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 평양지방법원 판사
이후 청진․광주․대전지방법원 판사
1949. 1955 대법관
1953 내무부 장관
● 5․20탄압 선거를 진두 지휘
우리나라의 헌정사를 더듬어 보면 출발점에서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진오(兪鎭午)가 내각제 형태의 헌법을 초안했으나 당시의 실력자 이승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통령 중심제로 변질되어 제헌 헌법이 탄생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형식은 민주주의였으나 내용과 의식, 그리고 실행은 전제군주주의나 다름없었던 이승만 정권 시대. 마치 조선왕조 순종(純宗)의 대를 이은 임금처럼 행세했던 이승만,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 이들은 민족이나 민주를 생각하기보다 제 한몸의 영달만을 추구했던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리 보전을 위해서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뜯어고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도 부당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제헌 헌법에 의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두 번째 대통령 출마에서 국회에서 선출될 자신이 없어지자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였다. 이 개헌안은 개헌안 공고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불법과 함께 야당 의원들을 폭력으로 위협하여 통과시켰다는 오점을 남겼다. 이렇게 하여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획책하게 되었다. 권좌에서 스스로 내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극명하게 하나하나 보여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초대 대통령에 대한 임기 제한 조항을 철폐하는 헌법 개정안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더하라고 해도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직을 물러났는데 비해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만했으면 하는 국민의 바람과는 역행하여 종신 집권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선진국 언론(영국)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보다 더 빠를 것이다"라고 비아냥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 대통령 임기 제한 쳘폐가 중심이 된 헌법 개정안의 통과를 전후하여 제3대 국회 총선거 당시 사령탑으로, 그리고 헌법 개정 기초 위원으로 활약했던 백한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3대 국회는 개헌 국회일 수밖에 없음을 간파한 집권당인 자유당은 총선거에서 개헌선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부정․탄압 선거에 앞장을 선 선봉대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심지어 "본인은 5․20총선에 당선되면 제3대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대한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에 찬성한다"라는 각서를 당 지도부에 제출하고 공천자 대회에서 선서 복창까지 하도록 자유당 입후보자들에게 요구하였으니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필사적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선거기간 동안 대표적인 야당 탄압 사례는, 자유당의 2인자격인 이기붕(李起鵬)의 출마 지역구인 서대문 을구에서 상대방 후보[조봉암(曺奉岩)]의 출마를 교묘하게 원천 봉쇄해 버린 점, 그리고 야당의 거물인 신익희(申翼熙)의 지역구인 경기도 광주에 최인규(崔仁圭)를 내세워 신익희의 선거 운동을 철저히 봉쇄한 점,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비중 있는 야당 인사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갖은 탄압을 자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탄압에는 경찰이 주로 악역을 담당하였고, 이른바 정치 깡패들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경찰이 내무부 산하 기관이고, 당시의 내무부 장관이 백한성이었다는 사실이 5․20총선거가 부정․탄압 선거였고 그에 대한 책임이 정부와 여당에 있으며 그 야전사령관격인 내무부 장관의 책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논리 이전의 상식이다.
● 헌법 개정 기초 위원으로 활약
백한성은 내무부 장관으로서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성공리에 치러냈으며 그 마무리 작업으로 헌법 개정 기초 위원으로까지 참여하였다. 장관 직책 때문에 불가피한 참여라고 보기엔 5․20총선시의 내무부 장관직 수행이 너무도 충직스러웠다. 따라서 그의 대법관 경력과 충성심, 그리고 장관직이 긍정적으로 참작되어 발탁되었다고 보겠다. 당시의 개헌 작업에 대해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개헌선을 확보한 자유당은 그 길로 개헌안 기초 작업을 서둘러 7월 9일에는 정부․국회 관계자들로서 헌법 개정 기초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는 정부측에서 백한성 내무부 장관, 조용순(趙容淳) 법무부 장관, 박일경(朴一慶) 법제처 제1국장이 선임되었고, 자유당측에서 이기붕(李起鵬), 임철호(任哲鎬), 장경근(張暻根), 윤만석(尹萬石), 한희석(韓熙錫), 한동석(韓東錫) 의원 등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얼마 시일이 걸리지 않아 개헌 요강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규제 조항을 철폐하며,
②주권에 관계되는 중대 사안의 국민 투표제를 신설하고,
③국무위원에 대한 신임 투표제를 폐지하며,
④국무총리제의 폐지와 관계 조항의 정리,
⑤외자 도입을 위한 경제 조항의 개정 등이 골자로 된 것이었다.
자유당은 8월 23일 중앙당 간부들과 헌법 기초 위원들의 연석 회의를 갖고 정부 관계자들을 동석시켜 이 같은 개헌 요강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나 자유당 간부들은 개헌 요강에 대해서는 별로 의견을 펴지 않고 변영태(卞榮泰) 총리가 자유당이 추진하는 개헌 과업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좀더 적극적인 지원책이 있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항상 과잉 충성을 하고 있는 자유당 간부들의 태도를 마땅찮게 생각해 오던 변 총리는 이 자리에서는 자유당이 요구한 개헌 통과 보조비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 따름이다(서병조,《개헌시비》, 113~114쪽).
여기에서 백한성의 이승만에 대한 충직성과 변영태의 개헌 과업에 대한 무성의가 대조를 이룬다. 이런 연유로 백한성은 내무부 장관으로서 총리서리직까지 겸하게 된다.
● 사사오입 개헌과 백한성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획책한 제2차 개헌이 왜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오명을 지니고 역사에서 영원히 부끄러움으로 남게 되었는가에 대한 전말을 살펴보자.
토론이 종결된 다음에 자유당 의원들의 암호 투표 획책이 문제된 후 개헌안은 1954년 11월 27일 무기명 비밀 투표에 붙여졌다. 그 결과 재선 203인 중 가 135표, 부 60표, 무효 1표, 기권 6표, 결석 1표로 개헌선인 3분의 2에서 1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포되었고, 정부측에서는 갈홍기(葛弘基) 공보처장이 중앙방송국을 통하여 이 같은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다수의 횡포를 이용하여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제6차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자유당 성명 내용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가결되지 못한 것 같이 선포한 것은 의사과정의 잘못된 산출 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한 것이다.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의 정확한 수치는 135.333 … 인데 자연인을 정수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四捨五入)의 수학 원리에 의하여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다.
부결 선포 이틀 후인 11월 29일 본회의에서 최순주(崔淳周) 부의장은 정족수의 계산 착오로 부결을 선포하였으나 재적 203명의 3분의 2는 135표이므로 27일 부결 선포를 정정한다면서 가결된 것으로 재선포하였다.
이에 곽상훈(郭尙勳) 부의장이 등단하여 "부결 선포를 취소 선포한 것은 불법이므로 그저께 결정된 것이 확정됐다"고 또다시 선포했다. 자유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후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 이므로 사사오입의 원칙에 따라 135명이 3분의 2가 틀림없으므로 통과되었다고 주장하고 국회 회의록을 가결된 것으로 수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사오입 개헌안 가결 선포로 인해 국회에는 회의록 수정에 관한 결의안, 곽상훈 부의장 불신임 결의안, 회의록 번복에 관한 결의안, 정부 규탄 결의안, 국무총리 서리 불신임 결의안 등의 5개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공보처장 파면에 관한 건의안이 제출되었다.
이 가운데 백한성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 규탄에 관한 결의안
1954년 12월 4일 조병옥(趙炳玉, 호헌동지회 소속) 의원 외 38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결의안 내용
11월 27일 헌법 개정에 관하여 정부의 공보처장(갈홍기)은 중앙방송국을 통하여 개헌안이 부결되었다고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국회의 일부인 자유당과 통모하여 국무총리 서리 백한성 내무부 장관이 국무회의를 개최한 후 공보처장의 성명을 통하여 헌법 개정 정족수는 135인이라고 발표하고, 부결된 동 헌법 개정안을 가결되었다고 공포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헌법 위반이며, 이러한 정족수 문제는 국회 자체가 결정할 문제이며 간여할 성질이 아닐 뿐 아니라, 이는 정부의 국회에 대한 간섭이다. 이로 인하여 국내 민심은 수습하기 어려운 정도의 혼란에 빠졌으며, 대외적으로 세계의 각 언론 기관이 한결같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비판함으로써 한국의 위신을 대외적으로 크게 실추시켰으며, 이와 같은 정치 파동을 유발시킨 책임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11월 27일 개헌안이 부결된 후 정부 대변인 공보처장은 국회 권한을 침범하여 국회에서 부결된 안건을 통과된 것이라고 발표함에 그 불법성을 규탄하고, 아울러 행정부에서 부결된 개정 헌법을 공포 실행하는 것이 불법임을 선언할 것을 결의한다.
이 안의 토의 과정에서 조병옥, 장택상(張澤相), 남송학(南松鶴), 정명섭(丁明燮) 의원 등은 서로 과거의 정치 노선을 들추며 인신 공격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토론 종결 후 재적 136인 중 부 81표로 부결되었다.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안
1954년 12월 13일 소선규(蘇宣奎, 호헌동지회 소속) 의원 외 9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출되었으나 다음날 표결 결과 재석 166인 중 부 91표로 부결되었다.
결의안 내용
1954년 11월 28일 공보처장(갈홍기)이 11월 27일 부결 선포된 개헌안을 통과되었다고 정정 발표한 것은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행정부가 입법부를 간섭 내지 모독한 처사로서, 공부처장에 대한 직접 감독 책임이 있는 국무총리가 그 과오를 그대로 지시했다고 하는 이 자체는 그 감독 책임을 면치 못할 것으로 국무총리 서리 백한성의 불신임을 결의한다.
백한성은 1953년 9월부터 1955년 4월까지 내무부 장관으로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절대적 충성을 다한 1등공신이었다. 종신 집권을 위해서는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3선 금지 조항을 헌법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는 바 이를 위해 개헌안 통과 기관인 국회의석수 확보와 개헌안 기초, 그리고 개헌안 의결 정족수 변칙 해석 처리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철저히 개입하여 충성심을 발휘하였다.
● 독재 정권의 악역 담당자 대법관으로 은신
백한성은 3선 개헌을 위한 온갖 악역을 전담한 후 그에 대한 공로로 다시 대법관으로 돌아가 은신하게 된다. 대법관으로 되돌아갈 때의 일화를 통해 이승만의 그에 대한 신임도와 일부 대법관의 반대 의사를 통해 민주 사법의 장래를 당시의 관점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
백한성 씨는 원래 일정 시대 때 판사와 변호사를 했고, 해방 후 대전지방검찰청장, 서울고등법원장을 거쳐 대법관을 하다가 내무부 장관으로 옮겨갔던 분이다. 그가 내무부 장관으로 1954년의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주관했고, 또 그해에 우리 헌정사에 오명을 남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개헌 파동이 있은 지 얼마 후, 그 분이 내무부 장관직을 그만두었던 것이다.
백씨가 내무부 장관을 사임하고 얼마 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에게 친서 한 통이 날아왔다. 그 내용은 "백한성 씨는 법조인으로 훌륭한 분이니 대법관으로 제청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것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어느 날 대법관 회의를 열어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고 대법관 결원의 한 자리를 백씨로 채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한마디로 반대하고 나섰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 때 내무부 장관을 지냈던 사람을 어떻게 대법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그 분의 인품이나 그가 대법관으로 재직하던 때의 업적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흐름과 관련해서 물의를 불러일으킨 사람이 대법관으로 다시 온다는 것은 사법부의 신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 말고도 그 임명을 반대한 사람은 김동현(金東炫) 씨였고 다른 사람들은 별반 말이 없었다.
장시간 회의를 열어도 결론이 나지 않자, 대법원장은 2, 3일 후 다시 이야기하자고 모임을 끝냈다. 그는 대법관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법원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한성 씨는 행정부에 가서 말썽이 있었으나 법관으로 일도 잘 하고 인격으로 따져 볼 때도 훌륭한 분이니 크게 보아서 양보해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으나, 결국은 대법원장의 견해에 설복당했다. 2, 3일 후 다시 법관회의를 열었을 때 만장일치로 백씨를 대법관으로 제청키로 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정치적 활동을 해온 사람이나 정치 권력과 밀착된 사람을 최고법원의 법관으로 앉혀서는 안 되며, 그런 문제는 한 번쯤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재호(高在鎬), 《법조반백년》, 16~17쪽).
5․16군부 쿠데타 직후 대법관들의 처신에서도 백한성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시 고재호 변호사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쿠데타 직후 최후의 대법관 회의석상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군사 정권 아래서는 사법의 전통이 이어질 것으로 보지 않고 사법 제도에 큰 변혁이 있어 수뇌부에 있는 우리는 결국 물러나게 될 것이니 차라리 미리 일괄 사표를 내는 것이 어떠냐"라고 제안했다.
배정현(裵廷鉉) 대법원장 직무 대행은 "아직 저쪽에서 아무 연락이 없는데, 무슨 연락을 받은 뒤에 생각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며 내 제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백한성 대법관도 배 직무대행과 같은 의견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렇다면 나 혼자만이라도 오늘 사표를 내겠다"라고 했더니 변옥주(卞沃柱), 오필선(吳弼善) 두 대법관이 자기들도 오늘 내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6명 전원이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하여 즉시 배영호(裵永鎬) 행정처장에게 종이를 가져오도록 해서 그 자리에서 모두 사표를 썼다. 나는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코자 한다고 적었다.
위에서 보듯이 백한성은 현실안주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시대에 등용된 법조인들 대부분이 그런 평가를 받겠지만 역사의식, 민족의식, 시대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대세(大勢)주의, 혹은 권력편승주의 지식인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다.
● 일제 시대의 판사
일제 시대에 판사․검사․경찰․행정 관료 등등이 동족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한 침략자의 꼭두각시 노릇을 직업으로 선택했다고 하여 싸잡아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이른바 지배 계층에 편입되어 일제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제와 적극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일제 시대에 판사를 했다면, 그것도 이력서상에 아무런 굴곡없이 무난하게 식민지에서 정치사상범을 재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동족의 가슴에 칼을 들이댄 것과 다름없다.
백한성은 189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19년에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7년 동안 고시공부만 한 것인지 다른 직업을 가졌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1930년 사법관 시보시험에 합격하여 1932년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세에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빠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판사직을 천직으로 알고 민족의식, 역사의식을 접어두고 일제의 지침에 순응하는 순발력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1935년 청진지방법원 판사, 1938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1942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함으로써 조선팔도를 고루 돌아보게 되었다. 3, 40대의 열혈 청년 시기에 독립 운동을 한다고 찬 이슬을 맞으며 숨어 다니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영감님 소리를 들어가며 사회의 지도자로 유지 행세를 하고 다니며 오히려 독립 운동하던 자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다스리는 민족반역 대열에 서서 전혀 민족감정을 보이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백한성이 어느 부류에 속했을까는 자명하다.
일제 시대 13년간의 판사 생활 족적을 철저하게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남기는 하나 무난하게 판사 생활을 한 그 자체가 민족의 정체성 차원에서는 더 큰 문제이다.
● 해방 후의 출세 가도
이승만 정권의 최대의 민족적 과오는 일제 청산은커녕 민족반역자들을 대거 등용한 것이다. 특히 판사․검사․경찰․관료 등 동족을 울렸던 자들이 다시 전문인력 확보라는 명분하에 대거 기용되었으니 '사필귀정'이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은 헛소리로 외면되었던 것이다. 과거 청산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고 희망이 없는 사회임을 우리의 근현대사가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다. 백한성도 전문인력으로서 해방 후엔 검찰로 옮겨 1945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에 올랐고 1948년엔 2대 법무부 차관이 되었다. 이어 1949년엔 서울고등법원장으로 다시 법관으로 돌아와 1949년 11월부터는 대법관으로 시류에 영합하는 판결로 무난하게 그 자리를 보전한다. 1951년에는 대법관으로 있으면서 서울 법대 강사, 탄핵심판소 심판관, 헌법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하여 일제 때부터 연마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학자로서의 일면도 보여 주고 있는 바《민사소송법석의(전․후)》,《민사소송법(전․후》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백한성의 공직 생활은 해방 전의 법관 생활, 해방 후의 검사, 법관, 변호사 생활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주로 법조 전문직에 종사하였으나 딱 한 번 1953년 9월부터 1955년 4월까지 1년 8개월간 내무부 장관으로 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내무부 장관직에서 그가 보여 준 족적이 그의 공인으로서의 일생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승만에게 어떻게 잘 보여 장관에 발탁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보여 준 이승만 개인에 대한 충성심은 한국 헌정사를 왜곡시켰고 민주와 독재의 구분을 흐려 놓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쪽같은 법관의 순간적인 외도로 보기 힘든 그의 장관 재직 시절에 나타난 정치적 사건들은 오명의 대명사가 되어 지금도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백한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충직성을 보여 왔다고 볼 수 있다.
● 죄있는 자도 돌을 던져야
어느 개인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는 자들이 흔히들 인용하는 말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죄없는 자는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나 질곡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그러한 절대적 선악 기준이 아니다. 공인으로서 민족과 국민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민족과 국민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비판되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철저한 비판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보류되어 왔고 오히려 과장되고 미화되어 역사를 왜곡시켜 버렸다. 따라서 정확한 평가가 공직에 있었던 유명인 개개인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은폐와 미화는 여전하다. 백한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이강국(李康國) 판사가 쓴 백한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백한성 白漢成, 1899~1972, 법조인, 충청남도 논산 출생,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사법관 시보 시험에 합격, 1932년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935년 청진지방법원 판사, 1938년 광주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하다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발탁되었고, 1948년에는 법무부 차관, 1949년에는 서울고등법원장을 역임하다가 대법관에 취임하였다. 1953년에는 제11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국무총리 서리가 되었다가 1955년 다시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1961년까지 재직하였다. 대법관을 그만둔 뒤인 1961년부터 서울에서 변호사업을 하면서 인권 보호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법관 시절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등에서 민사소송법 등을 강의하였는데, 저서로는《민사소송법석의(民事訴訟法釋義)》와《민사소송법》이 있다. 카톨릭 신자로서 청빈하고 성실한 외유내강의 성품이었으며, 내무부 장관 시절에는 말썽 많던 잡부금 문제․인사 문제 등을 쇄신, 정리하는 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앞부분은 변호사면 기본적으로 인권 보호와 사회정의 구현 노력이 사명이기 때문에 의례적인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무부 장관 시절의 잡부금․인사 문제 등의 쇄신, 정리가 큰 업적인 것처럼 인물 소개를 한 것은 지나치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인물 소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무장관 시절의 5․20총선이 탄압 선거였고, 사사오입 개헌 작업의 주도 인물이었다는 점도 아울러 소개하였어야 했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또 있다. 앞서 인용한 고재호의 회고록에 보면 "내가 그처럼 백씨의 대법관 롤백(Roll Back)을 막았으므로 백씨로서는 크게 섭섭했을 것이나, 그후 함께 선거 소송을 담당하여 일하는 동안 특별히 서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백씨의 큰 인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분은 퍽 온화한 성품이고 판결문도 자상하게 잘 쓰는 훌륭한 법관이었는데, 5․16군부 쿠데타 직후 나와 함께 사임했다"라고 하여 그의 인간적인 면을 좋게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 개인적인 성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인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동양 윤리가 전형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공인으로서의 책임까지 면제될 수는 없다.
백한성에 대한 평가는 일제하의 무난한 판사 생활과 자유당 이승만 독재 정권의 충직한 주구로서 행동한 점을 연계하여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