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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혹은 도유, 퇴도, 청량산인 등이며, 관향은 진보이다.
퇴계는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태극도설'과 마지막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군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과 천명도설후서(1553), 고봉 기대승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1559~1566), 주자서절요(1556), 자성록(1558), 전습록논변(1566), 무진육조소(1568), 성학십도(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 1)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2)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1998년 서울대출판부
3) "퇴계선집" / 윤사순 역주 / 1993년 현암사
사 상 》사상의 개관 / 핵심사상
퇴계는 16세기 중반에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토대 위에서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 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문인 정유일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정주를 표준으로 한다. 경과 의가 같이 지탱하고(경의협지, 敬義夾持),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며(지행병진, 知行幷進), 밖과 안이 한결 같고(표리여일, 表裏如一), 본과 말을 함께 하며(본말병거, 本末幷擧), 대원을 뚫어보고 대본을 심어 세운다(식립대본 植立大本), 그 이른 경지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는 오직 그 한 분 뿐이다.
유적지.>>도산서원
지정번호 : 사적 제 170호 지정연월일 : 1969년 5월 28일
시대 : 조선 선조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
소유자 : 도산서원
분류 및 규모 : 서원, 324,945㎡
종택원경
종택근경
추월 한수정
종택 사당
지정번호: 경북기념물 제 42호
지정연월일 : 1982년 12월 1일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
소유자 : 이근필
분류 및 규모 : 생가, 2,119㎡
퇴계 이황의 후손들이 지금의 종택 터에 언제부터 집을 세우고 살 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한서암 동남쪽 20m 쯤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종택(宗宅 :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은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29년의 일이라고 한다.
종택 옆에는 '추월 한수정'이 있고, 종택과 추월 한수정 사이에는 뒤쪽으로 쭉 물러나 앉은 사당이 있다.
추월 한수정(秋月 寒水亭)은 가을 달과 찬물이 함께 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한서암(寒棲庵)은 빈터에 푯말만 남아있을 뿐이고 계상서당은 복원중이다.
유적지>>묘소
퇴계는 1570년(선조 3년)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12월 8일 한서암에서 앉아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문인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선생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정부의 방침에 의하여 오늘날의 국장인 예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초라한 편이다.
퇴계의 유언에 따라 묘비의 앞면에는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라고 써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자명과 문인 기고봉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통상 비석을 배치하는 방법과 달리 특이하게 동쪽을 등에 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비석의 윗부분에는 좌우대칭의 구름무늬 한가운데 앞면에는 태양이 뒷면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묘소 앞으로는 동자석이 좌우로 자리잡고 있고, 멀리는 망주가 벌려 서 있으며, 더 앞쪽으로 나아가서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다.
유적지>> 퇴계 기념공원
유적지>> 계상서당 원경
정면
측면
측면
만년에 퇴계 선생은 은퇴하여 종가 건너편에 조그만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입문하여 장소가 협소해지자 후에 도산서당으로 옮겼다 한다. 율곡 이이가 23세 때 당시 58세의 퇴계 이황을 만나서 3일간 머무르며, 학문과 시를 논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은 강학(講學)하던 도산서원을 집인 계상(溪上)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때 상계(上溪)에서 도산서원을 다니면서 지은 시에 '계상(溪上)에서 산을 넘어 서당에 이르는 길을 걸으며' (보자 계상 유산 지서당 : 步自 溪上 踰山 至書堂)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랑에 꽃이 피고 봄날은 고요한데 화발암애춘적적 (花發岩崖春寂寂)
시내 숲에 새울고 냇물은 잔잔하네 조명간수수잔잔 (鳥鳴澗樹水潺潺)
우연히 산 뒤에서 동자 관자 이끌고 우종산후휴동관 (偶從山後携童冠)
청량상 원경
표지석
청량산(淸凉山)은 도산서원에서 동북방으로 17㎞정도 떨어져 있다. 13세 때부터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하였고, 64세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제나 제자들을 데리고 자주 찾아 풍류를 즐기고 많은 시를 읊었다. 53세 때는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를 짓고 끝에다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청량산을 우리집(吾家山)이라 일컬을 만큼 친숙하게 여겼다. 55세 때 겨울에는 손자 안도를 데리고 들어가 한달을 머물면서, 40년전 15세 때인 1515년(중종 10년) 여러 형제와 함께 숙부 송재 선생을 모시고 이곳에서 노닐던 때를 회상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시를 읊기도 하였다.
청량사에서 모시고 놀던 옛일 회상하니 그 날의 총각 이젠 흰눈이 머리에 가득하네 학 등에서 굽어보니 산천 몇 번이나 변했던고 남긴 시를 거듭외며 눈물 흘리네
유적지>> 태실
온혜 종가 원경
지정번호 : 경북민속자료 제 60호
지정연월일 : 1985년 10년 15일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604
소유자 : 이창건
분류 및 규모 : 가옥, 4동
온혜 종가
퇴계 이황의 윗대 조상들은 두루마을에 살았는데 그 두루마을에서 온혜로 옮겨온 것은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 : 1424~1488)이다.
이계양은 노송정공(老松亭公)이라고 불리웠는데, 노송정은 건물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이계양의 호이다.
온혜로 쑥 들어가 마을이 끝나는 부분에서 온혜초등학교를 끼고 돌아가면 노송정공 이계양이 개척한 진성이씨(眞城李氏) 온혜종가가 있다.
이 사진은 온혜종가(노송정)를 멀리서 잡은 모습이다. 온혜종가의 대문에는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집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다
태실
동쪽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막바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것이 '퇴계태실'이다. 태실은 안마당 쪽으로 혼자서만 돌출되어 있다.
또한 퇴계 태실은 조부인 노송정공의 호를 당호(堂號)로 하였기 때문에 '노송정고택'이라고도 한다.
ㅁ자 형상의 이 작은 방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나셨다.
태실의 주변에는 좁은 난간이 둘러쳐져 있고, 그 정면 남쪽으로는 현판이 높이 붙어있다.태실은 오똑하게 솟아있는 느낌이고 방안은 비좁아서 큰사람이 누우면 머리와 발 끝이 양쪽 벽에 닿을 만하고, 폭은 두 사람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