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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축복사역(24) / “여유로움이 축복입니다!”
+ 본 문 : 창 세 기 16장 1절 - 6절 (구약성경 18쪽)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멘!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의 가정과 생업, 사랑하는 모든 자녀 손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옆의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기도한 대로 됩니다.” “축복한 대로 됩니다.”
특별한 인사를 하나 더 나누겠습니다. / ‘저랑 친해지십시오. 나중에 제 덕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피면서 깨닫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라.' 는 것입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진리입니다. 여러분! 차를 운전할 때도 시간 약속 때문에 바쁘다 보면, 악세레타를 밟아 속도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급하면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뛰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쁠수록 천천히 가라.' 이건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앞 주일 낮 시간에 드린 말씀이 무엇입니까? “역설적인 신앙으로 복을 받으라!” 였습니다.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라.' 는 말 역시, 진리가 들어 있는 역설적인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가끔 누군가하고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까지 가야 하는데, 차가 밀립니다. 그러면 지름길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안다는 지름길로 간다고 갔는데, 좌회전이 안 되거나 일방통로여서 헤멜 때가 있습니다.
결국 빨리 가려다가 오히려 더 시간이 많이 걸려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상대방에게 황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적도 있습니다. 해남 촌놈이 서울 가서 전철을 타려고 급히 뛰어가서 탔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뛴다고 빨리 가는 게 아닙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바쁠수록 천천히 가라.' 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가 또 다른 역설적인 진리를 만들어 냅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오히려 빨리 가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서두르는 것입니다. 조급증이 있습니다. 느린 것을 못 참습니다.
무슨 일이든 빨리 빨리합니다. 사탕을 먹어도 입 안에서 천천히 녹여 먹지를 않고 이빨로 깨물어 씹어 먹습니다.
술을 마셔도 한 방에 취하는 폭탄주를 만들어 마십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해도 금방 나와야 합니다.
자기보다 늦게 온 사람의 음식이 먼저 나오면 참지를 못합니다. 그리고서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왜? 내가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똑같은 음식 주문했는데, 저 사람 먼저 주느냐?” 고 삿대질을 하며 야단칩니다.
그뿐입니까?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어도, 커피가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컵을 끄집어내다가 화상 입습니다.
중태에 빠진 어느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중태에 빠진 원인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시간에 맞추어 정해진 양을 먹은 것이 아니라, 미리 며칠 분을 단번에 먹었답니다.
그랬더니 그게 약이 독이 되어 중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아니 서두를게 따로 있지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분도 있습니다. 실화입니다. 어떤 분이 목이 너무 말라서 시원한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여니 소주병이 보입니다. 급한 마음으로 생각할 것도 없이 옳다구나 뚜껑을 열자마자 마셨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게 물이 아니라 강한 독성이 있는 식초를 만드는 원료인 빙초산이었습니다.
빙초산은 손에 닿으면 손이 그냥 타버립니다. 그만큼 강합니다. 그 독한 것을 마셨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길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죽었다가 깨어났습니다. 입 안과 목과 식도와 위가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마십시오.
창세기 15장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들을 너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 말씀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증거로 쪼갠 고기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게 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손도장 찍고, 손바닥 복사까지 한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성립된 약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은커녕 한 명의 자식도 생기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점점 많아져 갔습니다. 신체적으로 더 이상 자손을 둘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타겠습니까? 미치고 환장하죠.
약속이나 하지 말지, 새끼손가락 걸고, 손도장 찍고, 복사까지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집니다.
그러면서 돌발 상황으로 생긴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 창세기 16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전부 봉독했어야 하는데, 설교내용 중 반복되기 때문에 6절 말씀까지만 봉독을 했습니다.
어떻든 새끼손가락 걸고, 손도장 찍고, 복사까지 했는데,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집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의심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의심은 조급함으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그 조급함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자식 없어 고민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별로 안 좋은 말씀이라 함께 봉독하지 않고, 제가 대신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 "여보, 내 여종,
하갈을 씨받이로 해서 자식을 얻읍시다.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합니다." 하는 제안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이런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실언치 아니하시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 하시지 않습니다.
하박국 2장 3절 말씀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을 주신다.’ 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한 마음을 가지면서 생각이 흐려집니다.
남편 아브라함은 아직 자식을 낳을 희망이 있지만, 문제는 사라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신다고 했지, 자기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무슨 문제가 안 풀리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일지라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문제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꼭 붙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해지면 하갈이 보입니다. 믿음이 약해지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이용 대상으로 보입니다.
하갈이 종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씨받이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하갈을 남편과 동침케 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인 사라는 믿음이 약해져서 그렇다 치고, 남편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제안에 바로 응한 것을 보면, 그도 사라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남편 되시는 여러분께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딴 여자와 ‘동침하라.’ 고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편한 진실에 대한 대답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나는 내 아내 외에는 절대로 동침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거절하실 분, 손드실 필요 없습니다.
몇 분이 속으로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남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저도 남자입니다. 남자는 다 검은 동물입니다. 잉’ / 불편한 진실에 대한 대답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브라함!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통해서 자손이 하늘의 별 수와 같이 수없이 많아진다.” 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손바닥 문대서 복사까지 계속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왜요? 약속만 있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갈이 마음에도 없었는데, 사라의 제안을 듣고 조급하게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그 사람 말만 듣고 그렇게 했다가 실수했다." 고 핑계대지 마십시오.
그 사람 말만 듣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도 그 사람과 비슷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애정남 - 애매한 것을 정해 준 남자” 인 제가 확실히 정해 줍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딴 여자와,
‘동침하라.’ 고 해도 절대로 안 됩니다. 남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고 은근슬쩍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나는 술 안 마시려고 했는데, 옆 사람이 ‘잔만 받았다 놔!’ ‘입에 대는 시늉만 해’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셔버리고 말았다.” 고 핑계대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도 안 마셔야죠. 나는 그리스도인라고 해야죠.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하갈입니다. 권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이 마음에도 없었는데, 사라의 제안을 듣고 조급하게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검은 동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제안을 따라서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얻게 됩니다.
그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결정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사라 편에서 그렇게 합리화 할 수는 있겠지요. “자식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아내인 내 책임인 것 같고,
한 가문에 시집와서 대를 이을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당시 사회 풍습이,
다 그렇게 하는데요 뭐?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출산 가능성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이 안 주셨잖아요?
그래서 나를 통해서는 자식을 안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편에서도 이렇게 합리화 할 수는 있겠지요. “아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가정평안을 위해서!”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그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을 통해서 자손이 하늘의 별 수와 같이 수없이 많아진다.” 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손바닥 문대서 복사까지 계속 확인시켜 주셨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중에 더 큰 문제들을 만들고 말았잖아요.
어떤 문제들이 생겼습니까? 하갈이 임신하면서 사라를 멸시하면서부터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하갈이 기고만장 - 그래서 종인 자신의 신분을 생각지 못하고, 여주인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라가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씨받이로 쓰려고 했던 하갈이 안방마님 되려 합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방법이 처음엔 괜찮아 보이지만, 갈수록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문제가 커집니다.
그래서 사라와 하갈의 관계가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는 괜히 애꿎은 남편에게 화풀이를 해댑니다.
그러면서 이 갈등은 남편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갈등으로 번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건 다 아브라함 당신 책임” 이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태의 원인 제공은 사라 자신이 했습니다.
하갈과 동침하라고 한 것이 사라 자신의 아이디어였으면서도, 막상 문제가 터지니까 남편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사라는 자신의 잘못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하나님 앞에서 잘잘못을 가리자고 합니다.
일은 자기가 벌여놓고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사람이 급해지면 이성을 잃고 영적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감정과 말과 행동이 격해지고 맙니다.
이렇게 사라와 하갈의 갈등, 사라와 아브라함의 갈등은 14년 후,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으로 번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먼저 얻었지만, 14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를 통해서 한 아들이 주어집니다.
그 아들이 이삭입니다. 그래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심각한 갈등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비단 이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갈등은 민족적 싸움으로 지금까지 계속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사이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싸움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하였습니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분하고 원통했겠습니까? 하갈이 행한 일은 주인인 사라의 말을 들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태중에 아기를 가졌어도 종은 종입니다. 그래서 하갈이 선택한 길은 도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시에 종은 주인에게 절대로 항거할 수 없었으며, 종이 도망가면 누구에게 붙잡히든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도 종이었던 하갈이 과감하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집을 박차고 나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갈이 그렇게 과감한 행동을 취한 것은 그 마음에 아브라함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이 귀한 자기의 아이를 잉태한 나를 버리지는 아니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안고 집을 뛰쳐나가 기다리며 광야를 헤매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끝내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이 때 하갈의 마음은, 사라의 학대보다도 아브라함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이런 하갈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하갈을 보고 계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천하 만민의 아버지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상처입고 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하갈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상처입고 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도 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서 돌보시고,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약해지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나타나셔서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하갈의 갈 길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실 하갈은 용감하게 여주인 사라를 피해 집을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두렵습니다.
다 자기를 만나면 죽일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짐승의 밥이 될 수도 있고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하갈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갈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나, 직장이나, 가정으로부터 도망치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도망을 쳤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생각도 있고, 죽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다고 다 죽습니까?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긴 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삶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현실로부터 함부로 도망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도망쳐 나온 하갈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하갈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새로운 도피처가 아니라 사래의 학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을 도피하지 말라 하십니다.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거기에 해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학대하고 잘못해도 그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잘못하면 나 하나님이 손 볼 것이고 처리하리라 하십니다. 너는 그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라에게 순종하면, 너의 모든 삶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변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삶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다고 도망자처럼 사시는 분 계십니까?
“돌아오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혹 남편이 힘들게 해서 나오신 아내 없죠? 혹 아내가 힘들게 해서 집을 나오신 남편도 없으시죠? 돌아가세요.
집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남남처럼 살아가는 부부가 있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하나되야 합니다.
사역의 자리를 떠나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로, 주님의 교회 사역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돌아와서 온전히 순종하면, 놀라운 변화와 생각지도 못했던 회복과 엄청난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브라함에게도 있고, 사라에게도 있고, 하갈에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멘!
이 말씀에서 보면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과 ‘이스마엘’ 이라는 이름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는 뜻의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번성하는 축복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아멘!
이삭은 물론 이스마엘에게도,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6장 12절에 이스마엘과 그 후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이 말씀처럼 이스마엘 후손들은 들나귀처럼 고집이 세고 완고하며, 끈질기고 드센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웃과 불화할 것을 예언한 말씀처럼, 성경의 역사에서부터 근세와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민족은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투쟁의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번성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대단한 축복입니다. 부스러기라도 그 축복이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엄청나게 크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 한국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남한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북한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아랍도 사랑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넓고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사라의 무리수로 인해 문제가 생겼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문제의 불씨인 하갈은 물론,
그녀의 아들인 이스마엘에게도 엄청난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생긴 상황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이 부어집니다.
아무도 챙겨줄 수 없던 하갈 같은 인생도, 하나님은 친히 만나 주시고, 친히 챙겨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에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하갈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나타나 위로와 소망을 주시고,
인도해주신 그 하나님이, 세상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격려하고 인도해주십니다.
자세한 설명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집으로 돌아온 하갈을 사래는 더 이상 학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전과는 다른 겸손한 태도로 주인을 대했고, 사라의 마음 또한 하나님이 부드럽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학대받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여 돌아온 하갈을 하나님이 지켜주셨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무사히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사라의 조급함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물론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여, 약속의 자손을 만든다는 하나님의 뜻도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급함으로 인해 태어난, 이스마엘 자손들에게도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자, 그 뜻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생각해보면 모두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편법을 쓴 사래도 잘못했고,
종이면서도 아이를 가졌다고 함부로 주인을 멸시한 하갈도 잘못했고, 가장으로서 아브라함도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무엇엔가 쫒기듯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라.' 는 역설적인 진리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기도하시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정과 생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환경을,
돌아보시면서,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복을 주시지만, 조급함으로 실수한 사람에게도 사랑 베푸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가시는,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를 잘 되게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