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군 해평면 소재 벽진이씨 종당(宗堂)
경수당(敬收堂) 내의 "시조 벽진장군 표갈
“자손만대 이 마음 변하지 않으리라”
벽진장군 이총언은 문관과 장수들을 두루 불러모았다. 신발소리와 칼 부딪히는 소리가 성내에 가득찼다.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농사꾼들 중에도 정치에 관심이 높은 자들은 관아 뜰에 모여들었다. 오늘은 벽진군이 고려와 후백제 중 어느 세력과 힘을 합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날이다. 시키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일반 무지랭이들까지 운집한 데에는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벽진장군께서는 도적들이 그렇게 발호하였을 때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신 분이다. 이번에도 물론 장군의 결심을 우리는 철저히 따를 것이다. 그래도 오늘 같은 중차대한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석하여 세를 돋우는 것이 장군을 돕는 길 아니겠나. 그래서 누군가는 붓을 놓고, 다른 누군가는 괭이를 놓고 이렇게 뜰에 모여든 게지.’ 사람들은 서로서로 얼굴들을 쳐다보며 그렇게들 이심전심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많은 의견들이 오간 후 이윽고 벽진장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모두들 눈과 귀를 장군 쪽으로 모은다. 마당 뒤쪽에 선 자 중에서는 뒤꿈치를 들어 장군의 얼굴을 분명하게 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장군은 칼을 뽑아들며 외친다.
“자, 오늘 나 벽진장군 이총언은 말하노라. 그 동안 우리 벽진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존을 지켜왔다. 천하의 모든 호족들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을 때에도 때로는 후백제와 다투고 때로는 고려와 다투면서 눈부신 명예를 지켜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야 시대 이래 변함없이 지켜온 우리의 위세를 자랑스럽게 과시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많이 변하여 천년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도 존망의 기로에 섰고, 우리도 더 이상의 신라의 한 군으로 계속 머물 수는 없는 지경이 되었다.”
부하 장수들과 문관들, 백성들이 일제히 벽진장군의 연설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다.
“여러 장수와 관리들, 그리고 백성들이 다 알다시피 후백제왕은 여러 해 전 왕성을 급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후를 겁탈하였으며, 오가는 길에 우리 고장의 곡식을 불태우고 향토의 색상 장군을 죽였다. 그에 반하여 고려왕 왕건은 궁궐에 들었지만 예의를 다 갖추었고, 그의 부하 장수와 군졸들은 털끝 하나 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침탈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왕성의 사람들이 ‘후백제왕이 들이닥쳤을 때는 범과 늑대가 나타난 것 같았고, 고려왕이 왔을 때는 어버이를 만난 듯하다’(삼국유사의 표현)고 하였겠는가.”
“특히 우리가 지금 유념해야 할 것은 고려가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를 크게 물리쳤는데 대승의 전과가 공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상응하고도 남음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제 천명과 인심이 왕씨에게 돌아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자, 나 벽진장군 이총언은 여러 장수와 문관, 백성들과 더불어 고려와 힘을 합치고자 한다. 천하의 난적들을 평정하여 백성들의 삶을 피폐로부터 구하여 평안으로 이끌 길은 바로 이 길이 아닌가 결정하는 바이다. 우리가 스스로 성을 쌓아 초적들로부터 백성들을 구했듯이 이제는 고려와 힘을 합쳐 다시 한번 안녕을 구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 나를 따르라!”
벽진장군 이총언은 아들 영(永)에게 군대를 주어 고려의 군사작전을 돕게 했다. 영의 나이 18세 때였다. 영은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특히 고려와 후백제 최후의 대격전 일리천 싸움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왕건은 벽진장군 이총언에게 본읍장군(本邑將軍) 칭호를 내리고 이웃읍의 정호(丁戶) 299호, 창곡 3,200석, 소금 1,785석을 보냈으며. 친필로 금석 같은 신의를 표시하였다. 왕건은 서한을 보내어 ‘후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하지 않으리라’ 하고 다짐하였다. 이총언은 신라 말기 초적들이 난행을 부릴 때는 물론 사람 목숨이 초개처럼 취급되던 후삼국 시대에도 성주 지역 백성들의 안전을 지켜낸 위대한 장군이었던 것이다.
* 참고 <성주군지> 130-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