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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봉기…조선 팔도에서 벌떼처럼 일어선 동학농민혁명” |
東學農民革命 120주년!(제5부) ‘淸비적과 日왜구에 만신창이’ |
조선대신들 국가개념은 공염불 일신의 보신에 혈안 / 조선정부 물론 청과 일, 백성들의 계몽의식 몰이해 / 청일전쟁 승리 日 내정간섭 등 조선을 거칠게 압박 / 조정을 장악하고 모든 것 통제 일본인들 상권 보호
● ‘궁’만 잡으면 ‘졸’은 절로 떨어질 것?
청일전쟁이 임박했음을 조선 팔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대외 분위기가 그러했고 또한 조선의 시국이 그러하였다. 모든 게 급박하게 돌아갔다. 청과 일본은 마치 장기판에서 상대편의 ‘궁’을 잡기 위해 ‘초(楚)’와 ‘한(漢)’이 안간힘을 쓰듯 조선 조정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궁’만 잡으면 만사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 양국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졸(卒), 조선의 백성들이었다.(여기에서 백성을 ‘졸’에 비유한 것은 장기판 이론이므로 양해 바란다.)
장기판에서 졸은 앞으로 좌우로 한 칸씩 밖에 이동하지 못하지만, 쪽수에서 제일 많고, 결코 후퇴란 법이 없어서 최후의 승패를 뒤엎어놓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졸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궁’만 잡으면 ‘졸’은 저절로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을 터이지만 그건 그들의 오판이었다.
조선 백성들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청국과 일본이 조정을 뒤흔들수록 백성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차분하게 가닥을 잡아갔다. 부패한 지방관을 몰아내고자 뭉쳤던 농민운동과 달리 이번에는 목숨을 건 거병이었다.
진작에 왜(일본)와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척왜양(斥倭洋)을 주장하며 이를 갈던 백성들이 갑오년 두 번째 봉기 때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강원과 함경도, 그리고 황해와 평안도까지 그야말로 조선 팔도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청나라 비적(匪賊)들이 민가에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바다를 건너온 왜구들은 약탈뿐만 아니라 부녀자를 강간하고 살인까지 하는 판이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소식은 연일 끊이지 않았고 원성은 하늘 높이 날아 조선 팔도 곳곳에 파고들었다.
전봉준은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다. 사람이 곧 하늘.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살게 되기를 염원하는 인내천 사상. 교주인 수운 최제우가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한 이래 엄격했던 반상(班常, 양반과 상놈)과 남녀 차별의 경계가 무뎌진 건 사실이었다.
이는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 어떠한 사람도 수련을 통해 한울님과 일체화할 수 있고,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수운의 한울님 사상)에 힘입어 평등세상으로 나아가는 예정된(동학의 교리에 의하면) 것이기도 하고, 백성들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조선 정부는 백성들의 깨어난 의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청국과 일본도 조선 정부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결국 수운이 부르짖었던 반봉건과 함께 척왜양 사상을 더욱 각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조선 대신들, 청(淸)과 일(日)편으로 나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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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한 농민군을 다시 소집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일에 전념하게 하고, 동학교도들과 자원한 농민들은 남게 하여 불안한 치안을 안정시키도록 배치했었다.
첨언하면, 전주화약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조약이다. 전라도 지방의 개혁 사무를 담당할 자치 기구인 집강소의 설치와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 실시가 합의되었다
전주화약 당시 전라 감사 김학진과 협의한 집강소 설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전라도 각처 읍․면의 관아에 설치한 집강소는 공백 상태나 다름없는 관내 치안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고, 행정 사무를 보는 임무까지 겸하고 있었다.
자연히 집강소가 설치된 곳에는 탐학이 없었고, 따라서 민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집강소에는 수장인 집강을 중심으로 사무를 보는 조직이 체계적으로 편성되어 있어, 민정기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던 터였다.
거병한다는 소식은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빠르게 전해졌다. 임시로 마련한 본부에서는 향후 대책을 논의하면서 진격할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청일 양국이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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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선제공격을 하였다간, 어부지리가 아닌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어느 정도 판가름 날 때까지는 민가에 출몰하는 왜구들과 청나라 비적(匪賊, 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도둑)들을 토벌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될 터였다. 아울러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등 이 기회에 집강 간의 긴밀한 연락체계를 테스트하고, 거병하여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면 될 터였다.
조선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위태로운 시국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도, 황후도, 흥선 대원군도 그들은 각자의 생각에 매달렸고,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조정의 내부가 이렇게 분열되어 있으니 세력다툼을 하는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과 일본으로서는 조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대화 창구가 없는 걸 답답해했다. 서로 소통을 하지 못한 조선 대신들은 청과 일본 쪽에 나뉘어 서서 자기편을 응원하기에 바빴다. 그들에게 국가의 개념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고, 일신(一身)의 보신(保身)만이 최우선이었다.
● 1894년 갑오년에 동학군의 제2차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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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1894) 9월 8일(양력 10월 10일), 동학교주 최시형은 반(反)외세의 기치 아래 무력 봉기를 선언하였다. 제2차 봉기였고, 거병이었다.
삼례(參禮)로 집결하라는 통문이 각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미리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밤낮으로 모여드는가 하면, 오는 도중에 일본군과 일전(一戰)을 벌이고 합류한 소규모 부대급도 있었다.
경상도와 강원도,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부대를 편성하여 전투에 돌입하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군수의 탐학에 못 견뎌 민란이 일어났던 곳에서는 부대가 쉽게 결성되었다. 그만큼 관료들의 탐학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싸움의 장소는 다르나 그들의 거병 목적은 단 하나, 조선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군 타도였다.
청일전쟁은 어렵지 않게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단연 일본의 우세였다. “선전포고야 나중에 하면 되고”, 라는 식의 이 전쟁은 국제법도 소용이 없었다. 서구 열강들은 진즉에 일본이 발표했던 ‘탈아론(脫亞論)’을 떠올리며 중립을 선언하였고, 뒷짐을 진 채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탈아론(脫亞論)이란, 넓은 의미로 보면 아시아를 탈피하여 서구 열강의 발맞춤에 동참하겠다는 것이었고, 좁은 의미로 보면 이미 아시아의 절반 이상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도 아시아 국가를 침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전쟁에서는 ‘룰’도 불필요 했고 ‘선전포고’도 역시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전쟁은 한번 승패가 판가름 나면 패자부활전을 치를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고, 장기처럼 빅장질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승자만 남고 승자의 기록만 있을 뿐이었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청일전쟁 본격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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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던 청일전쟁 역시 그러했다. 조선에서 1882년(고종 19) 6월 9일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을 때, 청국은 군대를 앞세워 무력으로 군란을 진압하였고, 조선은 자연스럽게 청에 의존적인 체제로 변화하였다. 농민군의 진압을 청에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樂營) 등 2영(營)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 달 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선혜청은 조선시대 대동미(大同米) ·대동포(大同布) ·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관장한 관청을 말한다.
그러자 조선의 친일파들은 일본 공사관의 원조에 힘입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은 일본으로서도 야심차게 후원했던 정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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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청국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조선과 청에 대해 단호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은 아시아에 대하여(실은 조선과 청을 겨냥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탈아론’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탈아론을 상세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일본이 아시아를 흥하게 하는데 소임을 다할 필요가 없고 근대화에 동참하지 못한 주변 국가들에게 서구 열강이 하듯 대하겠으며, “…저 지나(支那, 청)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 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이좋게 대우해 줄 것도 없고, 바로 서양인들이 저들을 대하듯이 처분을 하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자는 더불어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1885년 3월 16일 ‘시사신보(時事新報)’사설에서>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청국이 농민군 진압을 위해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였으니, 일본으로서는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었다.
그런데 농민군이 채 진압하기도 전에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휴전을 해 버린 것이었다. 조선에 진입하게 된 명분이 사라져버리자, 청과 일본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들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청으로서는 조선 땅에서 일본이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의 입장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거한 뒤 친일파들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청군의 물자 수송선을 공격하면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대륙정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군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다. 조선을 벗어나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까지 쳐들어가자, 깜짝 놀란 것은 청국보다도 러시아였다. 청국의 공친왕(恭親王)이 영국과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公使)에게 휴전 조정을 요청하자, 러시아는 앞장서서 휴전에 조인하도록 협력하였다.
이로써 청일전쟁은 일단 끝이 났다. 하지만 일본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 내에서 무력으로 조정을 침입하는가 하면, 내정간섭을 하는 등 본격적으로 조선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청국이 떠나간 조선은 일본의 활무대로 변했다. 일본군은 무자비했다. 조정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통제했다. 철도를 부설하였고, 조선 내에서 일본인들의 상권을 보호하였다. 군용전선을 가설하는가 하면, 전신전화를 개통할 준비를 갖췄다.
이러한 후안무치의 행동에 격분한 조선의 관군이 일본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관군 역시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서양 기술로 생산된 최신 무기인 화기와 기동성에서 앞선 기병과 빠른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군과의 접전은 싸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군의 사기만 높여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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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日 주적은 단 하나 ‘동학농민군’
일본군은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무리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에게도, 민란을 일으킨 자들에게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에게 용서란 없었고,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본때를 보여주자는 속셈이었다. 민란이 일어났던 지역의 백성들이 쉽게 거병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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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이 떠나간 조선의 땅덩어리에 이제 일본의 주적은 단 하나, 동학농민군이었다.
청일전쟁이 끝나자, 일본에서는 일본군의 귀환을 명령했지만, 동학농민군의 진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빌미로 조선 땅에 남아 조선 정복의 야욕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인들을 공격한다는 소문이었다.
분명, 동학농민군의 무리들이거나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에 힘입어 일어난 의병들일 터였다. 의병들은 남해안을 침탈하는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 내에 상주하는 일본인까지 공격하여 살상을 저지른다는 거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제법 조직적인 공격을 하는 의병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는,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계란을 들고 바위를 깨겠다는 무모한 짓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