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경선 스님
수행·문화로 엮은 ‘범어 그물’ 펼쳐, 천상 물고기 건질 터
▲ 경선 스님은
“부처님 법을 널리 펴기 위한 나름의 방책으로 문화도량 조성에 매진하고 있다”며
“좀 더 많은 불자님들이 범어사를 찾아 금정총림에서 피어오르는
‘깨달음의 향훈’에 젖어 보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시골에 남아 있으면 결국 농사꾼이다. 산으로 들어 가 스님 되는 게 어떠하냐?”
성철 스님 3년 시봉 후
야반도주 해 범어사 입산
“행자 근기 약한 결과”
해인강원 대교과 졸업 후
토곡산 토굴서 화두 10년
일타·혜암스님 향훈 영향
신축 박물관 올해 착공, 예술·역사 스민 성보, 후대에 올곧이 전할 터
참선·강연·다도 향유, 선문화교육관 곧 완공, 재가자 위한 산문 활짝
조선불교조계종 종정에 오른 한암 스님을 시봉했던 김수학(金洙學) 거사.
훗날 한국불교 비구니계를 당당하게 일으켜 세운 인홍 스님,
비구니 수행도량 봉녕사를 중창한 묘전(妙典) 스님과도 인연 깊었던
김 거사는 출가가 꿈이었지만 장손 집안의 장남이라는 벽이 길을 막았다.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아들이 이뤄주기를 바라고 있던 차에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다.
“그리 하겠습니다!”
겨우내 내린 눈이 봄 햇살에 다 녹기도 전에 청년은 묘전 스님을 따라 파계사로 향했다.
그즈음 성철 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 치고 정진하고 있었다.
내심 묘전 스님은 그 청년이 성철 스님 제자가 되기를 기대 했을 터다.
청년은 우선 파계사에 주석하고 있던 종수 스님 시봉부터 들었다.
일우 종수(一愚 宗壽) 스님은 1963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에 오른 대율사다.
제자가 잘못했을 때 직접 나무라지 않고,
불전에 나아가 제자의 잘못을 고하며 잘못 가르친 자신을 참회했던 선지식으로 유명하다.
8개월 후 드디어 성철 스님 앞으로 갔다.
공양 마치고 잠시 쉬는 찰나 성철 스님이 나와서는 쌀뜨물 버려지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늦가을로 접어든 산의 기운은 매섭고 차가워 수채 구멍조차 얼어 있었다.
성철 스님은 느닷없이 수채 구멍을 파헤치더니 얼음 속에 묻혔던 쌀 몇 톨을 주워 냈다.
“이 쌀로 밥을 지어 먹어라!”
슬쩍 스쳐보다가도 눈에 거스르는 일이 보이면 그 즉시 불호령이 떨어졌다.
설거지 한 솥에 밥풀떼기 자국만 보여도 ‘이걸 일이라고 했느냐?’며 냅다 집어 던졌다.
잘못한 일 있어 부처님 전에 올리는 3000배는 알겠는데,
일 잘 해도 ‘고생했다. 3000배 해라’는 뜻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도 15살 행자는 묵묵히 시봉에 힘썼다.
그런 제자가 기특했는지 성철 스님은 만연(漫衍)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성전암에서의 10년 장좌불와를 풀고 김용사로 갈 때 성철 스님은 제자 만연을 앞세웠다.
그러나 시봉 인연은 3년이 다였다.
성철 스님의 직속 제자 되려면 10년을 배겨나야 한다고 들었는데
남은 7년의 세월이 억겁으로 다가왔다.
김용사에서 야반도주 해 범어사로 향했다. 범어사로 향한 나름의 연유가 있다.
1965년 3월 청담 스님이 지프차를 타고 김용사에 당도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성철 스님 스승인 동산(東山) 큰스님이 원적에 드셨어.
범어사 가는 길에 성철 스님에게 알려 주려 왔네.”
‘큰스님? 스승? 성철 스님보다 더 큰 도인이 범어사에 주석하고 있었단 말인가!’
범어사에는 전강 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었다.
자운, 성수, 광덕, 도광 스님 등 당대 내로라하는 선지식을 모시며
무언의 법향에 젖어갔고 법윤(法允) 스님과의 사제인연도 그 때 맺었다.
법명도 만연(漫衍)에서 경선(鏡禪)으로 바뀌었다.
강원 대교과를 마쳐 교학에 밝지만
‘이 뭐꼬’ 하나 들고 토굴에서 홀로 10년 동안 정진할 만큼 선기도 남다르다.
예서체 달인이요 서예계 거목이었던 청남 오제봉으로부터 10년 동안 서예를 사사했고,
한국 동양화의 토대를 닦은 청전 이상범 화백의 제자인
오진 이웅선으로부터도 10년 동안 그림을 사사했다.
초대 성보박물관장을 맡은 후 범어사가 품은 ‘보물’들을 16년 동안 관장했다.
경선 스님의 불교미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사부대중이 얼마만큼 신뢰하는 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궁금했다. 혹시 다음 생에라도 성철 스님 곁에서 남은 7년 시봉할 마음이 있는지.
“그 인연 닿는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행자근기가 약해 뭘 모르고 도망친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일을 잘해도 3000배하라신 건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일침이었던 듯싶습니다.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제자의 수행을 힘 있게 독려하는 데
성철 스님만한 분 찾기 어렵습니다.”
‘예불, 울력, 공양시간 등 세 가지만 잘 지키면 대중들 사이에 불화가 없다’는
동산 스님의 가르침은 범어사 가풍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큰일을 해 낸다’는 가르침을 전한 것이라 봅니다.
대중이 모이는 자리에 없다는 건 현재 이 도량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가한 이상 병고나 사고 등의 특별한 이유 없이 정진도량을 떠나지 말라는 뜻이요,
수행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경선 스님도 불음폭포가 떨어지는 양산의 토곡산(土谷山) 토굴(현 수암사)에서 정진할 때
사시공양만은 반드시 올렸다고 한다. “자신이 머문 이유를 확인하는 기회”라고 강조한다.
토굴 생활 동안 ‘적적하지 않으셨냐?’ 질문하자 스님의 미소가 만면에 퍼져간다.
“한가위 보름달 떠 있는데 찾는 이 없습니다.
바람 소리 옷섶에 들어차는 순간 ‘싸∼’한 느낌과 함께 적적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싸∼’한 느낌이 묘하게도 참 좋았습니다.
그 마음으로 토굴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 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하여 저는 토굴을 ‘월인산방(月印山房)’이라 이름 했었습니다.”
2011년 늦가을 스님은 부산에서 서화전 ‘월인산방’을 연 바 있다.
아마도 토굴정진 때 느꼈던 정취를 사부대중과 공유하고 싶었던 듯싶다.
범어사에는 의상, 원효, 사명에서부터 연백, 진묵을 거쳐 용성, 동산에 이르기까지
미술적 가치가 높은 고승진영 40여점이 있다.
익히 알려진 고승 이외에 범어사를 빛낸 스님 한 분을 추천해 달라 했다.
“해인사에서 정진할 때 일타 스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습니다.
범어사 내원암에 주석하고 있던 담해(湛海) 스님이
평상시에도 상서로운 빛을 쏟아냈다는 겁니다.
범어사에 돌아와 살펴보니 실재로
‘담해당덕기대선사방광탑(湛海堂德基大禪師放光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부도가 있었고 진영으로도 남아 있었습니다.
일봉경념(一鳳敬念) 스님께서 담해 스님 진영에 쓴 ‘찬’이 일품입니다.”
담해 선사라면 덕기(1860~1933) 스님이다.
범어사에서 총섭과 주지를 역임하며 불사에 매진하던 중
돌연 내원암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최근 ‘삼국유사 권 1~2’(보물 제1866호)가 국보 지정 예고됐다.
범어사 성보박물관도 ‘삼국유사’(보물 419-3호)를 소장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권4∼5까지의 2권을 1권(총 59장)으로 묶은 것으로
인쇄 상태와 보관상태가 양호한 편입니다.
조선 초 판본으로 권5의 28∼30장이 남아 있는 건 범어사본이 유일합니다.
일제강점기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세운
성월 스님이 1907년 입수해 내원암에 기증했다고 전해집니다.”
학계 연구가 뒷받침된다면 국보지정도 기대해 볼만하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은 ‘삼국유사’ 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주범망경(注梵網經)’,
‘불조삼경(佛祖三經)’ ‘금장요집경(金藏要集經)’ 등을 소장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6건을 포함해 지정문화재만도 62건이다.
고문서, 고서적 등의 전적류(典籍類) 1000여종도 품고 있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사격에 비해 전시실이 너무 작다.
범어사가 소장하고 있는 높이 3m 50cm의 사천왕도를 특별 전시할 때면 온전히 펴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6년 동안 성보박물관 신축불사를 위해 백방으로 뛴
경선 스님의 원력이 빛을 발해 올해 착공할 수 있게 됐다.
박물관은 템플스테이관 인근에 들어앉을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송광사, 통도사는 물론 유수의 일반 박물관까지 살피며
모델을 고민해 온 만큼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버금가는 범어사 성보박물관이 우리 앞에 설 듯하다.
최근 범어사는 템플스테이관 옆에 들어서는 선문화교육관 상량식을 봉행했다.
다도, 사찰음식, 지화, 서예, 강연 등 다양한 불교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재가불자를 위한 선 강좌와 실참실수 프로그램을 가동하는데 만전을 기하려 합니다.
화두 드는 법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며 가부좌 틀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 불사까지 회향하면 템플스테이관, 선문화교육관,
범어사 성보 박물관이 일정 공간 안에 모두 들어선다.
그리되면 범어사 도량은 지금보다 현격하게 넓어진다.
범어사에서 진정 펴고 싶은 법(法)이 무엇인지를 여쭈어 보았다.
“동산 스님은 원효암 옛터에서 ‘張大敎網漉人天之魚(장대교망녹인천지어)’
아홉 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옥인’을 발견했습니다.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펴서 인간과 천상의 고기를 건진다’라고 한 건
부처님 법을 널리 펴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문화도량 조성에 힘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좀 더 많은 불자님들이 범어사를 찾아 금정총림에서 피어오르는
‘깨달음의 향훈’에 젖어 보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씨실 사이에 문화의 날실을 꼼꼼하게 넣어
범어사만의 ‘장대교망’을 짜려 함이다! 멋진 불사다.
경선 스님의 일언이 금정산을 울린다.
“투도심(偸盜心) 내면 도둑이요, 자비심(慈悲心) 내면 부처입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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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스님은
1970년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1998년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2002∼현재 금정총림 범어사 성보박물관장.
2009년 조계종 법규위원.
2010년 부산 해동중학교 이사.
2016∼현재 부산시 불교연합회 회장.
사회복지법인 ‘범어’ 대표이사.
재단법인 범어청소년동네 대표이사.
2018년 1월 17일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