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시계/ 앤 타일러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그럭저럭 살다보니 어느덧 이십 몇 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세월을 들추어보면 결코 '그럭저럭'은 아닐 것이다. 크고 작은 고비와 위기가 있었을 것이다. 싸우고 화해하며, 때로 오해하고 이해하면서 넘어온 세월일 것이다. 남편/아내의 고쳐지지 않는 단점에 여전히 숨 막혀 하면서도 긴 세월을 이처럼 함께 해온 부부는 상대방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때로 위안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부부사이란 이래서 참으로 기묘한 역학관계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다. 평범한 중년부부가 친구 남편 장례식에 다녀오기 위해 아침에 차를 타고 나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일을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단 하루동안의 이야기이지만 녹록치 않은 세월이 응축되어 있다.
아내 매기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감정적이며 덜렁댄다. 그러다 보니 오해도 사게 되고 좋은 일도 망쳐놓기 일쑤다. 남편 아이러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싫어하고 냉정하리만큼 분석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는 늙은 아버지와 정신박약 누나들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액자 가게를 물려받아 일하고 있다. 그들은 차를 타고 가면서 평소처럼 자질구레한 일상의 얘기들을 나누다가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매기가 휴게소 여자에게 수다를 떨었다고 아이러는 화를 내고, '어떻게 된 게 맨날 나만 경박하기 짝이 없고 자기는 냉정하고 초연한 척'만 하는지 모르겠다며 매기는 차에서 내려버리기도 한다.
아이러는 쉰 살의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낭비만 해왔다고 여긴다. 더구나 아내는 신중하지 못해서 늘 실수연발이고, 아들은 유명한 가수가 되려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시험점수에만 안달복달하는 딸아이도 맘에 들지 않는다. 매기 역시 남편이 서운하다. 결혼 전에는 말이 없고 속을 보이지 않는 그가 신비로워 보였는데 살다보니 그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매기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슬프고 외롭고 피곤하고 희망이 없다고 여긴다. 아들은 엇길로 나가 있고 딸은 자신을 무시한다 싶어 우울하고, 인생을 줄곧 잘못 산 것 같다.
그러나 장례식은 '결국 우리는 모든 이들을 잃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거기서 우연히 보게 된 친구 결혼식 때 찍은 영상 속에는 청년 아이러와 처녀 매기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별 의미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여기던 그들에게 순간 환한 빛이 찰칵, 하고 켜진다. 긴 세월의 흐름이 와 닿은 기슭은 결국은 믿음과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은 결혼이 환상이나 가식이 아님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결혼 생활이란 시계의 움직임과 같이 늘 되풀이되는 지루한 반복의 일상이며, 이질적인 타인을 언제까지나 견뎌야 하는 일이며, 새로 태어난 생명을 인간으로 키워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어디 있으랴. 부부는 그래서 수십 년 함께 해온 세월 그것만으로도 기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기적은 이처럼 지루하고 사소하고 힘든 곳에서 만들어지나 보다.
첫댓글 저 이 책을 대학생 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글자를 읽었을 뿐 이해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 5년차로 22개월 아들아이를 둔 지금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