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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성경적 배경
1. 장로교회의 성경적 배경
구약-----
인간 사회에서 최초의 통치 형태는 가장이 다스리는 족장정치였다(창 12:4; 욥 1:5). 그 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대의 정치, 곧 장로 정치가 시행되었다. 즉 장로정치는 이미 모세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출3:16; 모세에게 가서 장로들을 모으라고 하심). 왜냐하면 모세 시대에 이미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다스렸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족장정치와 장로정치는 많은 연관성이 있는데, 족장은 오랜 연륜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가 다스리던 사회에 권세를 행사했다. 이러한 족장제도는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나이 든 원로들에 의한 통치의 길을 열었다.
출애굽 이 후 장로 제도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면서 그들을 이끄는 정치 제체, 통치 제도로 채택되었고, 모세에 의해 70인으로 제한되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로는 성격상 공적인 직분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했다. 모세, 대제사장 아론, 제사장들과 함께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치리하는 일을 했다.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릴 때 기도하는 역할도 감당했다. 또한 이스라엘 온 회중의 대표였기에 백성들은 장로들을 통해 발언했고, 장로에 의해 말한 것만을 백성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교회의 정치에 관한 일을 했다. 성도들 중에서 회중에 들어오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 가운데 부도덕한 자를 치리하는 일에 전념함으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했으며 이를 통해 교회 청결을 유지했다. 이와 같이 구약의 교회 정치 체제는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진 장로정치였다.
특별히 구약의 교회조직은 계급주의와 같은 하향적인 것이 아니라 평등과 자율을 중시하는 상향적 장로정치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장로회의는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관으로 모든 결정을 하나님 중심으로 행했다. 이러한 장로 정치사상은 회당 조직, 산헤드린 제도와 함께 신약 교회에 계승되었는데, 이는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행전, 바울 서신에도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은 행정 관료가 종교 본연의 일에 개입하거나 제사장들이 세속 정치 영역에 관여하는 것을 금했다.
신약 ----
신약의 정치 체제 역시 장로들에 의해 통치된 정치였다. 이 정치는 신약의 골간을 이루는데, 이스라엘 공동체뿐 아니라 이방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도 존재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연보를 장로들에게 전달하는 것, 14장에서 교회를 세운 후 장로들을 택한 것, 15장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예루살렘 총회가 열린 것, 20장에서 장로들을 세우므로 교회를 조직한 것, 디도서 1장에서 장로를 세우기 위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것 등 모두 장로정치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장로들을 세우므로 교회를 조직했다. 이렇게 장로제도는 구약 시대뿐 아니라 신약 시대의 제도이며, 유대인의 전통뿐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도 세워진 제도였다. 그러므로 신?구약 모든 교회를 위한 정치 형태는 장로 제도이다.
2. 중세의 2직분 사상에 대해
감독주의자나 교황주의자는 ‘하나의 교회에는 한 명의 감독’이라는 명제 아래,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위해 감독, 장로, 집사로 구성된 3개의 직분을 세우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로주의자들은 장로나 감독은 하나의 직분이며 동일한 직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로와 집사로 구성된 2직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첫째, 성경 기자가 교회 직분에 대해 기록할 때, 때로는 그 직분 자체를 말하지만 그 직분의 기능과 활동에 관련하여 쓰고 있다. 둘째, 감독과 장로가 동일한 직분이라는 것은 성경의 논증을 통해 증명된다. 셋째, 교회 조직 면에서 감독과 장로는 같은 뜻을 가진다. 넷째, 사도들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사도들은 교회의 직분이 감독(장로)과 집사라는 2가지 직분이었다고 증거한다.
초대교회는 장로와 집사라는 2직분에 의해 운영되고, 장로 또는 감독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때는 계급 구조적인 감독주의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성도는 평등한 가운데 서로 섬기곤 했다. 교부들도 2직분 제도를 그대로 교회에 도입했다. 가톨릭에서 로마교회의 교황이었다고 하는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도 2직분 제도를 교회에서 사용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심한 박해로 인한 배교자의 출현과 이단자의 출현 등 초대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로 인해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서서히 3직분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감독 중심으로 교회 운영이 생기고, 이것이 제도화 되면서 감독정치가 나타난 것이다.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리용의 이레니우스 등. 그런데 이러한 감독 중심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권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감독주의 사상으로 변질되었다(키프리안과 제롬). 키프리안은 감독직의 사도적 전승을 주장했고, 감독을 중심으로 모일 것을 주장하면서 교회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곧바로 감독주의가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감독 중심의 교회 정치 체제는 사제주의 신학과 결합되면서 막강한 힘을 가진 교황 정치 시대를 열었다. 감독주의 사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번져 갔고 10C 이후 교황들은 절대적인 권세를 행사하며 세속적인 일까지 관여하면서 왕 같은 권세를 행사했다.
교황 정치는 베드로의 우위 사상과 교황의 베드로 계승 사상에 기초한다. 로마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모든 사도들보다 위에 세우셨고, 그 권위 위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로마 감독은 이러한 베드로를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교황 정치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콘스탄틴 대제의 개종 이후 박해가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면서 사회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고, 목사들은 왕실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황제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자 많은 목사 지원생이 나타났고, 목회자 사이에 서로 높아지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도시의 감독이 작은 도시를 지도 감독하는 교구 주교가 탄생했으며, 수도에 위치한 감독은 자신을 대주교라고 부르면서 지방 교구의 감독보다 우위권을 행사했다. 또한 대주교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면서 총주교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교회의 평화를 가져 온 콘스탄틴의 개종 사건은 오히려 기독교 타락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단 운동(아리우스)이 일어나게 되었고 해결 방법으로 종교회의가 거듭 소집되었다. 하지만 점점 교회 회의는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교회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대형 교회 중심으로 질서를 잡는 것이 나타났다(로마 교회). 결국 로마의 감독과 로마 교회는 우위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교황권은 계속 확장되어 교황이라는 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동방 지역은 이슬람에 의해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기에 더 쉽게 그 우위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교회의 권력을 신장시키는 내용의 위조문서도 사용하고 왕위에 관련된 세속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14C에 이르러 교황권은 절정에 달했고 영적인 부분뿐 아니라 세속권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이럴 때도 왈도파라고 불리는 2직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왈도는 교회의 부패가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하여 신약성경을 번역, 보급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오직 무오한 성경만이 인간에게 구원에 대한 진리를 제공한다고 했다. 따라서 로마 교황청의 계급 구조가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교회의 권징』에 장로교회의 2직분 사상을 채택했다. 그들은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로 구분했고, 노회 제도를 인정했다. 집사의 일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며 장로는 치리하는 일을 했다. 또한 계급 구조는 인정되지 않았고, 모든 목사와 장로는 동등한 권세를 가지고 교회를 다스렸다. 그들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역자와 교역자 사이의 평등과 자율을 주장했다. 목사는 목회자와 교사로 나눴다. 목사직은 종신직이 아니어서, 그가 만일 큰 죄에 빠지면 출교되든지 설교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노회는 목사와 각 교회에서 파송한 장로로 구성되었다. 장로 총대는 각 교회에서 2명을 넘지 못했고, 장로의 투표권은 하나로 간주했다. 결국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전수된 사람들 1) 아일랜드를 복음화 한 패트릭: 교회는 장로와 감독이 함께 다스려야 한다. 2) 스코틀랜드는 6C에 아일랜드 사람 콜롬바에 의해 복음화: 그는 아이오나에 본부를 두고 장로교회 조직체라고 할 수 있는 쿨디를 조직했다. 3) 전 종교개혁자 위클리프: 감독과 장로는 동등한 직위이기 때문에 사도 시대의 감독직과 사제직은 같다. 그리고 모든 교회는 신약의 모델을 따라 교회와 교회 사이, 성직자와 성직자 사이에 평등성이 회복되어야 하고, 지교회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4) 보헤미아의 개혁자 얀 후스: 교회의 계급화는 비성경적이다. 교회는 계급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 성도 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에 평등을 기초로 하여 상호간 영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3. 칼빈의 교회, 정치 사상
종교개혁을 보는 시각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루터의 개혁: 면죄부와 성직 매매 같은 로마 천주교회의 부정과 부패로부터 교회를 개혁하는 것, 칼빈의 개혁: 성경에 근거한 교리, 예배, 교회 정부 형태를 회복하므로 교회 개혁을 추구하는 것. 칼빈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성경에 기초하여 미신적인 예배를 개혁할 뿐 아니라, 교리를 개혁하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회복하므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칼빈은 복음적인 설교와 생활의 개혁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하여 교회 권징을 실시하고자 했다. 개혁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동일한 신앙고백이 필요했고,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교회와 정부의 업무가 구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출교권이 교회의 고유 업무이며 정부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곧 하나님의 법은 권징의 행사에 있어서 교회에게는 영적인 무기인 말씀의 선포를, 정부에게는 성문법을 어긴 자를 징벌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사회 전 영역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하고자 『교회 헌법』을 작성했다. 칼빈은 이곳에서 교회 권징과 교회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교회 개혁을 위해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사역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신약 교회의 직분은 목사, 교사, 집사, 장로의 넷이며, 특히 교사직과 장로직은 기독교교육과 권징의 실시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였다. 먼저 목사는 주로 교육을 위한 직분으로 이해했다. 집사의 직무는 구제하는 것과 병자를 간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장로를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 보고, 장로의 사역은 설교 사역과는 구별되는 다스리는 직분으로 생각했다. 장로는 모든 회중의 생활을 관찰하며 권면하되 특히 형제애를 가지고 치리하는 직분이다.
칼빈과 교회 정치 원리
칼빈은 교회를 그리스도인의 근거 기반으로 이해했지만, 로마 천주교회를 교회로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증거되고, 성례가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하는데, 로마 천주교회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이 제시한 최초의 교회 정치 체제가 장로 정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감독 정치가 등장했는데, 그리하여 교회 제도가 계급화 되었고, 교권주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교권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 정치 원리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교회 형태를 추구했고, 이것이 장로정치의 원리를 제공했다. 그의 교회 정치사상의 기본 요소는 그리스도의 주권, 직무의 분배, 대의 정치를 골격으로 한다. 또한 그의 교회 정치 원리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모든 지체들이 누리는 평등성, 직분자들을 통해 스스로 운영되는 자율성, 대표를 통하여 실시되는 연합성으로 요약되고 있다.
1) 평등성: 칼빈은 교회와 교회, 목사와 목사 사이의 평등을 주장했고, 감독과 장로, 목사라는 말을 동의어로 보았다. 이와 같이 감독과 장로가 동일한 직분이며, 교회 직분자들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사상에 근거하여, 교회 직분을 계급으로 보거나 계급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배척했고, 교회 통치에 관련된 지배력 혹은 지배권을 형성하는 것까지도 아주 싫어했다.
2) 자율성: 목회자의 청빙이나 교회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교회 당국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의 회중에 있다고 했다. 목사의 청빙은 교회의 대표인 장로들이 청빙하거나 교권을 가진 한 사람이 임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회중의 합의와 인정을 받은 적격자가 목사로 세움을 받을 경우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이 이처럼 교역자를 회중에 의해서 선택하려고 한 것은 교회의 자율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3) 연합성: 칼빈은 교회의 평등과 자율만이 아니라 교회의 연합을 역설했다. 그는 평등과 자율을 강조하면서 연합을 부정하는 회중교회 정치와의 연합은 주장하지만 평등과 자율을 부인하는 감독 정치를 모두 배척했다. 하나님의 뜻은 개개인이나 모든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기준을 갖춘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 결정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회중과 회중의 대표에 의해 선출되어 다스리는 장로 정치를 특별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했다. 노회와 총회 같은 기관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라고 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교회 연합은 성경적이라고 했다.
칼빈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 운영을 반대했다. 더구나 전 회중이 직접적으로 교회 행정에 참여하는 것도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회중에 의해 대표가 뽑히고 그들에 의해 교회 업무가 수행될 때 질서가 유지되므로, 교회 회의는 회중의 대표인 장로와 목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4.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정부와 교회 관계
성공적인 개혁운동과 장로교회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군주제도가 있는 곳과 감독제도가 중심이 되는 곳에는 장로정치는 항상 박해받는 입장이었다. 왕은 장로체제보다는 감독제도를 더 선호했기에 그러하다. 장로체제는 교회와 국가체제가 동등한 것으로 보고 정부나 교회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반대한다. 군주체제에서는 정부가 교회를 지배하고자 한다. 감독을 자기 손에 넣고 교회까지도 지배하려고 했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목사를 영주가 임명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낙스에 의해 장로교 운동이 활발했지만 머튼 경에 의해 감독제가 되었다가 다시 장로교회 제도로 가다가 감독제가 되는 등 장로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과 정부와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감독주의적 장로교회를 허용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네덜란드도 계속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발생했다. 정부는 칼빈의 주장보다는 츠빙글리의 주장을 더욱 받아들여 교회를 계속 정부에 속하게 하려고 했다. 그것이 알미니우스 논쟁에서 강하게 나타났지만 결국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 네덜란드에 개혁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
1. 네덜란드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정부와의 관계가 어려웠다. 네덜란드는 계속적으로 정부와 개혁자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다. 초기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개혁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많은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자유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필립 2세에 의한 핍박은 가중되어 1567년에는 군대를 보내어 개혁자들을 교수형에 처했고 수많은 목사들이 피신하거나 살해되었다. 이런 압제와 학정을 본 오랑게의 빌렘 공은 1572년 필립(스페인)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고 북부의 7개 주와 우트레흐트 조약을 맺는 등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오랜 투쟁을 거쳐 1588년 영국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자 네덜란드는 1608년 독립을 얻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네덜란드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1568년 베셀에 모여 교회 조직을 의논한 후, 『네덜란드 교회의 목회자들이 교회를 섬길 때 필요하며 유용하다고 판단되어 온 조항들』이라는 규칙을 채택하고 1571년에는 엠덴에서 칼빈주의적 교회를 조직했다. 엠덴회의는 『벨직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장로교적인 『교회규칙서』를 제정하여 네덜란드 교회의 정치 규범으로 만들었다. 2년 후 도르트(Dordrecht) 대회를 열고 엠덴회의의 『교회규칙서』를 수정하여 채택했다.
그러나 세속 통치자들은 교회가 장로교회적으로 개혁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관계에 있어서 칼빈의 사상보다 쯔빙글리의 사상을 더 좋아하여 교회의 권징을 교회의 고유 권한으로 보지 않고 국가에 속한 것으로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특히 권징의 문제에서, 교회는 정부측에 여러 번 권징권의 교회 환원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 때마다 이 요구를 일축했다. 권징권에 대한 요구는 교회와 정부의 갈등 관계로 몰아넣었고, 이러한 갈등으로 네덜란드 7개 주는 정부를 지지하는 주와 교회의 주장을 지지하는 주 사이에 대립하게 되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각 주별로 교회 회의를 구성하여 교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하지만 정부의 간섭은 계속되어 권징에 대해 계속 방해했고 특히 지역 정부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알미니우스 논쟁 때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알미니우스는 『벨직신앙고백서』16조항의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배척하고 만인구원론 및 구원의 불확실성을 수용했다. 1605년 모든 지역 대회들은 총회를 소집해서 그를 제거하려 했지만 정부가 이를 방해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따라서 교회와 갈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알미니우스 논쟁은 신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이어서 매우 복합적이었다. 개혁교회 목사들은 교회의 독립을 주장한 반면 이들은 정부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했기에 정부는 그들을 후원하여 그들의 편에 서고 개혁파에 반대했다. 이러한 소수의 의견에 정부가 개입하자 1615년 일부 목사(칼빈주의자들)들은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게 되어 네델란드 개혁 교회는 분열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빌렘 공의 아들인 마우리스가 도르트에서 교회회의가 열고, 개혁주의 교회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는 ① 전적인 타락 ② 무조건적 선택 ③ 제한 속죄 ④ 불가항력적인 은혜 ⑤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를 채택했다.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다시 인정하고 칼빈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옹호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중대한 것들을 결정했지만 그 중에서도 권징문제를 교회의 고유한 권한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18C에 접어들면서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상륙하면서 다시 교회와 정부의 관계를 어렵게 했다. 교회는 도르트 회의에서의 교회법이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함에 불평했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교회가 교회법을 가지려는 것을 그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교회와 정부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정부는 목사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갈등의 시절이 지나면서 19세기가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을 격퇴한 후 네덜란드의 국왕 빌렘 1세는 개혁교회를 네덜란드의 국교로 선언해서 교회와 정부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지만 교회 행정을 장로 체제 대신 귀족 정치로 변경했다. 그래서 교회는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신앙 고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소개되면서 자유주의의 물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혁명과 격동의 시대에 등장한 판 프린스터러는 교회의 영적 타락에 항의하며 혁명을 반대하는 정치운동을 전개했다(반혁명당을 조직). 그리스도인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 주어진 환경과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선과 정의를 구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자들이 정치 영역에 등장하면서 정부의 간섭이 줄어들자, 교회의 연합 운동을 경험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개혁파 회중’이라는 교단과 합동하여 기독교개혁교회를 만들었다.
이 때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덜란드 교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여러 영역에서 큰 활동을 했는데, 일반은총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는 사이 자유주의자를 반대한 이유로 교회에서 제명되자 전통적 칼빈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세웠다. 또한 정부가 교회를 조정하는 것에 대항해서 교회의 자주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한 해결 방법으로 영역주권 사상을 주장했다. 그는 가정, 교회, 국가와 같은 삶의 모든 영역은 자체의 책임 영역이 있고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며 각 영역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정부의 지배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주장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칼빈주의의 원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1901년 수상으로 이 영역주권 사상을 정치에 적용했고 네덜란드는 20C 초반 강력한 개혁주의 국가를 이루었다.
2.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이라고 불리는 패트릭 해밀튼에 의해 시작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요한 낙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그는 여러 번의 포로 생활 끝에 1549년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교섭으로 석방되어 설교하게 되었지만 로체스터의 주교 자리를 거절하고 버위크에서 장로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이 즉위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때 제네바로 피신하여 칼빈의 개혁을 보게 되었다. 메리의 박해가 주춤해진 1555년 8월 고국을 방문하여 개혁주의 신앙을 전파하고 정치지도자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그들에 의해 『제일계약』에 서명함으로 장로교운동을 시작했다. 그 후 낙스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계속 장로교 운동을 펼쳤다. 1558년 11월 17일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것을 기회로 개혁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귀국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있었지만 메리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에 평화가 찾아왔고 낙스는 1560년 동료들과 함께 교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문을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의 요청으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이것이 채택함으로 개혁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2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칼빈의 요리문답과 제네바 신앙고백이 그 기초를 이룬다. 이 고백서는 장로교회의 교리 뿐 아니라 세속 정부와 행정관료가 하나님 앞에서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역설했다. 낙스는 그해 12월 20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조직했다. 총회는 1560년 5월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로 채택했다. 『제1치리서』는 스코틀랜드를 도덕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철저한 권징을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성경적인 교회 정부 형태를 수용하며 다양한 장로교회 정치에 관련된 것이 들어 있다. 1561년 천주교회의 교육을 받은 메리여왕이 귀국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위기를 맞이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를 로마 천주교회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문란한 사생활로 1567년에 폐위되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회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낙스의 사망 후 제임스 왕의 섭정이었던 모톤의 얼 백작이 감독주의를 소개함으로 장로교 정치는 다시 도전을 받았다.
이때 앤드류 멜빌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는 낙스의 『제1치리서』를 개정하여 『제2치리서』를 만들고 성경에 가까운 장로 정치를 실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감독 중심적인 교회 정치를 반대하다가 제임스 6세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고, 그가 영국까지 다스리며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 장로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공화정을 추구하는 장로교 교회보다는 정부가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 정치를 폈다. 이 정책은 영국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의 저항을 초래했고 앤드류 멜빌은 교회와 정부의 역할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이 일로 1607년 런던탑에 4년간 투옥되었다가 추방당했다.
제임스 1세 서거 후 챨스 1세가 즉위하자 영국은 청교도 박멸운동을, 스코틀랜드는 성공회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하여 장로교회를 폐지하고 성공회 의식에 따른 예배가 실시되도록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에 봉기했고, 에딘버러에 모여 장로교 정치와 예배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국가계약을 맺었다.
163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알렉산더 핸더슨과 사무엘 러더포드의 지도 아래 감독제를 추방하고 장로교회를 복구하기로 결의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법이 왕이다』에서 정부는 하나님에 의해 권선징악을 위해 세워진 기관으로 통치자와 백성의 계약에 의해 합법적인 정부가 이루어진다고 했으며,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이중적인 계약 아래 있어 법의 제재를 받아야 하며 그가 백성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백성도 통치자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그는 왕권신수설을 부인하고 백성이 통치자를 선출하고 통치권의 한계를 정할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했으며 찰스1세의 정책에 반대한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 장로교회의 유산이 되었다.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했으나 이 일로 영국에 내란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는 영국, 아일랜드와 함께 신성 동맹과 계약을 맺어 장로교 신앙을 보존하며 영국과 아일랜드 교회의 개혁을 약속했다. 이 계약은 의회의 권리를 인정하고 왕권을 제한하며 청교도들의 입지를 강화하여 주었다. 계약에 충실하기 위해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감독관을 파견하여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문답의 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결국 1649년 찰스는 의회군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크롬웰이 집권했으나 그가 독립파를 편애하자 영국의 성공회주의자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반발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찰스 2세의 배신으로 장로교를 탄압받자 스코틀랜드인들은 이에 대항했다. 이들을 계약파라고 부르는데, 찰스 2세는 계약파를 잔인하게 살해하며 탄압하여 수천 명이 순교하였다. 찰스 2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천주교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1688년 명예혁명으로 축출되고 그의 딸인 메리가 즉위하며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하여 살육의 시기를 끝내고 1690년 장로교 총회를 다시 열도록 허용했다.
빌렘공과 함께 돌아온 계약파 윌리엄 카스테어스 목사는 궁중목사로 장로교회를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하여 1690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 감독주의를 폐지했고 1707년 장로교를 국교로 인정했다. 그러나 1712년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이 의회를 통과하여 지주들이 자기 영지 안에서의 목사 임명권을 주장하면서
1)교회의 자율이 침해되고
2)자유주의 목사의 부임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확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었다
3)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장로교회의 분열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반대한 에벤에셀 어스킨이 노회와 총회에서 제명되자 분리교회를 창립했다. 또 1747년 스코틀랜드 국교를 참 종교로 승인하는 문제로 서약파와 반서약파로 나누어졌다. 그 후 어스킨 중심의 서약파가 다시 분열했고 1806년 토마스 매크리 중심의 반서약파도 재분열의 아픔을 체험해야 했다. 토마스 길레스피도 세속정부의 교권 지배를 인정하는 평신도의 목사 임영권을 거부했다. 1752년에는 원치 않는 교회의 취임을 거부하던 그는 면직되었고 1761년 구원교회를 조직했다.
또 18세기말과 19세기에 합리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중도주의 신학운동-기독교는 체험이나 교의가 아니라 윤리적인 삶 자체라 생각-이 일어나자 이에 대항하여 장로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토마스 찰머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는 자유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신앙의 회복을 위해 일했다. 그는 정부가 그리스도의 주권과 기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반대했고 결국 이러한 문제로 1843년 정부 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교회 분열은 교회의 정부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정부가 지명한 목사를 섬길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내포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는 연합운동이 일어나서 1847년에는 길레스피의 구원교회와 어스킨의 장로교회가 합동하여 연합장로교회를 조직했고, 1900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연합장로교회가 합하여 연합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소수파는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연합을 거절하고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남아 신앙을 보수하였다.
5. 미국 장로교회에서의 교역자의 질과 교회 성장의 관계
미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목사의 학문적인 수준을 중시했다. 설교자의 숫자가 다소 부족할 때에도 그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추구하던 이상대로 학식 있는 이를 목회자로 세웠다. 그와 더불어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계속 인재를 발굴하려고 했다.
18세기 말 미국 장로교회는 선교의 필요성과 목회자의 수급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으나 목사의 학문적 수준을 완화하자는 결의를 번복하여 학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자에게 목사직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 때 더 넓은 땅을 얻기 위한 서부개척 운동(프런티어)이 전개되면서 교회확장 운동이 전개했지만 장로교회가 감리교회와 침례교회보다 앞장서지 못한 이유는 목사의 자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학문성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로 교단을 확장할 수도 없었다. 이때 해결방안으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회중교회와의 협력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존 블레어 스미스). 그리고 여러 과정을 거쳐 1800년에는 회중교회 측인 조나단 에드워즈 2세가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합동을 제안하여 1801년에 두 교단이 통합했다. 두 교단의 지도자들은 통합의 원칙으로 다음 4 가지를 합의했다. ① 새 개척지에서 모든 선교사는 상호 협력한다. ② 회중교회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일하다가 문제가 발생한 경우 그가 속한 장로교 노회에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③ 장로교회가 회중교회 목사를 초청할 경우 장로교회 헌법을 따라서 하도록 한다. 그러나 목사와 교회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목사가 속한 연합회에 보고하도록 한다. ④ 상임위원회를 둔다. 이와 같은 서부 개척과 통합으로 장로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켄터키와 테네시를 비롯한 서부 지역에 많은 장로교 신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침례교회가 더 큰 교단으로 성장해 가게 되자, 1801년 트란실바니아 노회가 학력이 모자라는 4명에게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임시로 맡아 설교하며 요리문답을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또 컴버랜드 노회는 이보다 더 급진적이어서 1802년-1804년 목사 자격을 완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를 켄터키 대회에서 이를 징계하자 컴버랜드 노회 측은 교단을 이탈하여 독립 노회를 결성하고 컴버랜드 장로교회를 세웠다. 교회사가 입증하듯이 교리를 무시하는 교회가 바른 신학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컴버랜드 교단은 결국 알미니안주의로 빠지고 이들은 벧엘 대학과 컴버랜드 신학교를 세우고 1906년 자유주의적 신학을 취하는 미합중국 장로교회(P. C. USA)와 합동했다.
컴버랜드 노회의 이탈 후, 미국 장로교 총회는 목사의 교육 수준을 낮추려는 모든 시도를 배제하고 수준 높은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1811년 뉴저지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812년 총회는 높은 학문과 도덕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목회자의 양성을 목표로 신학생이 갖추어야 할 학문적 자질로, 성경 원어에 통달한 성경학자가 되어야 하고, 유대 역사와 기독교 고전을 이해하며, 조직 신학, 교회사, 실천신학을 배워서 목회자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게 할 것을 결정했다. 또 신학교 교육 기간은 3년으로 할 것이며, 성적 평가를 위해 시험을 칠 것과 경건생활과, 주일 성수, 금식을 하도록 하고 경건 훈련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퇴교하도록 했다. 그 후에도 1818년에 어번 신학교, 1823년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 1827년에 웨스턴 신학교, 1828년에 컬럼비아 신학교, 1829년에 레인 신학교, 1830년에 맥코믹 신학교, 1836년에 유니온 신학교가 뉴욕에 세워져서 급속히 성장해 나가는 교회들에 자격을 갖춘 목사들을 공급할 수 있었다.
6. 장로 교회의 쇠퇴 원인과 재건
미국 교회의 몰락은 진화론의 영향과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산업화와 도시화와 함께 일어난 대 이민 운동은 미국 교회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여러 지역에 온 이민자가 미국 인구의 1/3이 되었는데, 그들은 유대교, 로마 천주교, 그리스 정교회, 불교, 힌두교 등 다양한 신앙을 전파하여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던 청교도의 언덕 위의 도시는 사라지고 미국의 종교는 다원화됐다.
1) 진화론: 다윈의 진화론은 교회의 기초까지 흔들어 놓았는데, 천지 창조와 하나님의 섭리 관계와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관의 파괴를 가져오고, 고정 개념들이 깨졌으며, 불변하는 진리가 없다는 상대적인 가치관이 번지게 했다. 신학계에서는 진화론은 부정하는 무리와 수용하는 무리로 갈라지게 되었고,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진화론을 인정하게 되어 교회는 진화론의 영향에 들어갔다.
2) 자유주의 신학
(1) 고등비평: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어 미국에 보급되자, 일부 학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 교리를 부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들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주장함으로 신앙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찰스 브릭스는 이를 비판, 진화론을 지지하여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 논쟁에 빠졌다. 1892년 총회는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를 지지하여 브릭스의 교수직을 정직시키고 1893년에도 총회의 성경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2) 신비주의: 성경의 객관적인 권위가 부정되며 교회가 무력해지자 신앙의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가 일어났다. 20세기 초 일어난 대표적 신비주의 운동은 성령의 은사와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이다. 이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체험을 중시하여 성경중심적 신앙을 배척했다.
(3) 세대주의: 또한 세대주의의 도전을 받아 성경 해석의 혼란을 빚게 되었다. 세대주의는 1840년경 영국의 다비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역사를 7단계로 나누고 전천년설적 세대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그리고 1875년 시작한 ‘예언적이며 성경적인 집회’와 1909년 출판한 『스코필드 성경』을 통해 영향력을 넓혀 갔다. 특히 1886년에는 무디 성경학교와 1907년 로스앤젤레스 성경학교를 세워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계약신학을 부정하고 비관적 종말론과 배타주의적 문화관을 보급했다.
· 장로교회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목사 후보생들에게 안수 받기 전,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기독교의 5개 교리를 고백하도록 결의했다. 1) 성경의 무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교리. 장로교도들은 성경 중심적인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자 했으나 끈질긴 인본주의적 신학의 도전에 굴복하여 자유주의, 신비주의 같은 현대 사조에 무릎을 꿇음으로 기독교의 비 기독교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3) 신조의 개정: 18c 이후 인간중심의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에 의해 인본주의 사상이 퍼졌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앙고백을 수정, 새로운 신조를 만들어 낼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20c에 와서 북 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교리 개정에 관심을 나타냈다(반 다이크와 찰스 브릭스). 결국 1903년 총회는 이를 받아들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고 ‘선언문과 성령에 관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2개장을 신조에 첨가했다. 여기에서 북 장로교회들은 보편 속죄론을 지지했고, 칼빈주의적 예정교리를 삭제함으로 결국 전통적 개혁주의 신앙으로부터 떠나고 말았다. 신학적 포용주의를 취한 북 장로교는 1906년 모든 미국 장로교회에 합동을 제안하여 알미니우스주의를 수용하고 컴버랜드 장로교회와도 연합했다. 이러한 미국교회의 쇠퇴는 전통적으로 고백해 온 기독교 교리를 포기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연합장로교회는 1967년 신앙고백을 수정하여 타 교단과의 담을 헐어버렸다. 삼위일체라는 단어와 성경 무오교리가 삭제되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강조되었다. 그들은 인종, 전쟁과 가난, 성 문제를 시대적인 과제라고 선언하고 교회의 화해 능력이 요구된다고 했다.
4) 혼합주의 운동: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주님의 뜻이지만, 불신앙적인 집단과의 연합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찰스 브릭스는 조건 없는 교회의 연합을 주장하여 혼합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연합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결국 교단 일치운동은 로마 천주교회까지 포함시키는 운동으로 확산되어 장로교회는 예배 의식이나 신학 사상에서 로마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로마 천주교화 되고 말았다.
5) 여성 목회자의 등장: 여성 권리의 신장은 남녀평등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북부 지역의 장로교 통합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후 여성 해외 선교부를 조직했고, 1915년 여 집사 제도, 1923년 여성도 모든 초교파적인 기관과 교회 회의의 임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 여성 장로가 허용되었고, 1956년 여성 목사 제도를 승인하여 1971년에 최초의 여성 총회장이 나오게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의 쇠퇴는 여성 목사의 등장으로 가속화되었고 교회를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6) 예배의 의식주의화: 19C에 로마 천주교회, 루터파, 성공회, 개혁 교회에서 의식을 강조하는 운동이 번져갔고 장로교 예배는 인간의 고안물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예배의 순수성을 유지해 오던 미국 장로교회는 1840년대 성찬 중심의 예배 운동(존 키블)으로 설교보다는 의식 중심의 예배가 되었고 강단 중심의 예배가 제단 중심의 예배로 변했다. 이러한 현상은 북 장로교회에서 시작되었고, 남 장로교 안에서도 그 영향이 나타났다. 1957년 남장로교 총회는 북장로회와 함께 『공중기도서』를 만들고, 1960년에는 『예배지침서』를 만들어 보급하여 성례 중심의 예배를 강조했다
7) 재건 방향: 북 장로회가 좌경화되고 전통적 기독교 신앙이 도전을 받게 되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해독을 경고하고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고 1909년-1915년 『근본적인 것들: 진리의 증언』이라는 12권으로 된 책을 출판하여 미국 전역에 250만 부를 배포하여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1) 근본주의 논쟁: 『근본적인 것들: 진리의 증언』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는 논문 29편을 기고함으로 출판되었다. 거기에는 고등비평과 현대 과학적 입장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1)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2)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3)성경의 무오성 4)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5)그리스도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과 같은 진리를 옹호했다. 그런데 근본주의 운동에 반대한 포스틱과(진리의 상대성을 주장)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에 대항한 메카트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논쟁은 1920년-1930년대 그치지 않았으며 1923년 총회가 근본주의적 입장을 확인하자 1924년 어번신학교, 뉴욕 유니온 신학교,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 등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 1,274명은 어번 확인서를 발표하여 목사 안수에 교리를 관여시키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2) 프린스턴의 좌경화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논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프린스턴 신학교가 좌경화되자, 메이첸은 1923년『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출판하여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므로 이단성을 인정하고 교회를 떠나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1929년 장로교 실업가들과 몇 명의 교수들, 학생들을 포함한 약 70여명이 모여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개교했다. 이렇게 되자 북장로교 총회는 급속히 좌경화하여 자유주의화 되었고 메이첸은 10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북 장로회를 떠나 미국장로교회(PCA)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남 장로회 신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메이첸은 잘못된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정당화했다.
(3) 보수파의 분열과 진보파의 연합 운동: 1930년대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들은 무천년설을 고백했는데, 대공황으로 인해 전천년설(역사를 비관적으로 봄)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매킨타이어 중심의 필라델피아 근본주의 협회는 전천년설을 공식적인 교리로 선언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비판한 후, 훼이스 신학교를 세우고 성경장로교회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들은 싸우기만 좋아하는 편협한 자,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하며 자유주의 교회로 떠났다. 보수주의자들이 다투고 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연합운동을 통해 그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20 세기의 교회 연합 운동은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정치와 경제의 집중화 현상에 편승하여 교회가 그 기능을 다하려면 연합해야 한다는 사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사상에 기초하여 1869년 북부의 보수파와 진보파가 한 교단을 만들었고 1873년에는 남 장로교와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878년 북장로회는 다시 연합을 촉구하여 남 장로가 화답함에 따라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 장로회가 자유주의적 신학 노선인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연합하자 남 장로회는 다시 태도를 바꾸어 연합이 성사되지 못했다. 북장로회는 1954년부터 북미 연합 장로교회(UPCNA)와 연합을 시도하여 1958년에 두 교단이 합하여 미국 연합장로교회(UPCUSA)가 태어났다. 1972년 미국 장로교회(PCA)가 탄생했다.
7. 미국 New-side와 Old-side가 미국에 미친 영향
최초의 분열 움직임은 서면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신대륙의 사회는 혼란지고, 많은 이단 사상이나 합리주의 신학이 신대륙에 상륙하자, 장로교회는 신앙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나 될 필요를 인식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목사들은 목사 후보생들에게 여러 신앙고백서들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조항이요, 건전한 표현일 뿐 아니라 체계”라고 고백하고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과 뉴잉글랜드 출신의 목사들은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성경만이 신앙과 예배의 유일한 규칙이며, 성경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묶어 놓을 수 없으며 서명을 강요하는 것은 양심과 개인적 자유를 제한하는 죄악이라는 이유에서 서명할 것을 거부하여 서명논쟁이 시작되었다. 그 후 교회 분열이 우려되자 오랜 고민 끝에 타협안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명파와 비서명파의 대립은 후대 미국 장로교회의 갈등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분열의 시작은 대각성운동과 그로 인한 부흥 때문이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은 1730년대 중반 - 1740년 초반 장로교적인 칼빈주의자들에 의해(테넌트가의 사람들,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통나무 대학) 이루어졌다. 이들은 교리보다는 개인적인 체험과 전도, 경건을 강조하여 1720년대 후반부터 가는 곳마다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합리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등이 영향력을 상실했고, 칼빈주의 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장로교가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대각성운동은 장로교회의 분열의 동기를 제공했다. 예일대학과 통나무 대학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을 지지하는 신파 세력(New Side)과 하버드 대학 출신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세력(Old Side)이 나눠지게 되었다. 부흥운동으로 교구의 질서가 깨지게 되자 구파는 부흥운동을 사단의 역사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신파는 구파가 영적으로 죽어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① 목회자의 자격에 대한 의견과 ② 구파는 학문을 강조하고 신파는 경건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서 분열이 되었다.
그 후 신파 중심의 뉴욕대회가 조직됨으로 미국에는 두 개의 장로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구파: 뉴런던대학, 신파: 뉴저지대학=프린스턴 대학). 그러나 명분 없는 분열이 아무 유익이 없자 신파 중심의 합병이 이루어졌다(구파: 지도력이 빈곤하고 교회들의 지지를 잃어 힘이 없는 상태). 원칙:『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받아들이고 명칭을 뉴욕-필라델피아 대회라고 함. 그러나 대각성 이후 공동체의 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청교도들의 꿈은 사라지고 개인적 경건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에드워즈의 사후, 뉴잉글랜드의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 정의보다 개인 구원만을 강조하며 사회문제와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리하여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주의적 교회로 옮겨가게 되었고 복음적 교회의 몰락을 초래했다. 정통 신학을 고수하던 청교도들의 교회는 거의 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니테리언 교회로 변했다. 그러나 중부 식민지의 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교파주의가 번지며 회중교회와 장로교회의 통합에 대한 비판이 형성되고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보수적인 목사들은 회중교회 출신의 진보적 목사들이 칼빈주의 신앙을 버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진보파 목사들은 1801년의 통합과 초교파적인 선교사역을 지지하며 노예제도 폐지와 신학적 관용 등을 내세웠다.
1) 통합 계획의 폐지: 1829년 진보파인 알버트 반즈가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를 통해 보수파를 비판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초교파적인 미국 내지선교부와 미국 교육협회의 운영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더욱 심화되었다. 진보파가 초교파적인 협력을 주장하자, 보수파 교회들은 장로교 독단으로 선교부를 운영할 것을 역설했다. 1835년 총회 개최 전에 보수파는 진보파에 불건전한 교리의 보급과 신앙적인 방종을 경고했고,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통합을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1837년 총회에서 1)1801년 통합 계획의 폐지 2)초교파적인 단체들과의 관계 단절 3)통합에 의해 조직된 웨스턴 리저브 노회, 위티커 노회, 제네바 노회, 제니시 노회 등으로 구성된 웨스턴 리저브 대회가 불법적으로 조직되었다고 주장하며 총회에서 진보파를 제거했다. 이에 진보파는 보수파가 장로교 원리와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을 부정한다고 비난하면서 1837년 여름 뉴욕의 어번에 모여 그들의 신앙을 해명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여 그들에 대한 교리적인 불신을 종식시키고 웨스터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한 바른 신학을 표명했다. 그리고 총회에 회원권을 요청했으나 묵살하자 따로 총회를 구성하여 미국 장로교는 둘로 나눠졌다. 미국의 남부와 북동부 지역은 보수파가 북부 지역은 진보파가 차지하여 교회의 분열은 미국 사회를 지리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두 교회간의 적대감은 남북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2) 노예 폐지 논쟁: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1830년 이후 노예 문제로 절정에 달했다. 흑인 노예 해방 운동은 미국 독립 운동의 기초가 된 “자유와 행복 추구권”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국의 지성인들과 장로교도들은 일반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나 1820년대와 1830년대의 초반까지는 목화 재배에 대한 일손의 부족으로 강력한 반대발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833년 루이스 태핀과 아더 태핀 형제가 급진적인 노예 폐지론자인 윌리암 로이드개리슨과 함께 노예폐지협의회를 조직하고 레인신학교 학생들이 가담하면서 노예 폐지운동이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레인신학교 이사회에서는 반대하고 아사 마한이 오벌린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자 다수의 학생이 그를 따라감으로 오벌린 대학이 노예폐지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오벌린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찰스 피니는 노예제도가 죄악이며 노예 해방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사상은 조지 번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노예 문제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1836년 장로교 총회는 노예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무기한 연기했다.
3) 남북 장로교회의 분열: 노예 문제는 장로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1837년 진보파와 보수파의 분열을 겪었지만(노예제도가 분열의 주된 이유는 아님) 이제는 노예 문제로 남북으로 분열되었다(1844년: 침례교회, 1845년: 감리교회). 1850년 진보파 총회가 노예제도를 정죄하자 렉싱톤 노회를 비롯한 남부 교회들이 반발했고, 이를 대한 총회의 징계로 21개의 남부 노회들이 북부로부터 분리하여 연합 남부노회를 조직했다. 1861년 총회가 노예제도 폐지를 결정하자 남부의 보수파 교회들이 반발하여 미연방 장로교회(PCCSA)를 조직하여 미국 교회는 남 장로교회와 북 장로교회로 나누어진다.
당시 남장로교의 지도적인 인물은 벤저민 팔머와 제임스 손웰이었고 북장로교는 하지였다. 손웰(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학장을 역임한 남장로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은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는 충실했으나 성경의 교훈에는 무관심하여 노예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성경을 들먹이면서 노예제도를 옹호했는데, 이것은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이다. 성경이 노예제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하지는 계급을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손웰이 대표 원리를 찾는 반면 하지는 소수가 다수에게 복종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는 1855년 『장로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연설에서 장로정치를 “자유의 원리”와 함께 “질서의 원리”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며 성직자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회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4) 남북 전쟁 이후의 장로교회: 노예문제로 남북이 나뉘자, 각각 교회 합동 운동이 일어났다. 남부 장로교회는 1864년 보수파와 진보파가 합동하여 교단 명칭을 미국장로교회(PCUS)라 하였고, 북부의 장로교도 1869년 합동하여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라 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나 교회는 남부와 북부로 여전히 나뉘어 있었고 갈등도 계속되었다. 북부 교회는 남부교회가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고, 남부교회는 북부교회를 비판하여 서로 불신의 골만 깊어졌다. 그러나 무디의 부흥운동으로 장로교인의 생활은 달라져 갔다. 무디는 1873년-1875년 사이에 시카고를 복음화하고 시카고 전도협회를 조직하고 대중 전도집회를 전개하며 찬송과 기도와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무디의 전도 운동은 토리, 집시 스미스, 빌리 선데이, 그리고 빌리 그래엄의 전도 집회로 계승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은 전통적인 개혁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이고 의식 중심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종합해 보면 Old Side 칼빈주의 자들은 이러한 대각성 운동을 반대했다. 진정한 부흥은 감정적인 고조된 상태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New Side는 감정적인 부분에 많이 치중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부흥운동 가운데 많은 대립이 있었다. Old Side는 부흥운동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 New Side는 부흥에 많은 기여를 했다. 실제적으로 외적인 부흥이 일어났으나 한 편으로는 참다운 은혜를 모르는 신앙의 질의 저하를 가져왔다고 보기에 양쪽의 견해가 어느 정도 한 편에 평가는 정확했다. N. Side - New School은 감정적인 면을 많이 수용하여,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다보니 합리주의로 나가게 된다. 소위 신학적인 진보적인 입장들이 나오게 된다. 제2차 분열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신학적인 입장을 가진다. O. Side - Old School은 장로교 교단 중심의 본질을 지키려는 것이다. 장로교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제2차 분열이 일어난다. 그래서 제2차 분열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