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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 고향 밀양 원문보기 글쓴이: 龍雲(칠득이)
사명대사 이야기 / 글쓴이 : 안 재구
표충사는 밀양고을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사명당(四溟堂)이 나라를 위해 바친 충절을 기려서 조선 영조 임금이 이름을 표충사라 부르게 하고 사액을 내렸다.
사명당의 속성은 풍천임씨(豊川任氏)이고 속명은 응규(應奎)이다. 조선 중종(中宗) 때 밀양 무안면 괴나루골(塊津)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임효곤(任孝坤)은 대구 도호부 부사를 지낸 선비인데 점필재 김종직과 같은 시대의 선비로 성종시대에 벼슬을 살다가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연산군은 즉위하자마자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 세자시절 궁내에서 기르던 사슴을 발로 찼다가 아버지인 성종으로부터 받은 꾸지람의 화풀이였다.
이 소문을 듣고 연산군의 폭정을 짐작한 임효곤은 바로 낙향하여 자손들에게 벼슬할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후 그 참혹한 무오⋅갑자사화가 일어나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죽었고, 또 중종 때는 훈구파의 모략으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죽은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사명당은, 나라가 훈구파에 의하여 혼탁된 세월에 명리를 피해 화전민으로 사는 몰락양반의 집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사명당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특하여 열네 살에 이미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그런데 이 명석한 소년에게 액운이 닥쳐왔다.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다음 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사명당은 죽은 형과 연이은 부모의 죽음을 당하자 인생의 근본문제인 생과 사 그리고 희 노 애 락에 대한 깨침을 얻고자 스승과 친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가하고 말았다.
사명당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信黙和尙)을 만나 머리를 깎고 입도했는데, 승명을 유정(惟政)이라 하고, 호를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이라 했다.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만나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奎)와 뇌묵당(惱黙堂) 처영(處英)과 더불어 불법을 공부하고 금강산에서 구도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의주(義州)에서 몽진 중인 선조임금을 만나 ‘팔도선교십육도총섭판병부승의병대장(八道禪敎十六都總攝判兵符僧義兵大將)’의 직책을 받고 팔도에 격문을 띄워 전국 각 사찰의 승려들은, 늙고 병든 자는 도장에서 구국의 기도를 드리고 젊은 장정들은 항마구국군(降魔救國軍)으로 떨쳐나서라고 했다. 이리하여 황해도, 평안도, 경기도의 승병은 서산대사의 휘하로 모이고, 기허당 영규는 충청도 공주 갑사(甲寺)에서, 뇌묵당 처영은 전라도에서, 중관해안(重寬海眼)은 경상도 진주(晋州)에서, 의엄대사(義嚴大師)는 황해도의 일부에서 승병을 모아 일어났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가 보낸 격문을 중간에서 왜놈에게 탈취당해 받아보지 못했으나 금강산에서 의거하여 평안도 순안(順安)으로 가면서 연도 사찰의 승려들을 규합하여 평양탈환전에 참가했다. 또한 벽제(碧蹄)전투에서 임진강을 방위하고 서울탈환전에 참가했다.
그 후 도원수 권율(權慄)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 수차에 걸쳐 왜적을 무찔렀고, 가등청정과 세 번이나 만나 왜적의 정세를 파악하여 우리 군사의 전략과 전술을 세우도록 했으며, 정유재란에는 명나라의 장수 마귀(麻貴)와 유정(劉鋌)을 따라 왜적을 토멸했다.
임진전쟁 전후에는 국서를 받아 왜국에 가서 침략 안하겠다는 맹세를 받았고 동포 삼천 수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사명대사의 이러한 공으로 선조는 높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만년을 강원도 원주 치악산(雉岳山)에서 보내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1610년 가을에 예순일곱 해로 수를 다했다. 나라에서는 훈위와 직품 그리고 시호를 내리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백성들은 철시했으며 임금도 소찬에 음악을 금했다. 그리고 대신, 공신의 예로 국장(國葬)을 지냈다.
밀양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신 절인데 규모가 그런대로 크고 많은 스님이 있었다. 이들 스님들이 밀양 읍내에 들어와서 탁발(托鉢)을 하는데 읍내의 별난 아이들은 그 탁발승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놀린다.
표충사에는 불이 났는데 땡땡이 중놈들이 불꺼로 간다고 엇샤 푸푸 엇샤 푸푸.
그래도 탁발승은 싱긋 웃고 손을 흔든다.
어느 여름날 수돗가에서 나는 수도 호오스로 담 밑 남새밭에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물이 세차게 뿌려지자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불렀다.
“표충사에는 불이 났는데...... 엇샤 푸푸”
물살이 센 만큼 내 노래도 세찼다. 그때 마침 활천 할매가 오셨다.
“아이고 더버라. ○○야 그 호우수 이리 다고. 물 좀 마시자.”
“예. 할매 오나.” 하고 호오스를 드렸다. 할매는 물을 마시고 손을 씻고 난 다음,
“○○야. 니가 무슨 노래를 그런 노래를 다 하노? 뭐 표충사에는, 땡땡이 중놈이라고. 표충사에는 옛날부터 도가 높은 스님이 계신다. 더군다나 사명당이라 카는 높은 도승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절인데, 그리 마구 돼도 않는 소리하면 안된다이.”
“할매. 사명당이 누군데? 도술이 그리 있는강?”
“와 아이라. 못된 왜놈들을 얼마나 많이 죽인 승병대장인데.”
나는 호오스를 내던지고 할매를 따라 대청으로 올라갔다.
“할매. 사명당 도사 얘기해도고.”
“아이고 야가 뭐라카노. 이 더운데. 지금은 더워서 얘기가 아니라 그 보다 더한 것도 몬하겠다. 나중에 저녁 먹고나서 시원해지거던 해주께.”
언제나 활천 할매가 와야 옛날이야기를 재미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빨리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활천 할매는 나와 수환이 아지매에게 옛날이야기로 인기였다. 나는 저녁을 먹자마자 이야기 때문에 할매 곁에서 떠나지 않고 할매가 할아버지와 얘기하는 동안 초조하게 빨리 도술을 부리는 ‘사명당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활천 할매는 대청에서 나와 수환이 아지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끌러 놓기 시작했다. 곁에서 고모도 듣고 할머니도 들었지만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를 떠나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둘은 꼼짝 않고 활천 할매의 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옛날에 아마 300년은 훨씬 넘었을 꺼로. 나한테 11대조 할아버지 때 이야긴까네 400년은 못되고, ○○ 니게는 13대조 할배구나. 아무튼 300년이 넘는 옛날에 우리 조선나라가 태평하게 잘 살았는데 남쪽 바다 건너 왜놈들이 샘이 나서 임진년에 우리 조선나라로 쳐들어 왔는기라.
우리나라는 몇 백 년을 태평하게 살아 놓이까네 병정도 얼마 없고 대앙구(대포)도 없고 총도 없었제. 왜놈들은 어디서 구했던동 총을 갖고 싸우는 기라. 그러이 조선 병정들은 싸움이 안 되는기라. 그래서 전쟁에 지고 도망가기 바빴고 나랏님도 서울을 내버리고 피양(평양)으로 도망갔는데 왜놈들이 거기꺼정 오이 또 도망쳐서 압록강의 의주꺼정 달라뺐는기라(달아났는게라).”
“압록강만 건너면 조선땅 아이제(아니지).” 라고 내가 말하자 할매는 신통해서
“그래, 그래. 거기만 건느면 조선 땅 아이고 대국땅(중국땅) 아이가.” 할매는 얘기를 계속한다.
“왜놈이 온 나라에 들어와 집이란 집은 모두 불사르고 사람들은 보이는 쪽쪽 죽이기나 잡아갔는기라. 잡아간 사람들은 종놈을 만들어 죽도록 부려먹었제. 이래 놓이 나라가 왜놈한테 모두 뺏기고 망하게 되었거던. 그래서 온 나라 조선 백성들이 들구 일어났제.
홍의장군이라고 망우당(忘憂堂) 곽 장군이 의령(宜寧)에서 일어나이 밀양, 창령, 현풍 고을에서도 일어나 모두 홍의장군한테로 모여들었제. 또 전라도에서도, 충정도에서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조선팔도에서 모두 일어났제. 그라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장군이 거북선이라는 거북 모양을 한 배를 만들어 왜놈 배를 들어 받아 엎어 버리고 절단(결딴)을 내놓았제.
우리 낙원공(樂園公) 할배는, 그러이 니 한테는 13대조 할아버지인데 바로 이 홍의장군이 처삼촌이라 안 카나. 나이가 아주 젊어도 글재주가 어찌나 좋던지 홍의장군 곁에서 왜놈들을 쳐 없애자는 글을 지어 온 고을에 보냈다 안 카나. 글이 얼마나 좋던지 이 할배가 지은 글을 읽어 보면 구구절절이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울 힘이 생기게 했던 기라. 그리고 병법에도 밝아 홍의장군은 이 할배, 그라이까네 홍의장군 질서(姪壻: 조카사위)제, 늘 곁에 종사관으로 두고 임금께 보내는 편지, 다른 장군께 보내는 편지, 백성에게 알리는 글, 모두 짓게 했고 전쟁 계책도 의논했거든.
지금 성만이 종가에 병풍이 있는데 이것은 낙원공 할배의 장조(丈祖) 어른, 그라이까네 홍의장군 아버지 감사공[定菴 郭越]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임금이 내리신 선물인데 손서인 우리 낙원공 할배에게 주신기라 카거던. 명나라 임금이 감사공에게 이 병풍하고 붉은 비단하고 벼루 그라고 은으로 된 말안장을 내렸는데 홍의장군이 붉은 비단으로 전복을 해 입고 은안장에 올라 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치고 달라드니(달려드니) 왜놈들 머리가 추풍낙엽이라 카거던. 그래서 나중에는 붉은 옷만 봐도 왜놈들은 질겁을 하고 달아났다 안카나. 그러이 홍의장군이라는 이름이 생겼제. 그라고 벼루는 큰아들이 받아 아즉도 현풍 원산이 종가집 사당에 있다카제. 그 집 종부가 너그 어매 고모라카지 아매(아마). 그러이 명나라 임금이 준 선물 네 가지를 두 아들하고 손서에게 나누어 주었제.”
“나중에 성만이 가거던 종갓집 아재한테 한번 보자고 해야지.”
“어데 아무 때나 내어 놓는 강.”
“와. 가도 거기 없는 강.”
“귀한 기 되 놓이 아무 때나 내 놓지 않는다. 나중에 집안에 큰 경사가 있을 때나 내 놓지.”
이야기가 영 옆길로 돌아 흘러버리고 말았다.
“내가 사명당 얘기 할라 카다가 우째 홍의장군 이야기가 돼 버렸노?
“그래. 온 천지 조선 백성이 다 일어났제. 이때 나라 안에 있는 절도 모든 스님들, 그라이까네 중들 말이제, 스님들도 다 왜놈하고 싸우로 나왔거던. 그 중에서 제일 높은 스님이 서산대사라 카는데 사명당의 선생인기라.
사명당이 바로 이 서산대사 밑에서 도를 닦았거던. 그래서 공부도 많이 했지만 도술도 많이 배웠고 칼싸움도 모두 이 서산대사라 카는 도사한테 배웠다 안카나. 비도 오게하고 오는 비도 근치게(그치게)하고 짚동을 군사가 되게 하고 어디 몬하는 재주가 없는기라. 하루에 천리 길을 가는 축지법도 하고. 온갖 도술을 다 배웠는데 바로 그 때 왜놈이 쳐 들어와 난리가 났는기라.
그래서 사명당은 금강산에서 여러 스님들을 거느리고 서산대사에게 갔더니 피양에 왜놈들이 들어왔다 안카나. 사명당은 서산대사하고 도술을 부려 피양성을 꽁꽁 얼어붙도록 맹그려서(만들어서) 왜놈들이 물 한방울도 몬 구하고 밥도 몬해 묵도록 맨들어버렸는기라. 조선 군사가 쳐 들어가이 몇날 며칠을 굶어 놓이 힘이 없는기라. 그래서 모조리 목을 베어 피양을 도로 뺏아 버렸다 안카나.
사명당이 온갖 도술을 부려서 왜놈들을 절단 내 놓이 왜놈 장군 가등청정이 놈이 안죽을라고 빌면서 ‘우리는 그만 돌아갈랍니더. 조용하이 돌아가도록 좀 해 주이소’하고 손이야 발이야 닳도록 비는기라.”
수환이 아지매는 이야기가 별로 재미없는지, 더워선지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할매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할매는 벼개를 내어다 베어 준다. 할매는 내게
“이야기가 재미 없나, 그만 하까?” 라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왜놈 자석들 때려잡는 얘긴데 들어야지.” 라고 하자 할매는
“그런 소리 아무데나 하면 큰일 난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이.” 라며 야단을 친다.
“할매. 안 그랄께. 이야기 해 도고.”
“우리 조선 군사가 왜놈들을 마구 쳐죽이는데 왜놈들이 견딜 수가 있어야지. 바다에서는 왜놈들이 도망갈라캐도 이순신 장군한테 몽땅 배가 다 부서졌지. 이제 곱다시 죽게 되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한참 하다가 그만 총을 맞고 죽었는기라. 그래서 왜놈들은 바로 이때다 하고 달아났는데 백 놈 중에 열 놈도 옳게 몬 달아났을꺼로. 겨우겨우 달아났거든.”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말았나.”
“아이지. 왜놈한테 잡혀간 조선사람을 다 찾아 댓고 와야지.”
“누가 갔는데.”
“그게 바로 사명당이 갔다 아이가. 사명당이 임금의 분부를 받고, 그라이까네 왕명을 받았는데 그게, ‘네가 가서, 왜국에 가서 왜놈 임금한테 이제 다시 안쳐 들어온다는 다짐을 받고 거기에 붙들려간 조선백성을 다 데리고 오너라.’ 카는 기거든. 그래서 사명당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제.
그런데 사명당이 왜놈의 나라에 떡 갔더이, 아 요놈들이, 요 못된 놈들이 말이다, 사명당의 도술을 달아볼라꼬 안카나.”
나는 왜놈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그놈들이 우쨌는데.”
“왜놈들이 사명당을 데리고 ‘오늘밤은 여기서 주무시이소’라고 하는데 그 방에 들어갔더니 사방이 쇠벽이고 방바닥도 천장도 쇠로 돼 있는거 아이가. 그라고 고놈들이 문을 닫고 나가더이 불을 때는데 방바닥이고 벽이고 점점 뜨거워 오거던. 밖에서는 불을 마구 때고 풀무질하는 소리가 왱왱 안카나. 그래서 사명당은 종이에다 ‘얼음 빙(氷)’자를 몇 장 써 가지고 사방 벽하고 방바닥, 그라고 천장에는 도술을 부려서 휙 던져붙였는기라. 붙여놨더이 사방에 고드럼이 생기는기라. 불을 때면 땔수록 고드름이 더 생기는기라. 그래서 사명당이 방바닥에 있는 요이불을 깔고 앉았제. 왜놈들이 인자는 불에 새까맣게 타서 죽었을끼라 고 생각을 하고 아침에 방문을 열어보이 사명당 수염에 고드름이 얼어붙었는데, 사명당이 ‘일본은 조선보다 남쪽이라서 따뜻하다 카던데 우째 이리 춥노. 군불을 좀 많이 때라.’라고 안카나. 왜놈들이 깜짝 놀라, ‘이래가는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도리를 궁리했다 아이가.
이번에는 요놈들이 노골적으로 달아보는기라. 왜놈 임금을 만나로 갔더이 왜놈 임금이 ‘사명당의 도술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저기 저 마당에 있는 쇠로 된 철마를 타고 마당을 돌 수 있겠소.’라고 물었지. 그래서 사명당은 껄껄 웃으면서 ‘그것쯤이야’하고 마당에 내려가서 보이 철마가 불에 달궈져 벌건기라. 그래서 사명당은 ‘찰 냉’ 자를 써서 가사장삼에 넣고 벌건 말에 올라타이 아무렇지도 않고 말 볼기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니 말이 힘차게 달리는데 말에 대이는(닿는) 것은 모두 불이 붙는기라. 사람도 대이면 타죽고 야단이 났거던. 그라이 우짜겠노. 왜놈들이 사명당을 골릴라고 했다가 도리어 큰일이 났거던. 왜놈 임금은 마당에 기어나와 손이야 발이야 파리맨치로(모양으로) 빌면서 ‘잘 몬했심더. 지발 용서해 주이소. 뭐라카던지 시키는대로 하겠심더.’라고 빌었지 지놈이 별 수 있나.”
나는 그 얘기가 그럴 수 없이 고소했다. 그래서
“왜놈의 자석들, 몽땅 씨종자도 없애버려야제.” 라고 했더니 할매는 한참 웃더니
“니 맴이 사명당 맴하고 우째 그리 똑같노. 그래서 사명당은 ‘네놈들이 인총 (인구)이 많아서 이웃 나라를 몬살게 쳐들어오이 인총수를 좀 줄여야겠다’고 하면서 해마다 사람 가죽 삼 천장 하고 불알 석 섬을 보내고, 다시 안 쳐들어 오겠다고 맹세하고, 네놈들이 잡아간 조선 백성들을 다 내어 놓아라.’고 했지. 왜놈 임금이 지 안죽을라꼬 ‘예, 그라겠심더.’라고 하면서 문서를 만들어 도장 을 찍었다 아이가. 그래서 사명당은 이것을 가지고 돌아와 우리 조선 나라 임금께 갖다 바쳤고 또 올 때는 우리 조선 사람 수천 명을 대리고 왔다 안카 나.”
활천 할매의 얘기는 끝났다.
“니가 아까 수돗가에서 스님 놀리는 노래를 하던데 그라면 안 되겠제. 표충사에는 이 사명당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거기 있는 스님을 보고 욕하면 나쁘제.”
“응, 나는 스님보고는 한 번도 그런 노래는 안했는데, 아이들이 부르이 나도 몰래 저절로 나왔다 아이가.”
나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할매는 그런 내가 그처럼 귀여운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리고는 대청에 쳐놓은 모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밀양시에서 서쪽으로 삼십 리 쯤 가면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武安里)에 있는 무안초등학교 앞에 비각이 있는데 이것은 사명대사의 사적을 새긴 표충사적비(表忠事蹟碑)이다. 비면의 높이만 해도 아홉 자나 되고 대석과 용머리까지 합치면 전체 높이가 열석 자 쯤 된다. 비면은 가로가 석 자 넘고 세로는 두 자 쯤 되는데 거울같이 비치는 새까만 오석(烏石)이고, 대석과 용머리는 흰 화강석이다.
앞면에는 사명대사 영당비명(影堂碑銘)이고 옆면은 표충사(表忠祠) 사적비명인데 기허대사(騎虛大師)의 사적도 새겨져 있다. 뒷면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비명이다. 그래서 사명대사의 영당비명과 표충사 사적비명 그리고 서산대사 비명이 들어있다고 해서 이 비를 삼비(三碑)라고 한다. 표충사의 정문에는 삼비문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표충사의 사당과 이 현판은 없어졌고 새로이 사당을 지었지만 이름은 홍제사(弘濟祠)로 바뀌어 있다.
이 비는 조선 영조(英祖) 18년 임술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은 이 비가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는 꼭 땀을 흘린다고 해서 ‘땀내는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우리들은, 집안에 큰일이 있거나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온 집안 그리고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힘을 다하는데 집안의 조상도 나라의 위인들도 우리들과 함께 힘을 써주시길 빈다. 그러면 조상들도 위인들도 음우(陰佑)해 주신다고 믿으며 이러한 믿음이 ‘땀내는비’라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턱없이 잣대를 들고 나선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식 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바로 과학일 수가 없다. 강력한 소망은 사람의 의지력을 모으게 하고 이렇게 모아진 의지력은 환란에 맞서 싸워나갈 수 있는 창조성을 낳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그리고 임진전쟁에 참가한 많은 승의병은 이 비를 통해서 후손인 우리들과 함께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고 있다고 믿고 그들의 높은 충절을 영원히 기리고 있는 것이다.
*****[주] 활천 할매가 이야기한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소설은, 임진전쟁 전후에 모두 「임진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나왔는데, 임진전쟁 때의 무용담을 쓴 한글 소설입니다. 그 내용은 모두 군담소설이고 황당한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집에 그 필사본이 한 가지 있어서 어머니 나이또래의 아지매들이 가락을 붙여서 읽는 것을 자주 들은 기억납니다. 활천 할매의 이야기도 그 가사의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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