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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至人)의 경지
설결이 물었다. “선생님이 인간세상에서 무엇을 이롭다하고 무엇을 이롭지 않다고 하는지 이해(利害)를 모르는 바에야, 지인(至人)도 원래 이해를 모르는 것 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인은 그의 수양이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정신과 물질이 통일된 신비스러운 경지이다. 거대한 계곡이 불타더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의 물이 얼더라도 그를 차갑게 할 수 없다. 사나운 천둥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때로는 구름을 타고, 때로는 해와 달을 타고서 천지 밖에서 노닌다. 태어나거나 죽더라도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하물며 이해시비(利害是非) 따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冱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游乎四海之外。死生無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설결이 말합니다. ‘선생님이 인간세상에서 무엇을 이롭다하고 무엇을 이롭지 않다고 하는지 이해(利害)를 모르는 바에야, 지인도 원래 이해를 모르는 것 입니까[子不知利害, 則至人固不知利害乎]?’, 당신은 인간세상에서 무엇을 옳다고 하고 무엇을 옳지 않다고 하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이해를 모르는 바에야 지인(至人)도 이해를 모르는 것입니까? ‘지인(至人)’은 도를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장자는 세 개의 명사를 제시했는데, 뒷날 중국문화 ․ 도가 ․ 도교에서 늘 인용한 것입니다. 첫째, 소요유 편에서 신인(神人)을 제시했습니다. 둘째, 이 절에서 지인(至人)을 제시합니다. 뒤에 가면 또 진인(眞人)을 제시합니다. 사람의 가치에 관하여 그는 이 세 개의 명사들을 제시했습니다. 장자의 관념에서는 우리 이런 사람들은 지금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살고 있지만 사람의 본전을 다 가지고 놀아버렸습니다. 사람에게는 정말 신인(神人)으로 변할 수 있는 본전이 있습니다. 초신입화(超神入化), 이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정신과 물질이 통일된 경지까지 승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정도까지 성취한 것이 지인(至人)입니다. 지인의 경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바로 진인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사람의 진정한 가치에까지 성취하지 못했고, 이런 사람의 기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면, 도가에서는 이런 자신을 행시주육(行屍走肉)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시체가 걸어 다니고 있는 것으로, 그 안에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단지 몇 십 근 고기가 거리에서 뛰어다닐 뿐이란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학우들이 와서 말하면서 웃기를, 선생님, 선생님은 갈수록 빼빼 해지시네요 하는데 제가 말합니다. 이게 이른바 표준적인 행시(行屍)이고 조금 더 뚱뚱한 표준은 주욕(走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행시, 걸어 다니는 시체, 걸어 다니는 고기 덩어리가 아닌 정도에 도달한다면 그거야말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자! 이제 인뢰를 다 말했습니다. 다음은 인뢰로부터 천뢰에 도달합니다.
‘왕예가 대답했다. 지인은 그의 수양이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정신과 물질이 통일된 신비스러운 경계이다[王倪曰:至人神矣]’, 중국문화 속에서의 생명의 가치를 장자는 여기서 다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해낼 수 있다면 인도 불교에서는 바로 성불한 것이요 중국에서는 신인을 성취한 것입니다. 왕예는 말합니다. 아이! 노형 이 문제를 묻지 말라. 물론 우리는 보통사람으로서 걸어 다니는 시체요 뛰어다니는 고깃덩이다. 지인은 진정으로 도의 경계에 도달하면 신화(神化)할 수 있다. ‘대택이불능열(大澤焚而不能熱)’, 네 개의 대양[四大洋] 전체의 화산이 다 폭발해서 불타더라도 그는 조금도 뜨겁지 않다. 상편 소요유에서 말했듯이 지인은 사우나에 가서 목욕하는 정도로 느낄 뿐입니다. ‘하한호이불능한(河漢冱而不能寒)’, 북극 전체의 빙산이 녹아버려도 그는 마치 아이스케이크를 먹은 것이나 에어콘 밑에서 앉아 있어서 서늘한 것으로 느낄 뿐이다. ‘질뢰파산풍진해이불능경(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 온 지구가 진동하여 쪼개지고 산과 강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마르더라도 그에게는 조금도 감각이 없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어린아이가 진흙을 가지고 놀다 망가뜨렸을 뿐이라고 느낀다.
그러므로 지인의 수양은 그 초신입화(超神入化)의 경지가 이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장자가 그렇게 한번 글을 쓰자, 중국의 훗날 도가의 신선사상이나 봉신방(封神榜) 등등은 모두 여기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은 [若然者]’, 사람이 이 경계에 도달하면 ‘때로는 구름을 타고[乘雲氣]’, 항공회사의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이 한번 손짓하면 하늘위의 구름 한 덩이가 바로 와서, 자신이 마치 대만의 돗자리 위에서 잠자는 것처럼 그렇게 가서,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갑니다. ‘때로는 해와 달을 타고서[騎日月]’, 어떤 때는 오토바이를 사고 싶어도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해와 달을 가져다가 오토바이를 삼으면 됩니다. ‘천지 밖에서 노닌다[而游乎四海之外]’, 이 우주의 밖으로 놀러나갑니다. 사람이 도를 닦아 여기에 도달하면 ‘태어나거나 죽더라도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死生無變於己]’, 생사가 그에게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서[不生不死] 물질세계의 변화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해시비(利害是非) 따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而況利害之端乎]!’, 더더구나 세간의 이해시비는 그가 보기에 어린애들이 말다툼하는 것 같으면서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개미가 싸우고 있는 것을 보거나 한 무리의 동물들이 우리 안에서 자기들끼리 법석을 떨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단락은 사람의 가치가 인뢰로부터 천뢰에 도달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제물론 편은 가장 길면서, 한참동안 얘기 했지만 깔끔하지 못하게도 여전히 최고의 도를 언급했습니다. 도가 어디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스스로 상실해버렸습니다. 다음에서 또 한 단락의 일을 말하는데, 모두들 가장 쉽게 범하는 병폐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장자를 읽을 때 유의해야합니다. 진정으로 수도에 성공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때로는 구름을 타고, 때로는 해와 달을 타고서 천지 밖에서 노닙니다’. 위에서는 ‘구름을 타고 비룡(飛龍)을 몰아 사해 밖에서 노닌다’, 용의 등에 걸터앉아 타고 놀았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있는데 역시 고대 도가로서 수행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구작자(瞿鵲子)가 장오자(長梧子)에게 물었다. “나는 공자에게서 듣기를, ‘성인은 세속의 일을 애써 하지 않는다. 이익이 있는 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요구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도를 지녔다고 표방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면서 무슨 목적이 있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고, 그렇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성인은 이렇게 속세의 먼지 밖에서 노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내가 너무 맹랑한 말을 한다고 여기면서 나를 한바탕 꾸짖었습니다만, 나는 그것이 성인의 영묘(靈妙)한 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無謂有謂,有謂無謂,而遊乎塵垢之外。夫子以爲孟浪之言,而我以爲妙道之行也。吾子以爲奚若?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瞿鵲子問乎長梧子]’, 이 두 사람은 모두 수도자로서 고사전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구작자(瞿鵲子)가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나는 공자에게서 듣기를, ‘성인은 세속의 일을 애써 하지 않는다[吾聞諸夫子, 聖人不從事於務]’, 구작자는 공자의 학생이라고 전해오며, 여기서 ‘부자(夫子)’는 공자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가 장오자(長梧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들었는데 내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성인(聖人’, 진정으로 도를 얻은 사람은 ‘불종사어무(不從事於務)’, 이 세상에서 마치 세속적인 사무를 상관할 필요가 없는 듯이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우리 일반적으로 수도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일반인들은 불법을 배우면서 수도할 경우 밀종을 배우고 요가술을 배우면서 별의별 괴상한 것들을 배우는 것을 수도한다고 부릅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쌓은 경험에 근거해 보면 일반적으로 수도한다는 관념이 조금이라도 젖은 사람이라면 한 가지 병폐가 있는데, 그 사람이 폐인이 되어 끝장나버린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먼저 게으름을 배워서 어떤 일도 상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도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구! 이것은 내 도행(道行)을 방해할 것입니다. 그저 도만 닦고 그 외에는 뭐든지 상관 않는 게 제일 좋다는 겁니다. 둘째로, 아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수도한다는 게 본래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일이니까요! 내가 도를 이루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또 태양을 자전거 삼아 타고 싶기 때문입니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여러분들이 연구해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진정한 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장자가 지금 인용하는,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묻는 말도 이러한 도리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들었는데 도를 배운 사람은 세간의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익이 있는 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不就利, 不違害]’, 겉으로 듣기 좋고 이익 있는 좋은 일에 가까이 하여 덕을 보지 않고, 나쁜 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수양은 진정으로 높습니다! 절대적인 자기주의[自我主義]는 서양문화에서 진정한 자유로서 개인의 자유주의가 극도로 발휘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일반사람들은 ‘손해 보는 일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不違害]’를 실천해내지 못합니다. 해로움이 있는 곳에 내가 가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문화입니다. 예기에서는 말하기를 사대부인 지식인들은 위험한 일에 닥쳐서는 자기 목숨을 주어야한다[臨危授命]고 합니다. 예컨대 눈앞에 닥친 국난(國難)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에 재난[禍害]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점을 우리는 해내지 못합니다. ‘이익이 있는 일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不就利]’, 우리 도를 닦는 사람들은 겉으로 만사 상관하지 않고 내가 도를 닦는 데 유리하기만 하다면, 당신이 내게 도를 하나 전해주기만 한다면, 당신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게 하고 나를 거북이 손자라고 부르더라도 나는 하겠다는 것, 이게 바로 ‘이익이 있는 일을 가까이 하는 것[就利]’입니다! 비록 보기에는 아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도를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 이런 마음가짐은 ‘이익이 있는 일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 사람에게 정신이나 생명을 좀 희생하라고 하면, 불가에서 말하는 남을 위해서 보시를 좀 하라고 하면, 또 종교가나 기독교에서처럼 남에게 좀 봉사하라고 하면, 헤! 헤! 이런 것은 나 안 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해로움이 있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그렇지요?
‘불희구(不喜求)’, 무엇을 요구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우리 일반적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요구하는 게 아주 많습니다! 건강도 바라고 오래살기도 바랍니다. 거기다가 돈 벌기도 바라고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해주기도 바랍니다. 그러고도 또 뭘 바라고 뭘 바라고 … 아주 많습니다! 요컨대 바나나 세 개 가지고 절에 가서 절합니다. 절 다하고 요구 다하고 나서는, 또 그 바나나 달라고 하여 자기가 집에 가지고 가 먹습니다. 온통 요구하기를 좋아합니다. ‘불연도(不緣道)’, 자기 자신이 수도하고 있다고도 표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수도하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무슨 목적이 있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렇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고, 그렇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성인은 이렇게 속세의 먼지 밖에서 노닌다[無謂有謂, 有謂無謂, 而遊乎塵垢之外]’, 그는 ‘무위유위(無謂有謂)’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말할 바가 있을까요? 이 세상에 살면서 무슨 목적이 있을까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합시다! 그는 세상에서 열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세히 연구해보면 그는 비록 몸이 세상에 있어서 평소대로 장사를 하고, 평소대로 오토바이를 타고, 평소대로 6시에 일어나서 아주 서둘러서 바쁘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12시에야 잠이 듭니다. 대단히 바쁩니다. ‘이유호진구지외(而遊乎塵垢之外)’,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뛰어넘어버려서 마음은 세속의 먼지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내가 너무 맹랑한 말을 한다고 여기면서 나를 한바탕 꾸짖었습니다[夫子以爲孟浪之言]’, 구작자는 말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내 선생님은 내가 너무 맹랑하다며, 주제넘게 높은 데만 바라보면서 어찌 이 말을 물을 자격이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한바탕 듣고는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이 성인의 영묘한 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而我以爲妙道之行也]’, 저는 이것이 옳다! 고 봅니다. 진정으로 도를 얻은 사람은 특정한 모습이 없다고 봅니다. ‘당신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吾子以爲奚若]?’, 구작자가 말합니다. 노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구작자는 선생님에게 도를 얻은 사람은 그러한지 안 그러한지를 물었는데, 선생님은 구작자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들은 말이 ‘맹랑지언(孟浪之言)’이었습니다, 너는 너무 크게 허풍을 떤다. 너는 이 문제를 물을 자격이 없어. 구작자는 말합니다. 나는 내 질문이 옳았다고 봅니다. 노형, 당신은 어떤지 말 좀 해보세요?
남회근 선생 장자강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