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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5장 학문의 방법론
5.2. 개념분석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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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개념분석 방법
학문적 지식의 최소단위는 개념이며, 이 개념을 통해서 지식이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개념분석의 역사는 학문의 역사처럼 길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철학활동의 내용을 보면, 거의 개념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이 방법론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분과학문으로서 철학의 진로를 모색하는 가운데 예리하게 드러났다. 철학은 한동안 학문의 통칭이라고 할 만큼 모든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여 왔으나, 분과학문의 출현과 더불어 과연 철학의 고유한 영역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직면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철학의 과제를 재정의하려는 일련의 조류 가운데 하나로서 분석철학이 출현하였다. 분석철학자들은 철학의 고유영역이 인간의 개념체계에 대한 분석과 해명에 있다고 보고, 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과거를 반성하건대 그들에게는 전통적 철학의 모든 명제들이 위장된 경험적 명제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이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세우기보다는 명제가 품고 있는 의미를 명료히 하는 일을 해야 될 것으로 자임하였다. 그들은 더 나아가 제반과학의 영역과 일상적 지식에 포함된 개념과 명제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철학의 주된 과업으로 부각시켰다.
분석철학자들 가운데 이 분야에서 큰 공적을 남긴 사람 가운데 하나인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 연구를 반영하고 있는 <논리철학논고(1922)>에서 정확한 언어의 그림(picture of language)을 제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일상어의 문제를 거론하고 언어의 논리적 형태에서 완벽한 명료성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의 후기작업인 <철학적 탐구(1953)>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로운 방법으로 일상언어의 기능적 특성에 주목한다. 일상어가 가진 모호성의 문제를 추구한 초기 연구가 반영되어 있는 <논리철학논고>는 언어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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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형태에서 명료성을 찾는 데 반해, 후기연구를 반영하고 있는 <철학적 탐구>는 일상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용법에서 언어의 명료성을 찾는다. 후기연구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언어 속의 용도로 정의된다. 이제 언어는 더 이상 실재를 반영하는 그림의 역할이 아니라, 다양한 용법이 주어진 도구로 파악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서 논리적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언어에 대한 의미분석이라는 전통을 세웠다. 그가 강조한 철학에서의 언어 분석은 비단 철학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 동안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방법론에 대한 다른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앞(5.1.)에서 지적되었듯이 모든 학문이 물리학의 설명 모델을 전형으로 삼아야 한다는 방법적인 일원론에 대한 대안이 여러 방면에서 모색되었다. 인간에 관한 영역은 자연과학에 부합한 방법과는 전적으로 다른 특별한 탐구양식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 중의 하나가 윈치가 <사회과학의 이념(1958)>이라는 저서에서 제안한 방법이다. 윈치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언어와 이해의 개념을 이용하여 개념분석을 인문 · 사회과학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옹호하는 방법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5.2.1. 제반 특징
1. 개념적 문제와 철학적 방법
분석철학자들은 과학자와 철학자 간에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1951)>에서 이렇게 천명한다. “철학의 목표는 사상을 논리적으로 명료히 하는 것이다. … 철학의 결과는 일련의 철학적 명제의 수량이 아니라 명제들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철학은 그냥 놓아두면 모호하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르는 사상을 명백하게 하고 예리하게 하고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p.77). 이러한 철학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목표와는 다른 것이다. 경험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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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든 진술은 경험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근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철학의 논점은 외적인 대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외적이다’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개념적인 논쟁은 경험적인 것과 다르다. 이들 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논점이탈의 오류(ignoratio elench)”를 범하는 것이다.
앞서 실증주의적인 방법을 소개하면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의미 있는 명제를 종합적 명제와 분석적 명제로 나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철학적 분석의 관심은 후자에 있다. 즉, 철학은 경험적인 탐구를 통하여 무엇이 사실로 드러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철학적 문제의 중요성은 실험과학의 선입관을 통해서 포착될 수 없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윌슨(J. Wilson, 1963)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들어서 과학자의 문제와 철학자의 문제를 구분하고자 한다.
<질문 1> 비행정은 거센 물결 위에도 내려앉을 수 있는가?
<질문 2> 비행정은 배인가 비행기인가?
위의 예에서 첫 번째 질문은 사실에 관한 질문이며, 두 번째 질문은 개념에 관한 질문이다. 첫 번째 문제에서 비행정과 물 속에 내려 않는 것은 개념적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경험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사실의 문제라기보다는 개념의 문제에 속한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사실들을 점검하고 확인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우선 ‘배’와 ‘비행기’의 개념을 알고, 그 다음에 비행정이 어떠한 범주에 속할지를 논리적으로 따지면 된다. 분석철학자들은 사실적 지식이나 가치를 다루는 질문은 철학자의 과제가 아닌 것으로 본다. 그들이 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개념적인 문제이다.
개념분석의 첫 단계는 그 문제가 개념적인 것인가를 가려내는 일이다. 그런데 모든 명제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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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20세기에 있어서 진보는 필연적인가?”와 같은 질문에는 개념의 문제와 사실적인 문제가 모두 걸려 있다. 이처럼 만약 복합적인 질문을 다룰 때에는 개념분석자는 개념적 질문을 분리해내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즉,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진보’의 개념을 분석하는 일과 “20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서 조사해 보는 일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2. 개념의 논리적 조건
인간과 세계를 보여주는 도구로서 언어는 그 자체의 약속과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괴롭혔던 많은 지적인 혼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실상 언어로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논리적인 일관성이다. 예컨대, “선량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나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언제나 혼자이다.” 이러한 모순된 말을 우리가 쓴다면,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사고의 혼란을 초래한다. 논리적인 일관성은 개념의 일의성을 전제하고, 일정한 한계에 순응하는 연역적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형식논리학이 추리론에서 완성한 바와 같은 사고운동의 작업적 기술은 이러한 요구를 따르고 있다. 추리는 개념의 개개의 사유과정이 전제로부터 결론을 일의적으로 도출해낼 수 있도록 수행될 때에만 옳은 것이다. 추론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명제 사이에 존재하는 명시적인 논리적 관계를 배우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의적인 사고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개념을 그 내용과 타당성이 ‘고정’될 수 있도록 사용해야 한다. 논리적인 언어,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논리적인 규칙에 복종하는 언어는 언제나 언어와 사고를 일정한 한계 속에 정확하게 확정시킨다. “A는 A이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나 그 지칭되는 대상을 고정시켜 놓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리학, 수학, 고전적 자연과학과 같은 일의적인 사고체계가 나왔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되고도 남음이 있다. 수학적 방법과 실험적 방법은 고정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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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적인 사실을 진리로서 추구한다. 일의적 · 고정적 · 불변적 · 안정적 인식은 논리학과 수학의 원리에 의해 정립되는 사유에 있어서는 진리에 해당한다.
개념의 일의성을 위배하는 것과 관련하여 개념분석에서 특별히 문제시하는 것은 애매성(ambiguity)과 모호성(vagueness)이라고 하는 것이다. 애매성은 어떠한 말 또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배’는 해상운송체일 수도 있고, 신체의 일부일 수도 있으며, 과일의 일종일 수도 있다. 영어의 ‘ambiguity’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 철학자들은 ‘曖昧性’이라고 하고, 언어학자들은 ‘中義性’이라고 하는 경우는 하나의 아이러니컬한 예가 된다. 다음으로 모호성은 어떠한 말 또는 표현이 지시하는 범위가 불분명한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산’ · ‘대머리’ · ‘젊은이’ 등은 어떠한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한 가지 사례가 속할 수도 있고,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애매성과 모호성은 사고의 정확성을 위해서 가급적 피해야 할 사항이다.
3. 언어게임의 이해
초기의 작업에서 언어의 완벽한 명료성을 추구했던 비트겐슈타인(/1978)은 후기연구에서는 언어가 더 이상 그림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 단계에서의 언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우리가 실재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주어진다. 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사실상 ‘세계’라는 표현에 의하여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말하고 있다. 세계가 우리에게 그러한 개념을 통하여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철학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사실 우리는 세계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것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에서 이제 언어의 의미는 달라진다. 단어의 의미라는 것은 이렇게 정의된다. “우리는 ‘의미’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는 것으로 사용한다. 즉,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언어 속에서 사용되는 용도에 있다”(p.20).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언어의 구사가 게임처럼 규칙을 따르며, 삶의 형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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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한다는 생각에 접어든다. 그는 “여기서 언어게임은 언어의 구사가 활동의 한 부분이거나 혹은 삶의 한 형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으로 의미된다”(p.11)고 말한다. 게임이란 언제나 규칙이 있다. 그는 “규칙을 따른다”라는 개념을 논의하여 인식론적인 논점을 선명하게 했다. ‘에베레스트산’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한 대상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은 그 단어가 우리에게 그렇게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 정의는 용어가 정의된 이후의 사용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정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이 있다. “한 단어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어떠한 사람이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부터 그 답을 끌어올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의가 의미를 규정하며, 한 단어를 올바른 의미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정의에서 규정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언어라는 게임은 단어의 의미가 명백하게 이해되는 언어의 용법이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개념적 질문을 단어의 사용과 그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게 된 기준 혹은 원칙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그는 언어의 적절한 용도와 부적절한 용도를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 작업은 주로 단어의 실제적 용법과 비정상적인 경우의 용법을 대조하는 것이다.
개념분석법은 매우 정교한 의사소통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만 하면 개념적인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비트겐슈타인(/1978)은 모든 단어가 한 가지 의미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다양한 실제적 용법을 열거한다. 예컨대, 그는 축구 · 체스 · 카드놀이 · 줄넘기 등 ‘놀이(game)’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행위에 공통적이면서 특유한 성질의 집합이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pp.31-34). 이들은 마치 가족의 체격 · 용모 · 눈의 색깔 · 걸음걸이 · 기질 등이 동일하게 중첩되면서도 서로 엇갈리듯이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을 가질 뿐이다. 이 이외에도 우리는 ‘민주주의’ · ‘자유’ · ‘과학’ · ‘진리’ · ‘삼각형’ · ‘질량’ · ‘교육’ 등 무수한 단어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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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다. 엄격하게 보면 이러한 단어들에도 ‘놀이’의 경우처럼 분명한 정의가 있다기보다는 용법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각 단어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용법이 있고, 같은 단어라도 경우에 따라 맥락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적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각 단어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그 단어의 용법과 개념 적용에 관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개념적인 질문에는 정답이나 분명한 해결책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떠한 단어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거나 어떠한 사람의 필요에 꼭 맞는 단어가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의사결정이 현명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철학적 논점들 중의 많은 것은 언어적 표현의 올바른 사용법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만큼 개념을 해명한다는 것은 대체로 언어적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다. 언어적 혼란은 그것을 논의하는 것이 실재의 이해에 얼마나 공헌하느냐를 밝혀 주는 한에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개념적인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보아 넘겼던 개념들을 심각하게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써 왔던 단어들의 의미도 자세하게 검토해 보면,우리는 말의 의미가 마치 얽힌 실뭉치처럼 뒤죽박죽인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잘 정리하는 것은 마치 새로운 게임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게임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 게임의 원칙이나 규정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충분한 연습도 해야 한다. 우리는 연습을 통해서 코트에서 실제로 게임의 규칙을 익힌다. 단어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해 보고 이리저리 비틀다 보면 그 요점에 접근할 수 있다. [각주 9: 이와 관련하여 Wilson(/1993)은 문제의 단어가 쓰이는 가장 전형적인 예의 검토, 반대사례의 검토, 관련사례의 검토, 모호한 사례의 검토, 가상적인 사례의 검토,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의 본질과 사회적 맥락의 검토, 개념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잠재적 불안감의 이해, 해답의 결정에 따른 현실적 결과의 검토, 해답의 결정에 따른 언어적 결과의 검토 등 다양한 분석의 기술을 제안한 바 있다(pp.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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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적 고유현상으로서의 규칙
애초에 개념분석의 문제는 언어의 본성을 해명하려는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지만, 그 규칙에 대한 논의는 말 이외의 인간의 상호작용의 형식을 밝혀줄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 가능성을 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윈치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그것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가 다르다. 자연과학자들은 현상의 배면에 작용하는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고자 한다. 이에 비하여 사회과학자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현상이며, 그 가운데 하나가 규칙에 따르는 삶이다. 인간의 사회적 현상은 소위 “규칙의 지배를 받는 행동(rule-governed behavior)”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 규칙은 동물들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방식과는 달리 우리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현상이다. 사회생활 속에 내포된 규칙성은 ‘규칙’이지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은 두 가지 영역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상이점이다. 사회과학자는 그 규칙에 일치하거나 혹은 그 규칙을 위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자연과학의 법칙과 사회과학의 규칙을 구분하기 위해서 윈치는 개와 인간이 똑같이 규칙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전혀 의미를 달리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개는 행동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습관을 획득하고, 그것을 반복하도록 훈련받는다. 여기에는 “기준의 반성적인 적용”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현상으로서 규칙을 따른다고 할 때에는 그것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왜 올바른지, 또는 그른지에 대한 이유를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윈치(1958)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생물의 운동에 대한 역학적인 연구가 생물의 삶에 대한 개념을 밟혀 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개념적인 오해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앞서 재간을 부리는 행동을 배운 개의 반응과 언어의 규칙을 배운 인간의 반응을 비교하였는데 그 비교가 여기에서도 고려될 수 있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적용될 수 있는 개념 간의 차이다. 인간은 규칙의 이해를 배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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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비해서 개는 다만 어떠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배운다. 이와 같은 개념들 간의 차이는 그 반응의 복잡성과 관련하여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해의 개념은 개가 인간처럼 참여할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인 맥락에 근거를 두고 있다(p.74).
윈치는 모든 행위(유의미한 행동)를 지배하는 규칙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인식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어떠한 것을 정확하게 행하는 것과 부정확하게 행하는 것과의 구별이 가능하려면,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정확하게 하는 것의 구별 또한 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의미는 의미 있는 행위나 표현이 일부분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어떠한 사회적 배경, 또는 관습을 전제로 한다. 이 사실은 심지어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홀로 기도를 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러한 행위가 이루어지려면, 종교적인 개념을 포함하는 문화가 존재해야 한다. 윈치가 볼 때 모든 행위는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이다. 이러한 사회적 사실은 우선 모든 학문이 인과적인 설명 모델에 의한 연역적 체계를 갖추어야 할 이유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인간적 존재는 때로는 독특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때로는 의미 있는 행위의 주체로, 때로는 자신의 사회적 환경의 창조자로 간주된다. 이처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목적과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방법 역시 달라야 한다. 이러한 측면은 자연적 사실처럼 인과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의 한 가지 강력한 수단이 곧 일상적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다.
5. 사회과학의 고유한 방법
한 사람의 사회적 행위의 양태를 이해하는 것은 규칙성을 아는 데 있다. 한 사람의 행위가 규칙의 적용에 해당하는지를 밝혀 주는 것은 그가 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방법과 틀린 방법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유의미한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를 구분하는가? 윈치는 유의미한 행위를 분석함에 있어서 규칙이라는 개념에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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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행위의 주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미 받아들여져 통용되고 있는 합리적인 행위의 기준과 관계된다. 사회적 행위는 사회적 맥락에 적합한 고려사항에 의하여 지배된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의거하여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그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활방식과 제도에 대한 지식에 의하여 성립된다.
여기서 윈치(1958)는 언어분석이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이 될 가능성을 발견한다. 인식론자들은 “이해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특징적인 행위에서 이해라는 개념이 담당하고 있는 중심적인 역할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해는 의미를 함축하고, 의미는 사회적으로 설정된 규칙을 함축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삶의 형식과 규칙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언어를 통해서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윈치는 “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서술하는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서술하는 것은 그 단어가 개입되는 사회적 관계를 서술하는 것이다”라는 대전제를 설정한다. 더 나아가 “명제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일단 알게 되면, 사회적 관계는 명제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말은 덜 낯설게 들릴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명제가 서로 연관되는 방식과 아주 동일하게 사람은 그들의 행위를 통하여 서로 연관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6. 참여적 이해
이해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그 의미에 대한 자연발생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을 가리킨다. 사회적 행위는 행위자의 의미로 구성되어 있고, 행위자의 의미와 행위는 다시 모두 특정한 사회적인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인과적으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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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대한 기술과 설명은 그 행위자 자신들의 삶의 형식을 구성하는 개념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자들과는 달리 그 탐구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국외자가 될 수 없다. 그는 탐구대상의 삶의 형식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원치에 의하면 이러한 참여의 능력을 갖는 것이 이해의 핵심이다. 행위를 이러한 식으로 그것이 속한 상징적 우주와 관련하여 인식하는 능력은 어떠한 종류의 사회생활이든 간에 그것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은 바로 사람들이 공통된 “삶의 형식”, 또는 ‘문화’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현실이해의 본질 문제는 이해를 표현하는 언어의 본질 문제와 분리시킬 수 없다. 인간의 현실이해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양자는 삶의 형식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개념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언어행위와 인식행위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영향을 받게 되며,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 언어가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문화전통 전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은 잘못된 언어사용을 바로 잡는 사회적 제도가 존재한다는 데 있다. 연구자가 우선 유념해야 할 것은 그 언어사용의 규칙이다. 언어의 올바른 사용을 배운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제도를 배운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회과학도는 이질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특정한 사회에 적응하는 “제 2의 사회화”를 거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질적인 사회의 구성원들이 도대체 어떠한 개념들에 근거하여 자신들과 자신들의 세계에 관해서 사고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7. 문화적 상대주의
특수한 사회의 고유한 맥락을 강조하는 사상은 종종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회과학에서 상대주의는 주로 ‘자민족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채택된다. 서로 다른 사회에서 유사한 개념이 서로 다르게 쓰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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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그러한 사회의 삶의 특징적인 주요 관심사의 차이와 대응한다. 그 개별적인 개념은 그것이 속한 사회의 특수한 삶을 반영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을 택하는 윈치는 서로 다른 문화 간에는 언어의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탐구자가 자신의 사회와는 문화적으로 동떨어진 사회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자기 자신의 개념과 기준을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자의적으로 부여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사회과학자들은 이질적인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 문화 내부의 기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적 척도를 자신이 연구하려는 문화에 적용하려는 오류를 범해 왔다고 윈치는 주장한다.
이를테면, 서구의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이른바 ‘원시사회’의 문화 및 신념체계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관례를 보여 왔다. 윈치는 그러한 판단은 다른 문화집단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인 오만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윈치는 원시사회에서의 주술적 행위에 대하여 ‘과학적’ 인류학자가 제시하고 있는 설명들 가운데 어떠한 것들은 “우리와 다른 문명을 조롱하고 경멸하려는 반의식적 음모의 소산”인 경우가 있다는 콜링우드(R. G. Collingwood)의 말에 동조한다. 예컨대, 이반스-프리챠드(Evans-Pritchard, 1976)는 수단의 한 아잔드(Azande) 종족의 생활이 마술과 요술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아잔드 문화에서 요술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중심적이고도 내재적인 특성을 가진 것으로서 원주민에게 그것은 그 말이 함축하듯이 초자연적이거나 혹은 신비스러운 것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이것을 그 내부의 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들지 않고, 서구의 눈으로 판단하여 ‘비합리적’이라거나 ‘미신적’인 것이라거나 ‘틀린’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사회과학자가 다루는 사회적 사실과 자료 또는 현상은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살고, 생각하며, 행위하는 사람들에게만 특정한 의미와 적합성을 갖는다. 따라서 사회적 사실이나 자료, 현상 등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정의되기보다는 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행위자의 입장에서 정의될 필요가 있다. 각 문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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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은 그들의 경험을 유의미하게 조직하고 설명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개념의 틀 · 세계관 · 신념체계 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 속에 들어가 그들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윈치는 “특정한 사회적 삶의 양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삶에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연구자 자신의 탐구 맥락에 속하는 개념을 필수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러한 기술적인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먼저 현재 탐구 중인 삶의 형식에 속하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2.2. 비판적 전개
1. 방법적 이원주의의 문제
분석철학자들은 이른바 의미 있는 명제를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전자는 개념분석적 방법 그리고 후자는 경험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해결될 것으로 본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이외의 방법을 용인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 가운데 분석철학자들은 개념분석이 철학자들이 갖추어야 할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개념분석적 방법은 비단 철학에서만 독점될 방법도 아니려니와, 또한 철학적 방법으로서 개념분석의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과학에도 개념분석의 방법이 필요하다. 자연과학과 철학이 전적으로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며, 차라리 하나의 학문이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을 쓴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철학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예컨대, 다음에 소개될 현상학적 방법이 그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개념분석법과 더불어 다른 많은 비실증주의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다.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를 구분하고, 전자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핵심적인 의의를 부여했던 논리실증주의는 점차 붕괴되고 있다. 분석철학자들은 종합적 명제는 우연적인 것인 데 비해서 분석적 명제는 필연적이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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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은 필연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안이한 도식은 이제 허용될 수 없다는 비판적 관점이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콰인은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1961)>라는 논문에서 분석-종합이라는 구분이 무근거하다는 것을 보이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분석철학자들은 분석명제는 경험적으로 공허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좀더 깊이 따지고 들면 그것은 어떠한 기호에 대한 규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규약에는 모종의 사실적인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콰인은 이 점을 간파하고 분석적 진리는 필연적이라는 확신을 무너뜨린다. 분석적 명제 역시 근원으로 소급해 들어가면, 사실의 규제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사실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체계 혹은 신념체계는 경험의 저항 앞에서 끊임없이 수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러한 수정은 콰인 이전에는 종합명제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분석적 진리야말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바뀌든 흔들리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콰인은 분석적 진리라고 하는 것도 믿음체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 믿음체계 전체가 변할 때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구별될 수 있다는 그들 나름의 도그마가 무너질 때, 분석철학자들이 봉착하는 온갖 문제들인 것이다. 이제 그들이 그러한 전제하에 그 동안 정교하게 구축해 놓았던 진리들이 일거에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2. 제한된 언어관
언어가 그림처럼 현실을 반영한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철학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와 세계는 논리적인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고, 그들 사이에 성립하는 구조적인 동일성을 찾는다는 취지의 초기의 언어관을 포기한 것은 이러한 철학적 오류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발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제 그림이론은 더 이상 인식론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한 취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에 있어서의 전향은 철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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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에서 뜻깊은 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언어현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언어학 본토의 입장에서 볼 때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도 아직은 언어의 많은 부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오로지 단어 기호와 그 의미(용도)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를 용법과 동등시하는 조작적인 정의에는 원초적인 난점이 있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단어의 의미는 용법 이상의 다른 차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언어학에서 “언어학적 상황(semiotic situation)”에는 구문론적(syntactic), 의미론적(semantic), 화용론적(pragmatic) 상황의 세 차원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각주 10: Morris(1960)는 그의 기호학에서 이런 구분을 하였다. 구문론은 언어표현(즉, 기호)과 언어표현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고, 의미론은 주로 언어표현과 그 지시체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며, 화용론은 언어표현, 지시체 및 언어표현의 사용자 내지 사용되는 문맥 간의 관계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각 차원은 기호의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비트겐슈타인도 한 단어의 의미에는 이처럼 용도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주목하거나 분석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의 철학적 배경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분명히 언어의 구문론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뒤(5.5.)에 구조주의적인 방법을 다룰 때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예컨대, 구조주의적 언어학은 언어(language)를 언사(speech)와 구분되는 하나의 자기충족적인 전체라고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를 말의 행위뿐만 아니라 통합성과 관련하여 이해해야만 한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이 이전의 분석철학도와는 다르게 언어의 맥락적 의미를 인식했지만, 그러한 인식도 언어학 자체의 이해를 바탕으로 평가한다면, 아직도 단자적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한 단어를 문제시하지만, 그 단어는 의미론적인 규칙뿐만 아니라 문장론적인 규칙을 가진 체계이다. 문법적 규칙은 단어의 용도상의 규칙보다 선행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뒤의 논의로 미루겠지만, 기호로서의 언어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는 적어도 다른 기호와의 관련하에서 부분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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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화용적 측면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인식론이나 의미론에서는 명제 또는 진술문의 진 · 위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논리학과 언어철학에서는 문장 · 판단 · 명제 및 진술을 올바르게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하나의 단어는 그것이 말해지는 실제적이고 순간적인 상황에 따라서 발화의 구조를 달리할 수도 있다. 가령 영어의 ‘pull’이라는 단어는 특수한 활동의 맥락 예컨대, 가정부가 서랍을 열 때와 어부가 명령을 내릴 때에 전혀 다른 기능과 위치를 차지한다. 오늘날은 이러한 화용적 측면이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예컨대, 오스틴(J. L. Austin, 1962)은 언어의 사용이라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계열의 연구를 하였으나, 그는 사용(use)이란 말에 대해 비트겐슈타인보다 더 상세한 분석을 하였다. 그는 “어떠한 것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것을 진술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언어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말은 많은 경우에 무엇을 기술한다기보다는 여타의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는 일반적 경향에 그는 “記述主義的 誤謬(descriptive fallacy)”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러나 차후(5.3.)에 현상학적 방법을 다룰 때 더욱 자세하게 논의될 것이지만, 이러한 기술의 경우조차도 언술은 대상에 대해서 말한다기보다는 대상을 구성하는 데 가담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철학자, 특히 인식론자들은 언어문제를 다룰 때 이러한 기술주의적 오류를 범해 왔다. 그들은 어떠한 발화가 특정한 사태나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러한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많은 철학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방법적 논의도 그러한 오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예컨대, 오스틴은 언어의 용도를 다룸에 있어서 발화의 수행적 측면을 강조한다. 또한 개념적 규칙에는 권력의 불균형이라는 문제가 내재해 있다는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하버마스(J. Habermas, 1976)가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보편적 화용론(universal pragmatics)”도 이러한 점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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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의 개념적 분석론은 개념과 관찰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앞(5.1.)에서 지적했듯이 그들 간의 관계가 상관적으로 존재하는 한, 철학이 고유영역으로 본 개념적 문제와 경험적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기 어렵다. 사회과학이 인간의 전반적인 현실이해의 본질과 가능조건을 규명한다고 할 때, 이 과제는 그 이해를 표현하는 언어의 본질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적인 관심과 그것을 고유한 사회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키려는 윈치의 후속된 관심이 이미 초기의 분석철학적 범위를 벗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개념의 형성과 분석은 오로지 사회과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사실이 언어에 의해서 표현되듯이 자연과학의 이론도 언어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연에 관한 설명을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그 수도계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언어도 사회관계와 언어처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3. 언어의 상대성
어떠한 개념이 전체의 맥락에서 유리되어 특정의 고정되고 통일된 의미를 지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애초부터 환상이다. 서로가 말을 가지고 논의하는 가운데 상대의 의미가 나의 의미와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 점에서 언어 혹은 개념의 의미가 그들 간의 상호관계들의 체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을 주장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적 통찰은 전기의 언어관에 비해서 파격적이라 할 만큼 현실의 실상에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의 맥락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적어도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의 횡적인 상대성과 종적인 상대성의 문제를 철학의 수준에서 다시 검토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우리의 생활세계 내에는 다양한 종류의 하위세계가 있고, 그들 각각의 언어는 개념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나타낸다. 설사 그 하위세계들이 같은 용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그들 자신의 맥락에서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빛’이라는 단어는 종교계 · 물리학계 · 예술계에서 서로 다른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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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적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세계 간의 차이, 혹은 장르가 다른 분야에서는 처음의 언어에 표현된 개념적 구조를 그와 똑같다는 의미에서 두 번째의 언어로 옮긴다는 의미에서의 번역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균열의 현상은 우선 일상의 생활세계와 학문계 사이에서 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은 특별히 학문계 내에서 서로 다른 사실을 포착하는 분과학문 간에도 생긴다. 그것과 관련된 사실을 우리는 앞(3.3.3.)에서 횡적 상대주의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였다.
윈치가 이질적인 언어공동체의 삶을 그 공동체 내부의 관점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이해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은 이 점에서 수긍할 만하다. 마찬가지의 논리에 의해서 같은 사회에 속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장르가 다른 경우는 원치가 말하는 의미의 서로 다른 기준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수도계의 보편성에 비추어 볼 때 상이한 사회 간에는 또한 우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과학기술의 면에서 볼 때,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의 차이는 심대하며, 사회 간의 우열의 대비가 확연하게 일어난다. 그것을 윈치의 주장대로 단지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횡포라고만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사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학문계는 그 동안 이질적인 언어공동체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켜 왔으며, 우리는 그 일반적인 개념을 준거로 하여 상이한 사회를 동일한 관점과 범주에 의해서 상호 비교하고 검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윈치의 경우 이러한 위계가 있는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4. 언어의 생명력
개념분석의 방법에서 추구하는 방법은 논리적인 일관성이다. 논리적인 일관성은 개념의 一義性을 전제하고, 일정한 한계에 순응하는 연역적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논리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의적인 사고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일의적인 것은 고정된 것을 나타낼 뿐, 탈한계적인 측면을 포착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논리학이 파악한 사고와 언어의 의미는 예리하지만, 사고를 확장시켜야 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 의미의 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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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좁다. 대부분의 살아 있는 언어는 가변적이며 다의적이다. 따라서 언어가 혹은 그 용법이 다의성을 띠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는 것 역시 오류이다. 오히려 언어는 다의성을 띰으로써 역동성을 갖는다.
그러한 변증법적인 측면은 대부분의 경구에서 단순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삶은 건강일 뿐만 아니라 병이며, 죽음은 병일뿐만 아니라 치유이다.” “철학은 진리의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살해자이기도 하다.” “거지는 거지가 아니라 채권자이며, 자선가는 자선가가 아니라 채무자이다.” “한 번은 수에도 들지 않는다.”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말들은 형식논리의 기준으로 볼 때, 규칙에 위배되는 역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듯 개념이 확정되지 않고 다의적임으로써 세계의 진상을 보다 역동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러한 역동성을 무시하고 형식논리의 틀로써만 언어의 내용을 분석하고자 할 때, 언어의 생명력이 파괴될 수도 있다.
하나의 언어공동체에서 같은 용어를 쓰는 사람은 동일한 개념적 장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위험하다. 같은 용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이면에 들어 있는 사고의 전체적인 구조, 범주, 그리고 사고방식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많은 경우에 그 개념장치는 모순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두 사람이 같은 언어를 쓰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사고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단일사회 내에서도 아무리 부분적일지라도 개념적인 분쟁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집단들 간의 권력의 문제가 개재된다. 가령, 서로 분쟁하고 있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은 자신들의 관계를 구성하는 권리와 의무의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달리 생각할 것이다. 이 경우 그들은 윈치가 말하는 제도나 규칙의 변형에 실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지만 그 용법이 전혀 다를 수 있다(Benton, /1894, pp.14-15). 또한 하나의 언어공동체라고 해서 그 구성원이 통일된 개념과 언어를 쓴다고 가정하는 것도 무리이다. 기든스(A. Giddens, 1976)가 권력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윈치를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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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pp.48-53). 또한 학문계 서로 다른 학파들 간에 수시로 동일한 개념을 놓고 맥락상의 분쟁이 일어난다.
언어는 기존의 세계관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그 세계관에 변화를 주는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윈치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사회에서의 언어의 창조와 유희에 의한 인식의 변화와 창조라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측면을 간과한다. 언어는 통용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최초로 도입될 때에는 얼마만큼의 참신성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근래에 이전의 철학적 형이상학에 반기를 들고 있는 로티(R. Rorty, 1989)가 “통상적 담론(normal discourses)”과 “비통상적 담론(abnormal discourses)”을 구분한 것은 이 점에서 큰 시사를 준다. 전자는 기존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관을 전제하며, 기존의 언어사회적 규약의 합의에 의해서 언어로서 인정된 활동의 영역이다. 이에 반하여, 후자의 영역은 기존의 규약을 무시하거나 뒤엎으려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후자의 경우 기존의 언어에 속하지 않는 참신한 메타포나 아이러니가 차지하는 역할이 강조된다. 메타포는 기본적으로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낯선 소리”이지만, 우리의 사회적 실행에서 용도를 인정받게 되면 엄연한 하나의 언어가 된다. 아이러니는 기존의 개념을 다시 보게 하는 모순을 내포한다. 이들은 어떠한 법칙에도 구속을 받지 않는 힘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세계에 변화를 주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재적인 과학자 · 수학자 · 철인 · 시인들은 기존의 언어에 의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 이러한 참신한 언어의 창출에 의해서 자아의 확대는 물론 기존의 통상적인 세계관에 참신한 변화를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은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탐구해야 될 개념을 미리부터 정확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자가당착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개 성공적인 연구일수록 이전과 이후의 개념의 의미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학문계는 대개 비통상적인 담론의 영역이다. 학문에서 정확한 개념과 용어의 사용만을 요구한다면, 학문의 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으려는 진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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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에 있지 않고, 우리가 모르는 불확실한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그 나머지는 침묵한다고 할 때, 우리가 더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는 그만큼 우리의 논의 밖에서 머물게 된다. 만약 우리가 불명확한 것에 관해서 토론하기를 금지한다면, 우리는 항상 한정된 기지의 영역에 안주할 수밖에 없다. 학문적인 탐구과정에서 연구자는 그러한 금기조항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기지의 영역에서 탈출하려면, 아직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사고에 많은 자극을 줄 수 있는 탐색적 개념을 과감하게 창안해 나가야 한다.
5. 사회적 지식과 사회학적 지식의 차이
사회적 지식은 사회과학의 중요한 인식대상이다. A와 B라는 이질적인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각 사회적 현상이라 보는 것이 다르다면, 그 사회에 적용해야 되는 입장에서는 각각의 세계관을 익숙하게 습득하고, 그것을 동화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점에서 연구자가 이해의 태도를 갖는 것은 사회과학의 분명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개별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어떠한 ‘통념’이나 혹은 ‘상식’을 습득하는 것과 그러한 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학문적인 지식을 구성하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만약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면, 세계 각지의 사회풍습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여행객들이 가장 훌륭한 사회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지식은 일상적 세계 속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습득되며, 사회학적 지식은 학문공동체에 참여하는 가운데 습득된다. 윈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상적 언어의 경우는 사회화를 통하여 습득되지만, 학문과 같은 수도계의 지식은 교육을 통하여 습득되어야 한다. 교육을 통해서 후행하는 새로운 이론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선행하던 낡은 이론이 어떠한 잘못을 갖고 있었는지를 서로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윈치는 사회과학도들이 연구하려는 행위자의 개념을 이용하도록 권고할 때, 또 모든 종류의 사회에 대한 잡다한 인식을 상대적인 것으로 주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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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일상세계와 학문계 간의 이러한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MacIntyre, 1973). 오늘날 각국에서의 사회과학이 대부분 보편주의적인 관점에서보다는 자신의 사회, 즉 개별 국가의 발전과 관련하여 나타난 현실적인 문제를 특수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개별 국가적인 특수성에 비추어 사회과학을 이해하는 일은 일면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은 분명히 말해서 보편적 지식을 추구한다. 과학적 지식이란 그것이 단지 서구적인 인식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세계관도 과학의 역사에서 그릇된 것으로 판명된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말하는 학문적 지식은 학문적인 체험으로서 실재를 보편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가운데 산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서구의 것이든, 어느 후진사회의 것이든지 간에 그들이 가진 세계관은 사회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흥미있는 사회적 사실이다.
본 저서는 시종 사회의 상식과 학문적 지식을 구분해 왔다. 세속계적인 상식의 범주와 학문계적인 지식의 범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후자의 탐구대상은 될 수 있겠지만 양자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학자는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인식을 초월하는 개념범주를 가지고, 상대적인 사회 · 문화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적 설명은 원주민이 이해할 수 없는 보다 심층적인 이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원주민의 이해내용은 겉으로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특정한 지배계층이 주입한 이데올로기적인 허위의식일 수도 있다. 사회과학적 이론은 그것을 좀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폭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식적인 권위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매틱(P. Mattick, 1986)은 윈치의 입장과 마르크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킨다.
윈치의 입장으로 보면, 문화적 형식은 그들이 원주민을 대표하는 의미에 의해서 정의된다. 따라서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행위 지워졌거나 언급된 것의 요점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원주민의 문화적 항목의 “요점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가 추구하는 지식의 서곡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떠한 것이 설명되어야 하고, 학문적 탐구자에게 어떠한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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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립되어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작업에 불과하다(p.91).
윈치는 원시사회연구에 작용하는 서구학자들의 문화적 편견을 지탄한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어에 반영된 삶의 형식에 적응하면서 사회에 대한 모종의 개념적인 틀을 구성해 왔지만, 그것을 사회과학적인 지식으로 간주한 예는 거의 없다. 상식과 학문적인 지식은 서구사회에서도 서로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분리된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사회과학자들은 외래의 문화는 물론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들이 공유하는 피상적인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서 좀더 본질적인 의미의 사회가 무엇인지를 추구해왔다. 그 점에서 서구사회의 상식과 서구사회의 사회과학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와 관련하여 예컨대, 현상학적 사회학자인 슈츠(A. Schutz, 1973)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적 인식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였지만, 사회구성원의 인식구조와 그것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자의 인식구조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pp.5-6). 전자는 오랫동안의 사회화를 통해서 얻어진 관례구조이며, 후자는 그것을 학문의 절차와 규칙에 따라서 이차적으로 반성해 얻은 인식구조라는 것이다. [각주 11: Schutz(1973)는 “소통의 패러독스(paradox of communication)”라는 말로 일상적 세계와 이론적 세계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부각시킨다(pp.254-259). 이처럼 상식과 사회학적 지식에는 단절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식인은 학자가 탐구의 과정에서 체험한 역설과 외견상의 모순을 감수해야만, 그 의미를 학문의 영역에 맞게 이해할 수 있다.] 후자에서의 지식은 적어도 서구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실재를 가정해서 구성되었고, 이 때문에 개별 문화에 따른 서로 모순되는 세계관을 자체의 지식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과학적 지식은 제반 사회적 지식을 비교하고, 그것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별도의 일반적인 범주와 지층을 확보해야 한다.
6. 일상어와 학문적 언어의 차이
일상언어가 철학적 언어나 과학적 언어의 적절한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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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구체적인 사유양식과 학문적인 사유양식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일상어는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적절하지만, 학문을 할 목적으로는 적절하지 못하다. 일상인들은 그들의 삶의 형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그것의 진정한 성격을 집단적으로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잘못된 인식의 구조 혹은 허위의식은 대개 일상어의 틀 안에서 유지된다. 학자가 대항해서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일상과 습관이 냉혹하게 끌어당기는 힘이다. 그는 어떻든 일상적인 인식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대상을 습관적 문맥에서 분리시키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을 함께 묶음으로써 대상들을 보다 심층적이고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일상의 기계적인 반응이나 인식에 일격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학문적인 사고는 일상적인 사고의 형식과는 다른 형식에 따라 진행되게 마련이다.
학문적 사고의 거대한 계열은 이처럼 일상적 사고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부터 생기고, 그 결과는 일상적인 언어와는 다른 학문적인 언어의 창출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설사 일상적인 언어를 불가피하게 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소속한 맥락을 달리함으로써 이론은 일상어에 대한 자동적 습관을 파괴시켜야 한다(Cassirer, 1944, pp.134-135). 만약에 학문의 탐구결과를 일상적인 언어를 써서 기술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에 해당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사회과학적인 지식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인식의 틀을 일상어와는 구분되는 학문적인 언어로 나타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분명하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일상언어라는 언어게임과 사회과학자들의 언어게임은 목적이나 구조에 있어서 판이한 것이다. 학문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개념을 가지고는 도저히 서술할 수 없는 인식의 영역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철저한 훈련이 없이는 학문적 언어를 이해할 길이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초기의 <논리철학논고(1922)>에서 옹호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일상적인 구어가 과학의 용어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우리의 논지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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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 것이었다. 일상언어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학문적인 체험을 전달하기는 어렵다. 비트겐슈타인도 일상적 언어와 구분되는 학문적 언어의 중요성을 의식했지만, 그 때 그의 학문적 언어는 언어와 대상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공동체내에서 습득되는 언어와는 다르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학문적 언어는 대상세계와 대응하는 언어가 아니라, 대상세계에 대한 학문적 체험과 대응하는 언어인 것이다. 물론 과학의 용어를 다루는 방식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처방은 실증주의적 방법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가 당시 주장했던 논점, 즉 일상어와 학문어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우리의 입장과 통한다.
과학의 언어는 논리적 명료성만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상언어와 다른 차원에서 취급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는 철학적 언어나 과학적 언어보다는 비교적 명백하다. 그것은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과 친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에서는 일상적 인식을 초월해야 하기 때문에 일상언어가 학문활동을 할 목적으로는 적절하지 못하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작업인 <철학적 탐구(1953)>에서 일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학문공동체가 그들의 특수한 활동의 맥락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는 화용적 차원을 충분히 고려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은 비트겐슈타인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관심사였던 일상언어의 문제를 학문에까지 지나치게 확장해서 쓰려고 한 윈치와 같은 응용자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까지 학문적 지식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여 왔다. 근래에 하버마스(1976, 1977)는 언어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으로서 이데올로기의 매체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는 언어가 의식의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중시하여, 동시에 언어 속에 있는 사고의 이데올로기성도 중시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우리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받아들이는 일치와 합의는 많은 경우에 의사소통 속에 내재해 있는 제도적인 강제와 체계적인 왜곡에 의한 기만적인 합의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강제와 왜곡을 비판적인 반성을 통하여 제거하기 위해서 이상적인 담론의 규제적인 이념을 기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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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대화를 구성하여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또한 언어가 비판의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착안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학문적인 지식은 적어도 이 정도의 비판적인 여과과정을 거쳐 이데올로기성을 청산한 것이어야 한다.
7. 개념의 변증법적 발전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용법에도 역사가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한 사회 내에 다종의 세계가 있고 그들의 언어 역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변전한다. 사회는 다시 소사회로 나뉘며, 그 사회마다 특수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언어의 정의도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개념의 변화만큼 부단히 변전한다. 학문을 포함하는 모든 발전하는 세계는 거의 예외 없이 그들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언어는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윈치(1958)가 다음과 같은 언명을 하였을 때, 학문적 개념의 이러한 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듯 하다.
과학자는 그가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그의 특정한 연구 영역에 적합한 개념을 적용하고 발전시킨다. 개념은 그것이 적용되는 현상에 의해 ‘영향받아’ 수정되며, 또한 과학자가 그의 동료학자들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동료학자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아 수정된다. 그가 현재와 같이 자신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관찰된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기는 하되, 이러한 개념의 발전은 이미 정립된 행위 양식에 동료 과학자와 더불어 참여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pp.85-86).
학문계에는 부단히 새로운 학문적인 용어가 도입된다. 모든 혁신적인 학문은 발전의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탐색적인 개념을 써야 한다. 이 때 그 개념의 모호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명료한 기본개념과 날카로운 정의란 한 분야의 사실들이 모두 밝혀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개념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명료한 일반개념이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포착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 새로운 사실을 담는 개념을 초기에는 언제나 모호한 상태로 두면서 점차 그 효능을 시험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계속적인 시험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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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점차 그들은 분명하게 뜻있고 일관성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개념은 다층적인 변천과 개선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발전단계에서 이전의 이론과 이후의 이론 간에는 균열이 있기 때문에 학문계에서 용어의 의미는 발전단계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이 점은 역사적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경험하는 <과학혁명의 구조(1970)>를 다룬 쿤에 의해서 적절히 지적되었다. 예컨대, 물리학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 같은 특정한 개념들은 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지금까지와는 얼마간 다른 의미를 갖는 새로운 개념으로 변모된다. 새로운 패러다임 내에서 옛 용어 · 개념 · 실험들은 서로서로 간에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예컨대, 뉴턴의 우주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우주로 이행하려면, “공간 · 시간 · 물질 · 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성요소들의 전체적인 개념상의 연관이 변경되어 다시 자연 전체에 배열되어야만 하였다”(p.149). 이들은 서로 비교할 수는 있지만, 비대칭적이며 논리적으로 양립불가능한 것들이다. [각주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발생적으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불가공약적이라는 사실을 두고 그들 간에 연속성이 없다는 결론을 맺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하권 제 7장에서 다룰 교육적 인식론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한다.] 이를 그는 ‘不可公約性(incommensurability)’이라고 표현하였다. 두 이론이 불가공약적이라는 말은 서로 대조 · 대비될 수는 있을지언정, 서로 번역될 수도 없고 서로 간 잘잘못이나 좋고 나쁨을 평가해낼 수도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그 생성 및 변천과정으로부터 분리되어 마치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처럼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개념 자체의 맥락적 의미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기 때문에 외견상 동일한 어휘들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개념을 이전의 낡은 틀에 맞게 해석해서는 사고의 지체는 물론이고 의미상 큰 착오가 생겨난다. 하나의 용어가 그 세계에서의 발전수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변전한다. 학문적 용어 역시 발전단계에서 다의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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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용어가 종전에 사용되던 방식과는 반대되는 의미를 갖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분석철학 분야에서는 역사성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개념의 변증법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형식논리에 집착하는 분석철학은 개념의 비약적 변화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주의적 접근은 개념의 가장 현저한 특징을 말해 주면서도 학문의 발전이라는 부면에 들어가면, 그것의 한계성을 자초한다.
학문적인 개념은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다. 그것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사고가 결코 논리적인 추리의 직선적인 과정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후에 변증법적 방법(5.6.)에서 다루어질 주제이지만, 사고는 결코 직선적인 평면에서 움직이지 않고 참으로 다양한 평면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언어도 그것이 발전하는 세계를 대표하는 것인 한, 불가피하게 그러한 수직적 단층을 갖는다. 이처럼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변화는 변증법적 변화 또는 지양적 변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학문적 사고의 계속적인 전개에는 언제나 비연속성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학문의 역사적 변천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불연속성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연역적인 개념분석이 아니라, 발생적 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이다. 그 실천은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8. 언어의 규칙과 실천적 삶의 차이
윈치는 규칙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적으로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의미 있는 행위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든스(1976)는 하나의 적절한 사례를 들어 반론을 제기한다(pp.47-48). 예컨대, ‘산책’은 의미 있는 행위이지만 거기에 반드시 옳고 그르다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윈치에 따르면 주어진 행동의 어떠한 형태라도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복종행위 자체도 그 행위 전에 명령된 것에 대한 인식을 본질적 요소로 포함한다고 본다. 그러나 행위의 의미와 실제의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명령’과 ‘복종’이라는 두 개념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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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실제로 그 개념이 나타내고 있는 것 간에 일어나는 실제적인 관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들 간의 관계는 개념적인 것 이상의 수많은 실천적인 변인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컨대, 명령은 이해되지 않거나 충분히 이해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사유로 인해서 수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그러한 개념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의 중요한 단서라고 가정될 수도 있다. 윈치에게 언어의 사용은 사람이 수행하는 다른 비언어적 행위와 아주 밀접하고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들의 비언어적 행위 또한 논증적 개념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너무 강한 가정이 전제되어 있거나 혹은 매우 제한된 사례의 논의가 될 소지가 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는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으며, 설사 언어로 표현은 하지만 진정한 근거가 박약한 경우도 흔하다.
우리의 삶은 분명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개념분석은 그러한 삶의 양식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우리가 언어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해 자체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형성과정까지를 추적한다면, 그 근원은 결국 비언어적인 삶으로까지 연장되게 마련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관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용되는 사회적인 관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화의 현실성과 종족생활 그리고 사람들의 관습에 바탕을 둔다. 그리고 언어는 이러한 구어적 언사의 광범위한 맥락을 지속적으로 참고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러한 부면에까지 설명이 이루어지려면 불가불 비언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 간의 관계를 연구해야 되고, 그러한 연구를 수행하려면 언어적인 방법이 아닌 방법을 사용해야 된다. 그렇지 않을 때 하나의 토톨로지에 빠진다.
우리는 말이 근거한 원천을 이해하는 경우에만 언행을 이해한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윈치는 이것을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나 개념의 기원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실제로 단어가 사용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언어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암묵적인 지식이다(Pola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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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한 언어의 사용은 암묵적인 지식을 전제로 하며, 암묵적인 지식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언어를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람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비언어적 개념을 스스로 형성할 때까지 언어를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많은 경우 단어의 사용자, 즉 그것을 쓰고 읽는 사람이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사용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적 문맥에서 단어를 생각해 보는 문제가 아니다. 언어를 언어와 관련시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활동과 관련시켜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게임의 규칙은 비언어적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습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어는 주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상호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들 특수한 언어공동체내에서는 체험적 기반이 어느 정도 동일할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계에서는 같은 단어의 의미가 끊임없이 수정된다. 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정의만을 갖고 있는 단어는 거의 없다. 그것은 학자들의 수준에 따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학문적 언어가 갖는 원칙의 하나는 단순한 것을 토대로 복잡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의 변화는 극히 특수한 것으로서 다년간에 걸친 학문공동체적인 수련을 거쳐야만 이해될 수 있다.
선행하는 사회 · 문화적인 현상 가운데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포함되며, 그것은 언어적 분석과는 독립된 방법에 의존하여 구명되어야 한다. 언어는 대부분 비언어적인 언어게임에 의해서 습득되며, 후자는 전자에 의해서 해명될 수 없다. 언어에 의미를 주는 것은 체험이며, 체험은 비언어적 방법에 의해서 해명되어야 한다. 일상어는 단지 언어공동체내에서의 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지만, 학문적인 언어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학문적인 언어는 그에 대응하는 학문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학문계에서는 윈치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은 허용될 수 없다. 학문계는 발전의 각 단계에서 서로 다른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열등한 것과 우수한 것이 변별되고, 결국 전자가 후자로 대치 혹은 환원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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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우리는 목도하였다. 이 원리는 개인과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학문에서 선진의 언어와 후진의 언어는 서로 논리적으로 구별된다. 이 경우 각각의 것을 모두 타당하다고 간주한다면, 학문계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후진의 것이 선진의 것으로 대치될 수 있을 때, 학문의 진정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그 경우 후진은 선진의 개념을 습득한 후에야 비로소 선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