휘가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늘 감동하셨나봐요? 하는 것이다. 감동은 무슨, 가슴이 찢어지고, 만오천불 어떻게 갚냐는 것이다. 너무 불신의 모판이 작동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론이 속이지 말고, 가서 말씀드려야겠다고 갔다. 다려서 갖고 나가는데, 첫 집 30장 갖다준거 보여주고,. 나머지 2970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아시죠? 성실해요. 1년만 주시면 열심히 일해서 갚아드릴게요 하면서, 눈물 흘리면서 삐쩍 마른 여자가 떨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분이 참내 기가막혀서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제 주일날 목사님이 탕감하라 탕감하라 해서 아멘 그랬더니, 자기는 탕감할 일이 없었는데, 아침에 이런 일이 생기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탕감받았다. 제가 아니라고 했다. 저는 탕감이 뭔지 모른다. 나를 도둑년으로 취급받으면 안되니까, 아니에요, 제가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갚아드릴게요 하니까, 탕감한대잖아! 하는 것이다. 재밌는 사실이, 성경에 탕감받고 나왔는데 빚진 자를 쳐다봤는데,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이 없었으면 그랬을까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그렇지만, 지금 현재, 빌려준 사람을 만나면 돈 달라고 하겠는가? 달라고 할 것이다. 탕감받고 쪽팔려서 나왔는데 말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시니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으니까 이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입장에서는 탕감받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고맙지도 않다. 잃어버리지도 않게 해야지? 왜 탕감받고 쪽팔리게 하는가? 왜 내가 열심히 일하자고 하는데, 눈깔을 어디에 두고, 내가 탕감받게 하느냐고 화가 나는 것이다. 혹시 그 자리에서 내가 빌려준 사람이 나타나면 돈 달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지 않고, 내 마음을 붙잡으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 나 믿느냐, 테스트하는 것이다. 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믿는다니까, 믿으라고 말씀해주시는데, 내가 믿음이 없으니까, 막 생기려고 애를 쓰는데, 믿음이 있으려면 아멘 하고 주님을 붙잡고, 많은 것을 탕감해주시고,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이러신거죠? 하면서 감사하다고, 하나님의 언어를 구사했으면, 복에 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빌고 빌어서, 3000장을 또 갖고 나왔는데, 또 잃어버렸다. 탕감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때 순간 깨달은 것이, 내가 버는 모든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데 내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는 상징적인 행위가 십일조라고 배웠는데, 내가 하나님을 돈의 주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나보다를 깨달았다. 또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그때부터 십일조를 내기 시작하고, 그것도 해결이 되었다. 재밌는 것은, 하나님이 교훈을 주기 위해서 저지르는 일들은 반드시 해결되게 되어있다. 두번 다 탕감받았다. 너무 놀랍지 않은가? 탕감해주신분 지금 떼부자 되었을까, 헌부자 되었을까? 떼부자 되었다. 누구를 탕감해준건데? 나를? 믿음없는 여자를 십일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돈 없을 때 그 상황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것이다. 일도 다 해결해주셨다
자율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자유함 가운데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을 배우면, 놀라운 힘이 일어난다. 억지로 하는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때 돈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사하다고, 상징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구나. 감사한 일이 일어날 때, 나는 재수없는 년인데, 이 감사도 하나님의 것이군요라고 돌려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야지 복을 받고 살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교훈을 얻어서 자유함 가운데 조절하는 능력을 배웠다
저는 남편에게 그렇게 별로 불순종해본적이 없다. 그리고 모든 일에, 남편이 목사면,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어서 교회 안에서 사모를 하는 것도 자유함 가운데 조절하는 능력이다. 너무 섬기고 싶었지, 억지로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강의도 너무 재밌게 하고 있다. 자유함 가운데 조절하는 능력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있다. 여기서 권세가 부려지고, 권위가 생기는 것이다.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내것이기 때문이다
저희 남편이 설거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감사하다. 한숨을 푹푹 쉬고, 설거지를 해야하냐고 하면, 얼마나 보는 사람도, 시킨 사람도 힘들겠는가? 차라리 내가 하겠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설거지 다 했을텐데, 남편이 너무 기쁘게 한다. 아침에도 뭘 마시고, 컵을 놔뒀다. 일관성 약속했으니까, 설거지는 무조건 자기가 한다니까 말이다. 나오기 전에 달그닥 소리가 나니, 정리를 하는 것이다. 지금 가야하는데, 왜 씻냐고 했더니, 갔다와서 내가 할테니까 놔두라고 했더니, 설거지는 내 몫이니까, 여기가 깨끗해야, 은미가 편안할거 아니야? 이렇게 사랑을 받는데, 어떻게 자유함 가운데 조절하는 능력이 발휘되지 않겠는가? 남편도 나도 자율성이다. 억지로 하면 시키는 사람도 관두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시켰을 때 억지로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일 하고, 상 못 받고,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항상 이야기한다
자율성이 생기면 그 사람 속에 Will, 의지력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말하는 것만큼, 상상력이 번져나가고, 상상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야 하는 때가 이 시기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가장 세상에서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가 이 때이다.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에게 하늘 나라 언어를 막 쏟아져내야 하는 것이다. 감당하던지 말던지 말이다. 하나님,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성령님이 영원을 열어놓으셨다. 영원의 세계에서는 쏟아내는 것이다. 공부, 언어를 마다하지 말고, 싹다 긁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상력의 폭을 넓혀야만, 내 속에서 창의력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놀라운 상상력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창의력이 만들어진다.
또 하나님이 그 사역에 나를 불러주실지 몰랐다. 어떻게 찌질이로 자란 나를 가정사역자로 불러주시는가? 가정 사역 안에 이렇게 많은 분야의 말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레헴에서 18개 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더 안 오겠다고 해서, 3년이 지겹다고 해서 2년짜리로 한 것이지, 마음 같아서는 수십개도 더 만들 수 있다. 도씨 집안에서 나온게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었더니, 언어의 주인이신 것이다. 언어의 주인이 가지고 계신 언어가 기가막힌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주세요. 다른 분야는 모르겠는데, 가정 사역에서는 넓힐 수 있는 수평선, 지평선 다 넓힐 수 있도록 축복해주세요. 당신의 분야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상상력을 열게 해달라고 하면 열 것이고, 꽃이 피고 열매도 맺을 것을 믿는다
그런게 아니면, 그 사람 속에 수치심이라는 것은 부적절한 느낌이다. 자기가 부적절한 존재라는 느낌이다. 자기가 속해 있는 어떤 공동체 안에서 룰이 있고, 법을 선포했는데, 그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부적절한 존재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건강한 수치심은 우리에게 굉장히 필요하다.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란 말씀이 있다. 그리고 죄를 짓는다. 아담아 어디있느냐 했더니, 아담이 자기가 벗었으므로, 뭐하여 숨었다고 했겠는가? 뭐하여? 부끄러워?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벗어서 부끄러웠으면 건강한 것이다. 죄를 지었기에, 벗어서 부끄러워서 숨어있다고 했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건강한 부끄러움이 작동했을텐데, 변질된 부끄러움이 작동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되어있다. 벗었는데 왜 두려운가? 벗었으면 두렵지 말아야 한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하는데, 서로에게 실수하더라도, 책 잡혀서 연자 맷돌을 메고 물 속에 빠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하는 일이 다 아름답게 보이는 눈이 있었겠지만, 남편의 실수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황 목사는 저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그게 너무 고맙다. 남편이 아내를 부끄럽게하면, 자기는 문제가 안되겠는가? 저도 남편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에게 하는 일마다 잘해주려고 애를 쓴다
건강한 수치심은 나로 하여금, 오리지날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데, 변질된 수치심은, 수치심 안에는 불안이 있고, 두려움이 있어서, 그러므로 사람이 은밀해진다는 것이다. 사람들 모르게 작동한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데서, 따로 자기 판이 깔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부끄러워 숨었으면, 하나님의 판 때문에 숨은 것인데, 돌아오면 하나님의 판 밖에 없는데,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는, 내 판을 짰다는 것이다. 내 판에서 두려우니까, 내가 당신 판에서는 못 놀겠고, 내 판을 만들겠다고 숨어버리겠다고 한 것이다. 판이 달라진 것이다
남편에게 부끄러워서 미안하면, 사건이 생기면 제가 부끄럽다. 부끄러우면, 남편에게 얼굴을 못 든다. 미안하니까 말이다. 그러면 우리 남편이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고, 부끄러워하는게 당연하지, 어떻게 너네 집은 그 모양이라고 하면, 부끄러움으로 속이 상하는 일이 되면 치고 올라올 수 있을텐데,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은미야 괜찮아질거야, 하나님이 풀어갈거야, 이 순간만 견디면 된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나의 부끄러움이 안 부끄러워졌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친정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남편이 화가 나서, 창피해죽겠다, 어떻게 너네 집은 그 모양이라고 소리지르고 한다면, 두려워하므로 숨었나이다가 된다. 친정에서 사건이 생겨도 남편에게 말할 수 없다. 그런 남편이라면, 투철하게 철갑을 입고, 남편이 이야기한다면, 그래서? 네가 뭐 보태줬냐? 라고 싸워야 할 것이다.
부끄러워서 숨은 것과, 두려워하고 숨은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두려움이 작동하니, 이게 문제인 것이다. 자유함 가운데 조절하는 능력으로 법을 잘 배워서, 의지력을 배워서,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별하고, 수치심이 아니라, 자율성으로 작동해야 하는데, 수치심이 작동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약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강자를 알아서, 눈치보고, 아양, 아첨떠는 사람이 만들어진다. 강자를 어떻게 해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란 자기 판이 깔린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부적절한 존재가 아니기 위해서 어떻게해서 인정받겠다는 인정 욕구가 작동되고, 혹시 강자가 나타난다면, 강자를 향해서 안티해보겠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된다
교회 안에는 왜 이렇게 안티가 많은지 모른다. 성향이 어떠냐면, 걸어가다가 발에 모래알이 끼면 털어서 버리면 되는데, 그런 모래알이 있다. 기분나쁘긴 한데, 서서 털자니 별건 아닌거 같고, 계속 같이 걸어가긴 해야하는데, 발가락에 걸리는 것이다,. 이것을 안티라고 한다. 비가 우중충하게 오는 날에는 수제비를 먹으면 좋은데, 아내가 수제비 먹자고 이야기했더니 남편이, 무슨 오늘같은날 수제비냐, 소화 안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 같은날 수제비 먹으면 좋을텐데, 당신 먹고 싶은거 있냐고 했더니, 뭘 그런걸 먹자고 하냐고 한다. 뭘 먹겠냐고 물어봤더니, 내가 아냐, 너가 해주는거 먹지 하는거, 이런게 안티이다. 대책도 생각도 없으면서, 그냥 반대하고 싶은 것이다. 할 줄 아는 능력은 없고, 쫓아가자니 쪽팔리고, 자기가 팔로워하는 쫄력이 없는 것이다. 쫓아가기는 싫고, 자존심은 상하나, 대책도 없고, 어정쩡하게, 내 신발 속의 모래알같은 역할을 감당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서도, 공동체에도, 어디서 그런 사람이 있다. 안티하지 말고 대책을 주라. 왜 안티를 하냐면, 그 사람 속에 수치심, 두려움이 있어서 은밀히 행하고, 사람들을 깐쪽 약올리는 것으로 자기가 약자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거짓이 있는 것이다. 안티를 걸어서 리더가 되는 방법은 없다.
만약에 집안에서 남편이 안티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그 권위를 인정해줄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리더십에서는 빼버려야 하는 이야기인데, 리더십이 없으니까, 깐쪽깐쪽 신발 안의 모래알처럼, 계속 털기도 뭐하고, 걷기도 뭐하고, 같이 걸어가자니 안티고, 안 가자니, 불쌍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값이 떨어져서 불쌍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그 사람 속에 부적절한 것, 자기 스스로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부적절한 짓만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독은 도벽, 거짓말, 간음, 이런 것을 설명했다. 보통 결벽증이다. 우리는 전문적인 언어로는 강박증이라고 한다. 집착,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아이가 어릴 때도, 남의 집에 가서 화장실도 못 가는 아이들도 있고, 이거저거 닦아야 하고, 밥도 자기 그릇이 아니면 못 먹는 아이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일어나면 닦고 안고, 한번 썼던 것을 못 쓰는 아이가 있다. 왜 그럴까? 항문기에 걸려있다. 여기서 자유와 조절을 균형있게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유만 경험하고, 놔두고, 방임하면 무법주의자가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아이가 되고, 너무 법에 쫄려있으면 강박, 집착으로 가기도 한다
아파트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이, 담배 하나 피려고 나와보니까, 외제차들이 쫙 있는 것이다. 이놈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거야? 이렇게 애써도 돈을 벌 수 없는데, 이게 얼마짜린데, 몇대야? 우리같은 아파트에 이런 차를 몰고다닐 수 있어? 하니, 주머니에 열쇠가 있어서, 열쇠를 들어서 긁는 것이다. 삐용삐용. 무법주의자이다. 이런 무법주의가 또 나중에 가면, 사회의 안티를 거는 성향이 되어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로 발전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진다. 이때는 적절하게 아이가 옳다 그르다를 배워야하지만, 때려서는 안되는 때이다. 이때는 떄린다는 것이, 죄 때문에 때린다는걸 모르기 때문에, 벌을 주는 의자에 앉아있어라고 하는 것이다. 5분 해서, 큰 시계 해서, 초가 돌아가고, 다섯 바퀴 돌면 된거야. 뭐라도 아이가 쉽게 자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아이로 하여금 벌을 받는 것,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안 주면서 벌을 주는 것이지, 떄려서 벌을 주는 것은 어린 것이다
그래서 3살쯤, 남근기 이야기할 때, 회초리로 때리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손으로 때리지는 말아라. 칭찬하려고 손을 얹으려고 하면, 때리는 줄 알고 피했다. 몸으로 폭력의 도구를 삼는 것은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건너가도록 하겠다
여기서 일어나는 간음은, 두려움으로 불안해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이때서부터 자위행위를 하는 아이들도 생긴다. 너무 어린데, 그 아이가 다른 방법, 성기를 만지면서 자위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안정감이 있게 만들어내는 수건, 이불, 애착의 대상을 못 놓고, 인형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이것도 한 종류의 자위 행위이다.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거라도 없으면, 아이는 천방지축으로 난리를 치는 버릇없는 아이가 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항문기의 이야기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하는데, 오늘 남근기를 해야한다
남근기는 만 3살때부터 시작한다. 3자는 2.5도 될 수 있고, 아이의 상황에 따라서 이 아이가 이 시간을 지났는데, 자기 스스로에 남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여자 아이가 여자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할 때, 벌써 남근기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쟤하고 결혼할래 라는 것은 남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3살에서 7살이라고 하는데, 요새는 만 6살 정도이다. 아이마다 다르다. 어떤 아이는 7살에도 남근기가 안 끝난 아이도 있다. 이 시기의 성장 발달을 이루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남근기는 남자의 뿌리라 성장이 발달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남자라, 상징적으로 쓰는데, 여자도 이때 발달하고, 성기의 감각이 시작된다. 구강기에는 청각이 발달한다. 항문기에는 시각이 발달한다. 그리고 남근기에는 감각이 발달하는 시기라서, 모든 몸에 있는 감각들이 새롭게 힘을 얻고, 센스를 갖게 되고, 그래서 아이가 전에는 엄마의 젖을 먹어도, 엄마의 젖이 성적으로 부드러운 것은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날 엄마의 젖을 빨면서, 엄마의 여성의 부드러움이라는 것을 감각으로 느끼게 되는 시기가 3살 때부터이다. 그러니 만3살된 아기 젖을 먹어야 할까? 아닐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늦게까지 아기에게 엄마의 젖을 주면 안된다.
그 아이는 이미 남성, 여성을 알아가는 시기이기에, 이 시기가 되면, 아빠가 딸을 목욕시키는 것보다, 아빠가 아들, 엄마가 딸을 목욕시켜서, 너와 나는 몸으로 닮았다는 것은 확인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아빠가 딸을 좋아한다고, 7살, 10살 되었는데, 우리 딸 아빠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 가족이에요 하면 안된다. 10살짜리 딸 아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비비고, 뽀뽀하고, 안아주고, 무릎 위에 앉히면 안된다. 이제부터는 옆에 앉히셔야 한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그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 이마에 뽀뽀, 볼에 뽀뽀는 좋은데, 입맞춤은 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이 아이가 여성으로 발전하기 위한 첫 번째 시기에 온 것이다. 좋은 남성의 관계, 아버지의 관계를 배워야하고, 남자, 남성이 무엇인지를 아버지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아빠하고 목욕하고 싶다고 해서, 너가 여자이니까 엄마하고만 하는거야. 아빠한테도 네가 얼마나 예쁜 여자로 성장하는지, 가릴건 가리고, 보여줄 건 보여줘야해. 그래야 외부에서 남자들이 어쩌구 저쩌구 할 때, 가릴건 가리고 보여줄 건 보여주는 남자 / 여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집 안에서는 내 마음대로 한다면, 밖에 나가서 일 당할 수 있다는거 알고 계시는가?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시기에 남근기를 지나가면서, 성기, 성적 감각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이때 보면 아이가 잠을 잘 때, 자기 손을 바지 속에 만지작 거리며 자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감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감각은 발전해야 한다.
그래서 이때서부터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너무 중요해진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남근기라고 하면, 시기를 지나갈 때마다 세 가지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관심이 무엇인지, 만족을 어떻게 얻는지, 이 세상을 어떻게 알아가는지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일관성으로 믿음을 얻어야 하는 구강기가 지나가면, 신앙 안에서 자율성을 배우는 항문기가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남근기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로 끝나지 않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확고하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야 하는 것이다. 상상력을 펼치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십일조도 내는데, 내가 누군지 몰라서 꼴아박는 사건들이 생기니, 많이 아는 것으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터졌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가? 땅에서 볼 수 있는 예수입니다. 당신을 대신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땅에서 예슈여라고 부르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대답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살고 있는 것을 성령이 증명해주고 계신다. 이 땅에서 다른 어떤 존재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틀이 남근기에 짜여져야 한다
여기서 전-정체성의 확립이 이루어진다. 확립하기 위한 정체성의 틀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이때에 전-정체성이 어떤 것을 의미하냐면,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결정되는 시기이다. 내가 남성을 가질 것인지, 여성을 가질 것인지가 결정되는 시기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아이가 혹시라도 남자 아이인데, 인형을 갖고 노니까, 너는 기지배니? 이런 말 하면 안된다. 절대로 성이 혼동될만한 단어를 사용하면 안된다. 남자 아이인데, 왜 이렇게 기지배처럼 생겼어, 꼬추 있어? 없어? 사람마다 이야기하면, 나는 남자가 아니게 생겼나 하면서, 자기 정체성의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가 머리를 길러주지 않았다. 남자 아이를 원하셔서 머리를 짧게 짤랐다. 저는 머리를 기르는게 소원이었다. 머리가 짧으니까, 언니한테 하는 말이, 큰 딸은 기지배처럼 생기고, 둘째 놈은 딱 아들놈처럼 생겼네. 저한테하는 말이다. 얼마나 혼동되겠는가? 지금은 안된다. 제가 애를 둘 낳았으니까 말이다. 그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 프로이드가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더라. 우리 부모님이 그걸 들어보지 않아서, 당신들의 욕심으로 아들을 원했다고, 나를 아들처럼 해야지, 셋째 아이가 남자가 태어난다고, 나를 남자 아이처럼 성장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나는 진짜 여자 같은데 말이다.
그러므로 전-정체성의 틀을 형성하는 이 시기에 얻어야 할 모판이 주도성이다. 내가 무엇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가 확고하게 있어야만 한다. 내가 회장인 것을 알아야 회의를 주도하고, 사장인 것을 알아야, 자기 회사를 움직인다. 내가 목표, 방향을 정하고, 이리저리 해야한다, 방향성을 정하는 것이 사장인데, 의자에만 앉고 자기 역할을 안 한다면, 누구인지 몰라서 주도할 수 없다. 클래스에서 반장이 되었다면, 반장 주도력을 가져야 한다. 줄반장은 줄을 알아야, 줄을 어떻게 할 것 아닌가? 조장이 되었으면, 리드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조장이 되었는데, 어떨결에 되었다고, 조장 싫다고 하면, 그런 조장을 뽑은 조는 어떻게 되겠는가? 여자가 결혼해서 아내가 되었는데, 어떨결에 결혼했어, 어떻게 아내가 되었는지 몰라, 어쩌다가 애를 낳았을까, 몰라, 어떻게, 싫어, 하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애를 낳았으면 엄마가 되는 것이고, 결혼을 하면 아내가 되는 것이고, 남편이 첫 월급을 탔는데, 나 혼자 쓰기도 아까운 것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더니 갈라써야 한다. 너는 하루종일 놀면서, 너는 왜 이거가지고 먹냐 하는 남편이 있다면, 또라이 아닌가? 당연히 둘이 먹는 것이지, 처음부터, 너는 네가 벌어서, 나는 내가 벌어서 먹는다고 계약결혼을 하던가, 괜히 자기만 일하는게 화가 난다고, 너는 하루종일 집에서 뭐했냐고 물어본다. 이 여편네가 말이지, 남편이 일하는 동안에 놀고 먹을 수 있어? 그래도 너무 귀한거 아닌가? 아내가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집에서 일하는게 너무 많다. 계속해서 치워도 또 있다. 별일 아닌데, 월급을 안 줘서 그렇지 일은 되게 많다. 그러면 자기가 집에 있어봐라. 뭘 그렇게 쉬운가 말이다. 살림을 하는 여자는 진짜 할 일이 많고, 살림을 안 하는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못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결혼한 그 여자를 책잡고, 야단치면 되겠는가? 하루종일 쉬었나보네. 더 쉬어. 내가 힘들긴해도, 내가 해줄게, 이런 아량을 가지고 계시면,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야단을 맞지 않겠는가? 당신이 안 쳐도, 하나님이 반드시 그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그 여자 채찍질한다. 아내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내고, 속상해서 싸우고, 남편이 돈 못 번다고, 아내가 돈을 벌고, 인상 박박 쓰고, 너 만나서 팔자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하나님이 야단칠 수 없다. 여편네한테 야단을 너무 많이 맞아서, 하나님이 보기에도 불쌍하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가? 남편을 긍휼히 여김이 쏟아지고, 여자는 나가서 열심히 일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 여자를 야단쳐야 한다. 하나님이 야단치도록 놔둬야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박살을 내고, 하나님이 일어나게 부활시키는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여자가 평생을 소리지르며, 일 안 하고, 가족을 책임지지 않냐고 했더니, 내가 나가서 일하는 것만큼 네가 야단을 쳤으니까, 내가 나가서 일해야 하는가? 해도 욕 먹고, 안 해도 욕 먹을거. 이왕이면 안 하고 욕 먹는게 낫다
뒤섞인 실타리, 블랙홀 같은 아빠, 아빠에 대한 이야기 )
이 아버지가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이 아버지는 자기가 평생 일했는데, 이리저리 당해서, 열심히 하는 남자들의 공통 마음이 돈 벌어서 가족 잘 살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남자들 속에는 열심히 일하면, 가족들이 그 돈 가지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아빠는 일은 했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당해서, 돈 한 푼 벌어보지 못하고, 망하고, 가족들을 도울 수가 없었다. 지금 당신이 한 집에 살면서,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해결도 안 해주셨고, 24년을 그렇게 살고 계신다. 딸들의 용돈, 나라에서 나오는 연금도 한푼도 안 쓰고 모아놓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수치심인가? 불신인가?
이분이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혼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이 집의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이 집의 가장인데, 이 자리가 돈을 못 번다는 것 때문에 흔들렸다. 정체성이 흔들린 사람들이 하는 것이 있다. 정체성의 틀은 주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 속에 죄책감이라는 판이 생긴다. 이것은 수치감과 다르다. 수치감이란, 변질된 수치감은 어떤 공동체가 어떤 법을 정했는데, 그 법이 그 사람에게 부적절하다, 이 법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공동체가 주는 부적절감이다. 이 아버지에게 이게 있다. 가장이라고 하는 세상의 법을 이루지 못한 부적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도 흔들렸기에, 죄책감이라는 양심의 가책, 가장의 노릇을 못한 것은 돈을 못 번 것이지만 나는 애썼다. 돈을 벌지 못한 것 떄문에 가책이니, 내가 니들이 주는 돈을 쓸 수 있겠는가?
한푼마다 다 모아서, 캐리어를 고치는 이유도 다 나 죽고 난 다음에 뭐 남기기 위해서인가? 죄책감이 양심의 가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돈 못 벌어서 그렇다고 말이다. 그 아버지가 팔다리가 없는가, 성실하지 않는가? 캐리어 뜯어섯 고쳐서 팔아서, 그것도 또 모으고 계시지 않는가? 성실하신 분 아닌가? 나이가 80인데 말이다. 그러면 자식들이 보기엔 큰 돈이 아니고, 거지같아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 80이 되어도, 내가 한번도 쉬어본적이 없다 이런 것이다. 뭐 좀 해달라는 것인다. 나 인정 좀 해달라. 내 인생은 뭐냐, 너희들이 나를 위해봤느냐, 한번이라도 내 입장에 서봤는가, 걸인 취급하듯이 용돈이나 주고, 밥이나 먹자고 하면 내가 기뻐해야 하는가?
이 딸이 어떻게 아빠를 바라봐야 하냐고? 두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긍휼한 마음 전에, 아빠를 향해서 회개하셔야 할 것 같다. 아빠는 망한 죄, 돈을 못 번 죄 밖에 없다. 아빠로서, 아빠가 아니고자 한 것은 없는 것 같고, 아빠이고자, 남편이고자, 열심히 그 남자의 인생에서 일을 했는데, 일이 잘 안되고, 하려고 했는데도 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자기 나름대로의 변명, 설명, 해명을 아무도 안 들어주는 것이다. 너는 돈 못 벌었고, 엄마가 생계를 해야했으니, 엄마만 큰 일 하고, 고생한 것 같고, 나는 고생을 안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여편네 돈으로 밥을 먹었을 떄, 내가 얼마나 고난의 눈물, 쓴 물 마시면서 살았는지, 너희들이 모르느냐? 어떻게 아빠가 돈 벌지 못했다고 값이 없느냐?
따님, 아빠를 아빠로 바라보면 좋겠다. 만약에 딸 하나라도, 당신이라도 아빠를 아빠로 바라볼 수만 있으면, 아빠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치유되지 않으실까? 아빠가 돈만 못 벌었지, 넉넉하게, 우리를 돈으로 풍족하게는 못해줬어도, 아빠가 살아계셔서 나는 고마워요. 감사해요. 그리고 지금이라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좋겠어요. 아빠 그냥 건강하게만 살고 계시면, 내 마음에 아직도 상처가 있으니까, 아빠에게 애교떠는 딸은 못되도, 아빠를 고마워하는 딸이 여기 있잖아요. 그 말 한 마디만 해도 아빠가 살아날 것 같다. 80이면 오늘내일 죽을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아버지를 돌아가게 하신다면, 당신은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팔짱도 끼어보고, 밥 먹으러 가기 싫다고 하면, 사가서 먹어보라. 아빠가 밖에 나가서 창피하게 딸이 나가서 사주는 공밥 먹는 것, 내가 만원이라도 벌어서 너 주려고 모으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지 않는가? 손 내밀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거 아닌가? 그 아버지를 위해서 더 이상 수치감으로 작동하지 않으시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시게, 아버지의 정체성만 살려주면, 1년이라도 살려주면, 딸 하나 때문에, 그래도 내가 아빠구나란 것으로 기뻐하면서 돌아가실 수 있지 않을까? 이게 교회 아닌가?
인도에 언터쳐블이라고, 카스트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기독교가 그 사람들 가운데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하루에 300명씩 예수를 영접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취급 안되고, 짐승이라고 취급되는 거기에 말이다. 그 잘난 선교사들이 가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나와 당신은 형제입니다. 그 말이 그 사람들의 정체성에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데, 나를 짐승으로 여기는 여기서, 돈도 있고 잘난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살면서 나를 형제라고 하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나는 똑같다고 이야기하는지 말이다.
정체성이 살아나면, 그 사람이 사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황은철이 이쁘다고 한다. 너 아니면 다른 여자랑 결혼 안 할거라고 했다. 저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뭔지도 모르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아버님이 나보고 은미 너 이쁘다고 한 것, 몇마디 아닌데, 내가 살아났다. 이 아버지도 살아날 수 있다. 나는 뭐냐? 나를 위해주지 않는가. 이런 말 하셨다지 않는가? 좀 위해주면 안될까? 80년 동안 아무것도 못하셨는데, 지금 돈 벌어서 당신에게 주시겠는가? 돈 때문에 맺힌 거니까, 그래서 돈을 모으려고, 연금도, 용돈도 안 쓰고, 사준거마다 다 방에 재워놓고 안 쓰고 계시지 않는가? 나 니들한테 준게 없어서, 너희들이 준거 쓸 수 없다고 한거 아니겠는가? 마음을 좀만 쓰면, 그 아버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끈을 가지고 물어봐주셔서 감사하다.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갈등할 수 있어서 고맙다. 아버지 돌아가실날 얼마 안되었다는거 아실 것이다. 사람은 재수없으면 아버지처럼 된다. 우리도 예수님 열심히 섬기다가, 세상적으로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이지, 열심히 주님을 섬겼더니, 재수없어서 사돈댁에 들어가서 1년을 살았다. 은혜로 해석하면 은혜이고, 재수없으면 재수이다. 아버지가 평생 일하시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을 위해서 손 내밀지 않고, 밥을 못 먹더라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고, 틀니 해놔야겠다고 말할 수 없는 자존감이 상한 상태이다. 당신은 주존감이 있으시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아빠 미안해요, 용서해주세요, 아버지는 항상 아버지로 계셨는데, 돈을 주지 못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아버지의 값이 떨어지게 만든 나를 용서해세요.
제가 아버지가 있어서, 아직도 고아라는 소리를 안 들을텐데, 반쪽짜리 부모, 엄마만 살아있었으면 편했겠는가? 아버지가 계시니까, 그만큼 집안이 견디고 살아가는 것이다. 남의 집 이야기라고 쉽게 이야기하는거 아니다. 저도 그런 아버지 겪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자식들 일 시키고, 떵떵거리고, 노동수용소를 운영하셨던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가 날까, 당신같은 아버지가 날까? 내가 보기엔 니네 아버지가 더 낫다. 이해가 되셨는가? 서로 자기의 입장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그럼에도 너는 아버지가 있잖아? 라고 하는 고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주도성, 엄청난 주도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정체성인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살려주실 수만 있으면, 엄마는 남편의 정체성은 살릴 수 없더라도, 딸은 아버지의 정체성은 예수 안에서 살려드릴 수 있으니 해보시란 것이다
정체성이 만들어지면, 이 사람 속에 주도성이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 속에 분별력이 발전한다. 상황을 분별할 줄 알게 되고, 환경을 리드할 수 있는 리더의 베이스가 깔린다. 사람, 환경을 리드할 수 있게 되고, 환경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의 자녀가 좋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하고 싶은가? 1) 기본 신뢰 2) 자율성 3) 주도성 만 가지면,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대통령 말고, 진짜 건강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말이다. 환경을 리드하고, 변화시키고, 상황의 분별력을 가지고, 지혜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명철, 총명이 일을 할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상황을 잘 분별하고, 환경을 잘 드리하는 엄청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런 아이가 우리로부터 태어날 수 있기를 축복한다
브라질의 동양 선교 교회가 저를 그렇게 만들어줬다. 저를 그렇게 만들어줬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임을 앎에도, 저를 리더로 세우고, 제 말을 아멘으로 받았다. 정체성이 생기면 주도할 수 있다. 내가 사모라고, 꼼짝 말라고 했겠는가? 나는 너무 부족한데, 하나님이 나를 시켜서 말씀을 선포했더니, 교회가 아멘을 해주고, 그 말을 가지고 일주일동안 살아간다고, 은혜받고, 변화받았다, 감사하다는 말까지 하는 것이다. 너무 감사하지 않는가? 그러면 사람이 살아난다. 리더가 생기는 것이다
이 교회를 통해서 열방을 리드할 수 있는 리더자들이 탄생하기를 축복한다. 그래서 어떤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이 동네에서 엄청난 리더들이 태어났다면서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태어났습니까? 라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냥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더라. 그리고 우리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얘도 대통령, 장관, 선생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예의를 다해서 그 아이를 존중한 것 뿐이라고 했다
이 교회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예의를 다해서 존중하고, 귀히 여겨주면, 여기서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 생산될 것이다. 토라를 알고 있는, 히브리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히브리인이 되면 안되느냐는 것이다. 왜 내 집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세계 정치와 경제를 휘두르는 선한 부자들이 되면 안되는가? 돈 갖고 노는 것이 다 유대인들 아닌가? 브라질에도 얼마나 못된 유대인들이 많은지 모른다. 얼마나 못된지, 까만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나쁜 짓은 너무 많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를 처음에 망하게 했던, 우리 둘이서 제품 하다가 망했을 때 나쁜 짓한게 유대인이다. 다 말아먹었다. 재밌는 사실은 유대인들은 말아먹을 때도 격 있게 말아먹는다. 완전히 한번도 자기는 잘못한거 아닌 것처럼, 다 자기 쪽으로 계산해서 챙기고, 우리는 깨끗하게 망하게 해주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장사꾼은 되고 싶지 않다. 우리 속에서는 진짜 선한 부자들이 많이 생산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바쳐 살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 남편과 60이다. 한 20년 살면, 우리 좀 더 잘 먹고, 입고, 행복하게 살고, 여행도 다니면서 사는 것을 꿈꿀까? 20년 밖에 안 남았는데 말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강건함은 80의 기준으로 잡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자식도 없고, 보낼거 다 보내고, 나 자유, 너 자유, 우리자유 얻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곘는가? 우리 목표가 재밌음인가? 어떻게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주를 위하여 말이다. 그게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 어떻게 하면 내가 죽고, 주님이 살고,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내가 죽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죽어도 걱정이 없다. 부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주님이 죽고, 나를 사리셨다고 한다. 주님이 사셨으면 나는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잘 살자. 당신 정체성, 내 정체성, 도은미라는, 황은철, 남자, 여자라는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다. 세살짜리에게는 너무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그렇게 안 중요하다. 사모님은 아직 중요하셔야 한다. 60될 때까지 말이다. 내가 여자, 남자이면 어떤가?
이번에도 남편이 제가 머리를 한번 길러보는게 소원이라고 한다. 제가 조금만 기르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견뎌보자, 저번에는 세번 하다가 못했는데, 그래서 자를 마음에,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정도 되니까, 자르고 싶고, 불편해지고, 예쁘지 않은데, 은미야 조금만 더 견뎌보라고 이야기하더라. 기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견디고 있다. 아침에 볼 때마다 견디고 있다. 거울을 안 보겠다고 빗고, 나는 죽었습니다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여자되는 것이 중요하다면, 진작 예쁜 길을 선택했을텐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남편이 길러보라는게 중요하다. 남편이 원한다니까 해보는 것이다. 남편이 원하는거 싹 다 해주고 싶다. 어느날 자기가 수염을 기르고 싶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목욕재개를 하고 나타나서, 수염을 기르시면 절대 안된다고, 금식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 남편이 처음에 수염을 기를 때, 저렇게 예쁘지 않고, 여기저기 하나씩 났었다. 수염이 원래 없는 사람이니, 하나씩 삐져나오니 얼마나 웃기겠는가? 이렇게 만드는데 한 1년 걸렸다. 성도들도 얼마나 불편한 모습을 봐야하겠는가? 권사님들이 저에게 닥달하기 시작했다. 왜 목사님을 저렇게 놔두냐고, 수염 깍게 강력하게 이야기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우리 남편을 향해서 확고하다. 목사가 멋 부릴 수 있는게 별로 없다. 넥타이 밖에는 별로 없는 것이다. 수염을 기르겠다고해서, 기르라고했다. 그런데 안된다고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권사님, 목사가 할 수 있는게 뭐 있어요? 그거라도 길러서 희망을 삼아서 죄 안 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사람 놔두세요 했더니, 진짜 1년 동안 너무 속상하신 분이, 가슴을 치시다가, 1년 되니까 저렇게 기르니까, 다들 괜찮다고 하더라. 그랬더니 어떤 권사님이, 일본 앞잡이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 앞잡이라도 당신 남편 아니니까 괜찮다고 해줬다
정체성이 확고하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남편과 싸우는 이유는 당신이 흔들려서 그러는 것이다. 내가 누군줄 알면,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 줄 알면, 흔들림이 없다.
죄책감이 만들어지면, 그 사람 속에 편을 가르는 성향이 생긴다. 분열성향이라고 한다. 그 사람에게 소유욕이 만들어져서, 가지는 것, 하는 것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려고 한다.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작동해서, 계속해서 자기 속에서 이야기한다. 너는 계속 부족하다. 네 잘못이다. 네가 잘해야 한다. 네가 가진 것이 없어서 그렇다. 네가 돈을 못 벌어서 그래. 배운 것이 없어서 그래. 자기 존재에 대해서 못하다고 부족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채울 수 없으니까, 돈을 가져야 해, 잘 생기고, 잘 먹어야 하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채우는 일들을 열심히 소유욕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채우기 위해 반드시 분열시킨다. 너와 내가 편을 가르고, 당을 만들고, 네편, 내 편을 만들고, 내게 속한 것은 선하고, 네게 속한 것은 악한 것이 되는 것이 죄책감이다. 나는 죄책감은 가져도, 죄인은 아니어야 한다. 손가락질을 너에게 하게 된다. 너가 잘못한 것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너의 부족분을 나의 몫으로 만드는 것이 죄책감이 만드는 사건이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죄인이라고 했는데, 죄인을 받아들이고, 아멘하는 사람이 없다. 나 부터도, 죄인이라고 하면, 아멘은 예의상 하는 것이다.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죄채감이다. 건강한 죄책감은 고개숙이게 되어있다. 이 죄책감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데, 애비가 되어서 돈 한푼도 내가 못 벌어다 줬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해서 자식들, 여편네 찾아볼 수도 없고, 이것을 세우기 위해서, 고장난 캐리어를 고쳐서 만원을 받더라도 니들 돈 안 쓴다. 이런게 죄책감이다. 그분은 병들어계신 것이다. 나보고 죄를 지었다고 한다. 나는 죄인입니다. 진짜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진짜 인정할 수 있으면, 당신은 건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그게 안되면, 목사님은 교회 올 때마다 계속 죄인이라고 해. 교회 갈 때마다 힘들고, 부담스러워. 왜 토라를 자꾸 먹으라고 하는지 몰라. 너무 말씀이 부담스럽고, 교회에서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가 멀어지게 되고, 멀어지니까 좀 편해지고, 제자비전교회 안 가니까 속이 시원하다. 훈련, 교육 안 받고, SJ 안와도 되는 교회에서 편안하게 교회 생활 하면 좋겠다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래서 분열해야 한다. 반드시 당을 짓고, 편가르기를 한다. 변질된 죄책감은, 내가 죄책감을 가졌으니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돈 벌어주지 못한 것 때문에, 니들이 나에게 양심의 가책이다. 내가 못난이인데, 열심히 했는데,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하면서 지적의 손가락질을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랬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열 성향과 소유욕구 떄문에, 여기에서는 중독이 생기기 시작한다. "장" 중독이다. 팔에 매는 완장이다. 완장중독, 명예중독이다. 여기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정치에서 국회의원되겠다고, 자기 집 팔고, 논 팔고 해서, 몽땅 망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의 값이 안되는데도, 정체서이 확립이 안되니까, 엉뚱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 죄책감을 커버해보려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명예 욕구, 중독이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권세를 잡고, 힘을 갖고 싶어하고, 돈을 갖고 싶어하고, 사장이 되고 싶어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명함만 파서, 나는 사장이라고 하는 허세를 부리고, 헛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이 다 여기에 걸려있다
교회에 오면, 여기는 힘을 분배하는 곳이 아니다. 당신이 혹시라도 직분을 받아도, 그 직분은 당신에게 파워를 주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큰 자가 되고 싶으면 낮은 자가 되고, 섬기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셨는데, 내가 온 것이 섬겨주려고 왔다고 예수가 이야기하신 것처럼, 그래서 가장 낮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우리보다 못한 존재로 오시고, 더 낮은 곳에 임하셔서, 우리를 섬겨주시러 오셨던 하인이 아닌 하인처럼, 더 밑에 있는 하인이 되어주셨던 예수님이다. 그래도 자존심이 하나도 안 상하셨다. 정체성의 틀이 하나님의 아들의 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래야한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쫄지 않을 수 있는 정체성의 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누구입니까? 브라질에서도 잘난 사람들이 많은데, 쫄릴게 없다. 우리는 손바닥만한 집에서 살고 있어도, 우리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바람도, 해도 불고, 태양, 달, 뜨거움, 찬 것도 다 부릴 수 있다. 그들을 사역자로 사용할 수 있다. 예수 안에서 다 주셨다. 아들 안에 있는 것을 몽땅 나한테 주셨는데, 하나님에게 있는거 예수님이 몽땅 다 가지고 계시고, 예수 안에 있는 것 모두 내가 누릴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분열할 필요가 없다. 분열보다 누추하고 꼴보기 싫은게 없다. 진짜 값이 없다. 절대 분열하지 말라
오히려 너무 자존심 상해서, 우스운 꼴이 되는 것 같지만, 에하드, 하나되는 것이 너무 값진 것이다. 남편이 미안하다는 말을 평생 더 많이 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에게 더 이쁠 것 같은가? 하나님이 황 목사를 훨씬 더 이뻐할 것이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미안하면 미안하다, 고맙다 계속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상 받아야겠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고 싶다.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내 모판은 안 그래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싶은데, 워낙 남편이 많이 해서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데, 주여, 나의 목표는 황 목사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중독에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걸리는 중독이 분열증이다. 분열증에 가까운, Dissociation한다는 멍 ֵ때리는 병도 있다. 지금 현실에서 빠져나가서, 말도 안되는 다른 현실 속에 들어가있는 병이 다 분열의 병들이다. 집안에서 이 여자와 살면서, 다른 여자와 사는 것을 꿈꾸는 것도 분열이다. 내가 이 사람과 사귀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이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딴 생각 하는 것도 다 분열이다. 정신적, 마음, 감성의 분열이 다 일어나고 있다. 내 속에 일어난 내 안에 있는 분열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내 마음, 생각 따로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 말미암아, 뜻, 생각 다 모으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내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용기, 원인, 계기도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 내 죄책감이 너무 커서,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아버지가 그러고 계신 것이다. 죄책감의 틀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벗어날 수 없는 더 큰 언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속에서는 기가막힌 상한 자존심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에게 지지 않고, 저 마누라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80노인이 살고 있다. 그 아버지를 무슨 방법으로 돌이키는가?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안에서 바라보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를 빌고, 회개하고, 오히려 용서보다 그 아버지를 귀히 여기고 사랑의 권리를 먼저 베풀어야 한다. 허다한 허물을 덮는 권리, 하나님의 날개를 피고, 예수의 그늘 안에 들어오는 날개이고, 예수의 가슴 안에 들어오는 것이 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반드시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분열하지 않고 하나되는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남근기는 정체서을 얻는 시기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말이다. 수요일날 오면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짝을 맞춰서 살아가는지, 동성애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할 것이고, 남성과 여성이 잘 형성되어야, 건강한 여성과 남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 되는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성이 아니라, 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가진 자가, 여자의 몸도 가지고 있으니, 여성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사건이 남근기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정체성의 하나로서의 여자, 남자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공부해보도록 하자.
[출처] 2021년 가정세미나 (성장학교) 4|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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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헵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