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이연으로 자서전 글쓰기 에 참여 하면서 사라온 내 인생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였다. 가슴속에 숨겨진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나 한 편 한편 쓰다 보니 오래전 아픈 추억과 기쁨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오래전 옛날 생각에 내 마음을 글로 써 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지도하시며 이끌어주시는 김 홍은 교수님 고맙습니다.
처녀시절의 추억과 준비도 없어든 결혼으로 울며 타던 꽃가마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과 옛날을 상상하며 한자 한자 적는 순간 에도 눈물도 흐르고 비시식 미소도 지으며 옛날 사진첩을 뒤적이며 추억을 더듬어가는 이글로 제 과거를 전하고저 합니다.머리 잘라 부모님 게 불효한 이야기며 준비업시 족 도리 쓴 글 부모님과 슬픈 이별의 아픔 어려움을 이겨내던 눈물로 살아온 나의삶을 기록하면서 뉘우침과 보람을 두서없이 글에적어 봅니다.
<가제 假題>
* 1부/ 울며 타던 꽃가마
댕기 머리
열아홉 살 내 머리 결은 친구들의 부러 움이었다. 말총머리 결에 숱도 많으니 친구들은 네 머리 반만 달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머리카락도 제법 돈이 되었다. 머리 숱처서 어머니 나일론 치마저고리도 해 들였다.
옛날에는 가발을 사람 머리카락으로 하였기에 빗질 하여 나오는 머리카락도 모아 팔기도하였다. 내 머리는 너무 길어서 추단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 도움으로 머리를 감는다. 머리 감기는 어머니한데 엄마! 내 머리 반만 잘라주세요? 사정을 하였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시고 큰일 날 소리를 한다. 하시며 너의 아버지 한데 허락을 받아 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너의 큰아버지한데 어떤 불호령을 받으려고 그러니 하신다. 큰 아버지의 사랑이 유난하였지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마음대로 해본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어른들의 틀 속에서 갇혀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버지는 딸도. 조카딸들도 많은데 유난 스리 나한데 집착을 하시는지 철부지 내 마음에는 나를 사랑이라기보다 억압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큰 아버지는 동네에서 무서운 호랑이라는 호칭으로 큰 아버지를 보면 도망가기가 바쁘다. 그런데도 나는 큰 아버지 품으로 다가갔다. 동네 호랑이라 해도 오빠와 나는 큰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인가 큰 아버지를 많이 의지하였나 보다. 큰 아버지가 술에 취해 오시면 큰 엄마 사촌언니 오빠들은 대문으로, 담 너머로 모두 도망치기가 바빴다. 큰 아버지는 술에 취하시면 주정이 심하시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신다. 큰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오신다. 나를 보고 네가 가야 큰 아버지 주무시지 얼른 내려가 보라고 하셨다.
나는 큰댁으로 내려가 큰 아버지! 하고 부르면 “왜. 하신다. 큰 소리치지마세요? 하며 물수건으로 큰 아버지 얼굴과 손을 닦아 드리고 잠자리도 깔아주고 베개를 내주면 큰 아버지는 내손을 꼭 잡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신통한 것 하시며 누우신 후 취중으로 오늘의 말씀을 하시며 잠에 든다.
큰 아버지가 잠에 들면 나는 집으로와 큰 엄마! 큰 아버지 주무세요. 한다. 큰 어머니는 고생 했다고 하시며 그제야 큰댁으로 내려가신다. 큰 아버지 술주정에는 항상 온 식구들은 도망을 가고 그때마다 오빠와 내가가야 큰 아버지가 조용해지고 잠을 주무셨다.
큰 아버지는 나를 유달리 사랑하시고 내 댕기 머리를 참 좋아 하시었다. 담배 조리를 할 때도 큰 아버지는 나를 항상 옆에 있게 하시였다. 아버지는 속상 해 하시며 형님께 불만이 많으시다. 그 독한 냄새나는 건조실에 애를 되려간다며 큰 아버지한데 싫은 소리를 하셔도 큰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않으신다.
딸보다 더 귀여워하시며 너 시집 갈 때는 내가 장롱 해준다 하시며 내가 은비녀 해줄게 머리 자르지 말고 쪽찌라고 하시며 신신 당부를 하셨다. 모두 부러워하는 댕기머리는 내가 제일 싫은 긴 머리였다. 지인들은 예쁘다 예쁘다하는데 나는 추단하기가 힘들어 실었다.
머리보고 반하였다는 오빠친구인 나의남편은 총각 때 우리 집에 오면 나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람이 진중하고 처자식은 충분히 보호 할 사람이라며 호감을 갔고 나한데 오빠친구가 오면 인사는 해야지 어째서 바라도 보지 않으니 내가 너를 그리 가리 켰니 하시고 아버지는 자주 놀러 오라고 하신다.
부대가면 편지도 자주하라고 하며 친절히 대해 주셨다. 나는 그러시는 아버지도 싫었다. 한날은 부대에서 편지가 왔다. 내 사진 좀 보내 달라 고했다. 아버지는 편지를 건네주시며 너한테 온 편지다. 보고 답장을 해주라고 하셨다.
나는 두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밀쳤다. 아버지는 편지를 들고 아래채 서재로 들어가신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오빠친구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버지는 편지내용을 나한데 전해 주신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해 봄에 편지 속에는 예쁜 진달래꽃을 정성 들여 담아 보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며 내 머리 옆에 가만히 두고 나가신다. 아버지의 정성과 그 사람의 집념이 대단하였다. 삼년 내내 변함이 없다. 삼년 되던 해 제대하는 날 오빠와 우리 집으로 먼저 왔다. 나는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내가 어디가 좋으세요? 그 사람 대답은 가정이 화목해서 좋으며 모든 면이 밝아서 좋아요 라고 한다. 내가 어느 면이 제일 좋은가 또 물어보았다. 그 사람도 큰 아버지처럼 내 성품과 머리란다. 댕기머리 보면 너무 예뻐요? 댕기머리에 반했다고 했다.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가위를 들고 사촌 언니 집으로 가 언니 손에 가위를 들려주며 머리를 잘라 달라 고하였다.
사촌 언니는 깜짝 놀란다. 언니가 안 잘라주면 내가 잡고 자른다며 부탁 을 하였다. 언니는 걱정을 하며 내가 안 자른 거다. 네가 자른 거야 큰 아버지한데, 네가 잘랐다고 해야 한다. 하고 당부를 하고 아깝다며 머리를 잘라주었다. 나는 그 사람 핑계로 방망이처럼 매달리는 무거운 머리를 잘랐다. 자른 머리를, 댕기가 달린 머리꼬랑지를 들고 집으로 왔다. 오빠 친구에게 댕기머리보고 반했다하니 이 머리가지고 가시라며 머리 꼬랑지를 내밀었다.
오빠친구는 깜짝 놀라며 아침밥도 안 먹고 자기 집으로가 버렸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큰 아버지와 그 사람에게는 반항심처럼 보였고 나는 머리 때문에 힘들어서 자르려고 큰 결심을 하였다. 댕기머리 때문에 우리 집에는 무서운 태풍이 불어왔다. 큰 아버지의 노여움으로 호령 하시는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산자락이 쩌렁 쩌렁 온 동네로 울려 퍼지고 큰 아버지의 손은 벌벌 떨며 이게 무슨 일인가 하시며 애꿎은 아버지한데 야단치신다.
아버지도 놀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바라만 보신다. 어른들의 노여움으로 온 집안에는 먹구름으로 침묵이 흐른다. 큰 아버지가 가장 예뻐하시며 기밀답다 하시며 하루에도 몇 번씩 쓰다듬어 주시는 큰아버지께 실망을 준 것이 제일 죄송하였고 부모님에게는 미안하였지만 나는 얼마나 홀가분한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워 졌다.
족두리 쓴 날
족두리란 부부의 삶으로 평생 해로 하라는 끈이었다. 백년의 가약임을 본인의 의사란 아랑곳없이 큰아버지 마음대로 혼자 가서 사주를 써오셨다. 큰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큰아버지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신랑 집에 가서 사주를 받아오셨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한 밤에 대문이 열리며, 큰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시기에 왜 그러시나 하고 달려 나가보았다.
“새 상 가져오거라. 네 사주를 써왔다.” 하시는 큰아버지 말씀에 나는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 화를 참지 못하고 큰아버지께 소리쳤다. 큰아버지가 시집가세요? 그렇게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와 외갓집으로 도망을 쳤다. 큰아버지의 이유는 다 큰 처자 집에 낯선 사내가 드나드는 것이 망신스럽다. 하여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집안 망신시킬 참이냐! 망신스러운 일이 생기기 전에 오라비 두고 역혼으로 약혼이라도 시켜야겠다.큰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에게 호통을 치시며 가문에 법도를 어긴다며 네가 처음으로 집안 내력을 깼다며 역혼이라니 하시며 사주일 부터 한 달 전에 결혼 날짜를 받아 오셨다. 어머니는 중대사인 혼사를 밥하듯 서두르는 큰아버지가 못마땅하시며 혼수며, 이부자리 꿰맬 생각에 걱정이 태산이시며 어머니 마음이 조급해지셨다.
큰아버지의 가문과 법도란 온 가족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 억압적인 결혼이 법도인가? 가풍인가? 둘이 좋아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은 오빠 군대 친구로 오빠가 소식을 우리 집에 전해달라는 부탁으로 오는 사람을 집안 망신시킨다며 나를 꼼짝도 못 하게 했다.
이 사람은 우리 집에는 오빠의 부탁은 핑계이고 나 때문에 집에 온다고 온 동네 소문이 파다해졌다. 내가 죽어도 결혼 안 한다고 하니 시어머니 되실 분이 집까지 찾아오셨다. 내가 청춘으로 혼자 키운 내 자식 보고 살아온 자식을 네가 죽일 거냐! 넌 다른 데로 시집 못 간다.
시어머니 될 분은 난리를 치고, 오빠 친구 군인은 한 달이 멀다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군대를 제대하던 날도 오빠와 함께 우리 집으로 먼저 온 이 사람은 삼 년씩 다녀도 내 손 한번 못 잡아봤지만 끝내 나에게 족두리를 씌우며 혼례를 올리게 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상심하는 나를 안쓰러워하시며 말씀하셨다. 너 하나 세상에 아닌 셈 치고 살면 양쪽 집안이 다 편하겠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오늘이 족두리 쓰는 날이다. 빨강 치마에 노랑 저고리 입고 원삼에 족두리 씌우며 나에게 분단으로 연지 곤지 찍던 올케언니의 눈가에도 눈물이 촉촉하게 흐른다. 아가씨 참 예쁘고 고우세요. 아가씨는 성품이 고아서 사랑받고 복 받을 거예요. 하시며 눈물을 닦는다.
큰아버지께서는 족두리 쓰는 오늘부터 어른이 되고 이제는 그 집 사람으로 사는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제 앞으로는 그 집 법도를 따르며 살고, 죽어도 이제 너는 그 집 귀신이 되는 거야 하시며 죽더라도 그 집 마당 안에서 죽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부모님의 말씀에 연지곤지 분단장한 내 얼굴은 눈물로 얼룩지고 아버지 어머니 눈가에도 눈물이 흐른다.
어른들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신랑이 안 온다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함 사세요! 소리가 들려온다. “함 사세요!” 화가 난 큰아버지는 함진아비의 멱살을 잡으시며 호통을 치셨다. 백 년 지 대사인 혼례 시간을 어긴다면 무엇 때문에 좋은 날, 좋은 시를 받느냐! 큰아버지의 고함소리는 산자락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온 동네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그때 신랑 가마가 들어왔다. 신랑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박장대소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심술궂은 오빠들이 박하 기름과 솥 밑의 검정으로 신랑 얼굴에 문대고 재를 한 삼태기를 내려 씌워 신랑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어떡해야 좋아! 세숫대야에 물 좀 떠와라 어머니의 걱정에도 큰아버지는 시간이 없다고 어서 혼례부터 올리라고 호통을 치셨다.
오빠들의 심술은 얼굴뿐만 아니었다. 구두 속에는 밤송이를 넣고 초리 청 본처에는 도토리를 깔아 신랑이 들어설 때 넘어지도록 했다. 화가 난 신랑은 자리를 발로 걷어차 내고 초리 청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고 한다.
혼례를 올리고 나서 사진을 찍기 전 신랑이 아무리 세수를 해도 검정이 닦이지 않아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결혼사진을 보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신랑은 드센 동네라며 손이 얼굴을 문지르는데 눈을 뜰 수도 없고 앞이 보이지 않아서 시간이 지체된 거라고 했다. 지금 같으면 콜드크림으로 닦으면 되는데, 그때는 콜드크림도 모르고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안 지워져서 고생을 했다.
저녁이 되니 큰아버지 사촌, 육촌 오빠들은 신방을 지켜야 한다며 문이라는 문은 손가락으로 쭉쭉 찢어 내리며 불 끄라고 소리치고 온 집을 돌며 밤을 지새니 남편은 첫날밤이라고 각시 손도 못 잡았다고 했다.
예전 우리 동네에서는 신혼 첫날밤에 다른 사람이 신방의 지붕 처마 밑에서 오줌을 싸면 살이 된다며 살을 예방하기 위해 신방을 철저히 지키곤 했다.
그런 옛날 잔치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몇 날 며칠씩 모여 잔치를 치르곤 했다. 요즈음에는 시국이 변하고 문명이 발달하여 하루의 예식으로 백년가약을 맺지만 한 편으로 생각하면 옛날 우리 아름다운 문화와 우리 미풍이 사라져 가는 아쉬움도 있다.
옛날 어른들처럼 공부보다 도덕과 예절이 기본이 되어야 했다. 한번 맺은 인연은 평생을 해로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삶을 살았다.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의 가사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했다.
옛날 법도를 지키려 울며 살아온 세월이 오십 년을 훌쩍 넘기며 부모님께 불효하지 않으려 참고 살아온 나의 삶에 가슴이 뿌듯 해오기도 한다.
남편의 끈질긴 인내심으로 삼 년을 쫓아다니며 나의 모진 박대에도 굽히지 않고 결국 자기의 사람으로 족두리를 씌운 이 남편이 대단하다. 한 여자 때문에 매일 쓴 손 편지는 내가 아니고 아버지와 삼 년을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내가 아예 편지를 보지 않는다는 걸. 아시고 딸이 쓴 것처럼 답장을 하신 아버지 바쁘실 때면 사촌 남동생 편에 부탁하여 답장을 꼭 하시며 군대 삼 년 내내 딸 대신 사위와 편지를 주고받으신 우리 아버지와 남편이 참 대단하셨다.
결혼하고 나니 아버지는 사위 앞에서 사실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 아버지와 남편은 참 각별하였다.
<가제 >
* 2부/ 슬픈 이별의 아픔
시어머님 의 암 수술
오래전 이야기다. 결혼 한지 육년 되는 해이다. 어머님은 속이 아프다 하시며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하시어 소화제로 노루모산 이란 약을 잡수시며 어머님과 남편은 식사만 하고 나면 때마다 노루모산 약을 복용하시었다.
시집 와보니 다락에는 약 깡통이 가득하였다. 병원은 가볼 생각도 안 하시고 약만 먹고 계셨다. 대수롭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약만 먹다 보니 더 아파서 그해 봄에 청주 남궁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였다. 위암 초기 같다고 하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큰 걱정이 되었다. 집안 형편도 어렵고 작은 시누이와 시동생은 아직 공부를 해야 하고 남편 혼자 벌이로는 살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도 수술을 해야 하기에 빚이라도 내서 수술을 하자고 날짜를 받아 수술하기로 예약을 하였다. 그때 나는 둘째 아기를 임신 중이고 큰 시누이도 좋지 않은 계로운일로 신경을 많이 쓸 때라 온 집안이 엉망이었다.
집안 우환으로 온 가족은 근심이 많았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몸 아픈 어머님은 몸이 아프시니 억지소리도 하시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임신으로 내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다. 칼슘부족과 스트레스까지 동반하여 견디기 너무 힘들어 멀쩡하던 이가 솟아올라 밥도 못 먹고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임신한 몸으로 무허가 치과로 가서 하루에 이를 세 개씩 뽑고 퉁퉁 부은 몸으로 먹지도 못한다. 임신한 사람이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었다.
어머님의 수술 날이라 시골에서 청주병원으로 나와 어머님은 수술실로 들어가시고 큰아들도 어머님이 제일 의지해오며 살림을 다 맡기는 큰 시누이도 나가라고 하시며 큰 며느리를 부른다고 하신다기에 얼굴은 퉁퉁 부은 얼굴로 어머님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때 어머님은 내 두 손을 꼭 잡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애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거듭 세 번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한테 너무 모질게 하여 벌을 받나 보다, 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는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꼭꼭 싸서 간직한 돈을 건네주시며 당부를 하신다. 이 돈은 몇 푼 안 되지만 꼭 필요할 때 보태 쓰라며 몇 천원도 안 되는 돈이라고 하시고, 또 다른 종이에 싼 것은 이것은 머리카락이야 하시며 작은딸이 제비추리가 있는데 안 좋다 하니 예방으로 스님이 탁발 오거든 시주 줄 때 섞어서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은 큰아들 이야기이다. ‘그놈이 마음은 착한데 말투가 무뚝뚝해서 내뱉는 말이 천둥 치는 소리를 하여도 네가 참고 살아라, 하시며 신신당부를 하신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어머님이 내가 잘못했다는 그 말씀에 내 가슴에 응어리와 상처가 치유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하며 살겠다. 는 약속을 하며 어머님은 수술실로 들어가시고 나는 밖으로 나와 복바침을 참지 못해 얼마나 울었는지 남편과 큰 시누이는 나를 달래며 엄마가 또 뭐라고 하였기에 이러느냐고 달래주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작은 시누이 머리카락은 스님이 탁발하러 왔을 때 쌀 시주를 주면서 어머님이 이러이러하라는데요? 하며 차마 쌀에 머리카락은 못 섞어 들이구요. 하며 스님이 뒤돌아서면 머리를 태우려고요 하였다. 스님은 참 좋은 생각이라며 그러시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시어머님께 거짓말을 하였다. 어머님이 쌀에 섞어주었니? 하실 때 얼굴이 달아오르며 “예” 라고 거짓 대답을 하였다. 시어머니께는 죄송하였으나 나는 차마 쌀에 석지를 못하였다. 어머님도제마음을 아셨겠지요. 나는 둘째 아기 나려고 친정집에 갔다. 아기 낳으려 할 때 기형아는 아닐까 걱정이 된다. 임신 중에 진통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진통을 겪으며 아기 낳고 아기의 손과 발부터 살펴보고 울음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숨을 쉬며 작고 미숙했지만, 정상으로 태어나서 감사하였다. 아기 낳은 지 삼 일 만에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나는 아기 낳은 삼일 되는 날 산모의 몸으로 이십 리를 걸어와 어머님 초상 치러야 하였기에 몸조리도 못 하고 그때부터 나는 가정의 안주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때부터 나의 삶이란 몸과 마음의 아픔이란 말로도 글로도 하기가 싫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남편은 농사지어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며 객지로 나가고 작은 시누이 고등학교 졸업과 시동생은 중학교 다니고 큰 시누이와 둘이 아들딸 되라고 농사짓고 누에 쳐가며 사는 삶이 되었다.
우리 시어머님 돌아가시고 농사도 누에 농사 최고로 잘 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며 아이들도 잘 크며 공부도 잘하여 집안이 편하였다. 이듬해 큰 시누도 결혼시키고 나니 혼자 농사하랴 누에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지만 나는 시어머님과의 약속대로 최선을 다하며 작은시누이도 결혼 시키고 시동생까지 결혼 시키고 살다보니 내 자식대학에 결혼에 눈코 뜰세. 없이 열심히 살아온 보람은 어머니 자식 사 남매도 결혼 하여 잘 살고 어린 내 자식들 키우며 사는 나의 시골 삶의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어머니 노자 돈
어머니 사랑은 하늘 같다고 바다보다 넓다는 노랫말도 있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고 끝도 없더란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 되어보아도 어머니의 심증을 백분의 일이나 알까. 내 자식 아파하면 내 간잎이 녹아드는데. 우리 어머니도 그런 마음으로 기른 자식이 건만 어머니도 나처럼 이런 마음으로 키워 쓰련만 어찌하여 부모보다 자식이 소중하고 애착이 가는 걸까. 그것은 동물의 본능이라고 쉽게 하는 소리였다. 옛날에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사랑은 내리 사랑이지 치사랑은 없단 말씀을 하시어도 그 말의 뜻도 모르고 어머니한데 따스한 말 한마디 못해준 아쉬움만이 내 가슴을 울린다.
어머니 가시고 나니 어머니가 소중해지고 보고 싶은데 이미 때는 늦으리라 이미 가신 어머니를 부른들 대답을 하랴 내가 서러워 울은 들 달래 줄 어머니는 하늘로 가시고 없는데 봄이 되니 새싹이 돋아 오르듯 어머니가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봄이면 미나리 사들고 오셔서 부침개를 해달라며 네가 해준 부침개가 제일 맛나다며 막걸리 한잔하시며 하신 말씀이 내 귀전에 맴돌고 어머니가 요즈음 너무 보고 싶다.
그때 하신 어머니의 말씀은 유언이셨다. 마지막으로 입고 가실 수의 옷 이야기는 벼는 싫다 인견 아니면 한지로 해 달라고 하시고 노잣돈 이야기를 하시며 속바지에 주머니를 양쪽에 달아서 한쪽에 십만 원씩 넣어 달라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은 한쪽 돈 십 만원은 아버지 만나 준다고 하시며 그때는 돈이 없어 아버지 가실 때 노잣돈을 못 넣어준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였다. 꼭 해달라며 당부를 하신 어머니 말씀은 유원이셨다.
나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 어머니가 원하시는 데로 수의를 맞추며 속바지에 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바느질하시는 그분은 껄껄 웃으시고 수의에는 주머니를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어머니 유언이시니 주머니를 꼭 달아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며 도포는 어머니 회갑 때 내가 명주로 해준 것으로 하고 속바지에 주머니는 꼭 달아 달라며 다시 한 번 더 부탁을 하였다. 아주머니 말씀은 달아주는 것은 어렵지가 않으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는 건대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진짜로 돈을 넣어주려고요. 한다. “네 우리 어머니 유언인데요. 해드려야지요!” 아주머니의 말씀이 “아아 그러면 육거리에 불교용품 파는 가게 가면 가짜 돈이 있데요.” 저승 갈대 주는 돈이라 한다. “그런 돈이 따로 있나요?” 하며 물어보았다.
나는 남편한테 가짜 돈도 될까요. 하고 상의를 하였다. 남편은 안 주면 말지 어찌 가짜 돈을 주나 한다. 어머니의 말씀이 염할 때는 큰딸이 지켜야 한다. 하시며 염하는 사람이 그 돈 못 빼가게 꼭 지키라는 당부까지 하신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꼭 지켜볼게요. 하였다.
어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셨다. 우리 어머니는 구십 사세에 돌아가셨다. 자손들 다 보고 증 손주 물까지 받아 드시고, 마지막 밤은 딸 셋이 지켜주고 삼일 만에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 손 꼭 잡고 마지막 임종을 하신 어머니시다. 나는 어머니 유언을 온 가족들에게 알렸다. 온가족에게 노자를 달라고 하여 손주, 손녀까지 만 원씩 받아 어머니 주머니를 채워 들렸다.
어머니가 당부했던 말씀이 생각나 염하는 아저씨한테 물어보았다. 아저씨 우리 어머니 노잣돈은 어떻게 하셨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여기에 빼놓았는데요.” 나는 깜짝 놀라며 “아저씨, 우리 어머니 유언이라 온가족들이 모은 노자예요. 아저씨 돈은 어머니 주머니에 넣어주세요.” 부탁을 하면서 “아저씨 목욕비는 제가 잘 챙겨서 드릴게요.” 하였다.
아저씨는 다시 매듭을 풀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노잣돈을 넣어 주시며 “할머니는 참 부자시네요. 자식들도 효자시고 자손들이 한 사람도 앞서간 사람도 없고 참 복도 많은 할머니 잘 사신 할머니시네요 한다. 우리 어머니의 고생은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지만 고우신 마음 때문에 늦 팔
자는 좋으신 분이시다. 어머님이 당부한 데로 노잣돈을 넣어드렸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노잣돈을 들려는데 부족하시지는 않으신가요. 아버지를 만나 노잣돈은 전해주셨는지요? 아버지가 어머니 잘 살고 왔다고 칭찬은 하시던가요. 사랑하는 어머니, 천국으로 가시는 그 길도 꽃길 되어 편안히 행복하시길 발원합니다.
<가제>
3부 / 어려움을 이겨내던 눈물
도둑 쫓던 밤
삼십 대 새댁 시절의 삶은 큰아들 8살 큰딸 4살 때였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남편은 객지로 돈 벌러 가시고 어린아이들하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 때이다. 가을걷이 다 하고 초겨울이었다. 그날따라 첫눈으로 눈보라 몰아치는 바람결은 문풍지를 흔들고 문풍 지우는 소리에 스산한 겨울밤이었다.
세찬 바람 소리에 객지로 간 남편 생각에 잠도 오질 않는다. 언 발 굴러가며 고생하는 남편은 밥은 제때 먹는지 잠은 따스한 방에서 자는지 오만 걱정이 다 된다. 참새들도 밤이 되니 자기 집 찾아 지붕 처마 속으로 들어가는데 처자식 두고 간 남편인들 단잠을 잘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온다.
어린 남매는 곤한 잠자리에 들어 새근새근 잘 잔다. 재잘거리던 참새들도 단잠을 자건만 저 바람은 왜 아니 자고 문풍지 우는소리에 잠 못 드는 이 마음을 하늘이나 알까. 남편이 집에 있다면 나도 단잠을 자겠지 우리 마을에는 집집마다 울도 담도 없는 마을이었다. 자자 일촌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오늘은 첫눈이 내리느라 스산한 바람 소리가 문고리마저 덜컹거리며 흔들어댄다. 그런데 쿵 하는 그 소리와 문고리 잡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그러는가 가만히 문틈 사이로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안에서 문을 잠근다. 하지만 문고리에 수저 하나 걸어 놓았다.
누구네 집이든 일상처럼 문 잠금은 수저가 고작이다. 나는 그때 헛기침을 하며 곤하게 잠든 큰아들을 흔들고 꼬집었다. 아이가 울자 큰소리로 왜 안 자 아빠 깨라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혼잣말로 주고받는다. 그때 뒷문에서 서성이던 도둑은 앞문 쪽으로 돌아와 대청마루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동시에 두 아이를 꼬집어 울리고 불을 켜며 소리쳤다. 그때 대청마루에서 후다닥 뛰며 나간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안도하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날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아서야 나가보았다. 도둑놈의 발자국이라 하더니 대청마루에는 커다란 발자국으로 집을 앞뒤로 돌은 자국이 남아있다. 얼마나 섬뜩한지 옆집 형님한테 간밤에 도둑이 왔다고 말을 하였다. 형님이 하시는 말이 그 집에 무얼 훔치러 왔겠니, 사람 도둑이지 하신다. 나는 놀라며 형님! 사람 도둑이 뭐예요? 라고 물었다. 형님 말씀은 예쁘고 젊은 게 혼자 있는 걸 알고 온 게지 하시는데. 어이가 없고 서러움에 복받치는 눈물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
형님은 나를 위로는 못 해줄망정 젊은 것이 혼자 사는 것이 무슨 죄인가 그때부터 남편 신발을 뜨락에 나란히 놓고 집 앞뒤로 밖에다 전구를 달고 방 안에서 스위치를 누를 수 있게 장치를 하였다. 그다음부터는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나도 불을 켜고 방안에는 자물통으로 단단히 잠그고 살았다. 그때에 그 도둑놈 때문에 우리 큰아들은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아서인지 가장처럼 문단속도 하고 엄마 도둑놈 오면 나를 깨우면 내가 몽둥이로 때려준다며 엄마를 안심시키며 살던 생각이 난다.
큰아들은 그때부터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어른처럼 살아온 삶을 내 책 속에 아들이 싫어 놓은 글 속에 사연을 보니 가슴이 메어온다. 사 남매가 한편씩 실은 글을 보며 큰아들이 도둑 때문에 겪은 이야기를 쓴 글을 보고 마음이 찡해왔다. 엄마 왜 도둑놈 이 벽돌을 우리 집에다 던지고 그랬을까? 나쁜 놈이지! 어릴 때 한 말이 생생히 떠오른다며 엄마! 도둑놈 때문에 옆집 아줌마를 불러와 함께 자는 거야 했다.
남편이 객지 생활하며 살다 보니 억울한 소리며 마음 아픈 소리도 들으며 살았다. 청주로 이사 나와 살 때였다. 저 여자는 첩이라며 이웃에서 수군수군 했다며 이웃 사람들은 나를 첩으로 알았을 때 큰애하고 막내아들하고 나이 차이가 12년 차이라 위로 남매는 전처의 자식이고 어린 남매는 저 여자가 낳았다 라고도 하고 이따금 남편이 오면 달리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수모도 감내하며 살아온 우리의 삶은 젊은 청춘을 서러운 아픔을 견디며 오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서럽게 살아온 삶은 옛이야기로 흘러갔고 어느새 우리의 인생은 지려는 석양처럼 저물어 간다. 지난 세월 잠깐의 짧은 삶인 것을 그리도 외롭고 힘들고 고단한 삶으로 여기까지 잘도 견디며 살아왔다. 지금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자식들도 내 옆을 잘 지켜주니 편하고 든든하게 오늘을 살고 있다.
제주 약 천사
제주하면 참 좋은 고장 누구나 한번 가고 싶다 생각하는 제주이다. 옛날에는 신혼여행지로 손꼽히는 제주였다. 지금은 신혼여행을 해외여행으로 많이 가지만 옛날 그때는 지금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주라면 최고 좋은 여행지로 생각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포동 약천사 혜주 혜인스님의 큰 불사로 창건하시어 지금에 훌륭한 약 천사에 큰 법당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계종 극락 도량 약천사를 불기 2542년 11월 20일 내 나이 53 세 때 혜인 스님을 친견하였다. 스님 법문을 경청하고 나의 어둡고 얼룩진 마음은 다소 편한 마음으로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스님 법문은 내 마음에 와닿는다.
스님의 말씀 지나간 삶이 아픔이었다면 과거일 뿐인데! 왜 잡고 매달려 본인의 마음에 묻어 놓고 사는가! 하시며 전생의 업이 있다 해도 그만치 겪음으로 업장이 소멸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새봄으로 새잎으로 꽃으로 피워야 하지요?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힘이 들어 지치고 아파 울 때는 부처님을 찾아갔다. 내 삶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는 죽고 싶고 자주 죽음의 늪으로만 빠져갈 때 부처님을 의지하고 매달려 보라고 하시는 스님 법문과 아이들을 보라고 하시며 가슴에 와닿는 법문을 하시고 나를 부처님 앞으로 나설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 후로 열심히 부처님한테 매달리며 살고 나쁜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오르지 자식과 부처님을 의지하며 살기 시작하고 불교 대학도 수료하고 모든 봉사도 하고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점점 내 생활은 밝은 삶으로 살기 시작하였다.
스님 법문에 마음을 여는 그 순간 외소 하신 몸에서 법문의 음성 소리는 산자락이 울려 메아리로 가슴에 와닿는다. 그 강인하신 큰 스님도 모친의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았다. 부모 와 자식이란 천륜임은 어쩔 수 없는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의 삶이란 영암 스님의 짚시인생이란 노래가사 말처럼 모든 인년 무어버리고 그 한 몸 구름에 싣고 파란 하늘 지붕 삼아 구름에 달려가듯이 이곳저곳 헤매어 제주까지 오시나 보다. 약 천사 큰 불사하실 때 얼마나 힘이 들어 쓸까? 지친 몸을 끌어안고 살아오신 스님의 삶의 흔적이 여기 제주 약 천사에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 약 천사는 세계적 관광지로 유명하여 중국 관광객 손님은 기본 코스로 약 천사는 꼭 들린다고 한다. 약 천사 앞바다에 비릿한 바다 냄새에 봄 향기 가득하고,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제주 서귀포 약 천사가 나를 부른다.
산수유 꽃 만발한 봄날 남편의 생일 여행 차 약 천사에서 기도 올리고 싶어 나는 약 천사 스님께 전화를 하며 숙소를 부탁하였다. 남편 생일 기도를 약 천사에서 올려달라고 큰스님께 부탁하였다.
오래전 인연으로 혜인스님 어머님 사십구재에 우리 절 용화 합창 단원들이 제주까지 가서 동참을 하였다. 그 세월이 벌써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오래전 추억처럼 아련해진다. 요 몇 년 전에 남편과 단둘이 생일 기도를 제주 약 천사에서 올린 생각을 하며 요즈음에 운동도, 글공부도 방학을 하였는데 제주 약 천사나 갈까 싶은데. 왠지 가면 오히려 허전하고 울적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혜인 큰스님도 돌아가시고 친절하신 공양주도 집으로 가고 왠지 낯설고 허전할 것 같아 망설여진다. 어디론가 훌쩍 가고 싶은데 이러 타하게 마음 가는 곳을 못 찾아 마음만 심란하다. 혜인 큰 스님이 단양 광덕서 불사할 때만 가 보았는데 광덕사를 가볼까. 하다가도 큰스님이 머무르던 그곳에 어느 스님이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무엇 때문일까. 결정을 못 하는 나는 자신감도 용기도 없다. 나이탓이련가 전에는 내 집처럼 언제고 가고 싶으면 전화 한 통화로 가곤 하여는데. 지금은 부모가 없는 친정집처럼 갈까 말까 망설여진다.
약천사, 절로 가는 길가의 귤 나무에는 귤이 많이 달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법당이며 구석구석 이곳저곳 한 바퀴 돌며 산책하던 길로 내려오던 길에 큰 스님과 차 마시며 하시던 스님 말씀도 생각난다. 이제는 모두 지난 추억일 뿐이다.
포항 농산 스님 큰 행사로 포항까지 우리 부부는 새벽길을 달려 서해전 불우이웃 행사할 때 스님들 아침 공양을 해야 했기에 우리는 새벽 4시에 청주에서 대구 시민회관으로 달려가던 추억도 생각난다. 혜인 큰스님 말씀이 추억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도 지난 추억을 생각하네요. 제주 약 천사 앞바다의 시원한 바다의 내음이 나를 오라고 유혹을 하는데 망설여진다. 남편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 말을 하라고 했다. 어디고 모신다며 농담처럼 말한다. 제주 약천사 혜인스님이 하신 법문이 생각난다. 그리고 농산 스님의 대작 글을 선물로 받아 우리 거실과 안방에는 스님 글이 걸려있다.
그 스님은 글을 써서 서울. 대구. 포항에서. 글 전시회를 하시어 불우이웃 청소년들 선금으로 돌보실 때 우리 부부도 동참하면서 참 훌륭하신 분이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욕심 없는 삶, 오로지 봉사하시는 스님의 참뜻을 알면서 우리는 스님을 존경하며 자주 찾아가던 작은 암자 포항 문수암 농산 스님은 언제부터인지 소식도 없이 홀연히 떠나셨다. 포항 효성사에도 안 계시고 외국에 봉사 가시었단 말도 있고 이곳저곳 연락을 해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삶이 스님의 삶인가 보다.
<假題>
4부/ 내 인생의 열매
* 내 인생의 열매에 대한 서론 쓰기 - 삽입
내 삶이 고되고 힘이들어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 다라는 옛말처럼 나의삶의 열매들이 예쁘게 알알이 잘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의고생은 헛되지 않음 이였다. 내 소중한 나의 꽃 사남매들이 알알이 단단한 열매로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참고 살아온 보람이자 희망으로 노후를 보낼 수 있어 감사하며 잘살아간다.
큰아들
우리 부부의 인연으로 첫째 큰아들이 탄생하여 참 행복했다. 세상을 다 어느 것처럼 기쁘나 어머님 앞에서 내색조차 못하고 마음대로 안아 보지 못하였다. 우리의 예쁜 꽃, 보고 또 바라보아도 눈을 떼지 못하는데 이런 큰아들은 엄마 품보다 할머니 품에서 자라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 아들 백일 날, 동네 떡 잔치하며 행복했던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아들 나이는 오십이란다. 큰아들 군인 보내고 참 많이도 울었는데, 벌써 큰 손주가 군대를 갔다. 남편의 객지 생활로 큰 아들을 의지하며 살아온 오십 년 속의 삶은 좋고 기쁜 날도 아파서 울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효심이 지극한 큰며느리, 큰 아들 항상 고맙고 사랑한다. 큰 아들 가정에 항상 밝은 빛으로 행복함을 비추어 주시길 기도한다.
큰 딸
아픈 손가락인 큰 딸아이를 가졌을 때는 기쁘다고 내색조차 못하였다. 집안의 우환으로 임신이란 말도 못 하고 지냈다. 시어머님의 위암으로 수술 날을 받으며 내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다. 칼슘 부족과 스트레스까지 동반하여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멀쩡하던 이빨이 다 솟아올라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힘들었다. 견디다 못해 무허가 치과로 가서 하루에 이를 세 개나 뽑고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으니 배속에 아가는 얼마나 고통을 겪었으랴! 큰 딸 한데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하였다. 나의 걱정은 기형아로 태어나면 어쩌나 노심초사로 혼자 고민하였다. 작고 미숙했지만 정상으로 태어나서 감사하였다. 너와 나의 복이려니 하며 살자 하면서도 항상 아픈 손가락이다. 큰딸은 착한 마음으로 나라 밥 먹고 잘 살며 예쁜 딸, 아들 낳고 예쁘게 잘 사는 모습에 감사하고 고맙다. 큰 딸네 온 가족의 행복과 사랑으로 밝은 태양처럼 비추길 바라며 기도한다.
작은딸
복 많은 작은딸 임신하며 집안일이 잘 풀리며 가정에는 어려움은 없었는데 아기가 뱃속에서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여 엄마의 고통이 많았다. 세상에 태어나서도 한 고집으로 제일 힘들게 키운 작은딸 예쁘게 잘 성장하여 예쁜 가정 이루며 예쁜 딸, 아들 나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 고집과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으면 어떨까! 큰 출세 돈도 좋은데. 네 몸이 우선임을 알고 잘살기 바란다. 공무원으로 최고의 상도 받았잖아 출세 무엇이 출세인가 인간답게 살면 되지 어느 부모가 자식 출세 마다할까? 내 자식이 아프면 부모 마음은 더 아프단다. 네 자식이 아플 때 네 마음이 편안하더냐 부디 건강한 몸으로 예쁜 네 자식들 잘 키우길 바란다.
항상 자식 위해 기도하는 부모 마음은 변함이 없단다. 부디 건강하고 밝고 좋은 날이 되도록 기도하련다.
막내아들
늦둥이 막내아들 내 책 속에 이런 글을 올렸지요. 늘 말썽만 피우던 철부지 막내아들이 이제 번듯한 직장도 가지게 되었고 상냥하고 애교 많은 막내며느리도 생겼으니까요. 예쁜 손녀딸도 태어났지요.
- 어머니. 한 해가 지날 때마다 저는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어머니께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더 보답하고. 이 아들이 성공하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더 잘 해드려야 하는데. 하늘에서 허락한 시간이 언제 올지 몰라 서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어머니 제발 건강하게 오래오래 저희 곁에 있어주세요. 자주 찾아뵙고. 좋은데도 많이 모시고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릴게요. 우리 햇살이 커가는 모습도 보시고 우리 햇살이가 할머니 정을 느끼고 자랄 수 있도록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어머니 사랑해요.-
이 글의 구절을 내 책 속에 실었지요. 참 애태우던 막내아들 고맙고 사랑한다. 예쁜 가정 잘 꾸려가길 엄마는 두 손 모아 기도하련다.
내 자식에게 남기고픈 말
내 자식 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싶다.너희들은 비록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지금처럼 풍족하지 못한 삶으로 자라지만 사랑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어미 마음은 바른 정신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책임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사라주길 빌고 또 빌며 만은 사람에게 꽃으로 살아라가던 엄마의 기도였다.(문장 호흡을 ??) 그래도 엄마의 기도가 헤되지 안 토록 노력하는 너의 들보며 내 삶은 행복하단다. 나는 인복이 많으니 예쁘고 고은 며느리 둘을 보며 예절도 바르고 손주 손녀도 잘 키우며 예쁘게 사는 모습을 잘 랑으로 말 할 수 있어 고맙다. 사위 둘을 보며 미 듬직하고 예절바른 가정에서큰 며느리와 사위를 보며 나는 인복으로 살아간다. 너의 들이 부모를 행복하게 해주어서 고맙다.
부모로서 방한 칸도 말련해주지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은 글로도 말로도 한 번도 못했지만 그래도 불평불만 없이 사는 너의 들에 삶은 너의 들이 더 잘 아르리라는 생각으로 부모의 심정을 너의 들도 부모 됨으로 알 것이라 생각하며 우리자식 사남매 들은 돈도 명에도 다가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행복을 차자 살아 쓰면 한다.
너의 외삼촌들처럼 의리와 도덕을 삶의 원칙으로 알며 살아 씀 한다. 부모가 죽고 나면 얼마가 남을지 모자라지는 모르지만 적은 돈으로 다투지 말고 지금처럼 너의 들 힘으로 살며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외삼촌들처럼 의리를 지키는 형제로 살아간다면 어미도 저성에서도 응원 할 것이다.
첫댓글 교수님 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