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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학생회관 출발-계룡-금산 분기점-진주 무주분기점으로 안가고- 판암으로-판암 동대전으로 안빠지고 직진-대구 옥천분기점-충주내륙고속도로-선산-낙동터널-상주 -충주점촌행-문경 점촌 톨게이트-함창 우측으로 2킬로가서-예천행 34번도로-용궁 우측으로 2킬로가다가 회룡포 이정표- 다리지나 바로 우측도로로 장안사 등산 회룡포 전망(다리에서 우회 안하고 직진하면 마을로 들어간다고 함)
[안동가는길]
16전투비행단-영주예천:안동 갈림길에서 안동으로-병선 하회 이정표
[병산서원 가는 길]
하회 마을 나오면 삼거리 에서 우측으로-다리지나면서 우측 자갈길로
[도산서원 이육사 생가 가는길]
안동 시내 통과 해서 어찌어찌 가다가 봉화 가는길 봉화가기전 우측에 조그만 식당 몽실식당 바로 지나 우회- 도산 수련원-숙박
[칼선대]
이육사 절정 시상 실마리-수련원 정문에서 우측으로 걸어서 다리지나 마을 나오고 좌측으로 돌면서 산으로 들어가면 공민왕이 지었다는 사모정과 칼선대가 있음
[이상룡 생가 가는길]
도산면 소재지-몽실식당-35번 도로-산림과학박물관 지나-한국국학진흥원-오천유적지-안동 신세동 7층석탑(국보16호) 임청각
[봉정사]
이정표 따라 가는데 도산 생가, 학봉(김성일) 생가 지났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경상도는 모든 물이 한군데 즉 낙동강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항심이 있고 단결력이 있단다. 전라도는 모든 물이 흩어진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그래서 산발수. 그래서 변덕이 많고 단결도 잘 안되고. 이 말은 김판용 선생이 한 말이다. 변덕이 없다는 말은 반박을 못하겠는데 단결심이 없다는 말은 대한 민국 3대 마피아 중 하나가 호남향우회인데 좀 그렇다. 덧붙여 독일은 라인강 하나로 물이 모이고 프랑스는 여러 강으로 산발한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이야깃거리일뿐 어디서 정식으로 얘기할 것 못된다고 본다. 김판용 선생은 아는 것이 많다. 부럽기도 하지만 그렇게 지식을 쎃기 까지는 바빴을 것이다. 너무 바쁜 것은 싫다. 부럽기도 하다. 나는 학교일만으로도 바쁜데 그는 학교일도 잘하면서 다른 일까지 하고 있으니.
경상도 사람들은 과거보러 한양갈 때 남부는 추풍령을 지나 덕동진인가 하는 나루로 건넜고 북부는 문경 새제를 지나 모계나루로 건넜단다.
특색 있는 가로수 소개도 했다. 영동의 감나무, 충주의 사과나무, 청주의 플라타너스, 담양가는길 메타세콰이어. 월드컵 경기장 이팝나무,
상주를 지났다. 상주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고향이다. 견훤도 경상도 사람으로 전라도 사람을 자극하고 후백제를 건설한 것은 백제를 흠모해서일까 아니면 정권욕을 채울 욕심으로 전라도를 이용했을까? 후자같다.
[회룡포, 하회마을이 유명하지만 보는 맛은 여기가 더 낫다] [여기에 올리는 사진은 전북중등 국어교사 카페에 김판용, 최기재 선생님이 올린 사진인데 허락없이올린다]
[회룡포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맞은편 꼭데기에 있는 정자]
예천 회룡포는 물이 도는 장면으로는 하회마을을 능가했다. 물론 하회마을을 3번째 갔지만 물건나 무슨 봉우리를 나룻배를 타고 가서 올라가 봐야하는데 정확한 대비는 안되겠지만 왠지 그랬다. 전망대까지 오르는데 한 20분 걸렸나? 상당히 힘든 곳이다.
[하회마을]
[유성룔 생가 충효당. 허목이 쓴 글씨라고 한다]
충효당 대문
[충효당 대청 오른쪽 벽은 창호지가 아니라 판자로 막았다. 서향집이라서 어린 아들(유성룡의 아들인지 후대의 아들인지는 모르겠음)이 겨울이면 너무 춥다고 불평하자 나무로 한풍을 막아줬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병산서원 들어가는 복례문]
[병산서원 만대루 집안쪽에서 찍은 사진 뒤로 절벽이 보인다]
하회마을로 갔다. 89년에 갔을 땐 정말 좋았는데 내 생각엔 하회마을은 버렸다. 이럴테면 차라리 현대식 관광단지로 바꾸어서 여기저기 단장도 좀하고 마을 사람들이 사는 집을 개조해서 식당을 차렸는데 음식도 정말 짜증난다. 조상 잘 만난 덕에 엘리자베스 여왕 덕에 참 그렇다. 그런데를 찾아가는 나는 더 한심한 사람이겠지. 한 번은 더 가고 싶다. 나룻배 타고 산에 올라 하회마을을 보고 싶고 하회마을 바깥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 한 번 하고 싶다. 충효당도 온통 사람으로 북적이고 먼지 천지고 마을 사람들은 돈 버니 좋을 것이다. 손을 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퇴락할 것이다.
밥도 사기당한 것 같고 공연은 좋았는데 시간 때문에 다 못보고 뭔가 당한 느낌으로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41대 대통령 부시와 바바라 여사가 방문한 기념으로 심은 소나무가 있었다. 유성룡 선생이 34세에 후학을 지도하기 위해 세웠다고 했나? 관광 안내 해설가가 설명하는데 시조 한 구절처럼 '강산은 들일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에 딱 맞는 장치다. 집 뒤에 산도 있었지만 앞에 모래 사장 강물 그리고 병풍처럼 둘려진 산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해질 무렵 햇빛 물결따라 계곡이 7개로 윤곽이 드러나는데 7폭 병풍이란다.
[만대루에서 잠시 숨을고르고 있는 것 같은 수녀님들]
뒤로 7폭 병풍]병산서원 만대루 김판용선생님 사진
병산 서원 앞 모래 사장. 냇물도 보인다.그 다음 7폭 병풍 산
우리는 대개 좋은 건물이 있으면 곁에서 바라보면서 감탄하는데 이는 잘못이란다. 집을 짓는 사람이 집 구경하러 지었겠는가? 그 안에 있으려고 지었지. 그래서 진맛은 건물 안에서 경치를 바라볼 때란다.
해설가에 의하면 사액 서원이었고 대원군 탄압에도 살아난 서원이라는데 만대루는 늦을만 기다릴대 해뜨는 것도 늦고 달뜨는 것도 늦어 오래 기다린다는 뜻이라는데 김판용 선생은 다르게해설했다.
앞에는 모래 사장, 냇물이 흐르고, 병풍처럼 산이 둘러싸고 이만한 배경도 없다. 서원은 사립대학이다. 낮게 말하면 사설입시학원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출세를 향해 달리고픈 젊은이들이 모여서 공부했던 곳인데 다른 입시생들하고는 달리 이런 풍광속에서 공부한 것은 그래도 행복이었을 것 같다. 집 들어가는 첫문의 현판이 '복례'였다. '극기복례'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있데 몸은 낮추었겠지만 어서 출세해서 가문의 영광을 이루어야겠다는 야망까지 낮추었을까? 이율곡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요즘 젊은이들은 학문에는 뜻이 없고 그저 과거급제를 위한 공부에만 몰두해서 문제다." 나도 그 한 속물 중의 하나이다. 지금 당장 출세했다고 할 만한 자리를 누가 제의해 온다면 그냥 튀쳐나갈 것이다. "오메, 그게 뭐여"하면서.
[병산서원 옆에 있는 머슴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이란다. 지붕은 없고 달팽이 모양으로로 돌려 자동으로 문을 대신한 건축양식이다.]
[내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찾았다. 정명진 친구와 병산사원 내 구경하는 중, 뒤에 사진 주인공 수녀님이 보인다.]
이육사 선생 동네에 있는 도산 수련원. 도산초등학교를 YMCA에서 사들였다.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 점심때 못먹어 화난 것도 있고 해서 그읏에 듬뿍 퍼담아 왔는데 너무 퍼와서 다 먹느라 고생했다. 강연 끝나고 또다시 삼겹살파티. 배터지게 먹었다. 저녁 식사후 안동 시인 '안상학'님의 강연이 있었다. 이육사 시를 해설했는데 그냥 특별할것도 없고 잔잔하게 말을 이어갔는데 청포도를 들고 이육사가 친지에게 '정말 이 시가 내가 지은 시가 맞는지모르겠다.'고 하면서 감탄했다는 일화. '청포도'는 우리 민족, '마을'은 조국을 생각하며 지었단다. '내 고향 7월이면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했는데 7월은 음력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도 궁금증이 하나 풀린 셈이다. 절정에 나오는 '한 발 제겨디딜 곳이 없다'는 시 구절은 바로 앞산 봉우리 칼선대에 자주 오르던 경험이 시로 녹아진 것이란다. 그래 이튿날 모두들 일정을 바꿔 칼선대 등산을 했다. 오르는 데만 한 10분 걸렸나. 그다지 힘든 코스는 아니었다. 칼선대에 올랐다. 난간이 없었다면 정말 한 발 제겨 넣기가 힘들 것 같다. 본토박이사람에게 시에 얽히 사연을 들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해설피'가 해질무렵이라는 사투리라는 말을 교원대 교수로부터 들어 충격이었는데 육사 시에 대한 해설은 의미있는 여행에 포만감을 주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안상학 시인이 안내해 준다는 칼선대 길을 기다렸는데 시인은 전날 술먹고 떨어졌단다. 나랑 성질 급하고 술 몸이 괜찮은 선생들이 나가보았지만 이 성황당으로 해서 냇가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칼선대 제대로 잡은 사진이다. 김용락 선생 ]
[칼선대 가는 길에 있는 왕모정 ]
육사 선생의 마을에 들렀다. 아직도 육촌 형제들이 살고 계신단다. 시비 위쪽으로 다섯 가옥 쯤 되었다. 육사생가는 조금 아래에 위치하는 바람에 수몰지역에 해당 집을 옮기게 되었다. 89년도에 가보았다. 죽어서라도 후세들에게 위로와 존경을 받고 있으니 그래도 나은 삶인가하는생각을 해봤다. 외동따님은 지금 일본에서 거주한단다. 안상학 시인에게 왜 일본에 사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 이유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남편 따라가 사는 것일거라고 추측했다. 그래도 잘 사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중학교 국어책에 만주로 끌려가면서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안타까워하던 이육사의 모습이 실려있는데 후손들이라도 제발 잘 살아주셨으면 좋겠다.
[이육사 시비]
[우리 국보 탑 바로 옆으로 철로 방음벽이 보인다. 일본 개새끼들]
안동 시내에 있는 신해동 7층석탑과 바로 옆에 70미터 정도 떨어진 이상룡 선선의 생가 밈청각을 보았다. 디카를 안가지고 가서 사진을 내 구미에 맞게 찍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중앙선 철로와 탑과의 거리가 5미터나 될까? 또 철로가 임청각은 마당을 자르고 지나갔다. 설명을 듣고 구경하는 중에 기차가 4번 정도 지나갔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그냥 욕이 나왔다. "개새끼들' 반성하지 않고 있으니 개만도 못한 짐승들. 저들이 왜 물질적으로 잘 살아야 하나? 과연 정의의 신은 있는가?
[임청각의 군자정이다. 이 안에 이상룡 선생 사진도 있고 민박이 가능하게 되었있었다. 방이 있고 마루가 있고 ...]
임청각을 보았다. 99간 집이었다고 한다. 실력있는 양반으로서 공자 맹자는 시렁위에 잠깐 올려 놓고 우선 급한 나라부터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지금 이상룡 선생의 후손들은 지리멸렬 상태란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애국하면 3대가 멸하고 맞는 말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생각났다. 지금의 안동은 어떠한가? 3공화국 전까지만 해도 안동 대구 마산 부산은 그야말로 반골 저항 개혁의 도시였다. 대구폭동사건, 3.15부정 선거 이전에 데모가 일어났던 곳이 대구다. 당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야당 선거 유세에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석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령이 내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대모를 했었다. 뺨 맞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광주항쟁보다 10.26이 있게한 부마사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17년 독재 정권이 무너졌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경북은 이미 박정희 장군의 휘하에 속속 몸을 굽히고(복례) 들어 갔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때도 빌붙어서 한 자리 하려는 경상도 양반의 후손들이 끝없이 줄을 섰다. 마산은 어떤 도신가? 4.19혁명이 있게한 핵심적인 요인을 제공한 도시가 아닌가? 김주열 학생 시신 사진. 물론 김주열은 남원 사람으로 마산상고 유학 중이었지만. 마산은 이승만 독제 정권, 박정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다. 그랬던 도시가 김영삼 민자당 3당합당으로 인해 변절의 길을 또 걷게 되었다. 또다시 경남마져도 '복례'한 것이다. 우리 호남도 잘 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회가 좋았을 뿐이다. 아마 김대중이 노태우와 손잡았더라면 영남 대신 호남이 '복례'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수구 진보 타령이냐고 따지면 좀 그렇겠지만 대구 부산 마산이 그 바른 뜻을 이어갔더라면 우리의 현대사는 훨씬 돌아가는 수고를 아꼈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 애국지사 이상룡, 이육사를 뵈면서 다른 한편으로 불끈 솟는 답답함이 있다. 3,5공화국에서 '복례'했던 유명인사들은 이곳에 들러서 무슨 생각을 할까?
[봉정사]
대웅전에 용마루 기와중 하나가 홀로 파란색으로 끼어있다. 해설자 말이 엘리바베스 여왕이 기념으로 사인한 기와라고 한다. 이 봉정사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버려놓았는지도 모른다. 하회마을과 더불어. 물론 주지스님은 입장료 들어오는 소리에 입이 늘 귀에까지 걸려있겠지만. 올라가는데 마침 연속극 '황진이' 좔영이 끝났는지 하지원, 문천식이 내려오고 있었다.영상으로 볼 때는 참 예쁘던데 실제 보니까 작고 아담하고 장난감 같기도 하고 저런 여자는 평범한 삶보다는 다른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영화 '달마가....' 를 찍은 영선암인가도 가보았지만 좋구나하는 생각보다는 흙먼지 날리는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만 있고 좀 옛날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사람으로 북적대는 봉정사도 그 참 멋을 잃었을 법하다.
돌아오는 길은 대구까지 나가서 88고속도로로 나왔다. 전라도 가는 길은 생생 달리는데 경상도로 가는길은 정체가 심했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와서 돈쓰고 가는 중이리라. 고마운 일이다.
[식당소개]
옥동 손국수 054-855-2308 018-643-0204
오는 날 안상학 시인 안내로 먹었는데 반그릇 정도의 밥공기에 쌈밥을 먹게 나오고 바로 큰 대접에 국수가 나오는데 맛이 좋다. 양도 많고 맛도 있고
몽실 식당
도산수련원 가는 길에 있는데 기사님이 칭찬한다. 가보지는 않았는데 믿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