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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52) 2023. 12. 20
세바의 반역
사무엘하 19:40-20:3
드디어 다윗 왕은 요단강을 건너 요단 서편의 ‘길갈’에 도착하였습니다.
<다른 지파들의 불만>
그런데 이곳에서 갈등이 다시 시작됩니다.
40~41절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과 함께 건너니라/ 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요단강을 다시 건너 요단 서쪽 길갈에 도착한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이 마음을 알기 위해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의 모습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삼하15:30절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한마디로 부끄럽고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비록 아들 압살롬을 잃는 아픔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왕권을 다시 회복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자신을 조롱했던 이들이(시므이, 시바) 다시 자신의 무릎 아래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환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에게 뜻하지 않은 시험이 닥칩니다.
애굽 땅에서 고난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험의 연속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여러 가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시험과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결국 이겨내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면 다윗이 만난 새로운 위기는 무엇입니까?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지파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온 유다 백성’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각 가문의 대표들이 다 나온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반만이 모여 다윗을 맞이하였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잘반이나’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절반밖에’로 해석하는 것이 원어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10지파는 거리가 멀었기에, 다윗의 귀환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었고, 각 지파의 대표들이 모이기도 시간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절반밖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북쪽의 10지파 사람들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과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왕과 왕의 집을 도둑질하여 요단강을 건너도록 했다고 불평합니다(41절).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의 귀환을 먼저 논의하고 결의한 것은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9~10). 유다 지파 사람들은 다윗이 제사장을 보내 왜 늦게 움직이느냐는 책망을 들은 후에 움직였기에, 유다 지파의 독단적인 행동이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반박>
이에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에 다윗을 모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42절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유다 사람들의 말은 19:12에서 다윗이 유다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다윗이 유다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 한 말을 유다 사람들은 다윗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즉 자신들의 혈연관계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박>
이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한 권한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43절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이들은 자신들이 왕에 대해 열 몫을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열 지파가 모여 있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더 강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다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을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들의 혈연관계를 더욱 주장하였고, 이런 유다의 주장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바의 선동>
결국, 이 논쟁으로 분노를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중심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20:1~2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이런 혼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는 사울가의 사람이거나 적어도 사울가를 지지하는 사람인 듯합니다. 성경은 그를 불량배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과 행실이 과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 왕을 평범한 사람 ‘이새의 아들’로 격하하여 부르면서 다윗을 모독합니다. 그리고 연설을 통해 우리가 다윗과 나눌 분깃도 그에게서 받을 유산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제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선동합니다.
군중 심리가 작용합니다. 군중 속에 진입하는 개인은 "나" 에 대한 감각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내가 없어지고 군중만이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군중의 심리가 내게 전염(contagion)되는 것입니다. 군중에 잠겨 드는 개인은 "나" 에 대한 생각을 상실한 끝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합니다. 다시 말하면 익명성에 기대어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차원적인 이성과 규범, 현실 인식은 모두 사라진 후, 개인은 그저 그때그때 드는 충동과 감정, 욕구에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됩니다.
이런 세바의 선동에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에게서 돌아서서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유다 지파만 다윗을 따랐고,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모습은 다윗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를 연상케 합니다. 다윗은 처음에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잠시나마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다윗의 후궁들>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압살롬에게 강간당한 열 명의 첩을 감시가 붙은 집 즉 감옥 같은 곳에 감금한 것입니다.
3절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이것은 그녀들을 압살롬의 반란에 동조한 죄인들처럼 다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기본적인 부양은 하였지만 더 이상 아내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과 관계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 그녀들이 ‘생과부’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저는 이 여인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녀들의 잘못은 없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윗 왕의 범죄(밧세바를 범한)에 따른 징계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그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립니다. 특별히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거나 지도자일 경우에 그 폐해는 더욱 커집니다.
이것은 창 3장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미쳤고, 온 인류가 죄와 저주의 고통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롬5:17).
지도자 한 사람의 서고 넘어짐은 공동체(가정, 교회, 사회...)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저와 여러분이 늘 죄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게 죄와 싸워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감사가 사라지면 탐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 유다 지파나 이스라엘의 10지파나 자신의 권리(주도권 다툼)를 주장할 시점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윗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입니까?
그들 모두 압살롬이 잘해준 것 때문에 압살롬이 좋다 하며 다윗에게 마음을 돌렸던 사람들입니다.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하게 되고 다윗은 피신을 하는 고생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누가 더 다윗과 가까운가로 다툰다는 것이야말로 똥 묻은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냄새난다며 다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뻔뻔합니다.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들 모두는 다윗을 배신한 자들일 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배신한 백성이라도 자신이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상 단 한 사람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시므이, 시바), 용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신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용납해주는 다윗 왕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면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이런 모습이 드러납니까? 회개와 감사가 우선되지 않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은혜를 잊고, 감사가 사라지면 탐욕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입니다. 서로 권력을 차지하고, 주도권을 쥐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회만 되면,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마20장에는 ‘어머니의 치맛바람’까지 등장합니다(마가복음에서는‘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구함–막10:35-45).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 받은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은혜는 잊고 ‘누가 크냐’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스스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음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유다 지파나 이스라엘의 10지파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고 사다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힘을 강화함으로써’ 이미 형성된 ‘약육강식’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부각하려고 합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외되지 않고, 힘 좀깨나 쓰는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시기 질투하고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다툽니다.
다시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되새길 때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A. Schweitzer 1875-1965 독일 루터교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아프리카 선교사. 노벨평화상(1952) 수상)가 자기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를 위해 기부했으나, 그것으로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지로 다니며 부득이 모금 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친지와 동료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기차역에 모여 ‘20세기 성자’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일등실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슈바이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둥대는 사람들의 눈에, 맨 뒤 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폼으로 걸어 나가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그가 바로 슈바이처 박사였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하고 의아해하면서 물었습니다. 그때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3등 칸을 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은혜)를 잊으면 탐욕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다투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인 섬김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앙공동체 안에서 파벌을 조장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숫자의 많음을 강조하고, 유다 지파는 혈연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사실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모두 한 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도 함께 해방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구원 공동체, 언약 공동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 됨을 깨뜨리고 서로 자기주장에만 몰두하면서, 기득권 다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3절 하반절을 보면, “...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대응이 아쉽습니다. 이미 다윗 왕은 유다 지파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 사람들이 더 여유롭고 너그럽게 행동해야 하는데, 오늘 43절 말씀을 보면 더 강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서는 힘을 가진 쪽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쪽에서 양보를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혈연, 지연, 학연 등 온갖 인간적인 기준으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기득권 쟁취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이미 휴전선으로 두 동강이 난 마당에 동서도 서로 편 가르기 하면서 소위 ‘지역감정’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더욱 슬픈 일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마저 이러한 싸움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꼭 기억할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입니다.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온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릅니다. 몸의 각 부분은 머리의 명령을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분쟁과 다툼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셋째, 성도는 피차 다툼으로 대적 사탄이 틈탈 기회를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10지파의 싸움은 세바라고 하는 불량배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분열과 다툼은 사탄이 역사할 틈을 줍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영국 속담에 “목동이 서로 다툴 때 늑대가 가장 행복해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성도가 서로 다툴 때 가장 기뻐하는 것은 바로 우리 곁에서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킬 기회를 찾는 사단입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고 경고하셨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대적은 형제가 아닙니다. 따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대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혔습니다.
엡6:11~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래서 한 마음, 한뜻으로 합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우리 사도교회 역시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맡은 바 책임과 역할은 다르지만, 사명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선한 일꾼’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서로 조화롭게 협력하고,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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