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사이펀신인상(하반기)|제송희
천수답 외 4편
완행버스는 매번 산그늘 아래로 사라지고
신작로 앞 바다는 파도 소리와 함께
동구 밖까지 왔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날들은 대부분 화기애애했다
끄르륵 엄마가 자주 트림을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들꽃 같은 큰엄마가 한창일 무렵
우리는 큰 방에서 함께 뒹굴었다
누군가 밤의 호수로 데려다준 것 같았고
밤이 이슥하도록 어둠은 은반처럼 빛났다
사랑방 아버지의 창에 불이 꺼지면
큰엄마는 벽을 안고 끙 돌아누웠다
그리 나쁘지 않은 밤은 사악했고
그걸 알아채기에 나는 아직 어렸다
언제 올지 모르는, 단비를 기다리는
산태골 논은 천수답이었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가계를 이었다
좀체 벗기 어려운 검정 외투를
혼방코트로 바꿔 입은 뒤였을 것이다
큰엄마가 저수지 위 산판에 들자
속을 앓던 엄마는, 산태골 논둑 위에서
한 여인이 기다리는 꿈을 꾸곤 했다
결국 엄마도 떠났다 앞산 쑥국 새
두어 마리와 함께였을 터였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나서
한참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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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후견인이 있다
고뿔 든 봄비가 막 물러서려는데
유별난 것 없는 아침의 발밑이
송곳처럼 뾰족하다
새들이 깃을 털며 입을 다물고
때아닌 뻐꾸기가 새벽부터 울더라니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소환된 봄비가
그를 증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마 됐다 안카나
앞섶에 숨긴 뻔뻔한 손가락이
체념을 가리킨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될 일을
하필 왼쪽으로 갔느냐는 말은
워낙 터무니없었다
날 것들 낑낑거리며 마을을 뜨고
풀 길 없는 매듭의 끝을 붙든 채
먼 서녘으로 떠난 사람아
나는 아직 믿는다
연옥을 거쳐 순결해진 영혼이
더러 이승을 후견한다는 전설을
흐드러진 이생은 기왕 다하게 두고
감긴 태엽의 시간이 바랠 때까지
그가 몰고 올 은하와 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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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달비 내리는 날
화살이 쏟아지는 듯
빗줄기 냅다 꽂힌다
그 옛날 나라가 불운할 때
어린 백성이 쏜 화살들이다
사방에서 모여든
무명의 화살들 비장하다
구름, 안개, 한데 뭉쳐 물 샐 틈 없다
구름은 무공 깊은 장수였다지
검고 굵은 눈썹을 치뜨기만 해도
홍수가 터졌다는 전설을 아는지
화살 끝 붉은 마음
꺾을 수 없어 빗속에 뒹구는데
여봐라 우리 이겼다 구름 장수 웃음소리
회칠 같은 안개가 적의 눈을 동여매니
배시시 맑은 하늘이 트여 여우비 오락가락
창공은 뻐끔 입술을 열어 새 떼를 낳고
짧은 정적을 깨뜨리며 안겨드는 초저녁
새들 무성한 노래 사라질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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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서정
별들은 눈만 껌뻑이고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바람
축복이란 글자는 멀기만 했어요
그를 데리러 간 몇만 리 밖,
라인강 기슭에서 부르는 고향 노래가
간간이 흐느끼는 동안
이 땅은 포도주를 터트리고
어른들은 등골에 새긴 괭이와 호미 자국을
감추며 웃었지요
유언을 놓친 선대는 지쳐 단잠에 들었는데
전철 게이트 맞은 벽에 어른거리는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자들,
어디로 사라졌나요
마냥 우쭐대던 플래카드와 한패이던
그때를, 헤아릴 수 없어 나는
녹슨 계단을 내리밟고 있네요
초침이 따끔거려 고달픈 이마를 찧어도
겸연쩍은 소망 하나 새알처럼 우두고
눈썹이 샌다는 그믐밤 홀로
뭉텅이로 터지는 이 슬픔은 무언가요
동쪽 언덕배기에서 숨을 고른 뒤
순풍, 미끄러지듯 솟아오른 어린 태양
선명한 핏자국 지우며 훠이 훠이
홰를 치는 그리운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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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마켓 24시
꽤 긍정적인 이름이야
때로 얍삽한 네 얼굴
착용은 단 한번이예요
몇 번 안 썼는데 어머 닳았네요
거의 새것인데 얼룩졌어요
변죽 좋은 이들 말주변이
진열대 위를 뻔질나게 쏘다니고
허술한 단골 멘트가 간곡하다
불문에 부친 공정이 풍습으로 굳어와
이용자의 허용치랄까 그 넓이를
자로 잴 수 있으려나 몰라
심심 타파 즐거움에 발을 적셨다가
은근히 잠긴 당그니가 많다고 하나
아뭏거나 어떠하랴 당근스럽게
소소한 누리에 흠뻑 젖어보자고
안팎이 다르다면 진심이 아닐 수도
주성분이 당근인 건 당연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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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 신인상 당선 소감 - 제송희
그 아이를 찾았다
비 내리는 오후, 마당에서 미꾸라지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그 모습이 애처로워 빗물 웅덩이에 넣어주고는 일기장에 썼습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 담임선생님을 위해 글감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쓴 동시는 학기가 바뀔 때마다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어 있었지요. 그뿐이었습니다.
파도가 둑을 짚고 사정없이 달려들었어요. 물살에 쓸려 들었지만 용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그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아픈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으나 존재는 뚜렷해지고 있었어요.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는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닌 것 같았지만 신은 사실 내 편이었습니다. 드디어 문이 열렸네요. 아직 풋내를 벗지 못한 제 글에 눈길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조금 늦은 출발이지만, 더 좋은 시 쓰기에 몰두하고 정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존경하는 권애숙 선생님, 왜 이제 왔느냐는 말씀 잊지 못합니다. 이 만남의 축복을 이어가며, 문학 수업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선생님과 한결같은 문우들의 우정이, 당선 소식을 앞당기게 했음을 인정합니다. 작년 여름, 하늘의 별이 된 언니를 생각합니다. 이 소식에 참으로 기뻐했을 언니,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지척의 가족들, 모두 고맙습니다. 그 아이 여기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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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송희 endmf55@naver.com
-1956년 경남 고성 출생
-부산여자대학 졸업
-현재 양산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