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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경의 방법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독경하는가? “책을 천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보인다.” “일문에 깊이 들어가 오랜 시간 몸에 배이도록 닦는다(一門深入 長時熏修).” 천만번 기억하여 일문에 깊이 든다! 많은 문이어서는 안 된다. 많으면 망친다. 많으면 뒤섞이고, 산란하며, 통하지 않는다. 일문이라야 통하게 된다. 일문에 정말 통하면 일체 경에 전부 통한다. 하나에 통하면 일체에 통한다. 그래서 반드시 경전 하나여야 한다. 둘이면 안 된다. 분별을 일으키고 번뇌를 일으켜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선정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지와 관계한다. 이는 대사일 수 있기에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일천 번 읽을 때 경전의 의미가 저절로 현전하여 고금 대덕의 평주를 볼 수 있다. 평주가 어떻게 되어 있어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다시 일천 번을 읽으면 공부가 깊어져 더 깊이 볼 수 있고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다시 일천 번을 읽는다. 삼천 번을 읽은 후에는 저절로 이 경전을 강설할 수 있고, 고인의 강설과 견주어 차이가 없다. 만약 평주를 쓰면 후세에 전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천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보인다.” 말한다. 저절로 보임은 곧 개오(開悟 ; 명심견성)이다. 《무량수경》의 경전 제목에 「청정평등각 淸淨平等覺」이 보이는데, 여기서 각覺은 곧 개오이다. 청정심은 소오小悟이고, 평등심은 대오大悟이다. 삼천 번 이상 읽으면 대철대오大撤大悟할 수 있다. 삼천 번을 읽으면 더 읽지 않는가? 아니다. 뒤에도 여전히 4천 번, 5천 번, 6천 번 왕생에 이를 때까지 줄곧 읽는다.
《무량수경》의 평주는 어떻게 읽는가? 최소한 처음부터 긑까지 삼천 번을 읽는다. 어느 때 비로소 득력할 수 있는가? 최소한 일백 번 읽어야 한다. 처음부터 긑까지 일백 번 읽어야 한다. 날마다 최소한 10시간 이상 읽는다. 이것이 곧 오랜 시간 몸에 배이도록 닦음이다. 이렇게 공부하면 득력할 수 있다. 이렇게 독송을 거치면 우리의 번뇌는 저절로 사라지고 바깥을 향해 확장하지 않고 조복하여 머문다. 일백 번 번뇌를 조복하면 왕생할 자신이 생긴다. 만약 개오에 도달하고 싶으면 고인의 표준인 일천 번을 에누리해서는 안 된다. 《무량수경》을 평주에 곁들여 일천 번 읽으면 설사 대철대오 · 명심견성할 수 없어도 대오大悟가 열림을 장담할 수 있다. 철오徹悟이면 성불이고, 대오大悟이면 보살이다.
정토종의 6대 조상인 영명연수永明延壽 대사께서는 젊었을 때 《법화경》을 일만 삼천 번 독송하셨는데, 어떻게 개오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대철대오 · 명심견성하셨다. 미국에 사시는 재가 여거사 한 분은 《무량수경》을 독송하였는데, 여러 해 시간을 들여 6천 번을 완전히 읽었다. 6천 번을 독송한 후 완전히 암송하였다. 매우 어려웠지만, 그녀에게는 이러한 결심이 있었고 이러한 끈기가 있었다. 암송할 수 있게 된 이후 경본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 경행하면서 암송할 수 있었고, 좌선하면서도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러면 방편이 매우 많아진다. 다시 6천 번을 암송하여 이 경전을 매우 잘 강설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학불하여 진실의 이익(受用)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선조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이렇게 학습하는 이념과 방법은 대단히 중요하다!
세간 및 출세간법에는 복덕이 없을 수 없다. 불법은 세간에서 일체중생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도록 돕는다. 복덕이 없으면 괴롭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복덕을 닦을 것을 권하셨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누구의 복덕이 가장 큰가? “천상천하에 부처님만 한 분은 없다.” 부처님과 견줄 수 없다.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가 구경원만하다. 옛 성인과 이전 현인은 삼량이 크면 복덕이 크고 심량이 적으면 설사 복덕이 클지라도 오래 누리지 못한다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심량은 “마음은 태허를 감싸고 도량은 항하사 세계에 두루 하다(心包太虛 量周沙界).” 그의 심량은 자성에 원래 갖추고 있다. 현수賢首국사는 《망진환원관 妄盡還源觀》에서 우리에게 세 가지 두루 미침(周遍)을 알려주셨는데, 이는 성덕性德이다. 첫째는 「법계에 두루미침(周遍法界)」, 둘째는 「생겨남이 다함이 없음(出生無盡)」, 셋째는 「공과 유를 함용함(含容空有)」이다. 이러한 심량은 공과 유를 함용하고, 이러한 복덕은 너무나 크다! 그래서 인간 천상에서 크게 부유하고 크게 귀중한 복덕은 모두 불문에서 닦는 것이다.
성불 成佛은 이족존二足尊이라 한다. 「이二」는 곧 지혜와 복덕이고, 「족足」은 곧 원만이다. 즉 지혜가 원만하고 복보가 원만하면 성불한다. 우리가 학불함은 곧 복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다. 복덕과 지혜가 원만해야 중생을 널리 제도할 수 없다. 복덕은 있지만 지혜가 없으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 반드시 복덕과 지혜가 원만하여야 한다. 학불은 진정으로 시간을 장악하여 하루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면 십 년이면 공덕을 이룬다. 이것이 곧 고인이 말씀하신 대로 “십 년동안 차가운 창문 아래 공부하였지만, 단번에 천하에 이름을 이루었다(十載寒窗 一擧成名).” 세간의 독서인은 십 년에 성취하는데, 불법의 수행도 십 년이 필요하다. 이러한 십 년에 뿌리 깊게 근본에 자리 잡아 자신의 계정혜를 성취한다. 계는 덕행이고, 정은 삼매이며, 혜는 대철대오 · 명심견성이다. 진정으로 이러한 방법에 따라 수행하면 십 년이면 성취가 없을 수 없다. 성취가 없으면 잘못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십 년 동안 비록 일문에 깊이 들어가 오랜 시간 몸에 배이도록 닦을지라도 당신의 공부 속에 반드시 뒤섞임이 있으면 마음은 청정하지 못하고 평등하지 않아 성취가 수승하지 않다. 만약 당신의 심지心地가 정말 청정 · 평등을 유지하면 이러한 성취는 진실하고, 이러한 성취는 사람들이 찬탄할 만하다. 진정으로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며,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길 희망하는 동학 동수들은 십 년을 잘 배우면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현재 CD가 있고, 평주가 있어 당신에게 도움이 되려면, 반드시 한 경전에 통하면 일체 경전에 통함을 깊이 믿어야 한다. 일문에서 일으키고 일문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워서는 안 된다. 너무나 많이 배우면 배운 것이 뒤섞이고, 사상이 어지러우면 삼매를 얻을 수 없고, 지혜가 열릴 수 없다. 고인의 가르침을 준수하면 성공할 수 있다. 만약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겨 십 년을 헛되이 보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일문에 깊이 들어가 오랜 시간 몸에 배이도록 닦기 위해서는 대승경전을 선택하여야 한다. 왜 그러한가? 대승경전은 하나하나 모두 자성을 통달한다. 바꾸어 말하면 대승의 법문 하나하나 경전 하나하나는 모두 당신이 명심견성 · 대철대오 하도록 도울 수 있다. 《금강경》에 이르시길, “일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 하셨다. 대승법문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이 어느 한 경전에 기뻐하여 일문에 끝까지 깊이 들어가면 명심견성 · 견성성불하고, 불과를 증득할 수 있다.
대승은 큰 지혜를 대표한다. 대승의 지혜는 자성에 본래 갖추고 있는 지혜이다. 지혜가 얼마나 큰가 하면 세간 · 출세간 일체법의 가장자리와 바닥까지 다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세간 · 출세간 일체 법을 철저히 통달하여 분명하게 한다. 일반 종교에서는 신에 대해 「무소부지無所不知 · 무소불능無所不能 · 전지전능全知全能」, 이 한 마디 말로 찬미한다. 이것이 대승의 의미이다. 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대덕大德 · 대능大能 · 대복大福이 있을 수 없다. 이로써 지혜가 제일이고, 지혜에서 대덕 · 대능 · 대복이 생겨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가 현재 말하는 가치관이다. 불법의 가치관은 대지혜이다. 불법을 학습하며 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혜를 구함이다. 지혜가 있으면 갖가지가 갖추어진다.
「무량수無量壽」에서 수壽는 복보의 일종이다. 중국인은 늘 “오복이 집 앞에 이르길(五福臨門)”이란 글처럼 가정의 복을 비는 문구를 대문 위에 쓴다. 오복에서 첫째는 장수이다. 고래의 조사 · 대덕들은 우리에게 서방정토를 소개했는데, 서방정토의 첫째 대덕은 무엇인가 하면 수명의 장구함이라 말한다. 무릇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사람의 수명은 부처님과 같다. 이것이 서방세계의 첫째 덕이다. 단지 이 한 조목에만 의지하여 서방극락세계에 꼭 가야 한다! 부처님 명호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은 무량수가 주체이다. 수명이 없다면 일체 무량이 모두 허사가 되는데 누가 가서 누리겠는가? 그래서 수명은 일체 무량의 체이다. 무량한 수명이 있어야 모든 무량이 이익(受用)을 얻을 수 있다.
「장엄 莊嚴」에서 “장莊이란 공恭이고, 정正이고, 성식盛飾이다. 엄嚴이란 존尊이고, 숙肅이고, 장莊이다. 장엄 두 글자는 세속 말로 존중 · 공경 · 정숙 등등의 선미로 이를 장식함이라 해석할 수 있다.” (《정토대경과주》) 우리 세상 사람은 늘 진선미를 말하지만, 지혜가 없어 진선미가 원만하지 않다. 지혜가 있으면 진선미는 원만하다. 극락세계에서는 「진선미眞善美 · 혜慧」 네 글자가 모두 구경원만하여 쇠퇴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진선미와 지혜가 아닌가? 환경은 심성이 변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진선미와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眞의 경우 마음이 진실하지 않고, 망심 · 표면적인 호의로 마음에 진실이 없다. 선善의 경우 하루 종일 선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고, 망상을 하거늘 어디에 선이 있겠는가? 미美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미혹 · 전도되어 지혜가 없다.
서방극락세계에는 이런 사실이 있으니,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한 마디 「아미타불」로 자심自心을 장엄하고, 자심을 청정하게 함은 곧 「아미타불」, 이 한 마디 부처님 명호로 청정심 · 평등심 · 각오심을 닦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 · 평등 · 각오 모두 「아미타불」 이 한 마디 부처님 명호로 닦고, 진심眞心도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 이 방법으로 닦고, 선심善心도 「아미타불」로 닦는다. 미심美心 · 혜심慧心도 「아미타불」 이 한 마디 부처님 명호에 전부 원만히 갖추고 있다. 이렇게 수승한 법문은 일체 경론 중에서 찾을 수 없다. 일체 경전에서 오직 당신에게 청정심을 닦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있지만 반드시 평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당신에게 평등심을 닦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있지만 반드시 지혜가 생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이 한 마디 「아미타불」은 하나를 닦으면 일체를 닦으니, 이는 너무나 기묘하다. 그래서 학불은 소극적이지 않고, 절대 현실을 기피하지 않는다. 불법은 진선미와 지혜의 생활이고, 일체 인심이 향해 가는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이다.
이체理體 상에서 말하면 제불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일체중생이 본래 자신에게 갖추고 있다. 세존께서는 《화엄경》에서 “일체 중생은 모두 여래의 지혜 · 덕상이 있지만, 망상 · 집착으로 증득할 수 없다.” 말씀하셨다. 우리가 망상 · 분별 · 집착을 내려놓기만 하면 성불하지 않겠는가? 자성의 지혜와 덕상이 현전하는 것이다. 극락세계의 진상이 이렇게 되는 일이라면, 아미타부처님과 모든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사람은 모두 망상 · 분별 · 집착을 내려 놓는다. 그래서 극락세계는 아미타부처님의 자성 청정심이 성취한 것이다. 자신의 청정심과 아미타부처님의 청정심은 하나의 마음이고, 하나의 자성청정원명체自性淸淨圓明體이다. 하나의 체體에서 두 개의 용用을 일으키니, 불가사의하다.
이번 생에 진정으로 광대하고 깊고 미묘한 진실의 이익을 획득하고 싶다면 반드시 청정심을 닦아야 하고, 평등심을 닦아야 하며, 자비심을 닦아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닦는가? 「아미타불」 이 한 마디 부처님 명호로 뒤섞인 마음 · 산란한 마음 · 물든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청정 · 평등각을 회복하고 왕생하여 불퇴전지에 올라 성불할 수 있다.
행문行門에는 자신을 이롭게 함이 있고, 중생을 이롭게 함이 있다. 번뇌가 줄어들고 지혜가 늘어남은 자심을 이롭게 함이고, 십악을 끊고 십선을 닦음은 자신을 이롭게 함이고, 남을 위해 연설함은 중생을 이롭게 함이다. 자신을 이롭게 함(自利)과 중생을 이롭게 함(利他)은 한 가지 일고 두 가지 일이 아니어서 영원히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불제자로서 일상생활 속에서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모두 규칙이 있어 모두 일체중생에게 모범이 되어 주고 전형이 되어줄 수 있다. 이는 곧 진정으로 유정 중생에게 내세에 이익이 되고, 현세에 즐거움이 된다. 이것이 보살의 사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불법은 일종의 지식으로 변해버려 한평생 배워도 지혜가 아니라 여전히 범부의 지견이다. 당신이 쓰는 마음이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윤회하는 마음이고, 윤회하는 마음이 윤회하는 업을 짓거늘 어떻게 성취가 있겠는가? 이 《무량수경》 일문에 깊이 들어가 한평생 바꾸지 않고 새겨서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성취를 일체제불께서 모두 찬탄하실 것이다. 이 경전을 통하면 일체 경전에 모두 통하고 세간법도 모두 통한다. 이러한 학문은 사람마다 배울 수 있고, 사람마다 배워서 몸에 익힐 수 있다.
사서四書는 중국 선조들의 지혜의 결정체이다. 이는 중용中庸의 도를 말한다. 중용의 도는 어느 곳에서 응용하는가? 《대학大學》에서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 治國 · 평천하平天下를 말하는데, 모두 중용을 여의지 않는다. 중용의 도는 너무나 크다. 이것이 곧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중도 中道 제일의제 第一義諦이고, 일체제불과 법신보살이 밟는 길(所履)로 자신이 행하고 중생을 교화함에 원만하지 않음이 없다. 대승불법 전체는 이 《무량수경》에서 격물 · 치지 · 성의 · 정심 ·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의 지혜 · 이념 · 방법 · 경험 · 효과를 말하고 있고, 《무량수경》에 전부 갖추고 있다. 이 경전은 출세간법에서는 당신의 일생성불一生成佛을 돕고, 세간법에서는 당신의 치국 · 평천하를 지도할 수 있다. 이 경전의 분량은 현대인에게 꼭 들어맞아 길지도 짧지도 않으며, 내용이 풍부하다. 《군서치요群書治要》는 중국문화의 정화인데, 이 《무량수경》은 정체 불경의 《군서치요》이다. 우리는 이번 생에 다행히 만나 세간에서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며, 출세간에서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된다. 이것이 진정 방동미方東美 선생이 말씀하신 「인생 최고의 향수」로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불교란 무엇인가? 방동미 선생께서는 최고의 철학이자 최고의 과학이라고 말씀하셨다. 과학과 철학이 추구하는 종극의 목표는 원래 불법이다. 불법은 정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 개인에게 말하면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한다. 우주를 말하면 무궁무진하고 변제가 없는 우주로, 이는 자성이 변하여 나타나는 것이고 자신의 심상에서 생겨난 것이며, 다른 사람과 상관이 없고 원래 전부 자신의 일이다.
성인 및 현인의 교육과 과학기술의 교육은 완전히 다르다. 과학기술은 진성심 · 공경심이 필요하지 않지만, 성현의 교육은 필요하다. 인광대사께서는 “일 분의 진성 · 공경심이 있다면 일 분의 이익을 얻고 십분의 진성 · 공경심이 있다면 십 분의 이익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의심을 품고 있다면 의심이 많을수록 골치가 아프다. 어떻게 우리에게 의심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큰 문제이다. 근대의 과학자는 확실히 매우 대단하다. 그들이 연구하여 얻은 결론과 불경에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같다. 바꾸어 말하면 불경에서 말하는 우주의 기원은 과학자가 증명해주었다. 부처님께서 3천 년 전에 말씀하신 것은 최근 30년간 과학자가 발견한 것과 완전히 같다.
현재의 과학, 물리학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무한대를 향해 거시우주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들이 현대의 정밀한 기구로 관찰할 수 있는 우주는 실제상 전체 우주의 10%일 뿐이고, 여전히 90%의 우주는 보이지 않는다. 90%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발견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형상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거시적인 우주 형상이 극에 달한 것이 실보장엄토이고, 실보토가 더 상승한 것이 상적광토이며, 상적광토에는 형상이 없어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90%가 상적광으로 돌아가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대로 양자역학이 연구하는 것은 곧 미시세계이다. 부처님께서는 미시세계의 극한은 아뢰야阿賴耶이고 우주의 기원이며, 십법계 의정장엄의 기원은 제6의식으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극한이 정말 보이는 것은 아라야의 삼세상三細相으로, 경계상은 곧 물질 현상, 정신현상은 곧 아뢰야의 전상 轉相, 아뢰야의 업상 業相은 곧 에너지이다. 업상의 구경은 무엇인지, 과학자는 또렷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불경에서는 매우 또렷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불경에서는 구경 원만한 철학이 있고, 구경원만한 과학이 있다. 불교는 정말 고등 과학, 철학의 교육이지, 종교가 아니다.
불보살은 신선이 아니다. 불보살은 현대의 언어로 말하면 곧 과학자와 철학자이다. 부처님은 스승이고,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부처님은 이 학파의 창시인이다. 불교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확실히 방동미 선생이 말씀하신대로 「인생 최고의 향수」이다. 당신이 일체를 통달하여 잘 이해하여 조금도 미혹하지 않아서 이런 세계에서 살면 번뇌가 없고, 우려가 없으며, 근심이 없다. 어떠한 압력도 없어 생활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그래서 불법은 대학문이고, 구경원만하고 철저한 학문이다.
중국인의 선조는 대지혜가 있고, 대복덕이 있다. 중화민족 5천 년 역사의 강에서 대대로 성현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후세의 자손을 후덕하게 보살펴서 중화민족이 영원히 쇠퇴하지 않고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 대단히 풍부한 지혜와 가르침, 보배로운 문화자산을 남기셨다. 이러한 지혜와 가르침, 문화자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孝의 교육이다. 부모님에게 효양하는 효도孝道와 스승님을 존경하는 사도師道에 대해 진정으로 지성 · 공경심이 있다. 유교의 《효경》에서는 “무릇 효란 덕의 근본이요, 가르침이 생겨나는 곳이다(夫孝 德之本地 敎之所由生地).”라고 말씀하셨다. 효도는 도덕의 근본이고 교화는 반드시 효를 가르침에서 시작한다. 이는 옛 성인과 이전 왕이 천하와 잘 어울리기 위해 지극한 덕을 닦는 중요한 방도(至德要道)이다. 바로 중국인이 효의 토대가 됨으로 인해 선조들은 불법을 중국에 청한 이후 불법은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을 뿐만 아니라 광대하게 발양하였다.
《화엄경》에서 이르시길, “사람에게 효경을 가르쳐 보이지 않게 만방을 이롭게 한다(敎人孝敬 冥益萬方).” 하셨다. 그래서 그런 시대의 성현께서는 날마다 경전을 강설하고, 날마다 교육과 학문에 전념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두 잘 가르침으로 인해 사람들은 망상도 없고 잡념도 없어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이 모두 도덕의 표준에 부합할 수 있었다. 이런 표준은 유교에서는 곧 오륜오상五倫五常 · 사유팔덕四維八德이고, 불법에서는 곧 오계五戒 · 십선十善 · 육도六度 · 십원十願이다. 이 표준에 모두 부합할 수 있으면 천하는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며, 재해와 역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중국 선조는 이를 잘 이해하여 “나라를 세우고 백성에 군림함에 교육과 학문을 우선으로 삼으라(建國君民 敎學爲生).” 제기하셨다. 국가의 정치와 시설은 전부 교육을 위해 복무한다. 일체가 교육을 위해 힘썼기에 사회가 안정되고 천하가 태평하였다. 그래서 우리 국가는 일찍이 태평성세를 거친 적이 있었다.
인민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사회가 화해하려면 가장 중요한 일은 곧 힘껏 효도의 교육을 제창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효도를 힘껏 행하고 효도를 선양하면 효심과 선의가 우주에 두루 미치고, 전체 허공법계 중생이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거늘 하물며 지구이겠는가! 우리 불문의 제자는 노력하며 효도를 실현하여야 비로소 선조를 저버리지 않고 본사 석가모니부처님의 간곡한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불법은 정신문명 중에서 견줄 수 없이 수승한 일환이다. 대승경전의 독송은 우리로 하여금 불보살의 자비 · 불보살의 지혜 · 불보살의 선교방편에 대한 인식이 생기게 한다. 불보살님께서 우리 말법중생에게 베푸시는 은덕이 무량한 줄 알아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과거 세세생생 부지런히 힘써 수행하고 48대원을 발하여 서방극락세계를 성취하심은 나 한 사람을 위함이지, 다른 사람을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은혜에 감사해야 하고,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생각이 매우 절실하여야 이를 「일념에 상응하면 일념에 부처이고, 염념마다 상응하면 염념마다 부처가 된다(一念相應一念佛 念念相應念念佛)」고 한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위한다. 나는 과거 세세생생 감사할 줄 모르고, 아미타부처님의 선한 마음 · 선한 발원은 나를 위한 것임을 모른다. 열심히 학습하지 않으면 아미타부처님을 저버리고, 선조를 저버리는 것이다. 현재 명백히 알고서 반드시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선조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은혜를 갚으려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야 하고, 아미타부처님을 가까이 모셔야 한다. 이것이 참 보은이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온 우주법계에 회향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