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 경북 영덕 울진 문화기행 - 신형호
출발지인 어린이회관 가는 하늘은 얼룩 구름으로 희끗희끗하다. 영덕과 울진으로 문화 답사를 가는 날이다. 잠에 취한 새벽 도로는 아직 고요하다. 회관입구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환하게 맞아준다. 같은 문학의 길을 가는 이들이라 고향친구를 만난 듯 넉넉하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렸을까? 수런거리던 차안이 일순 조용해진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 “바다다.”라는 한마디에 일행은 모두 소년 소녀가 된다. 출렁이는 물결이 차 안까지 밀어올 듯하다. 허옇게 부서지며 달려드는 파도를 볼 때마다 쿵덕거리는 가슴은 아직도 호기심과 순수의 열정이 남았다는 증거이리라. 동해와 허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버스는 큰 대게 조형이 인상적인 강구대교로 들어선다.
깔끔하게 단장된 해안을 따라 쉬지 않고 파도가 울부짖는다. 이름도 싱싱하다. 블루로드라고 불린다. 잠시 후 뭉게구름 속에 하늘을 찌르듯 서 있는 풍력발전기와 마주 섰다. 높이와 날개의 길이가 각각 80여m인 풍력발전기. 바람 방향에 맞춰 날개를 움직이는 모습이 여유롭다.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유유히 도는 그를 보며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그동안 너무 쫓기듯이 앞만 보고 허덕지덕 살지 않았는지? 쪽빛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를 몇 번이나 보고 지냈던가? 눈부신 구름밭 속에 흰 날개를 펼친 광경은 고고한 학의 군무로 해석해본다.
영덕신재생에너지전시관은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문화해설사의 자상한 설명이 맛깔스럽다. 그 중에서도 방향에 따라 돌아가는 노란 해바라기 에너지 정원이 인상 깊었다. 하얀 몸체로 만든 모형수소자동차도 너무 아름다워 운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전시장 밖의 정원에서 고산 윤선도의 시비와 ‘월월이청청(月月而淸淸)’이라는 조각상을 만난다. 여의주 닮은 동그란 구가 위에 놓여 있는 탑과, 앞에는 세 여자가 팔을 들고 있는 조각이다. 일 년 중 보름 명절, 달빛이 청청한 밤에 춤추고 노래했다는 설이 유래다. 이는 동해안에 분포하고 있는 대표적이 여성놀이로 영덕읍 노물리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축산항에 우뚝 서서 동해를 지키는 죽도산전망대에 올랐다. 나무로 만든 계단 길로 10여 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내려다보니 푸른 물결이 가슴에 안긴다. 쉴 새 없이 달려와 해안의 검은 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이 한여름의 기억을 다시 부른다. 고개를 돌리니 초승달 모양으로 휜 해안과 블루로드다리가 한눈에 안긴다. 건너편 산 정상에는 해묵은 봉수대가 지난 역사를 안고 장난감처럼 편안히 서 있다. 조선시대 왜구가 침략하면 몇 시간 내에 여기서 한양까지 보고되었다고 해설사가 얘기한다.
오후 여정은 목은 이색 생가를 거쳐 건칠관음보살상이라는 보물이 간직된 창수면의 장육사를 찾았다. 운서산 깊이 한참 구불대는 길을 돌아 천천히 절집 입구에 들어섰다. 고려 말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문득 우리 집 거실에 서각 작품으로 걸려 있는 선사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을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흥원루라는 강단에 들어섰다. 사진 찍기를 유난히 거부하고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주지스님은 참선을 오래 했다고 한다. 나옹선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나옹선사는 스무 살 때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맞았다. ‘왜 죽었을까? 어디로 갔을까? 나도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오랜 번민 끝에 선사는 답을 얻기 위해 출가를 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지공스님의 제자가 되고 큰 깨달음을 얻어 고려로 돌아왔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 대사도 나옹선사의 제자라고 한다.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퇴색한 대웅전 단청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 칠을 하지 않아 빛바랜 색감이 아름답고 정겹다. 장육사는 대웅전 삼존불상 뒤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가 특히 유명하다. ‘영산회상도’는 영취산에서 석가가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한 모임의 불화이다. 여러 보살들과 각 상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 채색 기법 등을 통해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불상과도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불화이다.
조금 왼쪽 계단을 올라 관음전을 찾았다. 좌우에 동자를 거느리고 모셔진 관음보살상은 색다르다. 정확한 이름은 건칠관음보살좌상이다. 일반적인 건칠불의 표면은 삼베위에 옷칠을 계속 입히는 것이지만 이 보살상은 삼베 대신에 종이를 사용한 것이 다르며 머리의 보관은 별도의 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인자한 듯 근엄한 표정의 얼굴에서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려는 보살의 마음이 전해온다. 경건하게 고개 숙이고 작은 소망을 빌었다.
다시 오른쪽 어깨에 푸른 바다를 끼고 7번 국도를 달렸다. 하늘을 가릴 듯한 송림 속에 바다를 등지고 우뚝한 ‘월송정’에 올랐다. 서늘한 바람이 먼저 반긴다. 달을 즐기며 노닐었던 옛 화랑들의 기개와 풍유가 생각나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말 달리는 소리, 호탕한 웃음소리가 어울려 밀려오는 물결 소리에 들리는 듯 사라진다. 바닷가 백사장을 천천히 걸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내 삶의 여정을 곰곰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절정이 아닐까?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초엿새 달이 또렷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즐겁고 뜻 깊은 유적지 탐방이었다. 무엇보다 마음 맞는 문우들과의 여행이라 뿌듯했고 가는 곳마다 살가운 인심이 아름다웠다. 늦은 밤 어둠을 가르는 버스 불빛만 고속도로를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