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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드는 책에 들어갈 <나의 대학 시절 이야기>입니다.
좀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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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J!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지 40년이 되어간다. 40년이라!! 참으로 긴 세월이다. 우리는 1981년 2월 쓸쓸한 졸업식을 마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경희대학교 문을 나섰지! 사회생활 하면서 다들 고생과 우여곡절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다 보니 정말 신기하고 지금까지 잘 살아남은 친구들이 많이 고맙고 또 고맙다. 졸업 후 30~40대에는 결혼도 하고 가정생활-직장생활하면서 다들 바빠서 연락도 잘 못하다가 이렇게 다시 만나 지금은 카톡으로 실시간으로 연락을 하고 사니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다. 흘러간 세월과 함께 세상도 많이 변했고 우리는 다들 중년이 되었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어지러운 세상을 우리 친구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이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들도 어디서 우리와 같이 늙어가고 있겠지!
입학 40주년을 맞이해 이 기회에 나의 대학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이 글을 써 본다.
우리 친구들도 대학시절에 한창 청년 때라 다들 나름대로의 추억과 감회가 있겠지만 나에게 대학 4년은 한마디로 회색빛 시절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대학 다닐 시절에 상당한 정도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그 증세는 근래에 우리 경희대 국문과 78학번 동문 작가인 김형경의 심리에세이를 읽으면서 더욱 명확해졌다.
“삶이 어딘가에 막혀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는 듯한 느낌, 불투명한 막이 한 겹 의식을 덮고 있는 듯한 느낌... 이십대의 그 막막하고 암울한 느낌”(김형경, 인간풍경, 69쪽)
딱 이 느낌이 바로 나의 대학시절의 그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같은 시절 그 아름다웠던 캠퍼스를 공유했던 그녀도 그랬구나! 그런데 왜 나는 그 꿈 많고 싱싱한 20대 청춘이 왜 그리 막막하고 우울했을까?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증상의 원인은 바로 우리 아버지다.
J! 내가 너에게 우리 아버지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물리교육과를 졸업하셨다는 얘기를 했던가? 우리 아버지는 1928년생 용띠이신데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이다. 해방 후의 혼란기였지만 우리 아버지는 머리가 엄청 좋으시고 집중력도 뛰어나셔서 그 때는 시골이었던 김포에서 그 당시에는 명문이었던 (노동일교수가 다녔던) 서울공고에 진학하셨고 결국에는 서울대를 졸업하셨다. 물론 이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혼란기에 몰락했던 양반의 후손으로 엄청 부지런하셨던 농사꾼인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헌신적인 경제적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장교로 군복무도 하시고 대학 졸업 이후는 계속 교편을 잡으셨다. 술을 많이많이 드셨고!
문제는 내가 잘난 아버지 때문에 내가 아버지보다도 못하다는 콤플렉스로 인하여 평생 기를 못 피고 살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무렵 언젠가부터 줄곧 의식하기를 나는 아버지를 닮았으면 공부를 아주 잘해야 하는데, 그저 잘하는 축에는 들었지만 매우 우수하지 못하고 반에서 일등을 못하여 항상 주눅 들어 살았다. 항상 1등을 하여 나와 비교대상이 되었던 한 친구는 우리아버지 친구 아들인데 나중에 서울대 공대에 갔다. 그야말로 그 친구는 ‘공부라면 못 말리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여하튼 내가 서울대를 나온 아버지보다도 못하다는 그런 의식이 초등학교 언젠가부터 나를 계속 지배했는데, 어떤 책(장강명 장편소설, 그믐 -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68쪽)을 보니 자기 10살 때 가족관계 속에서 자기의 위상을 파악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형성을 막연하게나마 의식하게 된 것도 아마도 10살 때쯤 아니었을까?
내가 결국에는 그 당시 소위 일류 고등학교(용산고등학교 이상)에도 못가고 Sky대학에도 못가고 하니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하여 줄곧 열등감과 우울증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의식은 불행하게도 꽃 같은 청춘 시절인 대학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나는 태어나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계속 김포에서 中農으로 농사를 지으시는 할아버지와 김포농고에서 선생님을 하시던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 밑에서 비교적 안온하게 잘 살았는데, 중학교 2학년 들어와서 예기치 못하게 급작스럽게 온 식구가 김포를 떠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인천 주안에 잠깐 살다가 영등포의 신길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김포를 떠날 때에 가져 나온 돈이 없어 우리 아버지 친구네 집 별채 단칸방에서 6식구가 몰려서 자야 했다. 큰누나는 그 당시에 2년제였던 교육대학 학생, 작은 누나는 고등학생, 나는 중학생, 여동생은 초등학생!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내 중학교 시절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박봉의 교사인 아버지 봉급에 온 식구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은 되었고 다들 학교를 열심히 잘 다녔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은 김포중학교, 중2는 소사중학교(지금의 부천시에 있었음)을 다녔고, 중3때 신길동에 있는 장훈중학교에 전학하여 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마도 중학교를 3군데를 다닌 사람은 흔하지 않을 거야.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전체적으로 가난했고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하는 단계였기에 사회 전체가 변화무쌍했고 혼란스러웠기에 그런 상황을 나도 우리 가족도 온 몸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졸업 후에 마지막으로 치러진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신설학교인 여의도고등학교에 5.7:1의 경쟁률을 뚫고 1회로 들어갔다.
고등학교에서의 분위기는 신설학교라 어수선하기는 했어도 수업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특히 서울에 있는 공립학교라서 그런지 내가 다녔던 중학교 선생님들에 비하여 선생님들이 실력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대충 열심히 공부하여 상위 10% 안에 겨우 들었지만 재수를 했는데도 Sky대 못 갔다. 나는 법대-상대만 고집했기에 연-고대 낮은 학과는 눈여겨보지도 않았다. 여하튼 나는 잘난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증명한 셈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입학한 대학이었기에 나는 뭔가 자신이 없고 즐겁지도 않았고 미래에 대한 설계도 하지 못했고 중심을 잡기도 힘들었다. 유신말기 당시의 시국도 많이 암울하고 뒤숭숭했고!
J! 너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대학에 합격해서 기뻤냐? 이계순 회장은 대학에 합격해서 좋아서 난리가 났었다고 했는데, 나는 대학 합격을 확인하면서도 무덤덤했고 그러한 상태가 졸업 때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보다 5년 정도 후에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다닌 어떤 분도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다. 이대 입학해서 보니까
“주관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개인의 선망학교? 또는 레벨이라는 것이 참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입학해 보니 같은 대학 같은 과에 합격했지만 우는 아이, 시들한 아이, 웃는 아이, 좋아 너무 방방 뜨는 아이... 처지는 비슷한데 마음들은 다 달랐지요... ~~~~~ 세월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성실한 의지의 한국인들이 성공했더라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40년 전 그 당시도, 아니 최소한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는 文民統治의 전통이 확고하던 나라라 학벌이 중시되었고, 그 학벌이야말로 각 개인과 집안의 자존감과 위상과 장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지! 그 학벌을 결정짓는 ‘공부’라고 하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이 땅에서는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진 자나 배운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자식 교육에 매진했고, 못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설움과 가난이 배우지 못한 것 때문이라 생각해서 없는 살림에 자식들 교육에 많은 지출을 할 수 밖에 없었지. 결과는 항상 초라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나는 경희대에 입학하고 나서, 부끄럽거나 창피해 하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도 못하면서, 공부 때문에 일류가 아닌 이류 인생이 되었다고 자학하며 지냈다. 앞으로의 나의 인생도 2류, 3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유독이 왜 나만 이러한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건 우리 아버지의 존재 때문 일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똑똑한 문재인 선배는 어땠을까? 지난 대선 때 선거를 얼마 앞두고 경희대 법대 동문들이 모여 문재인 후보를 초청하여 힘 실어주는 행사를 하는데 문선배가 마이크를 잡더니 “자기는 대학에 별로 애착이 없이 다녔는데 이렇게 동문들이 와서 격려해 주니 고맙다”는 식의 인사를 했다. 아마도 문선배도 (나와는 다른 원인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입시에서 2차 대학이었던 경희대에 와서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까? 그래도 문선배는 사법고시도 붙고 결혼상대자도 만났지만!
J! 너는 기억하니? 지난번에 우리가 카톡방에서 박영선 국회의원(경희대 지리학과 78학번)을 성토를 했었지! 박영선은 그 때 지금의 은평구 쪽에 살았는데 대학 때에 134번 버스(이 버스은 연대, 이대를 거쳐서 경희대를 왔다)를 타고 경희대에 오면서 자기가 가고 싶어 했던 좋은 대학들을 지나쳐 왔고 그래서 안 좋았다고 자기의 대학시절을 회고하는 글을 썼는데 그것이 경희대를 비하했다고! 아마도 박영선에게는 경희대 지리학과는 부끄러운 이력일거야. 지울 수 있으면 지워 버렸을 테고 바꿀 수 있으면 바꾸었을 텐데, 본적도 이름도 국적도 바꿀 수 있지만 학적은 못 바꾸지. 그래서 박영선은 그 부끄러움을 지우려고 학력란에 서강대 (언론)대학원 나왔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것을 소위 ‘학력세탁’이라고 하는데 요즈음에 정치인들이 많이 하지. 그러고 보니 나도 대학원을 가면서 학력세탁을 한 셈이네. 그렇지만 나는 어디 가서 학력을 얘기할 때 학부는 경희법대 나왔다는 것을 일부러 적극적으로 알린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많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나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못나고 무능력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리고 성격도 나름 좋은 편인데도 콤플렉스에 눌려 자학하며 살았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
이러한 심리상태 때문에 나는 매사에 자신이 없고 남보다 못한 것만 뚜렷하게 의식하곤 했다. 남이 나에게 약간이라도 싫은 기색이라도 하거나, 못한다고 지적하거나, 스스로 남과 비교하여 내가 못하다고 느끼게 되면 그 사람이나 그 상황을 빨리 회피하거나 포기하려 했을 뿐 극복하려거나 도전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대학 내내 지속되어 성적도 평균 B학점 정도였고(대학 장학금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다) 요즈음 말하는 밀당을 못하다 보니 연애도 몇 번 미적지근하게 진행되다 말았다. 대학시절에 내가 무엇이나 누구에게 집착하거나 열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 시절에 낭만? 그런 것 없었다.
언젠가는 나의 심사가 왜 뒤틀렸는지 모르겠지만 몇 주를 계속 교련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나름 불만과 외로움을 그런 식으로 드러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왜 이런 쓸쓸했던 추억은 안 잊혀지지? 더욱이 유신말기의 살벌한 시국에 유신헌법을 들여다보면서 많이도 어둡고 착잡했다.
나는 도서관에는 열심히 다녔지만 쓸 데 없는(?) 소설책도 많이 보고 영어동아리인 Time반에 들어가 영어 공부도 했지만 뚜렷한 목표의식도 도전의식도 없이 대충 공부했고, 특별히 잘 놀지도 못하고 연애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지냈고, 중간에 군대 가는 결단도 못 내린 채 졸업했고 그리고 군대에 갔지! 김용섭 교수는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사법고시 공부한다고 유독 티를 냈었는데 나는 고시에 자신도 없고 뜻도 의지도 없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1년 재수 + 대학 4년 + 군대생활과 군대 가기 전후를 포함해서 3년 = 총 8년! 이렇게 나의 꽃 같은 20대 청춘은 허무하게 흘러갔다. 아~~ 흘러간 내 청춘이여!
우리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는 가끔은 내가 학교 갔다 와서 공부를 했나 안했나를 점검하려 하셨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는 공부 잘 해라! 열심히 해라! 하는 소리도 안 하시고 술만 잡수시며 학교를 다니셨는데 그러시는 것이 (전혀 그러하지 않으셨을 텐데도) 외아들인 나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책하고 주눅 들고! 간혹 어쩌다 당신의 친구의 잘 난 자식들을 언급하셨는데 그러면 나는 더욱 위축되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교육적인 면에서 안 좋다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인식이 없었지!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는데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시다가 (방학 때였었나?) 일어나시더니 그 당시에는 있었던 어느 석간신문을 보여주시면서 경희대 재학 중인 ‘김동훈’이라는 학생이 외무고시 최연소로 합격했다는 것이 신문에 났다고 하시면서 친구냐고 물어 보셨다. 내가 같은 과 다니는 친구라고 대답하였고 대화는 더 이상 얘기는 진행되지 않았다. 남의 자식들은 외무고시-사법고시 잘도 붙는데 당신의 아들은 학교를 다니기는 하는데 뭐하는지 참으로 답답하셨겠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어쩌라! 자식이 그 정도인 것을! 당신도 그 때쯤에는 아들의 장래에 대하여 적당히 체념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죄송하다.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이 공부 잘 하는 것이 부모에게 큰 위안과 힘이 되지. 당신도 남들에게 하나있는 아들 자랑 좀 하고 싶으셨겠지만 별로 자랑하실 것이 없으셨으니 사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으셨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렇게 술을 드셨나??
우리 아버지는 원래 성격이 자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 자식들에게 재미있게 이런저런 말씀을 안 하셨지만, 평생 자식들을 드러내 놓고 때리거나 욕하거나 큰소리로 야단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는데도 (우리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욕을 안했기에 나도 욕을 못 하고 우리 애들도 욕을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아버지의 태도가 못난 아들에 대한 배려이셨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죄송하고 부끄럽기도 했고! 대학갈 때 재수하고, 군대 갔다 와서 석사과정 갈 때 준비하면서 일 년 늦게 가고, 박사과정 갈 때 두 번 떨어져서 삼수해서 1년 늦게 입학했으니까 (대학원시험은 1년에 두 번 본다) 공부라면 최고였고 시험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다고 하셨던 우리 아버지가 보기에 참으로 답답하고 무능한 아들로 생각하셨겠지만 내색은 전혀 안하시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시면서 지원해 주셨지. 그러고 보니 나는 불운하게도 중학교 입시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대학교-석사과정-박사과정까지 참 시험을 많이 본 사람이네.
다행이도 나는 나중에 공부에 발동이 걸려서 군대 갔다 와서 부터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6~7년을 아침부터 정확하게 밤 10시까지 대학도서관을 지키며 제대로 열심히 공부했지! 그 때는 목표도 도전의식도 공부에 대한 열정도 생기더라! 그 당시에 뒤늦게 느낀 건데 공부가 내 체질에 잘 맞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존재의 무게에 짓눌렸던 나의 이러한 심리상태는 우리 아버지가 12년 전에 돌아가시고 나서 쫌 벋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러하다. 우리 아들이 우리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좋고 집중력이 뛰어나서 공부에는 도사급이였고 경찰대학 졸업했잖아! (지금은 결혼해서 강서경찰서 근무) 이번에는 또 아들에게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 우리 아들도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라 별로 말도 없고 특히 아빠인 나에게 까칠하게 구는데, 저 애가 나를 (4년제가 아닌) 2년제 대학교수라고 무시하는 것 같고 ㅠ ㅠ
이 정도면 병이지? 다른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만 정신적으로 자학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아마도 예전에 나에게 싫은 표정을 짓고 나의 못난 점을 지적한 사람들은 그들이 나에게 그러했던 것을 전혀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스스로 그 기억을 가슴에 못으로 박아 놓았지!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하다! 이러한 나의 심리상태가 줄곧 나의 발전과 성숙에 걸림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러한 상태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사례들을 들어 보면
사례 1. 내가 박사과정에서 법철학을 전공했는데 (1980년대 말 당시는 철학이 잠시 융성하던 시기였는데 철학을 안 하면 죽을 것 같았다!) 연대에 적당한 교수님이 없어서 주로 이대 박은정 교수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분은 경기여고-이대 법대-독일 박사셨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형적인 학자이고 천재형 교수님이셨다! 나중에 서울대 로스쿨 교수로 가셨는데 아마도 비(非)서울대 출신으로 서울대 로스쿨 교수로 된 첫 케이스가 아닐까? 그 분이 나의 박사논문을 지도하시면서 논문이 자기 수준에 못 미친다는 표정을 지으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고치라는 대로 고치고 보충하라는 대로 보충했지! 인하대 (나중에 이화여대로 옮김) 장영민 교수님이 매우 꼼꼼히 지도해 주시고 통과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셔서 단 한 번에 논문심사를 통과했지! 그런데 그 때 지도교수이셨던 박은정 교수님이 격려와 같은 말 한마디 없으시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신 것이 왜 그렇게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지! 그 이후에 내가 대학에 전임교수가 되면서 6년 정도 모시고 공부했던 그렇게도 존경하던 그 교수님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었다! 그렇게 열심히 나가던 법철학 학회도 안 나가고!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맞지??
(하기야 2년제 대학은 4년제 대학과 달라 논문이나 학문의 업적 같은 것은 중요시하지 않아서 내가 학문적으로 게을러지기도 했고)
사례 2. 나는 원래 운동신경이 없는 같다! 특히 공(ball)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타고난 볼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잘 할 수 있는데! 초등학교 때 동네 아이들과 몰려서 축구를 하는데 어떤 형이 “이 새끼 축구 디게 못하네” 하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내가 축구를 잘 하지는 못 했지만 그냥 같이 뛰어다니는 것이었는데! 그 말이 어린 나의 맘에 상처를 주었지! 그 때부터 나는 공놀이, 특히 축구하면 아예 할 생각을 안했다. 군대 가서도 보직이 열외를 할 수 있는 보직이어서 축구를 안 했다. 구기운동을 안하니까 더욱 못할 수밖에 없지. 골프도 안 한다. 최재황 노무사가 나에게 골프 배우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골프도 공 가지고 하는 것이니까 겁부터 나서 못하고 있다! 못하는 골프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돈 잃고 속상해 할 일이 없잖아! 우리 대학시절에는 학생들이 당구를 많이 쳤는데 나는 당구대 한번 잡은 적이 없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어떤 형의 한마디가 내 콤플렉스를 작동시켜 그 이후에 나의 인생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경우이다. 내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내가 축구를 웬만큼만 했어도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다. 군제대 후에 대학원을 안 갔을 수도 있었고 내 스스로 위축되지 않고 좀 더 자신 있고 씩씩하게 살았을 것 같은데....
(주로 팀별로 하는 공 가지고 하는 운동은 안하고 못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뛰거나 걷거나 등산이나 자전거 타기 등 나 혼자 하는 운동은 못하지는 않더라. 그런 운동은 지속적으로 하면 체력도 지구력도 늘어나고 재미도 있고. 지금은 주로 많이 걷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육체운동에 대한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는 극복했다고 본다.)
사례 3. 군대에서의 일이다. 대대 행정병으로 근무하는 중에 후임병이 들어 왔는데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경희대 박물관에서 근무를 하다가 왔다는 거야. 반갑기는 했지만 그런가 보다 했는데 처음부터 행정업무를 너무나 잘 하더라. 자기를 많이 드러내지도 않고 조용하게 업무처리를 완벽히 해 냈지. 나는 악필인데 그는 글씨도 잘 쓰고 타자도 잘 치고! 나는 4년제 대학 졸업하고 왔는데 누가 보아도 나보다도 그 후임병이 행정반 일을 잘 했다. 행정반에서 상대적으로 나의 존재감은 없어지고! 그런데서 나는 또 내가 잘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가벼운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가 저 애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생각하다가 ‘공부’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것이 제대한 후에 대학원을 가게 된 하나의 동기로 작용했다.
그 후임병(이름 윤재학)도 제대하고 다시 경희대에 근무하여 그 후에도 내가 경희대 갈 때는 가끔 찾아보았는데 경희대 직원으로 승승장구하여 입시부처장(처장은 교수가 함)을 맡고 있었다. 직원으로 올라갈 때까지 다 올라갔다는 얘기다. 어디서나 업무능력은 학력과 관계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지만, 내가 학생들에게 계속 강조하듯이 학력과는 관계없이 어디서나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만, 그래도 그 때 내가 집착할 수 있는 것은 ‘공부’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례 4. 내가 비교적 수학은 잘했지만 영어를 잘 한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리고 법대에 와서는 특별히 영어 공부를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법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방황할 때에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아마도 3학년 겨울방학 무렵에 Time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간지인 ‘Time’紙의 특정 부분을 매일 두 명이 돌아가면서 읽고 번역하는 과정이었는데 꼬박꼬박 미리 예습을 해가면서 거의 매일 나름 재미있게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얼마를 다니다 보니까 그 중에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측에 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영어를 잘 했던 학생들을 거론해 보면 지금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인 안재욱 선배, 지금 KBS 보도본부장인 김인영 정외과 78학번 후배, 박용기 법대 선배, 영문과 동기인 김용만(미국 이민)이다. 이런 학생들은 누가 보아도 영어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 영어발음도 좋고! Time반에 가서 또 나의 열등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 왜 이렇게 나는 잘하는 것이 없지? 또 절망을 했다.
(그 때 Time반에서 같이 공부했던 학생들은 나중에 보니 좋은 데에 취업을 잘 했다. 그리고 그 때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한 영어 공부가 내가 나중에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입학시험과 박사과정 종합시험 같은 것을 볼 때 디딤돌이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 것 보면 세상일은 예정되거나 의도된 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데로 진행되기도 하더라!)
왜 이렇게 내가 열등한 것만을 유독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이것이 다 심리학적으로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기본적으로 잘난 우리 아버지에게 억눌려 살았던 무의식의 발로라 할까?
10년 전쯤에 나는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의 아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정신분석 경험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환자적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경험했다. 유치함의 극단이나 의존성, 치사한 질투심, 끝이 없는 인정욕구, 내 안에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떠올리기 싫은 불편한 공격성 등... 내 안에 깊숙한 곳에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펄펄 끊는 피해의식과 심한 히스테리 환자의 자기현시욕과 의존성들을 적나라하게 확인(했다).” (젊은 날의 깨달음, 정혜신 외 8인 공저, 34쪽)
마치 저 분이 내 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저런 부정적인 의식들을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저런 의식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도 하지만, 나에게는 저런 의식들이 아마도 어느 정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우리 아버지와의 심리적 대결 과정에서 억압되고 왜곡된 무의식의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부정하기도 어렵고 극복하기도 힘든 저들을 지금은 적당히 달래면서 함께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요즈음에 그동안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나도 아주 잘 하지 못하는 공부를 오랫동안 집요하게 했고(36세까지), 학교라는 조직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올해로 20년), 이러저런 모임에 자천타천으로 감투도 써 보았지. 또한 내가 특히 윗사람들에게 보다는 아랫사람이나 사회적 약자 등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성격도 크게 유별나지 않고. (우리 아버지도 최고 대학을 나오셨어도 소탈하셔서 교장선생님으로 전근 다니시면서 시골 유지들과 교류하시면서 술을 많이 얻어 잡수셨다. 그 덕에 위에 빵구가 나서 고생 하셨지만). 나름 검소하고. 이것도 우리 아버지를 닮았는데 우리 아버지도 늦게까지 돈을 버셨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배서 돈을 못 쓰시는 분이셨다.
내가 글도 좀 쓰는 편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대 장영민 교수님이 나에게 ‘강박사는 말보다 글이 더 좋다’는 말 한마디가 그 후에 크나큰 자극과 힘이 되었다. 경기도 교육청에서 ‘장학직’이 아닌 ‘연구직’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신 우리 아버지도 글을 잘 쓰셨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작은 누나도 무명작가지만 소설을 쓰고 있다.
내 인생의 성적표를 보면 ‘매우 우수’는 아니더라도 ‘우수’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왜 나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면서 자학하고 살았는지? 특히 그 좋은 대학시절에!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쉽다는 얘기다.
J! 그 당시에 경희법대에 올 정도면 우리가 전체 우리 또래 중에서도 상당한 축복받은 그룹이었다. 내 시골 김포 친구들 중에 대학 간 친구들 거의 없다. 그런데도 돌이켜 보면 뭐가 그리 많이 아쉽고 후회되는 일이 많았는지!
이제 우리의 인생은 어느 정도 setting이 되어 각자의 position(경제적-사회적 지위)이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 아~ 자식농사가 변수가 될 수는 있겠다. 이제부터라도 분수에 맞게 맘 편하게 살아야지! 아등바등하고 살 나이도 지났고 지금에 와서 무리하면 잘못했다가는 노후가 불안해지지! 그저 학창시절의 저런 안 좋은 추억은 잊어버리고 좋은 추억만 회상하면서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앞으로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면서 지내자고. 그래야 인생 말년이 더 풍족해지지 않을까!
사랑한다! 친구야!
(이 글이 나에게는 치유를 위한 글쓰기에 해당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깊은 맘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우울했던 과거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짐을 많이 들어냈으니 이제는 그런 기억들로부터 해방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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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철님은 장점이 많으신 분이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