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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어 |
한국어 |
수메르어 |
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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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울(Annul)[최고 신] |
한울 [하느님] |
Bad 받 [ 밭 ] |
밭 (Bat) [밭, 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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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An) [天-하늘] |
한 (han) [天-하늘 ] |
Na 나 [나 1인칭] |
나 Na [ 나,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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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Gir) |
길 (Gil) [路] |
Ge 그 [3인칭 ] |
그 Ge [ 3인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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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Ra) [~ 에서 ] |
로 (Ro) [ 조사 ] |
이 [1 인칭 ] |
이 [지시대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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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Abi [ 아버지 ] |
아비 [ 夫 ] |
Uhma 움마[엄마 母] |
엄마 Uhma [엄마 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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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Nim [ 님 任 ] |
님 (Nim) [ 사람 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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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어는 "교착어"이다.
즉, ~은, ~는 , ~이, ~가, 를 쓴다. (예: 나는, 너는, 사람이, 나무가, 등 )
그리고 말의 순서가 "주어 + 목적어 + 동사" 이다.
이러한 말은 한국어, 만주어, 인디언 말과 수메르어 뿐이다.
즉,'한국어를 쓰는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들이 문명을 다 가지고 갑자기 나타나서,당시 그 지역 사람들은 동물 가죽 옷을 입고 살 때(원시 석기시대), 갑자기 나타난 그들은 천을 짜서 색색으로 염색을 할 정도의 문명을 가지고 글자와 건축술도 가지고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지역)에 갑자기 나타나서 생긴 문명이 그 유명한 "수메르 문명"이다.
세계 학자들에 의하여 에덴동산도 거기 있었다고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만주에 있는 피라미드와 유사한 피라미드를 쌓는다. (후에 수메르문명이 이집트로 건너가서 이집트문명이 일어나고,그리스로 건너가서 그리스 문명이 일어난다. 수메르문명은 유럽문명의 뿌리이다.-서양 유럽사)
이렇듯이 배달문명이 인류문명의 시작이라 하는 근거들이 자꾸 드러나고 있다. 문명이 수메르에서 한국으로 온것이 아니라,한국에서 수메르로 갔다는 증거 중의 하나가,농사를 맨 먼저 지은 사람들도 동아시아 사람들이고,개를 제일 먼저 기른 것도 동아시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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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피라미드
경북(慶北) 안동(安東)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로 약 30Km 떨어진 학가산(鶴駕山) 북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중남부에서 가장 온전한 상태를 보전(保全)하고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이다. 정확한 지명은 안동시(安東市) 북후면(北後面) 석탑리(石塔里) 구억들 마을이고 이 피라미드 옆에는 석탑사(石塔寺)가 있어서 피라미드를 지켜주고 있다. 지명(地名)이 말해주듯 오래 전에서부터 이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너무 오래 흘러서인지 아니면 옆에있는 고목(古木)이 뿌리를 뻗으면서 피라미드 남쪽을 주저앉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원래에는 분명 정방형(正方形)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맨 아랫단의 길이가 한 변은 13.2m, 다른 한 변은 12.7m로 약간 직사각형의 모양이다. 높이는 대략 4.5m이고 가장 윗부분이 근래에 덮어놓은 돌로 인해 한 단이 가려져 보이는 데, 이를 포함하면 총 6단이 된다.(1)

석탑에 쓰인 돌들은 강돌이 아닌 깬돌로서 주변의 바위에서 채석한듯 보이며, 이 근처에서 흔히 볼 수있는 자연석(自然石)을 그리 다듬지 않고 쌓아 올렸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에 전체적으로 약간 주저앉은 것 같다. 석탑의 위치는 앞에 석탑천(石塔川)이 가늘게 흐르는 조골산(照骨山)의 서쪽 기슭으로서 남쪽과 서쪽에는 학가산(鶴駕山, 870m)의 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비록 산으로 둘러싸인 좁다란 계곡에 형성된 평지이지만 이 석탑 만큼은 남쪽에 여유있게 자리잡았으며, 석탑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이십여미터 거리에 석탑사가 자리하고 있다. 북서쪽 하천가에 위치한 석탑사의 배치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서울 석촌동의 피라미드는 큰 피라미드의 모서리에 작은 피라미드를 배치하고 있으며, 또한 의성 피라미드도 피라미드의 현위치에서 북서쪽 근거리에 절자리가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전형(典型)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북서쪽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는 '석탑사'는 석탑을 보좌(保佐)하는 역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되며, 석탑과 석탑사의 위치는 거의 동시에 자리잡은 것이 분명할 것이다.
석탑의 좌향(坐向)은 각 변(邊)이 동서남북을 가르키고 있어서 장군총(將軍塚)하고는 좌향이 다르다. 계곡의 입구는 북쪽이며 남쪽에 학가산이 있다.
이 학가산은 과거에는 하가산(下柯山)으로 불리웠으며, 군사적 요충지(要衝地)로서 상봉(上峰)에 올라서 주변을 보게되면 소백산을 포함하여 안동지역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는 중계소(中繼所)가 자리잡아 과거의 흔적이 많이 파괴되었지만, 정상 부근에 축성(築城)의 흔적이 있고 또한 옹달샘도 있다.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傳說)은 여러가지인데, 첫번째는 아주 먼 옛날, 이곳에서 2백리(약 40Km) 떨어진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3천 승려가 그들이 먹을 공양(供養)밥을 신통수(神通手)를 부리는 학가산의 능인(能仁)대사가 훔쳐간다는 말에 격분, 그를 죽이자고 돌을 들고 여기까지 떼지어 왔으나, 이 낌새를 예지하고 이곳에 미리와 대기하고 있던 능인대사가 대성일갈, 그들의 행동을 꾸짖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승들은 살상을 목적으로 갖고온 돌을 공손히 한 자리에 모아 탑을 쌓아 지금의 돌탑(石塔)과 절(殿閣)이 세워졌다 하며,(2) 두번째는 옛날 명인도사(明認道士)와 마고선녀(麻姑仙女)가 바위집에 살면서 돌신(石鞋)을 신고, 돌말(石馬)을 타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신통력이 있어 소백산을 왕래하면서 밥을 날라다 먹었다고 한다.(3)
이밖에도 전설이 더있지만 대부분 위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고려(高麗) 후기의 고승(高僧) 일연(一然, 1206~1289)이 말년에 군위(軍威)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編纂)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편(義解篇)에 보면,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의상대사(義湘大師)의 10대 제자 중 "오진(悟眞)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 석등에 불을 켰다. "라는 기사(記事)가 있다. (4) 여기서의 골암사는 현재 석탑사의 동쪽 산을 조골산(照骨山)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석탑사의 원래 명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의 오진(悟眞)이 전설에서는 학가산 남쪽의 봉정사(鳳停寺) 창건자이자, 의상의 10대 제자로서 같은 스승을 모신 능인(能仁)으로, 그리고 친밀하여야 할 관계가 전설에서는 적대적(敵對的)인 관계로 바꾸어져 있으며, 기록에서는 부석사에다 불을 피워주고 전설에서는 부석사에서 밥을 훔치거나 얻어먹는 것으로서, 학가산에 기거(寄居)하였던 기인(奇人)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영주 부석사와는 분명히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지(發源地)인 부석사(浮石寺)의 창건(創建) 설화(說話)를 보면 이렇다. 당(唐)나라 장안(長安)에서 10년간 유학(留學)하고 등주해안(登州海岸)에 살던 선묘(善妙)와 함께 고국(故國)으로 돌아온 의상(義湘)은 5년 동안 산천을 두루 편력(遍歷)하였다. 그러던 중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되었는데,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神靈)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法輪)을 굴릴 만한 곳이다. 이교도(異敎徒)의 무리들이 5백 명이나 모여 있을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이 때 함께하고 있던 선묘(善妙)는 허공(虛空)에서 변신(變身)을 하여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 일리(一里)가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伽藍)의 지붕 위에서 떨어질까 말까 하는 모양을 하였다.
그 곳의 군승(軍僧)들은 소승(小乘)에 집착한 무리들이었는데, 그 돌을 보고 사방(四方)으로 흩어져버렸다. 그 후 선묘(善妙)는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變身)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5)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언급하듯이 부석사라는 명칭은 이 '뜬돌'에서 비롯하였고, 의상대사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 부르고, 화엄종(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이라 부른 연유(緣由)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한 고려(高麗)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하였는데, 선달사의 '선달'은 '션돌'의 음역(音譯)이라고 한다.(6)
무량수전의 뒷편 북서쪽 모서리의 경사진 절벽 아래에 위치한 이 부석(浮石)은 길이 약 10여m의 화강암(花崗巖) 반석(盤石)으로 그 아래에는 깨어진 바위들이 이곳저곳 놓여있고 가장자리에 커다란 바위들이 고여져 있으며, 바위 아래는 사람이 들어가서 기거(寄居)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결국 뒷편의 암반(巖盤)이 절리(節理)로 인하여 떨어져서 자연적으로 돌집과 같은 모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북송(北宋)의 찬녕(贊寧)이 펴낸 송고승전(宋高僧傳, AD 988) 의상전(義湘傳)에 수록되어 있는 위의 설화(說話)는 이 대규모의 거석이 떨어져 내리면서 여기에 모여있던 군중들이 놀라 도망가게 된 사연을 과장하여 기록하였다고 추정되며, '대석단(大石壇)' 건축에 사용된 거석들이 매우 많은 데도 불구하고 여기의 '부석(浮石)' 주변은 그대로 나두었다는 점에서 '부석'은 곧 보존 가치가 있는 유적(遺跡)으로서 반대자(反對者)에 대한 승리를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고구려 멸망이 서기 668년이고 부석사 창건이 서기 676년(新羅 文武王 16년 2월)인 점을 감안하면, 대략 6세기 말까지는 이곳 소백산(小白山, 1440m) 아래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의 입김이 닿지않는 곳으로서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土俗信仰)이 우세하였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의 거석으로 민중을 교화(敎化)시켰으며, 불교의 교리에만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현지의 신앙을 바탕으로 교세(敎勢)를 확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석등(石燈), 대석단(大石壇), 당간지주(幢竿支柱)와 함께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부석사 삼층석탑은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보여주어 연구의 대상이 되고있다. 즉 탑 하나를 세울 때는 법당(法堂) 정면에 그리고 쌍탑인 경우에는 불전(佛殿) 좌우에 배치하는 것이 통례(通例)인데, 여기서는 남향의 무량수전 앞모서리인 동쪽 옆이며 무량수전 보다 높은 언덕에서 남서향으로 단 하나만 세워져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배치가 여기서는 예외이며, 이에 대한 의문은 이미 신라 때부터 기록으로 남기고 있고, 고유섭(高裕燮)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7) 뿐만 아니라 무량수전 내의 본존불은 건물 내 서쪽 중앙에서 동쪽을 향하여 놓여져 있으며, 당간지주는 무량수전과 같은 방향으로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제각기 다른 방향이다. (8)
이런 점에서 창건 당시는 지금에 비하여 지형(地形)과 진입로(進入路)가 매우 달랐으며, 각각의 건축시기도 알려진 바와는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송고승전'의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기존의 신앙을 능가하고 불력(佛力)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기존의 신앙지로서 적합하였던 지형과 배치를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삼층석탑 또한 여기 석탑리의 경우에서처럼 과거 피라미드형 돌무지나 그에 버금가는 기존(旣存)의 석물(石物) 또는 석조물(石造物)을 대치(代置)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곳에서의 기존 세력은 봉황산(鳳凰山)을 떠나게 되었고 그중 일부가 석탑리에 들어와서 석탑을 쌓으면서 재기(再起)를 꾀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부석사와 상호(相互) 적대적(敵對的)인 관계를 말해주는 전설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11년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원산성과 가불성을 함락하였는데, 원산성은 지금의 예천군(醴泉郡) 용궁(龍宮)으로 비정(比定)되고 있으며, 소백산 넘어 영월(寧越) 근처에 위치하는 정양산성(正陽山城)과 태화산성(大華山城?)은 고구려산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천(醴泉), 안동(安東)을 포함하여 동해안의 영덕(盈德), 청하(淸河) 지역까지 한 때 고구려 영역이었다고 하며,(9) 안동군과 영풍군 지역을 1세기 후반부터 신라(婆娑王)가 영유하다 5세기 초에 고구려(廣開土大王)가 점령하여 40여 년간 영유한 지역이라고 한다.(10) 그리고 영풍군(榮豊郡) 순흥면(順興面) 태장2리(AD 535)와 읍내리(邑內里, AD 539)에서 발견된 고분 벽화는 비록 신라시대의 수도(首都)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신라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이 일대는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接境) 지역이었으며, 석탑리와 인접한 신전리(薪田里)의 경우, 남쪽으로는 학가산을 비롯하여 전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산속의 분지(盆地)나 다름없고, 북쪽으로는 낙동강 지류가 구비구비 흐르고 있어서, 외부와의 단절이 가능한 은둔지(隱遁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패망(敗亡)한 고구려 장수(將帥)나 유민(遺民)들이 이 곳에 살면서 영토회복을 꿈꾸며 집안의 장군총과 비슷한 모양으로 이 피라미드를 쌓지 않았나 생각하여 볼 수 있다.(11)
석탑리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그 축조상태가 분명하여 이미 경험이 축적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건축된 구조물로서 약간의 기념비적인 성격도 배제(排除)할 수는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4대 탈해왕(脫解王) 편을 보면, 왜국의 동북쪽 천 리에 있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의 탈해왕이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한 후,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서 돌무덤(石塚)을 만들었다.(12)"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돌무지가 단지 도착 기념으로 만들어졌으며, 후대에 만들어진 경계비(境界碑)나 순수비(巡狩碑) 등과 같은 성격으로서 산 정상이나 언덕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숨어있듯이 계곡 안에 자리잡은 이 구조물은 대중에게 과시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성격보다 은밀하게 감추려는 의도가 강하여 일단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성격은 제외하여도 무방(無妨)하며, 차라리 인력동원이 가능한 귀족 출신의 무덤이라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서울 석촌동은 과거 돌산이나 바위가 전혀 없는 들판이었는데, 이곳에는 동서남북을 네변으로 한 대형 피라미드형 적석총(積石塚)과 함께 원형 봉토분(封土墳)이 있다. 또한 층위적(層位的)으로 적석총 이전의 것으로 알려진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까지 동일구역에서 발견되는데, 아직 피라미드형 적석총에 대하여는 단지 백제(百濟) 초기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묘제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여기와 의성 지역까지 백제의 영역일 수 있느냐는 점에서 이러한 적석총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그 주체(主體)는 의문으로 남는다.
고구려와 백제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었으며 기껏해야 40년간 고구려 말기에 통치를 받은 지역에서 고구려 말기의 묘제(墓制)인 원형 봉토분(封土墳)이 아닌 방단형(方壇形)의 돌무지 무덤을 축조(築造)하였다는 점은 이것이 부석사의 창건설화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이교도(異敎徒)의 유적으로서 고구려나 백제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퍼졌던 돌무지 무덤으로서의 가능성을 강하게 내포(內包)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1996년 9월, 1997년 12월 촬영, 1996년 9월 작성, 1997년 12월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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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를 책으로 펴낸 유우식(兪禹植)은 1층의 서쪽 길이를 12.8m, 남쪽 길이를 13.6m, 1층에서 5층까지 각각의 높이가 80Cm~1m이며, 탑꼭대기의 입석(立石)을 포함하여 전체높이 5.23m로 적고있다. 또한 '안동신문(安東新聞)'에서는 서측의 기단(基壇)을 포함하여 전체높이 6.5m로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막돌과 깬돌들을 쌓아놓은 것이라 각층의 정확한 높이를 산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필자는 꼭대기의 입석 높이를 제외시켰다. (유우식, '고구려·백제의 바위유적', 서광학술자료사, 1994. 80쪽)
(2)'안동신문(安東新聞)', 1992.4.20.
(3)위의 책, 169쪽
(4)이재호 옮김, '삼국유사(三國遺事) 2', 솔출판사, 1997. 262쪽
(5)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발췌된 것임, 한국불교연구원, '부석사', 일지사, 1976. 60~61쪽 참조, 그러나 현지 안내판에는 "의상이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여기에 살고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善妙神龍)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고 쓰여있다.
(6)위의 책, 21쪽
(7)고려 문종 8년에 세워진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의 비문(碑文) 참고. 범종루(梵鐘樓) 앞에 세워진 석탑 2기는 근처의 속칭 약사골 동방사지(東方寺址)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위의 책, 60~61쪽
(8)창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높이 4.8m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상당히 우아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하부에는 원석(原石)이 노출되고 조각된 부위의 높이가 서로 달라 당시의 지표면이 지금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의 석당간(石幢竿)의 건축 방법이 우선 거친 원석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다듬는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현재 상태로 보면 선돌을 세워놓고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 앞에 옹기종기 모여져 있는 선돌과 돌들은 약 20여년전에 관상용(觀賞用)으로 조성된 것이다.
(9)박진욱, 조선고고학전서(고구려), 1991. 189쪽 참조
(10)유우식, '고구려·백제의 바위유적', 서광학술자료사, 1994. 58쪽
(11)유우식은 광개토대왕이 이곳 학가산에서 죽었으며, 여기에서 광개토대왕의 기념비 석재를 낙동강으로 반출하였고, 그 기념으로 이 탑을 조성하였다고 주장한다. 위의 책 참조
(12)이재호 옮김, '삼국유사(三國遺事) 1', 솔출판사, 1997. 120~127쪽 참조
(c) 변광현 1996-1997 [펌] 한민족참역사
의성 피라미드
보통 피라미드는 단군의 고조선때부터 고구려까지 이어오던 우리민족의 전통무덤양식이다.
안동 피라미드에 이어 의성피라미드도 어떤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역사학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의성에서 안평으로 약 5Km 정도 가다보면 석탑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 골짜기 안에는 안동 석탑리 피라미드와 규모와 모양이 비슷한 돌무지 무덤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1리 (慶北 義城郡 安平面 石塔一里) 에 속하며, 안동 피라미드에서 직선거리 약 37Km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안동 피라미드와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추측케 한다. 단지 안동 피라미드와 다른 점은 이 돌무지 무덤 사방에 감실 (龕室)을 만들어 조그만 돌부처를 그 안에 안치하였는데, 현재는 동쪽과 남쪽의 감실에만 남아있다.
현지 주민이 전하는 말로는 동, 서, 남쪽의 감실 안에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돌부처가 있었으며, 3,4년 전에 서쪽 감실 안의 돌부처가 도난당하면서, 돌무지 서편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쪽 산기슭에는 과거에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다.

이 곳은 동, 서, 북쪽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트여있는, 남북으로 길다란 분지 (盆地)에 해당하며 석탑1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백여미터 가다보면 왼쪽 산자락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게되면 단촌 (丹村)이라는 마을로 향하게 되며, 여기서 비롯된 하천은 안평 (安平 또는 朴谷) 을 거쳐 안계 (安溪)를 지나 낙동강과 합류하게 된다.
이곳의 지형은 두드러지게 높다할 만한 산이 없으며 해발 300 ~ 400m 이하의 야산과 구릉이 대부분으로 별다른 지형적 특징이 없는, 여기에서 매우 일반적인 계곡 중 한 곳에 이 피라미드가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주변에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게끔 좁다란 계곡에 터를 잡았다. 게다가 넓은 터 한가운데 세울 법한 석조물이 비스듬한 경사면 (현재는 밭) 끝자락에 얹혀 있기에 축조 당시 터잡기에 그리 여유가 없었지 않았나 생각되는 현장이며 그런고로 북쪽의 돌들이 붕괴되어서 이 마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수시로 보수하여 왔다고 한다.
사면 (四面)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르키고 있으며, 현재 동쪽의 하단에서 제1단을 알아볼 수 있고, 이를 감안하여 보면 전체는 7단의 방형단으로, 남쪽과 서쪽의 제일하단은 2단으로서 주변의 토사가 쌓여 제1단이 묻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아랫단이 동서로 기울고 동과 서쪽의 단의 높이가 달라서 지금의 경사면과 단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사가 쌓일 수 있는 지형이 아닌 깍여 내려가는 경사면 끝자락이여서, 1m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어느 정도 파묻힌 부분이 있겠지만 지금의 모습이 원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주민들이 보수하여 원래와 달라졌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연석의 축조는 밑에서 부터 다시 쌓아야만 제대로 유지할수 있기에 그 보수작업도 최소한도 내에서 이루어졌지 재축조에 버금가는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남쪽의 제1단은 길이 12.7m 이며 서쪽의 제1단은 11.4m 이고 남쪽 중앙에서의 높이는 약 3.5m 로서, 3,4년전 도굴범이 정상부터 서쪽 감실까지 돌을 들어내면서 정상의 단이 원래와 달라진 것 같다. 약 10여년전 어느 재일교포가 이 피라미드를 답사하여 책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책자에 그 당시의 모습과 제원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거의 정방형인 맨 아랫단에서부터 윗단으로 갈수록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게 단을 쌓았으며, 각각의 단의 높이는 제각각이지만 평균하여 약 90Cm 정도의 높이이고, 제7단인 정상은 3.6m x 1.6m 의 직사각형이다.
안동 피라미드와 비교하여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는 감실은 현재 동, 서, 남쪽에서만 확인할 수 있으며, 북쪽에서는 감실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고, 주민들 또한 북쪽 감실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분명 북쪽 감실이 있었으리라 추측은 되지만 현재 상태로서는 이를 알기가 힘들다. 그리고 감실이 애초부터 설치되었다고 하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각각의 감실은 지표면에서 일정한 높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 서쪽의 감실은 지표면에서 부터 3단에 있으며, 동쪽 감실은 지표면에서 부터 2단째이고, 동쪽에서 드러나 보이는 제1하단을 포함하면, 3단째에 위치하는데, 동쪽과 서, 남쪽 감실이 같은 단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감실이 각각의 단에서 들어가 있어야 올바른 감실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각단의 표면에 돌부처를 세워놓고 그 위와 옆에 돌을 쌓아 감실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 잔존하는 돌부처의 석질이 여기에서 쓰여진 돌과 다른 것으로 연한 노랑색의 풍화된 사암 (砂岩) 종류이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석질이 아니다. 주민의 말로는 이 돌부처와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한 것이 인근의 옥련사 (玉蓮寺)에도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 확인하여 보지 못하였다. 돌부처의 크기는 대략 높이 85Cm, 너비 45Cm 이며, 두께가 약 30Cm 로서 길죽한 타원형의 돌을 깍아 가부좌하고 있는 부처를 부조하였으며, 동쪽 감실의 부처 하단에는 다섯 갈래의 연꽃 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여기의 감실과 돌부처는 돌무지무덤을 축조한 이후에 가설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집안의 장군총과 같은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내부에 돌방을 두기는 하여도 이와같이 돌무지 외부에 감실을 설치한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특이하다 할 수 있다.
후대에 불교의 영향으로 이 돌무지무덤에다 감실을 설치하여 불교의 옷을 입혔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 형의 돌무지무덤이 주로 고구려와 관계된 영역에서 등장한다는 지금까지의 사실로 인하여 이 곳의 돌무지무덤도 안동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관계된 유적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며,
안동과 청송 그리고 영일군의 청하면까지 한때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학설이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부 지방의 고구려 유적은 남쪽을 등지고 북쪽이 트여진 계곡에 위치하는데, 여기서는 남쪽이 트여진 계곡에 위치하며 게다가 아직까지 의성 지방에서는 고구려와 관계된 유물이 전혀 출토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주 오래 전에 여기에서 부터 남서쪽으로 75Km 떨어진 해인사 (海印寺) 에 불이 났었는데, 이 피라미드 옆에 살고있는 어느 영험한 스님이 여기에서 정화수 (井華水)를 적신 솔가지를 들고 주문을 외우며 물을 뿌리니 해인사의 불이 꺼졌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가 이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지는 전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축조에 대한 전설이 없다는 것은 축조 당시의 주민이나 관계된 사람이 이 곳에 주거하지 않고 이주하였거나, 모조리 사멸 (死滅)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새로 이주한 사람들도 이 유적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돌무지를 쌓았는가? 또 이 지방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전탑이나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 아닌 독특한 고구려 양식의 돌무지를 무슨 이유로 쌓았을까?
단지 안동의 돌무지무덤을 모방한 것일까? 모방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하등의 근거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물론 고구려의 전방 경계선의 표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와 유물이 너무 빈약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계곡에 숨어서 누가 오나 안오나 옅보듯이, 산 사이에서 고개를 비죽 내민 이 돌무지는 석탑리의 감추어진 보물로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묵묵하게 세월을 지켜보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우리의 고대 역사에 대하여 넌지시 의문 부호를 보여주고 있었다.
(1997년 3월 촬영, 1997년 3월 작성)
(1)필자는 아직 이 책자의 제목이나 출판사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였다. 이를 아는 독자가 있으면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2)박진욱의 조선고고학전서에서는 대략 서기 511 년에서부터 629 년 신라군이 랑비성 (청주) 을 함락시킬 때까지의 기간으로 보고있으며, 모 학자는 고구려가 영풍지역을 5 세기초 40 년간 점령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유린군은 고구려의 우시군이며 그 속현인 해아현은 고구려의 아예현이고 지금의 청하현 이라고 씌여있다. ... 전성기의 고구려 남쪽 계선은 서쪽은 충청남도 례산 (예산)으로부터 동쪽으로 연기와 충청북도의 문경군, 례천군 (예천군), 안동군, 청송군을 지나 영일군의 청하면에 이르는 계선으로 된다. " 인용; 조선고고학전서 (고구려) 189쪽 , 박진욱,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1991
[펌]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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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http://www.mugunghwahongcheon.go.kr/sub4/h/history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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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天竺)과 천독(天毒)이 동일하다면 왜 조선(朝鮮)과 나란히 있지? -최두환
오래된 일이지만, 제목으로 “《산해경》에 적힌 ‘조선’은 중국대륙의 중심에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가 있다.
거기에 나온 내용은 <海內經>의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人愛之.”의 번역을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하늘이 사랑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까지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天毒”을 “하늘이 사랑하는 나라가 있는데”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또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원문의 문장과 나라의 이름[有國名]과에서 그 흐름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동해(東海) 안과, 북해(北海)의 모퉁이와가 조선(朝鮮)과 천독(天毒)과의 어떤 간계가 있으며, 지리적으로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동해니, 북해니 하는 것은 동/남/서/북이라는 방위의 중심에서 볼 때에 어디가 중심이 되는 것인지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동쪽/북쪽이라는 것은 사실상 매우 부정확/불명확한 지리적 위치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일단 동쪽의 안이라면 그 서쪽에 중심지가 있을 것이며, 그 중심지가 통상적 관내도(關內道: 섬서성 장안 중심)이든, 천산산맥, 파미르고원이 있는 곳이든, 동해는 한반도와 일본렬도가 있는 지역에서 서쪽이 되는 바다, 즉 동경 123도에 있는 황해의 서쪽인 산동반도/강소성/안휘성/절강성 등지가 “동해의 안[東海之內]”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조선”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북해의 모퉁이[北海之隅]”라는 말은 어디에 걸리는 말인가? 이것은 분명 “천독(天毒)”과 관련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天毒”을 “하늘이 사랑하는 나라가 있는데”라는 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 된다. 이는 “조선”과 마찬가지의 지리적 위치를 가지는 국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산해경》속의 지리의 중심지는 두 가지로 나온다. 하나는 구조적으로는 오장산경(五臟山經)을 보면, 하남성 낙양과 섬서성 장안이 중심이 되지만, 내용적으로는 천산산맥[곤륜산] - 파미르고원이 중심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란 지리적 위치는 별로 변함이 없을 수 있지만, 일단 “북해의 모퉁이”에 있는 것이 “천독”이라는 나라라고 본다면, 그 “천독”이 어떤 성격의 나라이며, 지리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중국력사지도집》제2책, (p.37-38, p.65-66)의 지도에 보면, 대월씨(大月氏)의 남쪽 인더스강 상류,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 “天毒(身毒)”라고 적혀 있다. 이곳은 인도의 서북부 이슬라마바드[Islamabad: 伊斯蘭堡(이사람보): 북위 34도, 동경 73도]가 되는 곳이다. 즉 “천독(天毒)=신독(身毒)”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身毒”(신독)은 무엇인가?
(1) <宋史>(卷490 列傳249 外國6) 天竺國舊名身毒, 亦摩加陀, 復曰波羅門.
(2) <後漢書>(卷89 列傳78) 天竺國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
이 두 사료 <송사>와 <후한서>에서 보면, 옛날에 “신독”이 “천축국”으로 고쳐졌으며, 그것이 월씨국(月氏國)의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국명을 가진 나라가 동해의 안과 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북해의 모퉁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어디로 보겠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3) <史記>(卷123 大宛63) 身毒在大夏東南數千里. 大夏在大宛西南千三百里.
(4) <漢書>(卷96上 西域傳 65上) 捐毒國, 王治衍敦谷, 去長安九千八百六十里. 東至都護治所二千八百六十一里至疏勒, 南與蔥嶺屬無人民. 西上蔥嶺則休循也. 西北至大宛千三百里, 北與烏孫接.
신독국은 대하의 동남쪽에 있고, 섬서성 장안에서 서쪽으로 9860리 되는 곳이다. 이곳은 역시 인도의 서북쪽 인더스(Indus)강 유역이다.
그렇다면《산해경》원문의 “北海”라는 말은 “南海”라는 말로 바뀌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北海”는 인도의 “오천축(五天竺)”의 중심이 되는 “중천축국(中天竺國)”의 북쪽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산해경》의 구도와는 원칙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렇게 해석된 내용에서 “身毒”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와 관련된 강명을 보면, 대개 영어권에서는 “인더스(Indus)”라고 한다. 그런데 페르시안(Persian)말로는 “힌두스(Hindus)”라고 하며, 산스크리트(Sanskrit)어[범어(梵語)]로는 “신두(Sindhu)” 또는 “신두스(Sindus)”라고 한다.[유원수 역주,《몽골비사 元朝秘史》(사계절, 2004), p. 273/p. 484] 요즈음의 이란에서는 “헨드”라고, 터키에서는 “힌디”라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印度”의 印“을 조선의《동국정운》에서 “여린 ㅎ”이라는 문자가 들어간 “?”이다. 즉 알파벳트로 첫 자가 “H”가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의 발음이 페르시아안, 즉 중앙아시아에서 발음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동일언어권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자 발음으로는 물론 “신독”을 현대에 와서는 “인도(印度)”라고 바뀌었다.
(5) <표준 종합역사지도>(조좌호, 수학사, 단기4294, p. 13) 신드 Sind.
(6) <고등학교 역사부도>(오인석, 이존희, 최찬일; 두산동아, 1997, p. 80) ‘1877년의 인도’에 인더스강 하류가 ‘신드’지역임.
역시 “인더스” 강을 지방말에 따라 “힌두스(Hindus)”니 “身毒(신독)”, “신두스(Sindus)>신드(Sind)”이며, 인더스 유역의 평원의 인도 서북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India<Indos<Indus<Hindus<Hind라는 말이 한자로 印度<天毒<身毒으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원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정리하자면,《산해경》시절(B.C.12세기 - A.D.4세기)의 지리적 내용적 중심지는 결국 고대에서는 곤륜산[천산산맥, 파미르 고원. 총령]이 있는 지역이며, 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남쪽의 모퉁이에 신독[身毒=천축(天竺)=Sind=Hind, Sindus=Hindus=Indus=印度]이라는 나라가 있으므로, “남해의 모퉁이[南海之隅]”라는 말로 바꾸지 않을 수 없으며, 이렇게 되면, 그 “東海”가 “동쪽이 되는 바다”가 아니라 “동쪽으로 바다”가 되며, “北海”는 “南海”로 바꾸어 “남쪽으로 바다”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인도서북부 인더스 강 유역에 있는 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틀에 있으며, 그 중심지가 곤륜산이므로 그 동쪽에 있는 지역이 “동해의 안[東海之內]”이 되며, 바로 그곳이 조선인 것이다. 결국 천축(天竺)과 나란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조선”이기 때문에《산해경》의 <해내경>에서 그렇게 쓴 것이며, 곤륜산의 서쪽에 있는 西아시아 역시 “조선”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산해경》의 <해외서경 21>에 “肅愼之國 再白民北.[숙신국은 백민국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숙신(肅愼)이 있으니, 이는 결국 조선(朝鮮)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지역에 발해(渤海) 있었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이를 보면 조선이란 아시아 전체를 말하는 것이니, 참으로 어마어마한 조선이었음을 새삼 놀랍기도 하다.
[펌] ☞대륙 조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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