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농사짓는 사람은 토지를 갖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실시하여야 한다. 산골짜기와 시냇물의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확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 안에 포괄되어 있는 지역을 1여(閭)로 한다. (중략) 1여마다 여장(閭長)을 두며 무릇 1여의 토지는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고, 내 땅 네 땅의 구별을 없이 하며 오직 여장의 명령에만 따른다. 여민(閭民)들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5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 분배한다. 이 때 국가에 바치는 세를 먼저 제하고 다음으로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노동량에 따라 여민에게 분배한다. <여유당전서>
유형원의 균전론이나 이익의 한전론은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룩하여 대토지 사유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제시된 방법론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은 균전론과 한전론을 모두 비판하였다. 양자 모두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토지 소유의 편중 현상이 재현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약용이 제시한 방법론은 여전제였다. 위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여전론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여전론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즉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할 것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농민적 토지 소유를 추구한 것이다. 둘째 여전론은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한 마을(1여)을 단위로 한 토지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토지 소유가 재현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함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정약용의 여전론이 중국 주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에 영향받았음을 뜻한다. 셋째, 여전론은 공동 경작과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주장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