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13> 광개토대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일본서기’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⑤
네 나라가 동시에 조공을 바쳤다?
‘일본서기’는 한 마디로 평가하면 조공(朝貢)에 한이 맺힌 역사서다. 야마토왜가 조공을 받았다는 기사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조공 기사에는 나가도 너무 나간 내용들이 많다.
‘일본서기’ 흠명(欽明)기 원년(540) 8월조에 “고구려·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사신을 보내 헌상하고 겸해서 조공을 바쳤다”는 구절이다. 고구려의 안원왕과 백제의 성왕, 신라 진흥왕이 나란히 야마토왜의 흠명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임나는 별개로 치더라도 이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가 아는 고구려·백제·신라라면 유치원 아이들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일본서기’ 서명(舒明) 10년(638)조에도 ‘백제·신라·임나가 함께 조공을 바쳤다’고 나온다. 638년은 562년 가야가 신라에 망한지 76년이 되는 해이다. 가야가 임나라면 망한 지 76년 되는 나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서기’는 646년에는 “고구려·백제·임나·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공물을 헌납하고 세금을 납부했다(貢獻調賦)”고 쓰고 있다. 세금을 납부했다는 ‘조부(調賦)’라는 표현은 이 네 나라가 야마토왜의 행정구역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에는 이런 황당한 기사가 셀 수 없이 많다.
광개토태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일본서기’에는 심지어 광개토태왕이 야마토왜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까지 있다. 응신(應神) 7년(276)조의 기록이다(자세한 내용은 원본 기사 참조).
응신 7년은 276년인데, 일본 극우파들은 120년을 끌어올리는 주갑제(周甲制)를 사용해서 120년 끌어올려 396년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인들이 직접 작성한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영락(永樂) 6년(396)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과 백제를 토벌했다(王躬率水軍討倭殘)”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은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과 백제를 토벌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 광개토태왕릉비. 릉비는 396년에 광개토태왕이 왜와 백제를 토벌했다는데, 일본서기는 광개토태왕이 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쓰고 있다.
‘일본서기’의 눈으로 보자는 강단사학
그러나 일본 극우파들은 물론 남한 강단사학자들도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와세다대 출신의 인제대 교수 이영식은 이렇게 주장한다.
“현대적 국가 의식을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일본서기’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다. 객관적인 사료 비판을 통해 관련 기술을 다시 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선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역사학의 기초 중의 기초인 사료비판도 하지 말고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보자는 말이다. ‘일본서기’의 눈으로 한일고대사를 보면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모두 야마토왜의 식민지가 된다.
이영식의 “‘일본서기’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돌아가자는 말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자는 말이다. 야마토왜를 높이는 황국사관(皇國史觀)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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