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2)
(당고개성지∼노고산성지, 2023년 2월 4일)
瓦也 정유순
당고개 순교성지를 나와 원효로 전자상가거리를 지나 새남터 순교성지로 향한다. 새남터는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1456년(세조2)에 성삼문 등 사육신과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1801년(순조1) 신유박해 때 청나라 주문무신부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들이 순교의 성혈을 뿌린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1846년 9월 16일(헌종12)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신부가 처형되었다.
<새남터성당>
1956년 천주교도들에 의해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1년 한강본당에서 새남터본당이 분리ㆍ독립되었다. 1983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는 새남터에 대성전을 건립하기로 하여 공사에 착공, 그 이듬해 완공하였다. 이 성전은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의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과 전시관, 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103성인들의 모습이 있고, 여러 성화 중에서도 한복을 입은 성모마리아님과 아기예수님의 성화가 아주 인상적이다.
<한복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103성인도>
새남터에서 한강 변으로 나오면 바로 한강철교가 나온다. 한강철교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놓여 진 다리이다. 용산역과 노량진역을 이어주는 한강철교(A)는 1900년 7월에 최초 준공되었으며, 지금은 교량이 4개(A·B·C·D)선으로 이루어 졌다. B선은 1912년 9월에, C선은 1944년 6월에, D선은 1995년에 건설하였으며, 지금의 용도는 A선은 경인선과 직통전철, B선은 화물열차, C선은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의 철도, D선은 수원행 인천행 전철이 사용하고 있다.
<한강철교 - 2019년5월>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로 면적 2.9㎢(약87만평)이다. 영등포에서 샛강 건너에 있는 모래로 이루어진 쓸모없는 땅이었으나 일제가 1916년 9월에 이곳에 간이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접수하여 사용하였고, 백범 김구 등 독립투사 등이 이곳을 통해 개별 귀국하였다. 1967년에는 충남 청양의 구봉광산 매몰사고로 16일간 갇혀 있던 광부 양창선도 구조되어 헬기로 여의도공항으로 후송되었다.
<여의도 빌딩 숲>
1968년 여의도 윤중제(輪中堤)가 축조되면서 여의도비행장은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하였고, 지금의 여의도로 변신하기 시작하여 영등포에서 여의도를 가로 질러 마포로 연결되는 마포대교(1970년 5월), 원효대교(1981년 10월), 서강대교(1999년)가 차례로 개통되었다. 입법기관인 국회의사당, KBS와 SBS 등 언론기관, 증권회사 등 각종 금융관계사, 순복음교회, 63빌딩, 엘지(LG)쌍둥이 빌딩 등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고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다.
<여의도와 원효대교>
여의도로 국회의사당이 이전하면서 마포지역이 여의도 다음으로 정치인들의 활동장이 되었다. 마포는 우리말 삼개라는 포구 이름을 한자로 옮기면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에서 오는 산물의 하역과 보관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오강(五江, 뚝섬·노량·용산·마포·양화진) 중의 하나로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농산물을 저장하고, 서해에서 들어오는 새우·조기 등의 수산물의 집산지로 큰 역할을 하였다.
<여의도와 국회의사당>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으로 인하여 조강(祖江, 한강하구)의 수운이 폐쇄됨에 따라 옛날의 기능은 상실되어 한때는 침체기에 접어들어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이라는 가요가 소외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나, 여의도가 개발되고 마포대교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서울의 서부거점도시로 발돋움 하게 된다.
<한강유람선>
여의도와 마포 사이에는 밤섬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고려 때에는 귀향 보내던 섬이었고, 1394년에는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정착하여 살았고, 한국전쟁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도선하역 등이 성행 하였다. 1968년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철새와 수변생물들의 낙원이 되었다.
<밤섬>
마포구 당인리에는 우리나라 전기산업의 산 역사인 당인리화력발전소(현 서울화력)가 있다. 한강에 황포돛배가 오가던 시절인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되었다. 한때는 학교 입학시험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지만 공기오염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연료와 시설의 대폭개선으로 발전 시 발생하는 증기로 여의도와 동부이촌동, 마포지역 일대 5만여 세대에 온수와 난방을 공급하고 있다. 발전시설을 지하화 하고, 현재의 지상 부지에는 시민의 쉼터인 공원과 문화창작발전소로 거듭났다.
<서울화력 - 2019년5월>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북단 옆으로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원래 이곳은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 모양이 누에머리 같기도 하여 잠두봉(蠶頭峰)으로 불리었고 바로 아래의 한강 변에는 양화(楊花)나루터가 자연과 어울려 명승으로 문인과 풍류객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겸재 정선은 이곳의 빼어난 산수에 반해 <양화환도 (楊花喚渡)>라는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명나라 사신들은 중국의 적벽(赤壁)에 못지않다고 감탄을 했던 이곳이 순교의 성지가 된 것은 병인박해(丙寅迫害)에서 비롯된다.
<정선의 양화환도-네이버캡쳐>
<절두산(잠두봉) - 2019년 5월>
1866년 2월 프랑스 군함이 천주교탄압을 문제 삼아 한강을 거쳐 양화진과 서강 나루터까지 침입했다. 이에 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을 서학쟁이들의 피로 씻는다”라는 이유로 천주교도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화 나루터는 사형장으로 변하여 잠두봉은 자연스럽게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는 당시 ‘사학(邪學)’으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절두산에서의 처형은 ‘일단 먼저 머리를 자르고 본다.’는 무지막지한 선참후계(先斬後啓)였다.
<무명순교자 기념비>
<병인박해 조형물>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1만여 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곳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은 28명 외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한국천주교에서는 순교 100주년인 1966년에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순교정신을 헌양하였다. 순교자기념성당과 박물관, 순교성인 28위를 모신 경당(經堂, 지하묘소) 등 셋으로 구분하여 순교자 기념공원을 꾸몄다. 이곳은 1997년 우리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로 인정받아 국가사적(제399호)으로 지정되었다.
<절두산성당>
<성 요한 바오르2세 교황>
절두산성지에서 합정역으로 나오는 길목 좌측에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이 있다. 이 묘역은 1890년 7월 주 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매장지로 획정하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매장된 사람은 미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왕립병원인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활동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에 사망한 헤론(John W. Heron, 惠論)이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이 묘역에는 15개국 총 415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연세대학을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부부와 그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부부,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한국명 아편설라)와 그의 딸로 이화여전 초대교장을 지낸 앨리스 아펜젤러,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제중원과 기독교서회를 세운 존 W.헤론(한국명 혜론)이 묻혀 있다.
<외국인선교사 묘원>
또한 평양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홀(한국명 하락)과 그의 부인으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운 로제타 홀(한국명 허을), 이들의 아들이자 결핵요양원을 처음 세운 셔우드 홀이 1992년에 안장되었다. 숭실대학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1862~1931, 한국명 배위량), 한말에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활동을 펼친 호머 헐버트(한국명 흘법) 등의 묘가 있다.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 관리한다.
<대한매일신보 베델(한국명 배설) 묘>
https://blog.naver.com/waya555/223009744228
첫댓글 기념비 묘원을보니 마음이 울컥 하네요
많은 생각을 읽을수 있도록 해주심 늘 고맙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른 상황에서
서로 이해될 때까지는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