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7:1~44)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에 몰두하는 성향. 이것을 각성해서 나와 다른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면 다행. 이런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요즘 경험하는 시절. 무라키미 하루키 소설가, '언더그라운드'라는 탐방 보고서, 옴 진리교에 대한 것. 지하철에서 독가스를 뿌려 많은 이들이 죽은 사건. 취재. 추종자들이 대부분 연구자. 한 가지만 생각하고 빠져 있는 것으로 인해 다른 것을 들으려 하지 않은 것. 그래서 입체적 사고가 형성되지 않은 것. 내가 옳다는 것에만 빠져. 무척 조잡한 논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조금 맞으면 매우 주술적으로 넘어가버리는 취약성. 공멸의 복음. 구원? 내가 사는 것을 넘어서 함께 사는 것.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것. 너는 어떻게 되었든 나는 살아야겠어 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착취하는 것은 공멸. 우리 기독교는 공멸의 복음을 전해왔음.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나만 이기려고 하는 것인지를 점검해야.
바울의 로마를 향한 항해. 276명. 단 두 사람도 마음이 안맞으면 끔찍한 위협이 될 수 있음. 그런데 이런 다수가 망망대해에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 끌고 가는 자와 끌려 가는 자... 등의 위험한 구조.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망망대해 위의 배. 하나의 세상 안에서 공생의 에너지가 흐르지 않으면 순식간에 파멸의 나락에 빠질 수 있음. 우리 가정, 공동체, 국가도 마찬가지. 단 1개의 은하계 안에서도 천 억개의 별...그런 은하계가 수천억개... 그중의 하나인 지구.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처럼. 지구는 지금 멸해가고 있음. 20~30대 목회자들을 보면 측은. 생태계가 너무 바뀌어. 존경받지 못하는 교회. 삶의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공생애의 길을 걸을까?
작은 배, 하나의 세상은 백부장 또는 선장. 선장은 방향 키, 백부장은 통제하는 칼. 이들이 서로 맞서면 공멸. 손잡고 사람들을 겁박해도 공멸. 이 둘이 화합하여 잘 항해하면 공생.
1. 공멸의 복음
1차적 위협은 '자연재해'였음. 사람 통제를 벗어난 절대적 사태. 이것으로 모두가 목숨을 잃는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자연재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 또 재해를 극복하고 나서 이후의 태도도 중요. 그레네 섬을 지날 때 거기 높은 산으로부터 북풍이 내려옴. 그리고 동풍과 만남. 그래서 광풍이 일어남. 닻의 기능을 망가트리고 배가 방황. 그런데 피할 수도 있었던 재앙이었음. 피하지 못했던 것은 공멸의 복음을 따랐기 때문. 9~11절, 금식하는 기간이 지났다는 것은 10월 중순. 그 때는 태풍의 위험. 그래서 항해가 제한되는 기간. 죄수 바울이 그런 말을 했음. 백부장에게, 항해 일정을 변경하자. 그렇지만 죄수인 바울이 호송책임자인 백부장에게 조언.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았기에 죄수로서도 가능한 것임. 선주, 선장과 의견을 맞춘 백부장. 여기서 60여킬로 가서 미항에서 피항하자는 것으로 합의. 책임자끼리, 그리고 당시는 순풍이 불어서. 그것이 복음이라 생각한... 그러나 그것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위험이 된 것임. 그들은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았고 생명보다 편리를 더욱 생각한 것이 문제. 지난 수요일 묵상집에서 사울이 다윗 잡는 것에 대해 첩보를 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는 말은 지금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임. 자신의 추태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는 문제. 나라를 위기에 넘기는 것. 이렇듯 항해의 첫단추가 잘못 끼워짐. 향후의 문제들도 명약관하. 겨우 극복했는데 암초에 부딪히니까 선원 일부가 구명복을 빼앗아 그들만 살려고 함. 다음 위기는 선원들의 치사한 행동을 바울이 알고 보고하여 못하게 함. 뱃머리가 모래톱에 걸리자 군인들이 죄수들이 도주할까봐(그렇게 되면 형벌을 군인들이).. 물이 얕아졌으니, 그러니까 군인들이 죄수를 죽이려고 함. 강박에 빠짐. 함께 고난을 당했음에도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행동만. 강박관념. 바울을 포함한 모두를 죽이려고. 주술같은 공멸의 복음에 사로잡힘. 선원들의 이기심과 군인들의 두려움, 강박. 이것이 세상을 망가뜨림.
그러면 이러한 세상에서 공생의 소망은 어떻게 시작되나? 1/276일뿐인 바울에게서 어떻게? 바울이 아니라 바울의 질문으로부터 시작. 바울이 걱정한다고 일이 이루어질까?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물었음. '지금 항해를 해도 되겠습니까?' 기본과 상식에 충실한 사람으로서 질문. 건의하고 거절당했으나 나중에 상황이 발생하면서 바울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니, 바울에게 무게가 실림. 행동의 결과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옳다면 행동하라!! 보편, 기본적인 상식 하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담대히 행동할 때 이루어짐. 바울의 말이 거절되었지만 그는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20~26절, 누구도 이 말씀처럼 말하는 자가 없었음. 선주의 이해관계, 키, 칼, 재능 등 등도 아무 의미가 없는 공멸의 위기 속에서 모두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두려운 상황이 되었음. 구원의 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광풍과 파도를 이길 수 있는 자만이 참리더가 되는 것임. 그것은 광풍과 파도를 지배하시는 존재만이 할 수 있음. 그러므로 그와 소통하는 자만이 리더가 될 수 있음. "절망 위에 계신 분과 통하는 리더"만이 할 수 있음. 다른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과 통하는 이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음. 바울이 지난밤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 있으니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임. 이 말씀 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뭉쳤음. 바울이 말한대로 될 것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도 바울의 말에 힘이 있음. 왜? 바울이 말한대로 되어가니까. 증거가 있는 반응적 태도가 아니라, 말씀의 힘에 애한 믿음의 반응임. 바울의 모습. 엄청나게 겸손.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러면서도 지극이 담대함.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러므로 지극한 "겸손"과 "담대함"이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2. 공생의 성취
사람들은 측정하면서 육지가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됨. 고대 선박들은 닻이 여러개가 있어서 사용. 육지가 가까워지면 닻을 통해 수심을 알게 됨.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축사를 하고, '이 떡이 당신들을 구할 것입니다.'하고 떼어먹게 함. 이 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마치 성찬식같이 떡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였을 것임. 낯설었던 사람들이 식구와 같은 공동체가 되었음. 그런데도 육지가 가까워오자 군인들이 다시 걱정하면서(죄수 도주) 죄수들을 모두 죽이려고 함. 42~44절, 백부장의 변화 "세상으로 질문하게 하라!" 백부장이 바울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졌음. 뭘까? 뭘까? 백부장은 바울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았음. 죄수를 잃으면 처벌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에게 도망하게 하는 정도로 뭔가를 깨달은 것임. 결국 276명 모두가 살게 되는 공생.
어떤 이들은 죽음과 부활로 이 성경을 비유. 바다는 괴물(리워야단), 어두움의 영역, 죽음의 영역. 그래서 바다로 들어간 바울이 모두를 살려 자신도 산다. 요나가 탄 배는 요나 때문에 침몰할 뻔했음.
지금의 세상은 신자들 때문에 살아나는가? 신자들 때문에 죽어가는가? 어쩌면 사도행전은 묻고 있는것 같다. "신자는 누군가?" 내가 살려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사람을 살리는.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한 사람을 통해서 공멸의 위기가 공생의 기쁨으로... 집단이 공동체로. 기본과 상식에 충실한 사람으로부터. '당신이 있으면 돼' '당신이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말하게 하는 사람이 '신자'임. 우리는 언제쯤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까? 예수님만 계시면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기능을 하게 되는.
나태주 시인.
"그 사람 하나가 세상의 전부일 때가 있었다. 그 사람 하나로 세상이 빛났던 때가 있었다." 가정, 교회, 국가에서 그런 한 사람이 그립다. 너가 그 사람이 되면 돼. 다윗은 블레셋에서 그렇게 유명한 지 몰랐다. 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 헌신만. 우리가 예수님의 손을 굳게 잡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