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제4대 중앙종회 개원식 모습. 폭력으로 얼룩진 3대 종회가 막을 내리고
새로 출범했지만 더 험난한 여정을 보냈다.
일부 ‘名字僧’ 난동 농간에 종단 휘둘려
김대심 사건은 종단 내 갈등과 깊은 연관이 있다. 김대심과 동생은 경찰에 연행된 뒤 자신들의 행위를 종단 정화의 일원이라고 강변했다. 자신들은 김대심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대책위원회’ 행동대원으로, 종단을 정화하기 위한 의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동생 김병옥의 말을 빌어 이렇게 보도했다.
“김대심의 동생 김병옥은 앞서 손경산스님 등 조계종 간부들이 배임 등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을 때 불교재산을 함부로 팔아먹는 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검찰에 고발하는데 주동이 됐으며 이 종정 등 새 집행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같은 부조리가 뿌리 뽑히지 않아 행동대원들을 동원, 실력행사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극소수 폭력승 전국사찰 돌며 ‘행정’ 트집 잡아 문제 일으켜
흉기 사용·거친 언사 등 불교 이미지 훼손 심각한 수준 이르러
하지만 돈을 뺏기 위해 금고부터 찾고 살인을 하려다 실패한 이들의 정화 운운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강도행각을 감추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문제는 폭력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종단 문화에다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가 종단을 좌우할 정도로 질서도 규율도 없는 승단 풍토였다.
무엇보다 폭력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되는 종단 풍토에 문제가 많았다. 종단 내 폭행사건은 이전에도 많았다. 종단 내 폭력이 처음으로 사회문제가 된 사건은 1968년 11월 불국사에서 스님들 사이에 발생한 폭력사건이다. 당시 불국사 주지의 잘못을 감찰하기 위해 내려간 총무원 감찰원의 일부 스님들이 불국사 주지 스님의 승복을 강제로 벗기고 감금 폭행한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제로 주지 사직서를 받는 등 사회통념을 벗어난 폭력이 개입됐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쫓겨난 불국사 소임자 일부가 다시 폭력으로 불국사를 강점하는 등 폭력이 되풀이돼 종단 안팎에 엄청난 파장을 던졌다. 이 사건에서는 감금, 집단 폭행, 폭력배 동원 등 온갖 악행이 동원돼 종단과 사회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폭력은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총무원 소속 스님이 특수폭행, 기물파손, 납치 등의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고, 사찰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폭행, 기물파손이 다반사로 진행됐다. 하지만 폭력은 근절되기는커녕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1969년 연말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17명의 스님들이 부당한 대우를 한다는 이유로 총무 스님을 폭행하고 사찰 기물을 파괴하는 난동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4명의 스님이 구속됐다.
폭력은 문제가 불거지고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일상적 해결책으로 등장했다. 종회에서도 서로 설전을 벌이다 해결이 되지 않으면 바로 폭력을 행사했다. 폭력은 주먹다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1971년 7월 동화사의 수좌 철웅스님은 당시 총무원이 봉은사 토지 매각, 관악산 연주암 매각 등 사찰 토지 매각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자 소포에 뱀을 넣어 부치는 사건을 벌였다. 1973년 12월에는 한 전직 승려가 조계사에 불을 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보름여 만에 경찰에 체포된 범인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멸빈당한 전직 승려였다. 그는 복적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만을 품고 조계사 대웅전에 들어가 좌복 15장을 불상 앞 탁자와 피아노 건반 아래 놓고 석유를 뿌려 불을 냈다.
감찰부장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한 스님 사진과 함께
당시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1973년 5월에는 종단 감찰부장이 남해 보리암 주지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특별분담금을 빨리 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귀를 때려 고막이 터져 감찰부장은 폭력혐의로 구속됐으며 감찰부장직에서 해임당했다. 한 일간지가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는 바람에 사건이 커졌다. 종단은 한 개인의 돌출 행동을 마치 종단 전체의 일인 양 크게 보도해 종단의 위신을 실추시킨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국민에게 사과했다. 당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보도의 일부를 보자. 당시 종단 상황과 폭력의 발생 양태를 엿볼 수 있다.
‘서울 시경은 1일 대한불교조계종 감찰원 간부의 폭행 금품수수 등 혐의를 잡고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이날 조계종 총무원 등의 관계서류를 임의제출형식으로 제출받아 이들이 전국 사찰로부터 특별분담금 중앙분담금 등 명목으로 거둬들인 자금의 사용처 등을 조사하기로 했으며 주지 또는 간부 등의 임명을 둘러싸고 부당한 행위를 했는지도 추궁키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대한불교조계종은 그동안 종단의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전국의 작은 암자 등 말사에 이르기까지 주지 등 간부들을 재임명하면서 말썽이 많았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날 1차로 특별분담금을 빨리 내지 않는다고 암자의 주지를 때려 고막을 터뜨리는 등 피해를 입힌 대한불교조계종 감찰원 부장직을 임시로 맡고 있는 한편 경남 하동 쌍계사 주지인 홍○○스님(35, 동대문구 창신동)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입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홍씨는 지난달 30일 하오 4시쯤 서울 중구 장충동 조계종 총무원에서 경남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보리암 주지 양○○스님(45)을 감찰원 부장실로 끌고 들어가 특별분담금 15만원을 제 때에 내지 않았다고 양씨의 왼쪽 귀를 때려 고막을 터뜨리는 등 상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피해자인 양씨는 이날 홍씨가 사무실로 끌고가 “왜 3월 말까지 내기로 돼 있는 특별분담금을 내지 않았느냐”며 백지와 펜을 갖고 와 주지 사표를 쓰라고 2시간 동안이나 협박, 양씨의 승려증을 빼앗고 마구 때렸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73년6월1일자>
1973년 10월 동화사 주지 임명에 반대하는 스님 12명이 총무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총무원장 경산스님이 당신의 상좌인 자신스님을 동화사 주지에 재임명하자 이에 반대하는 동화사의 일부 스님들이 장충동의 총무원 청사로 휘발유와 칼을 들고 난입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10월6일 낮 12시30분쯤 총무원에 길이 40cm의 칼 10개와 휘발유 8줔가 든 통을 들고 들어가 조계종 총무부장 스님 등 간부 10여명에게 동화사 신임 주지 임명을 철회하고 조계종 간부 사퇴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에 불응하면 간부들을 찔러죽이고 할복 분신자살하겠다고 위협하며 이날부터 10일까지 5일간 농성했다. 총무원은 조용히 처리할 예정이었지만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는 바람에 전원 검찰에 구속돼 이들 중 주모자 3명이 1년에서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농성에 가담했던 스님들 중 일부는 이후 종단 사태로 제적됐다.
1974년 2월에 열린 제3대 마지막 종회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종회는 종정 고암스님과 총무원장 경산스님의 갈등, 운문사 산판, 동화사 부채문제 등 각종 의혹에다 집행부와 재야의 대립, 그 전에 종정 고암스님의 중앙종회 기능 유보와 이에 반대하는 종권수회위원회의 대립 등이 겹쳐 서로간에 날선 대화를 주고 받다가 급기야 폭력으로 치닫게 된다. 대놓고 집행부를 물러가라고 발언하는가 하면 거친 용어를 사용하는 등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으로 결국 몸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김대심 사건은 당시 종단의 고질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속에서 벌어진 것이다. 종단내에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은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문제가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일부 승려의 양산이었다. 1974년 4월 종정 고암스님, 총무원장 경산스님, 종회의장 벽암스님, 감찰원장 지효스님과 종단 간부 스님들은 ‘승단정화의 기본 방향’에 대한 연찬회를 열었는데 스님들은 당시 기강문란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일부 소수의 승려들이 금일은 서울, 명일(明日)은 부산식으로 제방에 유랑하며 공부는 하지 않고 공부하는 스님들이나 사무 보는 스님들에게 해로움을 주는 명자승(名字僧)을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종단 중앙 뿐 아니라 지방 사찰에서도 이들로 인해 골머리
1970년대 문제 일으킨 일부 스님들 1990년대 초까지 등장
스님들의 지적처럼 이들은 명색만 승려였지 하는 행동은 속인과 다름 없었다. 아는 스님들을 협박하는 식으로 돈을 뜯어내 노름을 하거나 주색잡기에 탕진했다. 사찰에서는 분쟁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반대하거나 불만을 가진 세력을 규합해 혼란을 부추겼다. 당시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 먹는 문제로 불만이 많았던 수좌승들을 선동하거나 스님들의 미숙한 행정을 트집잡아 문제를 일으키는 식이었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당시 종단이 아주 부패한 것처럼 인식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별문제가 아니다. 미숙한 행정처리로 인한 실수, 세속의 일에 능숙하지 못해 벌어진 실책을 일부의 명자승(名字僧)들이 트집잡아 폭력을 행사하거나 문제를 키운 일이 대부분이다. 이 과정에서 반대편에 있거나 감정이 좋지 않은 스님측에서 사법당국에 고소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지는 식이다.
당시 문제를 일으킨 스님들은 대개 10명 안팎이었다. 이들 면면은 현재 60대 후반 이후 스님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말 불국사 폭력사건을 일으켰던 N스님, 강원도에서 주로 활동했던 또 다른 N스님, 동화사 사건에 관여됐으며 경북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B스님, 경기도 지역 사찰의 S스님, 경북지역의 또다른 S스님, 김대심 사건에 등장하는 D스님 등 폭력이 동원되는 혼란의 와중에 꼭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문제는 이들 소수의 문제승들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종단 행정과 토대가 취약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종단을 혼미에 빠트렸던 문제의 스님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종단 분규의 한가운데서 활동하다 대부분 멸빈이나 제적된다.
[불교신문 2712호/ 4월16일자]
첫댓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은 지금도 여전히 다만 폭력행사만 줄었다 뿐이지...ㅎㅎㅎ
부끄러운 일을 하는 승려들의 숫자는 더 늘어났지 싶네요....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