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은
선조 27년 평안도 개천에서 태어났다.
스물다섯 살에 무과 시험에 장원 급제하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가선
대부에 오르며 1등 공신이 되었다.
1633년에는 청북 방어사와 영변 부사가 되어 백마 산성을 수축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적의 진로를 막아 물리쳤으며 가도 전투에서 공을
세워 청나라 태종으로부터 작8급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벼슬을 유쾌히 받을 임경업이 아니었다.
나라가 청나라 태종의 손아귀에 들어가 힘을 못 쓰자 명나라로 망명하여
청나라와 대적하였다.
용감무쌍하게 싸우던 임경업은 이번에는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조선에
이송되었으나 간신배들의 음모로 죽음을 맞았다.
임경업의 기백은 우리 민족의 용맹성을 드높이는 행동이었음을 명심한다,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친 임경업
임경업은 조선 중기의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용맹을 떨친 명장이다.
그가 명장으로서의 위엄을 떨쳤다고 하는 이유는 명나라의 대군을 지휘하였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대장 노릇을 하였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임경업은 1594년에 절충 장군 임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자주 하였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집안을 돕ㄴ느 가운데 혼자서 병서를 읽으면서
무예 연습을 하였다.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무과 시험에 합격한 임경업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었다.
또 1633년에는 청북 방어사와 영변 부사의 벼슬을 지내면서
의주의 백마 산성을 튼튼히 고쳐 쌓았다.
임경업 장군이 평양 중군으로 있을 때 부하들과 성을 쌓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임경업은 부하들을 몹시 사랑하였으므로 힘든 일도 함께 나누어 했다.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 쌓는 일도 제일 앞장 서서 모범을 보였으므로
그가 하는 일이라면 부하들은 무조건 잘 따라 주었다.
1636년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경업은 백마 산성에서 쳐들어오는 후금의
군사들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를 두려워한 후금의 군사들은 백마산선을 피해서 곧장 한성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는 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짓밟혔으면
이에 임경업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임경업은 마흔일곱 살때 청나라의 요청으로 주사 상장이 되어 명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청나라로 붇잡혀 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임경업은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했다.
1643년 명나라 군대의 부총병에 임명되어 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이 멸망함으로써 결국은 임경업은 청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인조 임금의 요청으로 돌아온 임경업은 신문을 받다가
김자점 일파의 음모로 죽음을 당하였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도 이름을 덜쳤던 임경업 장군이 우리 나라에 와서
간신들의 음모로 죽음을 맞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직 나라를위해서만 살았던 명장 임경업!
그는 정녕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우리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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