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점감상실’과 ‘동백아가씨’
‘즉흥 스테이지’. 하루는 단골 전유성이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하고 와서 가위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자기가 솔로 액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액트는 5초를 넘기지 않았다. 매고 왔던 새 외제 넥타이를 목 아래 10cm 정도에서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그뿐이었다. 부잣집 아들같지 않았던 전유성.
전위행위예술가 정강자씨도 즉흥 스테이지에 모습을 보였다. 정강자씨는 미술가로 가수 남일해의 누이동생이었다. 음악을 따로 가져와 한판을 벌였다. 흰 망토 같은 의상을 입고 간단한 분장을 하고는 거의 나체로 바디 랭귀지를 보여주었다. 학생들과 같이 보는데 왠지 가슴이 무거웠다. ‘해프닝’ ‘스트리트 퍼포먼스’ 같은 단어들이 주변에 떠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날의 퍼포먼스는 관중의 역할보다 ‘행위자의 감성 체험’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삼행시 백일장’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재치 넘치는 글들이 많았는데 수작에는 쎄시봉 입장권을 상품으로 주었고 범작은 혹평을 맞고 머리 뒤로 버려졌다. 얼마간 진행을 맡다가 당시 홍익대 학생이던 이상벽에게 바통을 넘겼다. 훗날 이 프로는 CBS 라디오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성점(별의 개수로 평가를 한다는 뜻) 감상실’. 하루는 TBC TV로 정홍택 기자가 찾아왔다. ‘주간한국’이 창간되는데 좋은 아이템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학 때부터 계속 읽어오던 미국의 재즈 전문 격주지 ‘다운 비츠’에서 본 ‘블라인드 폴드 테스트’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새로 나온 음반을 유명 재즈 뮤지션에게 설명 없이 들려주고 각 파트의 연주자가 누구이며 평가를 한다면 별을 몇 개 줄 것인가 하는 특이한 칼럼이었다. 별 다섯 개에서 별 하나까지 채점을 하고 그 음악에 대한 자기 평을 쓰기 때문에 연주자, 제작자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페이지였다. 눈을 가리고 한다는 뜻으로 사전 정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시청(試聽) 소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말 ‘성점감상실’이란 제목으로 연재가 결정됐다. 다운 비츠는 유명 재즈 평론가가 입회한 상태에서의 1인 평이었지만 성점감상실은 쎄시봉에서 공개로 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용지를 돌려 의견과 별 개수를 적도록 했다. 최고점은 별 다섯 개였다. 자신의 평이 주간지에 실린다고 하니 학생들의 참여가 왕성했다.
메인 게스트로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었는데 3주차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봉봉사중창단이 손님이었고 주어진 곡은 ‘동백아가씨’였다. 봉봉은 이 곡에 평점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왜색조라는 이유였다. 기사가 나가고 신문마다 왜색가요 시비의 기사가 올라왔다. 결국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이 곡을 금지곡으로 묶고 말았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성점감상실’은 1970년대까지 장수했다. 짧은 몇 줄의 의견이었지만 학생들이 시중 잡지에서 평론가의 역할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주간한국’의 정홍택씨와는 ‘신곡합평회’, ‘시인만세’도 같이했다. 쎄시봉은 ‘주간한국’ 전용 젊은이의 광장이었던 셈이다. 신곡합평회는 레코드 제작에 들어가기 전 대학생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이었고, 시인만세는 시인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말씀과 자작시 낭송을 듣는 기획이었다. 아마추어 시인들도 참가해서 자작시를 낭송할 수 있었다. 첫 손님으로 서정주 선생을 모셨고 박목월 선생, 박재삼 시인 등 쟁쟁한 분들이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와는 별도로 ‘명사특강’도 했는데 국회의원 김대중, 정광모씨등 각계 분들이 와주었다.
‘대학생의 밤’에서 구봉서씨를 초청한 일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구봉서씨를 만나 쎄시봉에 한번 얼굴을 비쳐 달라고 부탁했다. 뭐하는 곳이냐는 반문에 음악감상실인데 대학생들이 모이는 장소라 설명을 하자 막동이 구봉서씨는 “어이쿠, 안 돼요. 나 세상에서 대학생들이 제일 무서워요. 그 친구들 길에서 날 보면 ‘막동이구나’ 하고 막 부르면서 콧방귀 뀌어요. 난 대학생 보면 미리 도망가요. 걔들은 날 사람으로 안 봐요. 사절하겠습니다” 하며 손을 내저었다.
술집에 팔려간 그 여자아이
그럼에도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약속한 날 나는 학생들과 작전을 짰다. 보초가 길에 나가 기다리다 구봉서씨의 모습이 보이면 알리기로 했다. 그가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전원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다. 무대중앙 좌석에 앉을 때까지 그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구봉서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시지 말고 같이 있어만 주세요.” 그는 더욱 의아해했다.
학생들이 차례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개그도 했다. 손님을 위해 모두 일어나 주먹을 흔들며 빨간 마후라도 불렀다. 학생들의 구봉서씨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쎄시봉 전체가 무대였고 그 날의 유일한 관객은 구봉서씨 혼자였다. 끝에 가서 마이크를 잡은 구봉서씨는 감격의 답사를 해주었다.
“이럴 줄 몰랐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고, 대학생들이 이렇게 귀여운 줄도 몰랐다. 꿈을 꾸는 기분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정말 고맙다.”
끝난 후에도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그가 사라질 때까지 기립박수는 이어졌다.
프로가 없던 가을날 밤이었다. 실내에 바깥의 냉랭한 공기가 스며드는 여덟 시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신청곡을 받고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생각나세요? 매일 저 베란다 바로 아래 자리에 혼자 와서 음악 듣던 여자 아이.”
그는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걔가 나가면서 말했어요. 이젠 쎄시봉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부산 술집에 팔려서 간댔어요. 서울역에 빨리 나가야 한다면서 아까 나갔어요.”
그 여자아이가 신청하던 곡은 늘 티미 유로가 부른 ‘허어트(Hurt)’였다. 빈자리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티미 유로의 처절한 가락이 찢어질 듯이 쎄시봉 안을 메아리쳤다.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실내는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