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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화가, 아니 우리나라 전시대의 화가들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단원 김홍도가 첫손가락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수많은 뛰어난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신라의 솔거(率居), 고려의 이녕(李寧, 12세기 전반과 중엽 활약), 조선 시대의 안견(安堅, c.1400~1470년경), 정선(鄭敾, 1676~1759), 장승업(張承業, 1843~1897)등 大家들만 해도 상당하다. 조선시대의 경우 안견, 정선, 김홍도, 장승업을 四大家로 꼽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들은 각각 독특한 예술적 성취와 업적을 지니고 있어 어느 한 사람을 최고로 추켜 올리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화가들 중에서 단연 김홍도를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화가로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작품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들이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조선 초기의 안견과 그 이전의 화가들의 경우 남아 있는 작품이 아예 없거나 아주 드물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천재적인 화가라 해도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김홍도의 경우 작품세계가 아주 다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김홍도는 산수화, 화조영모화, 인물화 등 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無所不爲의 기량을 발휘했다. 조선 후기에 김홍도보다 약간 앞서 명성을 떨쳤던 겸재 정선의 경우 주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長技였다. 그래서 정선은 그 회화적 성취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 만큼 많은 분야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장승업의 경우에는 작품세계가 다양하지만 김홍도처럼 서민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근한 국민적 화가인 김홍도는 경기도 安山에서 자라나며 대화가로서의 기틀을 닦아 나갔다. 안산이 이처럼 조선후기 최대의 화가 김홍도가 성장하는 배경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8세기 당시 안산은 노론(老論)과 이 당쟁에서 피해 물러난 남인(南人)과 소북(小北)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다. 우리나라 실학자 중 유명한 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조카이자 당시 문단의 거장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허필(許?, 1709~1768), 강세황의 처남이자 안산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진주 유씨 유경종(柳慶種, 1714~1784)과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유경종은 조부인 이조판서 유명현(柳命賢, 1643~1703)의 고향집을 물려받아 오교장(午橋莊)을 마련하여 안산 문화계의 사랑방을 제공하였다(지금의 부곡동). 현재의 정재초등학교도 진주 유씨 후손들이 그 부지를 정부에 기증하여 건립된 것으로 유명현의 호이다. 어쨌든 유경종의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많은 인물들 중에는 유명한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시인 신광수(申光洙, 1712~1775), 正祖代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정치인 목만중(睦萬中, 1727~?) 등 유명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홍도는 이처럼 풍성한 안산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로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스승 강세황과 이용휴가 있었으며, 이들은 안산 문화계의 핵심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김홍도의 폭넓은 회화세계는 풍속화(風俗畵)와 신선도(神仙圖 ⇒ 道釋人物畵), 고사도(故事圖 ) 등의 인물화, 다양하고 많은 소재를 포괄하는 화조화, 동물화, 진경산수화와 관념적인 산수화 등 너무나 다양하다. 이들 중 풍속화나 신선도 한 가지 분야만 해도 아주 큰 회화적 성취와 그에 따른 풍성한 미술사적, 문화사적 맥락을 짚어 볼 수 있다. 고사도나 화조화, 진경산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홍도의 폭넓은 회화세계를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열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그것보다는 김홍도의 회화적 성취 중에서도 중요한 한가지 주제-금강산도에 대해서 그것이 그려진 경위와 회화적 특징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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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금강산 여행과 그림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우선 김홍도의 생애를 연보를 통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이 그의 전체에서 차지하는 연대기적인 위치와 문화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회화 자체의 이해에도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 김홍도 年譜 - *1774년 강세황이 서울에서 안산시 부곡동 처가 근처로 이사옴 1745(영조21)년 金海 金氏 중인 집안에서 출생, 증조부는 萬戶(종4품). 부친 金錫武 는 벼슬없음
소년기 - 10대 : 安山에서 유명한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과 문학가 이용휴(李用休)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서 문예 전반의 교양 을 쌓음. 10대말 - 20초 : 도화서 화원이 됨. 20대부터 명성 날림. 1765(영조41)년 (21세) :《景賢堂受爵圖?屛》을 그림(그림은 전하지 않음). 1773(영조49)년 (29세) : 英祖御眞 및 世孫(正祖)의 초상을 그리는데 동참화사 1776(영조52)년 (32세) : 봄 호암미술관 소장 《群仙圖》8첩병풍
※ 3월 5일 英祖 승하, 正祖 즉위.
1778(정조 2)년 (34세) :《行旅風俗圖》 8첩병풍, <西園雅集圖>扇面,<西園雅集圖>6첩병풍 1779(정조 3)년 (35세) :《神仙圖》 8첩병풍(국립박물관), <松月圖> 1781(정조 5)년 (37세) : * 眞率會. <仕女圖>, <正祖御眞>(31세상), 《慕堂平生圖》8첩병풍 1782(정조 6)년 (38세) : <南極星圖> 1783(정조 7)년 (39세) : 12월 28일 경상도 安奇察訪 임명(이후 1786년 5월까지 2년4개월간 재임). 1784(정조 8)년 (40세) : 燈淸閣雅集. 淸凉山 遊覽 <檀園圖> 1786(정조10)년 (42세) : "湛樂薺"懸板(안동인근 풍산읍 상리동 宣城李氏 ?華亭) 5월 경상감사 김상철과 이병모의 선정비 세움(현재 안동시립민속박물관 뜰). 5월 안기찰방 임기를 마치고 강세황에게 「檀園記」를 청해 받음 <安陵新迎圖>(原本은 전하지 않음). 1787(정조11)년 (43세) : 李漢鎭과 <寧靜帖>을 합작 1788(정조12)년 (44세) : <金泥竹鶴圖>선면, <金泥花鳥圖>>선면. 隱巖雅集, 4월2일 李德懋의 부친의 71세 생일잔치에참석, 가을 金剛山 寫景. 1789(정조13)년 (45세) : 對馬島에 가서 지도를 그림. ※ 顯隆園 영건. 1790(정조14)년 (46세) : ※龍珠寺 창건, <騎驢遠遊圖>선면, 《十老圖象帖》 (강세황과 합작) 1791(정조15)년 (47세) : ※강세황 卒(79세), <松石園詩社夜宴圖>, <정조어진>, 12월 22일 충청도 延豊縣監 임명. 1792(정조16)년 (48세) : 연초 연풍현감 부임. 公靜山 上菴寺에 기우제와 시주. 이때쯤 아들 金良驥 출생. 9월 李光燮, 李漢鎭, 黃 運祚 등과 西原雅集. 1793(정조17)년 (49세) : 연풍현감 재임. ※봄 작년에 이어 三南에 가뭄과 기근. 1794(정조18)년 (50세) : 연풍현감 재임. ※3년 연이어 三南에 큰 기근. 1795(정조19)년 (51세) : ※1월 7일 연풍현감 해임.
※윤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華城).
『園幸乙卯整理儀軌』圖設 삽화, 《을묘년화첩》, 《풍속도8첩병풍》 1796(정조20)년 (52세) : 《병진년화첩》(檀園折世帖), 『佛設大報父母恩重經』再刊. <徐直修肖像>, 《園幸乙卯整理所?屛》(수원능행도). ※8월 19일 華城 완공, 水原行宮에 排設한 병풍 ?本華城秋八景圖 그림. 1797(정조21)년 (53세) : 『五倫行實圖』 1798(정조22)년 (54세) : <海山仙鶴圖> 1799(정조23)년 (55세) : ※ 이 무렵부터 만년에 쓴 書簡과 詩文이 《檀園遺墨》 1800(정조24)년 (56세) : 正初 歲畵 《朱夫子詩意圖>, 8첩병풍
※6월 28일 正祖 갑자기 승하함.
1801(순조 1)년 (57세) : 《三公不換圖?屛》 1802(순조 2)년 (58세) : <滄波圖>선면, <老僧觀瀾圖>, <歸漁圖> 1803(순조 3)년 (59세) : <冠巖圖> 그림( 《高山九曲圖12첩》 병풍 중 제3폭). 1804(순조 4)년 (60세) : 이무렵 천식 등 병고로 시달림. 5월 5일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처음 差定 됨. <耆老世聯契圖>, <老梅圖>, <知章騎馬圖> 1805(순조 5)년 (61세) : 8월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祿取才에 마지막 참여함.
<秋聲賦圖>
1809년말 이후 1809년 이전 어느 때 죽음. 1809(순조 9)년 : 純祖가 《海山帖》을 洪顯周에게 下賜함. 1818(순조18)년 : 아들 김양기가 《檀園遺墨》을 만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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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44세 때인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게 되었다. 이때 정조대왕은 김홍도와 함게 동료이자 선배화원인 김응환도 동행할 것을 명하고, 두 사람이 거쳐가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부족함이 없이 준비해 주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정조가 이처럼 김홍도에게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려오라고 지시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정조 자신도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승지로서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멀리 중국인까지도 그 명성을 듣고 가보고 싶어했으니 만큼 인간 정조로서도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國政에 힘써야 하는 군왕으로서 최소 한달은 걸리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림으로나마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적합한 화가는 자신이 왕세손(王世孫) 시절부터 신임하고 아꼈던 김홍도가 적임이었다.
그런데 김홍도가 다녀온 금강산과 관동팔경 사생 여행의 경로는 요새 남한 사람들이 즐겨 가는 금강산 유람을 가던 코스와도 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바닷길로 해금강, 외금강을 볼 뿐이고, 옛날의 금강산 유람도 한양에서 철원, 회양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을 주로 보는 코스였다. 그런데 김홍도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영동고속도로와 동해안 해안도로, 그리고 금강산에 이르는 코스를 잡았다. 이것은 김홍도의 여행 목적이 단순히 금강산 뿐만이 아니라 관동팔경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관동팔경의 명승지를 얼마나 가보고 싶어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금강산은 관동팔경과 함께 바다와 산(海山)승경의 중심이었지만, 오직 금강산만이 볼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홍도가 지나간 지역 중에는 남한의 대표적 명산, 설악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김홍도가 지나간 여로를 순서대로 열거해 보기로 한다.
한양을 떠나 양근, 지평(楊根, 砥平:현재의 양평군)을 거쳐 원주에 이르러 淸虛樓를 그렸다. 청허루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원주목 조에 "추천현 객관 서쪽에 있는데 절벽과 맑은 담이 있다(在酒泉懸客官西 石壁削立 下有澄潭)"이라 되어 있다. 원주를 떠나 평창군 방림(芳林), 대화(大和)를 거쳐 淸心臺를 그렸다. 청심대는 대화에서 진부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며, 진부에서 정선으로 가는 405호 지방도로변에 있다. 현재는 영동 고속도로나 서울->강릉간 국도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강릉으로 가는 大路였다. 청심대를 지나면 진부를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간다. 월정사, 사고(史庫), 상원, 중대를 그리고 다시 큰길로 나와 횡계를 거쳐 대관령을 넘었다. 대관령 고개마루에서 좀 내려와 멀리 강릉을 조감하며 대관령을 그렸다. 강릉에서는 천연정, 구산서원, 경포대, 호해정을 그리고 난 후 남쪽 삼척으로 갔다. 삼척에서는 죽서루와 능파대, 두타산 소금강 무릉계와 용추폭포를 그렸다. 능파대는 현재는 추암, 촛대바위로 불리고 있다. 이어 계속 남쪽으로 울진 성류굴, 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그렸는데 이곳이 남쪽 끝이다.
다음부터는 다시 북상하여 강릉을 지나 양양으로 갔다. 낙산사, 관음굴을 그리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토왕폭, 계조굴(울산바위), 와선대, 비선대 등을 그렸다. 속초를 지나 간성(고성군 토성면)의 청간정을 그렸다(현재의 청간정은 위치가 달라짐). 더 북상하여 감호와 영랑호를 그렸는데 후자는 속초의 것과 이름이 같으니 위치가 다르다. 감호는 현재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구선봉(九仙峰) 아래 위치해 있다. 고성에서는 대호정, 해산정, 해금강, 삼일포를 그렸다. 이어 북상하여 통천 초입의 옹천을 그리고, 문암, 금란굴, 총석정, 환선정을 그렸다. 또 북상하여 흡곡에 이르러 안변호반에 있는 시중대를 그렸다. 다음 안변 가학정을 그렸는데 이곳이 김홍도의 여행 중 가장 북쪽 끝이다.
남하하여 철령을 넘어 회양에서 취병암과 맥판을 그렸다(회양에서 강세황과 만남). 며칠 후 강세황 일행과 함께 내금강으로 들어가 장안사와 내금강 일대를 그렸는데, 노쇠한 강세황은 먼저 회양으로 돌아갔다. 김홍도 일행은 내금강에서 우선 명경대 골짜기를 그렸다(명경대, 문탑, 백탑, 증명탑, 영원암). 다음 명연, 삼불암, 백화암 부도, 표훈사를 그리고 정양사로 올라가 헐성루에서 금강산을 조망한 모습을 그렸다. 다음 원통암 골짜기로 가서 원통암, 수미탑을 그리고 다시 내려와, 만폭동 골짜기를 그려 나갔다(흑룡담망보덕암, 분설담, 진주담, 마하연, 묘길상 등). 내금강을 다 그린 후에는 외무재령을 넘어 동해안쪽 외금강으로 갔다. 유점사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은선대에서 십이폭포를 바라 보고 그렸다. 효운동과 선담, 유점사를 그렸다. 이어 외금강 유점사 계곡 문호인 백천교를 건너 고성쪽으로 나왔다가 발연과 그 위의 치폭도 그렸다. 다음 신계사 계곡으로 들어가 신계사, 옥류동, 비봉폭, 구룡연 등을 그렸다. 다시 나와 온정을 거쳐 만물초를 그리고 온정령을 넘어 회양으로 가서 강세황에게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회양으로 가기 전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과 작별하고 내려오면서 맥판을 그렸을 것이다. 단발령과 맥판은 회양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렸을 수도 있다. 한양으로의 귀로에 금성 피금정을 그리고, 금화, 영평을 거쳐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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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금강산 일대의 사생 여행을 통하여 약 100 여점의 초본을 그려왔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약 10미터 달하는 채색 금강산도 횡권(橫卷)을 제작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는 이에 여가가 나면 이 금강산도를 수시로 펼치며 감상하였고, 궁중의 신하들에게 금강산도를 주제로 하여 시를 짓도록 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덕무, 서유구 ·서유본 형제 등의 문집에 금강산도 長詩나 이와 관련한 글들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금강산도권은 그 후 궁중의 화재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궁중에는 이 금강산도 횡권 이외에 김홍도가 그려 바친 화첩 본 금강산도(5권 70폭)도 전해졌다. 그러다가 순조에 의해 1809년 정조의 부마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 1793~1865 이후)에게 하사되어 그 아들 홍우철(洪祐喆, 경기감사)대까지 전해졌으나 그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현재까지 전하는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개인소장 <을묘년화첩> 중의 <총석정>, 호암미술관 소장 <병진년화첩(檀園折世寶)> 중 <영랑호>,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산도8첩병풍>, 개인소장의 <명경대>, <만폭동> 등 여러 점이 있다. 그리고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60폭과 40폭으로 이루어진 금강산화첩도 있다. 이 중 60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은 화풍이나 세부묘사, 기타 다른 작품과의 비교 등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 볼때 김홍도가 그려온 금강산화첩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후대의 뛰어난 모사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이 60폭 화첩의 내용 중 일부를 통해 김홍도가 금강산 여행을 통해 그려 나갔던 현장들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 보는 한편, 실제 경치를 어떻게 회화로 작품화 하였는지도 알아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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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유명하여 많은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모델로 삼아 모방하였다. 이런 작품은 무수히 많으나 대표적인 것으로 문인화가 이의성(1775~1833)이 그린 <해산첩> 20폭, 조선말기의 문신 이풍익(1804~1887)이 그리게 한 <동유첩(東遊帖)> 28폭, 필자미상 <금강와유첩(金剛臥遊帖)> 30폭 등이있다.
끝으로 김홍도의 금강산도의 화풍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前代 정선이나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훨씬 객관적, 사실적이며, 묘사태도도 더욱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둘째, 김홍도의 금강산도는 서양화법의 원근법, 투시도법을 활용하여 넓고 합리적인 공간표현을 보여준다. 셋째, 김홍도는 객관적, 사실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회화적 목적을 위해서는 과감한 생략과 압축을 가했다. 이밖에도 김홍도는 전통적인 지도나 궁중행사도의 기법인 부감법도 활용하고, 금강산의 다양한 경관을 묘사하기 위하여 다양한 기법을 동원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김홍도가 금강산도에서 이룩한 객관적 사실성과 높은 예술성은 조선시대 금강산도의 정점(頂点)이자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성과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