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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해외포교의 대명사인 숭산 행원스님이 2004년 11월 30일 오후 5시에 화계사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열반송은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 이다.
다비식은 12월 4일 수덕사에서 가졌다.
이 다비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 미주에 있는 숭산 스님의 제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태고사 무량 스님과 프로비덴스 국제선원의 여러 스님을 비롯한 많은 미국인 제자들과 뉴욕 조계사 묘지 스님, 시카고 손지학 스님, 불타사 현성 스님, 보스톤 심검도 창시자 원광 스님 등 여러 스님과 시카고 불타사 림 대지 거사 등이 참석하였다.
숭산 스님의 해외포교의 중심지였던 미주의 여러 곳에서도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스님을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스님이 창건하였던 달마사에서는 12월 5일 오후 2시에 법당에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남가주 사원연합회 주최로 추모법회가 열렸다. 도안, 현호, 현일, 진각 스님 등 L.A. 지역의 스님 및 신도 500여명이 참석한 이 법회는 진각 스님의 사회로 초대신도회장인 김종모 거사와 김재호 거사가 헌향하고 숭산 스님의 생전 육성법문과 도안스님(관음사주지)의 추도법어 및 남가주 사원연합회장 현일 스님의 추도사에 이어 정정달 법보선원장, 송문영 추진위원장, 김충웅 달마사 신도회장, 브리짓 더프 달마선원 선임지도법사의 조사 등의 순서로 거행됐다.
도안스님은 법어를 통해 “사부대중에게 지혜광명을 밝혀주신 맑고 깨끗하신 큰스님의 높은 공덕을 기린다.”고 말했다.
뉴욕에서는 11월 30일 미동부 승가회 모임을 마치고 보스톤 문수사 도범 스님을 비롯하여 혜성 스님, 휘 광스님, 원영 스님, 성오 스님등 10여명의 스님이 조계사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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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 스님과 미국불교
숭산 스님은 뉴저지 거주 동국대학교 사업가 유영수씨의 초청으로 1972년 4월에 일본에서 L.A.로 입국하였다. 이후 뉴욕을 방문중에 맨하탄에서 일본 선방을 보고 미국에서 선을 보급하기로 결심하고 보스톤으로 가서 로드아일랜드 주립대학교 교수 김정선의 주선으로 브라운대학의 보스톤과 로드아일랜드 지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선을 지도하였다. 1972년 10월 프로비덴스 선원을 개원하였는데 이 선원이 현존하는 미국 최초의 한국사찰이다.
이후 이 선원은 브라운대학교의 프르덴 교수가 숭산 스님의 설법을 통역하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1973년 2월 3일 달마사 개원하여 한국신도들을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프로비덴스 홍법원과 L.A. 달마사를 각각 미국인과 한국인 포교거점으로 삼아, 보스톤, 뉴헤이븐, 뉴욕, 시카고, 캐나다, 버클리, 시애틀, 캔사스 등 전 미주에 선원을 내고 또 폴란드 등 유럽과 홍콩 등 전세계에 걸쳐 130여 개의 선원을 내면서 한국불교를 전 세계에 알렸다.
숭산 스님은 일찍부터 당뇨로 고생을 하였는데 이 때문에 1999년 10월 로드아일랜드 국제선원에서 세계 여러 지역과 미주에서 참가한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매 3년마다 열리는 '제5차 세계일화대회'를 마지막으로 미국에는 오지 않았다.
약 30년에 걸친 미주에서의 포교기간 동안 스님은 프로비덴스 금강선사, L.A. 달마사에 한국전통 사찰을 세웠고 그의 제자 무량스님이 캘리포니아에 태고사에 한국전통 사찰을 건립하였다. 또 스님은 프로비덴스 조실인 대광선사, 한국 무상사의 조실 대봉 선사, 무상 스님, 무량 스님, '만행'의 저자 현각 스님 등 수 십 명의 미국인 스님을 배출하였다. (숭산 스님의 행적은 본지 169호에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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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뭐꼬? (是甚磨?)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떴다. 간 자리가 보이던가. 중천에 안개가 꼈다 진 자국이 보이던가. 강물 위에 배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전가. 여름내 풀 속에서 울던 벌레소리가 동짓달에도 들리던가.
백 년 전에 내가 이 세상에 없었듯이, 백 년 뒤에도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 전에 숭산 스님한테서 참선(參禪) 공부를 할 적에 별안간 주장자(柱杖子)를 법상(法床)에다 <탁!> 내리치면서 "있는가 없는가?"하고 소리를 지르며 묻던 생각이 난다.
뜻을 몰라서 울상이 돼 있던 일. <이 뭐꼬?> (是甚磨?) 하고 고성대질(高聲大叱)할 적에도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던 일. 딴 사람들은 대답대신에 주먹을 내밀기도 하고 숭산 스님의 물음을 되받아 소리쳐 묻기도 했다.
혹을 동문서답(東問西答) 격으로 뚱딴지같은 질문을 대답 대신에 던지는가 하면, 단장에라도 스님의 멱살을 잡아 끌 것같이 서슬이 퍼래서 맞서기도 했다.
나는 그저 싸움이 벌어지지 않나 하고 가슴만 죄었는데, 숭산 스님은 그제야 비로소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공부가 좀 진전됐어요."하고 기뻐하지 않는가.
<이 뭐꼬?> - 나는 이 화두(話頭)를 들고 10년이 넘도록 그 진면목(眞面目)을 알아 내려고 공부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법회(法會)에 꼭 나갔다.
법회가 시작하면 으레 숭산 스님은 죽비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바닥에 대고 딱 딱 딱 세 번을 친다. 다같이 자기가 앉고 싶은 쪽을 향해서 앉고 20분 동안 좌선(坐禪)에 들어간다. 연상 <이 뭣꼬?>의 화두는 들고.
좌선이란 생각을 산락 하지 않게 해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한 경지에 들고, 조용히 앉아 선악을 떠나 유무(有無)에 관계하지 않고 마음을 안락 자재한 경계에서 소요(逍遙)하게 하는 것이라 하는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벽을 마주보고 않아 있노라면 고단해서 잠이 올 때도 있고, 내일내야 할 곗돈 생각이며, 시아버지 제삿상을 봐야 하는 일 등등 . 이러다 보면 들고 있던 <이 뭐꼬?>의 화두는 꿈나라를 오락가락 하기도 하고, 곗판에 가서 앉아 있기도 하고 동대문 시장 어물전을 돌아 다니기도 한다.
20분이 지나서 다시 죽비를 치는 소리가 들리면 곗판으로 어물전으로 멋대로 돌아다니는 화두를 다급하게 붙잡아다 놓는다. 그럴 적이면 괜히 죄를 진 것 같아서 고개도 편하게 들지 못했다.
숭산 스님은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주장자를 법상에다 탁탁탁 내리칠 때가 있다. 혹은 법문 도중에 혹은 끝날 때도 이런다.
<탁!>하고 내리치는 순간, 그 <탁!>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적멸>이요, <허공>이요, <이 뭐꼬?>의 화두가 풀리는 순간이라고 한다.
또 그<탁!>하는 속에서 석가(釋迦)도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도 역대의 조사(祖師)도, 그리고 일월성신(日月星辰)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출현한다고 한다.
남들은 그 본면목(本面目)을 알아내서 그럴까. 모두들 얼굴에 희열을 머금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죽이 끊는다 밥이 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법회가 끝나면 둥그렇게 원(圓)을 그려 다 같이 합장하고 "성불(成佛) 하십시오" 하곤 했다. 그러나 내 가슴 가득히 들어찬 망상(妄想)이 장안이 좁다고 날뛰는 판에 성불이 다 어느 세월인가.
공부하는 스님이 이 지경이었다면 때리기 삼십 방, 다시 삼십 방, 또 삼십 방, 그래서 90방은 내려졌을 게다. 때린 방망이까지 더럽다고 내던졌을 게다.
그 법회를 떠나 뉴욕에 온 지도 3년이 됐다. <이 뭐꼬?>의 화두는 여전히 놓칠세라 붙잡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앉은뱅이다.
지금 다시 내게 묻더라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설사 안다고 치자. 안다고 대답해도 삼십 방, 모른다고 대답해도 매가 삼십 방이 돌아올게 아닌가.
석가세존 시대의 유마거사(維摩居士) 생각이 사무친다. 거사의 법담은 많지만 한가지만 들쳐 보자.
어느 날 거사가 병석에 누웠다고 해서 세존은 제자들에게 문병을 가라고 했다. 그러나 사리불(舍利佛), 목견련, 수보리 등 누구 하나 선뜻 문병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마거사의 병은 보통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고 있다는 큰 병이다.
섣불리 문병을 갔다가 유마거사 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의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병고를 더욱 중태에 빠뜨리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유마거사는 세존의 속 제자지만 불타의 10대 제자 가운데 누구 하나 거사의 법담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나한(羅漢)은 물론 보살도 서로 가기를 꺼려해서 할 수 없이 과거 칠불의 스승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세존의 부촉을 받아 가게 됐다.
많은 대중의 내방을 받은 유마거사는 그의 거실인 방장(方丈)에서 모두를 맞았다.
"잘 오셨습니다, 문수보살이여! 보살은 오는 상(相)이 없이 오고 나는 보를 상(相)이 없이 보살을 봅니다."
"거사여! 참으로 그러하오, 만약 왔다고 할진대 그것은 온 것이 아니며 또한 간다고 해고 그것은 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자(來者)는 그 온 바가 없고 거자(去者)도 또한 그 갈 바가 없는 고로, 따라서 보를 그것은 역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초직입여래지(一招直入如來地)의 대오(大悟)겠는가.
<이 뭐꼬?> -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엔 단풍이 들지. <이 뭐꼬?> - 해와 달이 비치고 사시(四時)가 옳아 가며 밤과 낮의 구분이 정해져 있는 이것이 대자연이라지.
내 밑천은 이것이 고작이란다.
의상대사 법성게
법성이 서로 융통하여 두 가지 상이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 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으니
증득한 지혜의 알 바요 다른 사람의 경지가 아니다.
참 성품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제 성품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제 성품을 지키기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나니
하나 속에 모든 것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여럿이 곧 하나로다.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었으니
일체의 티끌 속도 그와 같도다.
한량 없는 오랜 겁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한량 없는 겁니다.
1973년 이계향씨가 쓴 글로
이계향 전집 1중에서 옮겨실었다.
*숭산 행원 큰스님 영전에
동녘에 뜨는 해 막을 수 없고 서산에 지는 해 잡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큰스님 가시는 길 잡을 수 있다면 잡고 싶고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단 저희들뿐만 아닙니다. 큰스님께서 뿌리신 부처님의 덕이 천의 강과 천의 달에 비추듯 세계 방방곡곡에 두루 하시여 불은의 인연을 맺어 주신 큰스님 덕을 흠모하는 제자중생들의 한결같은 간절한 소망인줄 압니다. 큰스님께서는 전주 이씨 병자 준자 이신 이병준 선생님을 아버님으로 경주 이씨 소저 님을 어머님으로 백학이 백송에 내려앉는 태몽으로 점지된 인연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 나시여 삼대독자의 이씨 가문의 대를 이으셨습니다. 정묘년 8월 1일 이였습니다. 부모님은 삼대독자의 대를 잇게 하여 주신 신령님께 감사하며 세상에 덕과 인을 베풀 것을 바라시며 덕인이라 이름지어 주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은 분단되어 6.25의 전화는 육군 중위의 계급장을 그 분에게 달아 주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받은 살생의 독기를 충정남도 탈해산 첩첩혐로의 심산유곡의 기도원에서 백일 기도와 선수행으로 씻어 냈습니다. 그때에 솔잎과 산초만의 채식은 그 분의 온몸을 녹색으로 바꾸는 고행 이였습니다. 숭고한 산과 같은 높은 세계일화의 원을 행하려는 수련이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은 숭산 행원선사는 조계적자로서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여 영겁불멸의 무상 정법을 만천하에 선양하였다는 말씀으로 행원 스님의 60생을 축하하였습니다. 백학과 같이 나르면서 덕과 인으로 부처님의 법을 세계 방방곡곡 천강에 달 비추듯 심어온 큰스님은 철의 장막 동토의 나라 소련에서도 서구 문명의 발상지에도 청교도의 나라 미국 등 강대국에도 진여 진리를 철견 하신 자신감으로 부처님의 위의를 선양하였고 미개한 빈국에도 부처님의 자비를 알게 하고 빈부강약의 차별 없는 홍법으로 부처님의 평등 요익 사상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는 살상과 파괴로 불타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말법 시대를 두고 어이 눈을 감으셨나이까? 부처님의 말법시대의 뜻은 극락의 불국정토였으며 이는 스님께서 염원하는 세계일화의 종교결사로 이룰 수 있다 하셨습니다. 못 다한 그 길을 계속하기 위해 낡은 옷 갈아입으려 입적하였다 생각하며 쏟아지는 슬픔을 참으려 합니다. 가시는 걸음 편안 하시옵소서. 저희들 정성을 다해 청정한 연꽃 아름 따다 가시는 길 밟히오리다. 미국에 불법을 펴시고 초기 이민자들의 등불이 되어 주셨던 숭산 행원 큰스님의 덕을 받들어 삼가 영전에 이 글을 바치나이다.
불기 2548년 12월 5일 달마사 신도 유 남식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