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집(효자도 권1,2,3,4)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제3권
언겸순호(彦謙馴虎)
縣令兪彦謙天安郡人 早喪父及壯追服盡禮 母歿守墓 泣血三年 一不到家 有兩虎來廬 後食其祭餘 一日病僧請宿廬舍 且盜入稻田 兩虎吼而逐之 汲道甚艱 黙禱泉卽湧出 朝夕奠杯酒輒乾 恭僖大王朝 㫌門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언겸순호 - 유언겸이 범을 길들이다
현령 유언겸은 천안군 사람이다. 일찍이 아비가 돌아가매 자라면서 뒤를 좇아 상복을 입으며 예를 다했다. 어미 돌아가매 무덤을 지키며 피를 토하듯 울며 삼 년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두 마리 범이 집 뒤에 와서 제사하고 남은 것을 먹었다. 하루는 병든 중이 제청에서 자고 싶다 하고 또한 도적이 볏논에 들었거늘 두 범이 소리하고 쫓았다. 물을 긷는 길이 매우 어렵거늘 조용히 비니 곧 샘이 솟아났다. 아침저녁으로 제사하는 잔의 술이 다 말랐다. 공희대왕(중종) 시절에 정문을 세웠다.
Ⓒ 역자 | 정호완 / 2015년 5월 15일
고전번역서 > 명재유고 > 명재유고 제31권 > 잡저 > 尹拯
효자 유공(兪公)의 행실에 대한 찬(贊) 신유년(1681, 숙종7)
자(字)가 겸지(謙之)인 효자 고(故) 유공 언겸(兪公彥謙)은 창원(昌原)이 본관으로 천안(天安)의 공사동(貢士洞)에서 살았는데, 중종조(中宗朝)에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장성해서는 처음처럼 3년 동안 참최복을 입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동안 집안이 가난하자, 자신은 몸소 농사를 짓고 부인은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봉양함에 있어 마음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예를 다해 장사 지내고 제사 지냈으며,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를 하는 동안 한 번도 집에 내려간 적이 없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관찰사가 그 효행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이에 정려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또 관직에 제수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며, 공은 벼슬이 호조 정랑에까지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만력(萬曆) 정축년(1577, 선조10)에 손여성(孫汝誠)이 천안 군수로 있을 때 희생과 제주를 갖추어 그에게 제사 지내고 그를 위해 전(傳)을 만들어 그 효성을 기렸다. 공의 가장(家狀)과 손 군수가 지은 전에 보면, ①호랑이가 여막을 지켜 준 일과 샘이 부엌에 솟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종종 진실된 효성에 감응하여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공의 지극한 행실은 애초에 이런 기적과 상관없이 귀감이 될 만하였다. 가장에는 또 “공은 독서를 좋아하여 어머니를 섬기는 여가에 반드시 스승에게 나아가 예(禮)를 배웠다.”라는 내용이 있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더라도 배울 줄을 모르면 그 자질이 완성될 수 없는 법이니, 여기에서 배움의 효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겠다. 가장에는 이런 말도 있다. 공이 첩(妾)을 들이고자 하여 이미 길일까지 잡았는데, 첩이 될 여자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그 첩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항상 신중하고 청렴했던 나머지, 네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내내 집은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으로, 물욕에 담담하기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의 아들 유경인(兪敬仁) 또한 지극한 효성이 공을 닮았으므로 조정에서 벼슬을 받아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로 일생을 마쳤으며, 손자 유명립(兪名立) 또한 효행으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니, 삼대가 효행으로 관부에 이름이 오른 것 또한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공의 사적은 또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찬(贊)하는 바이다.
마음에는 타고난 이치가 있어 / 心具生理사랑하는 마음을 양지라 하지 / 愛爲良知인륜은 하늘에서 나온 것인데 / 倫自天敍효성이 그중에서 으뜸이라네 / 孝首民彝사람에겐 누구나 부모 있으니 / 皆有父母누구인들 타고난 성품 없으랴 / 孰無性命그런데 어찌하여 요즘 사람들 / 胡今之人이 같은 효행이 드문 것일까 / 乃鮮此行어버이 주신 몸 생각 안하고 / 罔念親遺제 몸을 사유물로 생각한다네 / 私有厥身어느새 그 마음을 상실했으니 / 旣喪其心인륜을 어느 결에 돌아볼 건가 / 遑恤其倫아아, 하늘이 낸 효자 유공은 / 嗟哉兪公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넓어라 / 藹藹其仁자연의 그 천성을 온전히 해서 / 克全其天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시었다네 / 以事其親사람들은 공의 그 효성에 대해 / 人謂公誠범과 샘의 감응을 말하겠지만 / 感虎與泉내 말하고 싶은 건 공의 마음이 / 我言公心아들과 손자에게 전하여진 것 / 傳子與孫샘과 범의 기적이 있었다지만 / 惟泉與虎그것이 상서가 될 수는 없고 / 未足爲瑞자손이 효성을 이어받은 것 / 子孝孫孝영원한 복이라 말할 수 있네 / 是謂不匱아아, 아름다운 우리 유공은 / 嗟哉兪公순수한 효심을 지닌 분으로 / 惟孝之純그 행적 역사책에 올라갔으니 / 載籍所登누가 공과 짝할 수 있단 말인가 / 誰與公隣하늘이 본성을 내려 줄 때에 / 惟帝降衷똑같이 공평하게 주시었으니 / 匪有豐嗇내 공의 덕행을 기리게 되면 / 我贊公德이것을 후인들이 본받으리라 / 後人是式
이상은 바로 여윤(汝潤) 유군 헌(兪君瓛)의 증조부의 일이다. 유군도 효성스럽고 공손한 행실과 순수하고 꿋꿋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다. 옛날 우리 마을에 이덕규(李德揆)라는 어른이 계셨는데, 그분 역시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분이었다. 그분이 먼저 유군과 면식(面識)이 있어 자주 유군을 칭찬하곤 하였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마음으로 선(善)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나 집이 곤궁하여 학문을 하지는 못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뒤에 유군이 책 상자를 지고 우리 선친을 찾아뵙고는 서실에 머물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배우고 돌아갔다. 선친께서 일찍이 서울에서 돌아오실 때, 지나는 길에 그 사람의 집을 들렀는데, 그때 그 집안이 대대로 덕행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오언절구 한 수를 지어 찬탄하신 적이 있다. 내가 부친을 여읜 이후로 줄곧 시골에 묻혀 지내느라 유군과 서로 보지 못한 지 거의 10년이 되어 가는데, 얼마 전에 그가 갑자기 궁벽한 시골로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집안에서 보관해 오던 글을 보여 주면서 길이 남을 글 한 편을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가승(家乘)에 상세히 적혀 있고 손 군수의 전(傳)에 징험되어 있으며, 《삼강행실속록》의 기록이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다. 나는 글을 잘 짓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덕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래도 군은 계속해서 간청하는 것이었다.
아아, 옛글에도 “선조에게 선(善)한 행실이 있는데도 모르는 것은 밝지 못한 것이며, 그걸 알고서도 전하지 않는다면 인(仁)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아름다운 행실을 칭송하여 후세에 밝게 드러내는 것이 효도를 장려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런 효성을 장려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자신의 졸렬함을 돌아볼 때 그 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어찌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마침내 그 행실을 모아 기록하고 그 뒤에 찬을 붙이고는, 다시 그 뒤에 이렇게 전말을 기록하여 그에게 돌려주는 바이다. 증은 또 이렇게 삼가 쓴다.
① 호랑이가 …… 있다 : 유언겸이 어머니의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할 때, 호랑이 한 쌍이 나타나서는 3년 동안 여막을 보호한 일이 있었고, 또 그가 시묘하는 동안 우물이 멀어 고생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여막의 부엌에 샘물이 솟았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기찬 (역)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