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에서 있었던 법인연수를 마치고 곧장 다음 연수를 위해 대전으로 왔다. 영광의 영산성지고, 성지송학중, 경남의 원경고, 경주화랑고, 전북 김제의 지평선고, 용인의 헌산중, 탈북청소년을 위해 특화된 경기도의 한겨레중/고등학교까지. 원여고나 해룡고처럼 원불교 교립학교이면서 입시를 중시하는 일반계고를 제외한, 대안교육특성화 중고등 교원들이 모여 다음 해의 '사람농사'를 준비하는 인농연수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름만 알던 사람과는 대면하고, 같은 직장의 동료였지만 한번도 정담을 나눈 적이 없던 사이에는 수다와 질문이 넘쳐 흘렀다.
첫 날 대특강에선, 시대의 향배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운 집단, 곧 기업이 오늘날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짐작케하는 '빅데이터'관련한 강의가 있었다.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해석하는 업체의 대표가 강사였던 시간으로, "통계학을 전공하고 사회학을 복수전공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채용할텐데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TV에 방영된 모교양프로그램의 강사였다는 작가이자 사회학 연구자의 두 번째 강의는 실망스러웠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강의였는데, 20년 전에 공부했음직한,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상식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한참을 듣다가 깨달은 것은, '나이가 지긋한 남교사가 많은 이곳에 진보적인 여성학 강사가 와서 강의했다면 아예 소통이 안될 수도 있겠다. 이 정도가 여기서 소화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어린이나 노인,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등 여러 층위의 사회적 약자가 존재하지만, 젠더문제는 워낙에 일상적이고 역사적으로, 심지어 인류역사와도 연관이 되는 심층의 문제라 문제로 자각하기도, 해결을 위해 현재의 기득권을 내려놓거나 상황을 재구성하는 일이 여간해선 쉽지않다. 세대가 바뀌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늘날 10대~20대 남성이 토로하는 여성혐오나 상대적박탈감의 크기 또한 놀라울 정도라서 아직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문제이다.
이튿날엔, 매 시간 마다 세 가지씩 강의가 개설되고 각자 관심사에 따라 참석할 수 있는 열린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수학과 인문학을 접목한 수업, 학교폭력예방 사례발표, 마음공부 지도 사례발표. 내가 참석한 세 가지이다. 특히 전날 속속과 시독 공부에서 "개념 중의 개념이 수이며, 말과 생각과는 별개의 개념이 수"라는 선생의 명쾌한 정리를 들은 직후라, "수학자나 수학교사 중에 시쓰는 분이 많고 크리스천도 많다"는 강사의 말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느낌과 감정(feeling)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개념의 세계. 어째서 공부를 하는 것이, 공부를 함으로써 내게 명상효과가 생기는지도 생생하게 짚이는 소득이 있었다. 말그대로 '집중'의 작용이었던 것.
방학동안 고기와 밀가루를 끊고 있는 중인데, 급식당에 나온 찬이 부실하여 튀긴 고기 두 점을 마지못해 먹었더니 곧장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자기처벌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전환하여 실행하는 것. 내게는 오래된 습관이다. 애연가였을때는 저지른 죄와 사무치는 반성의 크기에 따라 일주일이나 보름씩 금연을 하는 것으로, 공부길에서 피할 수 없는 상처로 심연 같은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고 원망심으로 바뀌려할때는 단호하게 끊어내는 마음으로 귀를 하나씩 뚫기도 했었다. 금식이나 단식은 숱하게 했던 일이고. 이번엔 좋아하던 빵과 과자를 끊는 것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잡고 몸에는 좋은 기운을 불러오고자 하였는데 조금씩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지난 월요일, 서울에서 영광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는 내내 울면서 글을 썼다. 3시간 남짓, 하염없이 글을 썼고 한 손으론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했다. 옆에 앉은 승객이 흘낏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참회와 반성과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을까. 울적해하는 것으로는 매양 그 자리인것 같더니 울면서 글을 쓰고 나니 더없이 명쾌해졌다. 사람농사에, 공부와 기도말고 무슨 해법이 있을까 싶었다. 아이들을 만나는 내 수업도 '공부와 기도', 곧 '집중'에 줄을 대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수업일 뿐일텐데 어떻게 한 걸음씩 나아갈지 아직은 고심과 궁리 중이다. 한 학기에 20%씩만 지분(?)을 키워 가보자고 조급함에 제동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