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조연이지만 삶에선 항상 주연
----------------대장금’ 수발상궁 맡은 이숙
안방을 사로잡는 드라마 ‘대장금’. 주인공인 장금(이영애 분)을 비롯해
한상궁(양미경) 최상궁(견미리) 등이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어찌 한편의 드라마가 이들 스타로만 만들어지랴.
주인공 뒤에 병풍처럼 자리하는 수많은 조연연기자가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준다.
탤런트 이숙씨.
동갑내기 박정수(제조상궁 역)의 수발상궁역을 맡은 그는 MBC공채로 시작한
연기경력 27년의 조연탤런트.
시청자들 중에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지난봄 종영한 전원일기의 ‘쌍봉댁’이라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조연으로 늘 배역에 대한,
못다 풀어낸 연기에 대한 허기를 느꼈다는 이숙씨.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어느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는 주연”이라고.
■5분만에 끝난 12시간의 기다림
지난 일요일 저녁 6시. 여의도 MBC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오전 10시에 방송국에 와 대본을 읽고,
점심후 리허설을 마쳤다는 그는 이미 푸른치마와 녹색저고리에 5kg무게의
가체머리를 한 상궁복장이었다.
기자를 맞이한 그는 분장실에 놓인 짐꾸러미에서 종이컵을 꺼내고 인스턴트
커피를 담아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야외녹화때면 쌍봉댁네 부엌에서,
궁궐의 수라간 한쪽에서 뜨거운 물을 끓인다는 그의 스테인리스 주전자가 떠올랐다.
그렇게 돌리는 수십잔의 뜨거운 커피 때문에 그에게
‘숙다방 마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던가.
녹화가 시작되고 스튜디오 곳곳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연습한다.
녹화를 지켜보며 그도 이따금 엄숙한 표정으로 힘주어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9시가 되어가지만 그의 차례는 쉬 오지 않는다.
누군가 대사가 엉켜 NG가 계속되자 그가 속삭인다.
“긴 대사를 속사포처럼 쏴대는 연기가 제일 힘들어요.”
“그럼, 대사가 적은 조연이 낫겠다”고 받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
래도 대사가 많은 역이 보람 있다고. 자신들 같은 조조연(그는 그나마 캐릭터가
있는 조연과 비교해 스스로를 그렇게 구분했다)의 꿈은 뭔가 성격이 분명한
역할을 해보는거라고….
드디어 9시55분. 그가 제조상궁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연생이가 울며 달려들어와 동무인 장금이가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다.
근엄한 목소리로 그가 외친 대사는 “썩 물러나지 못할까.”
이어 잠시후 “어서 물렀거라”를 다시 한번 외치자 그의 연기는 끝났다.
정확히 10시였다.
■응삼이와 알콩달콩 살려했더니…
전북 김제가 고향인 그는 이리(익산의 옛이름) 여중고를 졸업했다.
웅변으로 이름을 날렸고 멋부리는 이를 가리키는 ‘째쟁이’로도 유명했다.
학교수업 빼먹고 본 영화 ‘알랭들롱의 고독’이 그를 흔들었다.
여고졸업후 서울에 온 그는 73년 CBS라디오 성우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 사이에서 자신에 찬 허스키가 개성적으로 보였던 걸까.
성우로 일하며 그가 키운 꿈은 탤런트. 이를 위해 그는 김정옥씨가 지휘하던 극단
자유극장 단원이 되어 엑스트라로 ‘동리자전’이라는 연극무대에 섰다.
발톱이 다칠 만큼 탈춤을 열심히 추는 엑스트라의 정열이 눈에 띄어 ‘파우스트’
‘여인과 수인’같은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왔다.
그리고 3년후 그는 MBC탤런트시험을 통과했다.
“생애 제일 기쁜 날이었어요.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감했으니까요.”
그러나 자리매김은 쉽지 않았다.
일이 없는 날도 그는 직원통근버스로 매일 정시 출근해 탤런트실을 청소하고,
연습하는 동료 선배들의 대본을 나눠주고,
대본검열을 받으러 가는 심부름까지 자처했다.
그렇게 대기중인 그에게 자연스레 다방레지, 지나가는 떡장수같은 ‘빵꾸난’
단역들이 돌아왔다.
“20대에 영어 일어 태권도 붓글씨까지 연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대로
배웠죠.
만능탤런트가 되고 싶어서요.
아, 직접 작사해 앨범도 3집까지 낸걸요.”
그의 가수경력은 몇해전 드라마 ‘그여자네 집’의 가요교실 아줌마수강생역으로
빛(?)을 발하기도 했다.
그가 꼽는 대표작은 신인시절 “진짜 동대문아줌마냐”는 시청자의 전화가
쏟아졌던 ‘시장사람들’,
유일한 주인공역이었던 단막극 ‘제3교실-깨순이’편,
그리고 얼마전 쌍봉댁으로 활약했던 ‘전원일기’다.
단막극 ‘깨순이’의 주인공역은 그렇게 그의 차지가 됐다.
그러나 역시 존재를 알린 것은 15년여간 고정출연한 전원일기.
“이제 막 응삼이와 신혼살림차려 재미있어지려니 끝났다”며
그는 이 드라마의 종영을 못내 아쉬워했다.
■개성적인 조연은 드라마의 향기
“상궁역이 낯설다뇨? 아마 제가 상궁역 최다 출연자일걸요.”
실제로 MBC TV의 조선오백년 시리즈에 그는 거의 빠짐없이 출연했다.
몇백편일까.
그는 출연작을 셀수도 없다.
그 세월동안 그의 출연료는 최고 18등급 중 17등급까지 올랐다.
하지만 배역이 없으면 수입도 없는 게 연기자의 생활.
그는 작은 보석가게와 역삼동에 문연 세꼬시전문점 ‘하얀등대’로 생활의
불안함을 메워가고 있다.
“커리어우먼, 여성사업가, 멋진 악역도 시켜만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텐데…
제 이미지가 너무 소박한 동네아줌마로 굳어진 걸까요.”
그의 서민적인 이미지는 많은 사람에게 친근함을 주었지만, 그
에겐 때로 회의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10여년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야당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을 때 당원들은
“사모님 방송일 좀 그만두실 수 없느냐”고 했다.
선거운동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남이 최선을 다해온 천직에 어떻게 그런 평가를…”이라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눈에 잠시 붉은빛이 돌았다.
“연기자의 세계는 인기가 곧 인격이죠.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며
‘감초연기자’로 오늘에 이른 내 모습에 부끄러움은 없어요.
단지 좀 비중 있는 감초였으면… 하는 바람이죠.”
‘대장금’에서 최상궁에게 은근한 상납을 요구하는 자신의 대사
“차 맛이 좋습니다”가 뜨고 있다(?)고 자랑하는 그에게 탐나는 역할이 있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최상궁역. 예쁜 견미리보다 진짜 악독하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아서란다.
“드라마에서 예쁜 주인공이 꽃이라면,
개성적인 연기를 보이는 조연들은 향기예요.”
꽃이 눈으로 들어온다면, 향기는 온몸으로 전해오는 것.
“아흔이 되어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이숙씨의 모습에서 세상의 향기로 살아가는
모든 평범한 이들의 꿈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