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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 진수완
S#1 다설록(茶雪錄)외경(N)
늦은 밤... 인적이 끊긴 인사동 거리...
저만치 보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다구(茶具)집.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잠깐 스치는 가게 간판.
'다설록(茶雪錄)'...
그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
S#2 다설록(茶雪錄)(현재/N)
은은한 인테리어 등만 켜져있는 텅 빈 실내.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놓여있는 다구들.
차시, 찻수건, 찻주전자, 귀때그릇, 뚜껑 받침대, 찻잔 까지 제대로 갖춘 다도상이다.
잠시 후 찻주전자를 집어드는 누군가의 손.
51세의 송주다. 이어 찻잔에 쪼르르.... 따라지는 찻물...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가만히 입으로 가져가는 송주.
그 모습 위로, 매서운 바람소리 겹쳐지면,
S#3 영채집 앞길(새벽)
1952년 겨울. 바람소리... 흩뿌려지는 눈발...
그 텅빈 화면 속으로 아이를 업고 들어서는 여인의 모습.
등 위에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이...
소리없이 눈물을 삼키고 있는 여인... 그 모습 위로,
인하 (E) 차에는 말야. 다섯가지 맛이 담겨있어... 처음엔 그 맛을 잘 몰라. 그저 쓰고, 떫고, 시고, 짠 맛만 느껴지지...
S#4 다설록(현재/N)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그 옆에 놓여있는 쓰다만 원고용지와 만년필...
그 외 차씨주머니, 책 (제목:다향(茶香) 저자:차송주) 등.
인하 (E) 하지만 잘 음미해 봐... 그 네가지 맛이 모두 합쳐지면서 결국 혀 끝에는 쌉싸름한 단맛만 남게 되거든...?
카메라 그렇게 잠시 찻잔을 보여주다가 천천히 어느 한쪽으로 이동하면,
진열대에 꽂혀있는 LP판들을 훑고 있는 손...
어느 한곳에 멈추더니 낡은 LP판 하나를 꺼내든다.
쟈켓 속에서 판을 꺼내 레코더에 걸고 바늘을 올린다.
이어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음악...
그 음악 위로, 겹쳐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S#5 영채집 앞길(새벽)
대문 앞에 보따리 하나와 같이 버려진 채 악을 쓰며 울고 있는 아이.
아이의 품 속에는 '차송주'라는 이름과 함께 비단으로 만든 엄지손톱 만한 크기의 차씨주머니...
인하 (E) 인생도 마찬가지야. 쓴맛을 음미 할 줄 알아야, 단맛을 배울 수 있어. 천천히 음미하면서 기다려봐... 혀 끝에, 인생에, 심장에...
쌉싸름한 단맛이 밸 때까지...
지지직거리는 LP 음악소리 커지면서 천천히 F.O 되는 화면,
그 블랙 화면 위로 타이틀 뜨고...화면 천천히 F.I되면,
S#6 영채집 앞길(D)
잠시 60년대 정서가 담긴 동네 풍경이 펼쳐지는 화면.
(자전거를 타고 종을 울리며 지나가는 두부장사... 아이들 서너명, 장난치며 지나가고 그 위로)
보성댁 (E) 송주야! 고거 버리고 와서 마당도 좀 쓸어라이?
순간 끼이익- 커다란 나무대문 활짝 열리며 안에서 나오는 계집아이.
열두살이 된 송주다. 송주의 목 근처에서 찰랑이는 목거리... 예의 그 차씨주머니다.
배추 쓰레기가 담긴 소쿠리를 골목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1961년 봄.
S#7 영채집 마당(D)
송주, 빈 소쿠리 한켠에 치워두고 빗자루로 마당 쓸기 시작한다.
송주 문득 대청마루 쪽 돌아보면, 거기 상 펴놓고 앉아 숙제하고 있는 영옥(12세).
산수문제 푸는데 지겨워 죽을 노릇인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60년대 가요)에 발 까딱이며 연필만 질겅질겅 씹고있다.
이때 동네 계집아이 서넛 고무줄 들고 와서,
계집아이1 영옥아 고무줄 하자!
영옥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얼른 연필 팽개치고 일어나며) 그래에!!! (급하게 신발 꿰차며) 야, 차송주.
송주 ? (쓸다가 보면)
영옥 (턱짓으로 자기가 하던 숙제 쪽 가리키고는) 알았지? 엄마 오기 전에 다 해놔. (하고는 신나서 아이들과 함께 튕겨나간다)
송주 ... (보다가 빗자루 놓고 마루로 오른다)
연필 들고 산수문제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송주,
막힘 없이 술술 풀어나가는 송주의 눈빛에서 총명함이 느껴지는데,
송주의 목에서 찰랑이고 있는 차씨주머니를 잽싸게 낚아채는 손.
송주 놀라서 보면 언제 왔는지 교복차림으로 서있는 영채(15세).
영채 (비죽 웃으며 산수문제 턱짓하며) 또 영옥이 숙제 대신 하냐?
송주 ... (손 내밀며) 주세요.
영채 (얼른 손 올려 피하며 비죽 웃는) 너 꼭 이렇게 업동이 티내구 싶냐?
송주 (순간 멈칫 하는)
영채 이런 건 버리는 게 좋잖아. 안그래? (하고는 저 멀리 던지는 시늉)
송주 안돼! (기겁하며 마당으로 뛰어 내려가서 찾아보다가 없자 원망스레 영채를 보는데)
영채 (씨익 웃으며 손안에 숨기고 있던 차씨주머니 흔들어 보이는)
송주 (손 내밀며) 주세요. 제꺼예요.
영채 (가방 던지며) 이거나 빨아놔! (들어가는)
송주 (울 듯이 보고)
S#8 영채집 부엌(D)
저녁 준비하고 있는 보성댁과 송주.
보성댁 나물 무치고 있고, 송주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파 다듬는.
보성댁 새끼 버릴 위인이 그래두 지 새끼 지침(기침)해쌌는다고 오미자며 산수유며, 지침에 좋다는 열매는 죄 줏어다 넣은 거 같든디,(나물
한가닥 맛 보며) 차씨 주머니는 왜 목에 걸어줬으까?
송주 ...
보성댁 비단조각에 차씨앗까지 짬매 보낸 거 보면 니가 지법 법도를 아는 아는 집안 애긴개비다.
송주 ... (손동작 멈추고 본다)
보성댁 (다 무친 나물 그릇에 담으며) 차나무는 뿌리가 곧게 내리 뻗기 때문에 옮겨 심으면 죽어버린다잖여. 그려서 옛날엔, 시집가는 딸한티
는 정절 잘 지키라고 차씨를 혼수로 챙겨줬어. 모르긴혀도, 니 에미가 새끼 보냄서 깐에는 혼수까지 챙겨준 거 아니겄냐 고것이.
송주 .... (우울한 표정으로 일하는)
S#9 영채집 안방(N)
영채부, 영채모, 영채와 영옥 밥상에 둘러앉아 있고,
송주 국쟁반 들고 왔다갔다 하며 시중들고 있다.
영채모 (좀 천박한 분위기다)아, 글세 영옥이가 또 산수문제를 한개도 안 틀리고 다 풀어놨지 뭐예요? 가만보면 얘가 보통 똑똑한게 아니예요.
육학년 문제두 척척이예요. 척척. (영옥 머리 쓰다듬으며 이뻐 죽겠다) 아유우. 어디서 요런 야물딱진 게 나왔을까? 응?
영채부 (기분 좋은) 어디서 나오긴. 날 닮아 그러지.
영채모 어머? 저이 좀 봐. 호호호.
송주 ... (영채의 앞에 국그릇 놓는 위로)
영채모 (E) 영옥아. 너 지금 처럼만 해. 이대루만 하면 유학두 보내줄 테니까.
영채 (국그릇 옆에 슬쩍 차씨주머니 올려놓는 위로)
영채모 (E) 요즘은 여자두 공부해야 돼. 그래야 잘 살어. 알았지?
송주 ! (얼른 차씨주머니 집는 순간)
영채 (슬쩍 송주의 치맛 속으로 손 집어넣는)
송주 ! (순간 기겁하며 영채를 쟁반으로 치고)
영채모 (기겁하며) 어머머머!! 재가 근데에!! (앙칼지게) 얘, 너 미쳤니이!!
S#10 영채의 마당(N)
맞았는지 오른 쪽 뺨이 퉁퉁 붓고, 입가 터진 얼굴로 양동이 들고, 무릎 꿇고 앉아있는 송주인데,
영옥 (다가오며) 야, 그만하구 들어가래.
송주 (양동이 내리고, 들어가려는데)
영옥 (송주 앞에 불쑥 문제집 내미는) 과외숙제야.
송주 ... (보다가 외면하며) 이제 안해줘. 니 스스로 해. 중학교 시험 보려면 너두 미리미리 준비해놔야, (하는데)
영옥 (이번엔 소설책 한권 불쑥 내미는)
송주 ! (보는)
영옥 (살살 웃으며) 이 책 읽고 싶다며?
송주 ... (갈등으로 보는데서)
S#11 부엌방(N)
머리 맡에 라디오 틀어놓고 잠들어 있는 보성댁.
스탠드 켜놓고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영옥의 숙제하고 있는 송주.
급하게 마지막 문제까지 다 풀고는 연필 놓자마자 얼른 소설책 꺼내 눈빛 반짝이며 읽기 시작한다.
그 모습 위로,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 띠.띠.띠.띠--
아나운스 (E) (특유의 톤으로) 아홉시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오늘, 반국가단체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한 문서를 제작,
배포한 대학생 30명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하고, 관련 미수범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F.O)
S#12 동네 어귀(다른날/D)
동네로 들어오고 있는 서의원 차.
S#13 서의원의 차 안(D)
서의원, 운전하고 있고, 쿨럭쿨럭 기침 소리에 돌아보면,
그 곳에 핏기없이 파리한 얼굴로 앉아있는 인하(20세). 병색 있는 얼굴...
서의원 ... (안스러움과 심난함으로 보는)
인하 ...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S#14 영채집 부엌(D)
송주, 설거지 뒷마무리 중이다.
행주 꼭 짜서 옆에 놔두고는 얼른 찬장에서 책 꺼내 중간 쯤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데,
영채모 (들어서며) 보성댁. 손님 오실 때 다됐는데...
송주 ! (순간 얼른 책 찬장 속에 집어넣는)
영채모 ? (보는) 뭐니?
송주 네?
영채모 뭔데 도둑고양이 처럼 감추는 거야 너? (하면서 찬장 쪽으로)
송주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막아서고)
영채모 (홱 밀쳐내고는 찬장 뒤져 네댓 권의 소설책과 영옥의 숙제노트 발견하고) ! 너...너 또... (노려보는데서)
S#15 영채집 앞 + 서의원 차안(D)
영채집 앞에 와서 멈추는 서의원의 차.
서의원 (한약꾸러미 챙겨들고 인하 돌아보며) 영채 아버지 약두 전해줄겸해서 오랜만에 들리는 건데, 너두 들어가서 인사하구 갈테냐?
인하 전...그냥 여기 있을께요 아버지. 다녀오세요.
서의원 ... (보다가) 그래라 그럼... (내리는)
S#16 영채집 마당(D)
한약 꾸러미 들고 문 열고 들어서다 엄마아아! 비명 소리에 멈칫 서는 서의원.
송주, 무릎 꿇고 앉아있고, 영옥, 영채모에게 빗자루로 맞고 있는 중이다.
영옥 (매질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내가 시킨게 아니라니까아. 저 기집애가 내 책을 훔쳐간 거란 말이야아!!
영채모 이 기집애가 근데 아직두 정신 못차리구, (매 치켜드는데)
영옥 (얼른 피하며) 진짜란 말이야. 내가 시킨거면 오빠 책은 왜 저 기집애가 갖구 있겠어?
송주 ! (기막혀서 보고)
영채모 ... ? (그제서야 빗자루 내리고)
영옥 (이때다 싶어 얼른 울먹이는 체 하며) 나두 낼 시험이라 공부해야 되는데, 저 기집애가 책을 뺏어가서 공부 한개두 못했단 말이야.
나두 속상해 죽겠는데 엄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울먹이고)
영채모 (순간 송주 쪽을 홱 노려보고)
송주 아, 아니예요. 영옥이가 숙제해주면 영채 오빠 책 얼마든지 준다구,
영옥 (순간 송주 입 막으려 얼른 와아앙 울며) 아아앙--내일 시험 봐야 되는데 공부 하나두 못해서 어떡해에--!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고)
영채모 (매질이 송주에게 향하며) 이 놈의 기집애, 내가 딴건 몰라두 도둑질은 용서 못한댔지!! (때리기 시작하고)
송주 (매질 막으며 도망 다니는) 아니예요. 훔친 거 아니예요.
S#17 차 안(D)
인하의 시선으로 보이는, 열려진 영채집 대문 틈으로 얼핏 보이는 마당의 풍경...
두손으로 싹싹 빌며 도망 다니는 송주의 모습....
S#18 마당(D)
영옥의 울음소리, 아니예요 아니예요, 도망 다니는 송주의 소리,
너 이리 못와! 소리치는 영채모의 소리로 아수라장인 마당.
서의원 (더는 못 보고) 저기 영채 어머(니), (나서려는데)
영채부 (방문 벌컥 열고나오며 무섭게) 뭐야 도대체! 집안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하다가 서의원 발견하고) 어, 이 친구, 언제 왔나?
영채모 ? (봤다가 이크, 얼른 빗자루 내리고 옷매무새 가다듬고는 교양있게) 어머, 어서 오세요오.
서의원 아 예... (어색하게 인사하는)
송주 ! (눈치 살피고 있다가 이때다, 얼른 바닥에 떨어진 소설책 줏어 들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고)
영채모 너 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서의원 의식하고 얼른 교양있는 미소로)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서의원 아 예... (대청으로 오르는)
S#19 대문 앞 + 차안(D)
소설책 품에 안고 튀어나오는 송주.
맞은 데가 아픈 듯 만져보다가 이내 헝크러진 머리 대충 손으로 정리하고 적당한 곳에 앉더니
소설책 꺼내서 아까 읽던 곳부터 펼쳐서 읽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그런 송주를 바라보는 인하... 귀여운 듯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영채부 (E) 그래 서울엔 무슨 일루 다녀오는 길인가?
S#20 안방(D)
다과상을 마주하고 앉은 서의원과 영채부.
서의원 한약재도 좀 구할게 있고, 간 김에 인하녀석 아주 데려와 버렸네.
영채부 그래에? 거 잘했구만. 그래 건강은?
서의원 ... (가만히 고개 젓는)
영채부 쯧쯧. 모난 돌이 정 맞는다더니 옛말 틀린거 하나 없구만. 서울서 좋은 대학 다닌다길래 그런 줄로만 알았더니...
서의원 ... (말없이 차 마시는)
영채부 도대체 그 녀석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거야? 이승만 뒷덜미 잡아 끌어내렸으면 됐잖아. 뭘 또 바꿀게 있다구 몸 망쳐 가며 그러는 거냐 구 대체.
서의원 바뀌면 뭘 하나. 군인이 탱크 밀구 한강다릴 건너왔는데. 할 일 다하면 다시 부대루 돌아가겠다던 사람이 아예 들어앉으려구 하구 있잖 아 지금.
영채부 (잔뜩 긴장하며) 말 조심하게 이 사람아. 지금 시기가 어느 때라구 그런 소릴 함부루 하나.
서의원 겁 먹기는... (피식 웃고는 차 마시려다) 근데 아까 그 아이, 그때 그 업동이 맞지?
S#21 대문 앞(초저녁)
송주, 거의 책의 끝부분을 읽고 있는 중이다.
주위가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듯, 책을 눈 가까이에 바싹 붙이고 읽는데, 문득 주변이 환해진다.
송주 ?해서 보면 세워진 서의원의 차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불빛...
송주 입가에 고마운 미소 생기며 다시 책으로 시선 주는데, 차 안에서 쿨럭쿨럭 새어나오는 기침소리...
송주 ... ? (보다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 쪽으로 걸어가는)
똑똑, 차문을 노크하면 천천히 내려지는 창문.
거기 창백한 인하의 얼굴...
송주 ... (보다가 꾸벅 인사하고는) 저기, 불... 고맙습니다.
인하 (웃고, 송주가 들고 있는 책 보며) 그 책... 좀 어렵지 않니?
송주 (쑥스럽게 웃으며) 네. 무지 어려워요.
인하 (귀엽다. 웃으며) 그럼 좀 더 쉽구 재밌는 책을 읽지 그러니?
송주 (씩 웃으며) 읽을게 이거 밖에 없거든요.
인하 ... (보다가 웃는데 다시 터지는 기침)
송주 ... (어쩐지 안쓰러운)
인하 (잘 멈춰지지 않자) 감기 옮기겠다. 창문 닫을께 책 읽어.(닫으려는데)
송주 저기, 잠깐만요.
인하 (멈추고 보면)
송주 (잠시 망설이다 목에 걸고 있던 차씨 주머니 건네주는)
인하 이게...뭐야?
송주 차 씨앗이요.
인하 ... ? (보면)
송주 기침하는데 뜨거운 차가 좋데요. 키워보세요 한 번.
인하 ... (따뜻하게 웃으며) 고마워...잘 키워볼게...
송주 (웃는데서)
S#22 부엌방(N)
보성댁, 맞아서 상처 난 송주의 다리에 약 발라주고 있다.
보성댁 이 집 어매가 천출이라 열등감이 좀 있어. 혹시라도 저 닮았다는 소리 들을까봐 지 새끼들 못난 꼴을 못 봐. 가만 보면 고 화풀일 다
너한테 퍼붓는겨.
송주 (쓰라린) 아아...
보성댁 아퍼? (상처 후후 불어주다가) 그러게 왜 자꾸 책엔 손을 대는겨? 그러니까 영옥이 고것이 널 자꾸 부려먹는 거 아니여.
송주 ...
보성댁 앞으로 아는 문제가 있어도 모른다그려. 딱 잡아떼고 해주덜 말어.
송주 (시무룩하게) 나두... 공부하구 싶단 말이예요...
보성댁 ? (보는)
송주 나두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구 싶다구요.
보성댁 ... (그 맘 아는, 약 치우며)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어 이것아. 어중띠게 글 알아봤자 머리만 더 복잡해지는겨. (윗옷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흰소리 고만 허고 어여 잠이나 자.
송주 ...
보성댁 (누운 채로) ... 짧지만 살아보니께 너두 잘 알 것 아니여. 사람 사는 게 워디 맘 묵은 디로, 하고 자픈 디로 돌아가는 것이간디?
그냥저냥 쓸어덮고, 포기하고 사는 것이제.
송주 ... (시무룩하게 보다가 세워논 무릎 사이로 얼굴 묻는데서)
S#23 영채집 외경(D)
벨 소리 울리며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우체부.
영채 집 앞에 멈춰서더니 뒷칸에 실었던 짐꾸러미 들고 영채집 안으로 들어간다.
S#24 마당(D)
보성댁과 송주 빨래줄에 빨래 널고 있다.
한손에 누런 포장지로 포장된 소포꾸러미 들고 들어오는 우체부.
보성댁 (빨래 탁탁 털어서 널다가) 그게 뭣이여? 이 집 사장어른 것이여?
우체부 아녀. 이 집 송주 헌티 뭣이 왔구먼.
송주 (멈추고 보며) 저요?
보성댁 워매? 너 한티 누가 뭣헐라고 물건을 배달시켰을까이?
우체부 (송주에게 주고) 고것이사 풀어보면 알겄제. 가네 그럼. (나가고)
송주 평상에 올라 얼른 소포 꾸러미 풀러본다.
소포 안에서 나오는 네댓권의 책들.
보성댁 얼래? 고것이 책 아니여? (얼른 자기도 책 한권 들고 넘겨보면 군데군데 밑줄 친 자국도 있는) 누가 읽던 걸 준거 같은디?
송주 (보성댁 보며 좋아서) 누굴까요? (책장 넘겨보며 환해지는데서)
S#25 몽타쥬
- 부엌. 찌개 끓고 있는 솥 앞에 쭈그리고 앉아 책 읽고 있는 송주.
- 한 손에 책 들고 마당 쓸고 있는 송주. 그때 우체부 들어서고...
잠시후 배달되어져 온 소포 꾸러미 풀고 있는 송주, 소포 안에서 나오는 다른 제목의 책들.
- 부엌방. 이불 덮고 누워서 후래쉬 들고 책 읽고 있는 송주.
다 읽고 덮다가 맨 뒷장의 '서인하'라는 이름을 발견하는...
- 대청마루를 왔다갔다 걸레질 하고 있는 송주,
두 손으로 걸레를 마루 끝까지 쭈욱 닦으면서 가면, 그 곳에 놓여있는 책 한 장 읽고,
마루 저 쪽 끝까지 걸레 쭈욱 밀고 갔다가 다시 와서 한 장 읽고 하는 식으로...
S#26 마당(D)
마루 끝에 앉아 책 읽고 송주.
책으로 가려져 얼굴 보여지지 않았다가, 다 읽은 듯 천천히 책 내리면,
어여쁘게 성숙된 스무살의 송주다. 1969년 봄.
다 읽은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책에 밑줄쳐져 있는 부분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보는 송주.
늘 해왔던 일인 듯 이번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겨보는 송주.
마지막 빈 페이지에 적혀있는 '서인하'라는 이름...
송주 (그 이름 손 끝으로 만져보며 혼잣말로) 누구세요....? (묻는데)
영채 (E) 안가! 이 기집애야!
송주 ? (대문 쪽 보는)
S#27 대문 앞(D)
진하게 화장한 여자 한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영채(23세).
여자 왜 이래? 오늘 영화보여주기루 약속했잖아.
영채 내가 언제 기집애야! 빨랑 안가?
여자 다 알아. 이 나쁜 자식아! 너 또 바꿔찼지? 그 여자한테두 서울서 대학 다닌다구 뻥쳤니? 그랬더니 그 기집애두 속디? 속아?
영채 이 기집애가 근데. (손 치켜 들며) 이걸 확 그냥!
여자 (손으로 막으며) 치기만 해봐 어디이. 니네 아버지한테 확 불어버릴 테니까.
영채 어휴, 미치갔네 진짜. 어으! (하고는 대문 발로 뻥 차며 들어가고)
여자 영채씨이 어디가아!! (울상이 되고)
S#28 마당(D)
대문 거칠게 열리며 들어서는 영채.
송주 (마루 끝에서 책 들고 일어나며) 오셨어요?
영채 ... (송주가 들고 있는 책 힐끔 봤다가) 어머니는?
송주 친구분 아드님이 아프시다구 사장님이랑 거기 병문안 가셨는데요.
영채 (마루로 올라가며) 나 밥 안 먹었어. 빨리 차려줘. (방 쪽으로 가고)
송주 네. (부엌으로 가는)
영채 (들어가려다가 문득 송주 쪽 돌아보는) .....
S#29 영채의 방(D)
영채, 아무렇게나 누워서 잡지 넘겨보고 있다.
송주, 밖에서 기척 하면, 영채 누운 채로 '들어와' 한다.
송주 밥상 들고 들어온다. 상 놔두고 나가려는데,
영채 (비스듬히 누워서 잡지 넘기는 채로 건성으로) 너 잠깐 이리 와봐.
송주 (돌아보며) 네?
영채 (송주 보며) 안들려? 문 닫구 와서 앉으라구.
송주 ... 저 지금 바빠서요. (나가려는데)
영채 (일어나서 문 쪽 막아서고)
송주 (놀라서 보면)
영채 (비죽 웃으며) 가만 보니까 너 제법 이쁜 구석이 있어.
송주 ! (보고)
영채 눈 감아 봐.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비죽 웃고)
송주 (하얗게 굳어 보는데서)
S#30 영채집 앞길(D)
보성댁 시장 다녀오는 길인지 장바구니 들었고,
영채모는 외출복 차림.
보성댁 그려서, 그 집 아들은 아주 가망이 없는 거래요?
영채모 젊을 때 얻은 병을 여태 보듬구 사는데, 쉬 고쳐지겠어요 어디? 아버지가 한의사면 뭘해요. 말은 안해두 죽을 날짜 까지 받아논거
같습디다.
보성댁 쯔쯔쯧... 인물도 훠언허니 잘생겼등구만 안됐네요이.
영채모 누가 아니래요.
S#31 영채집 마당길(D)
보성댁과 영채모 들어서는데
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후다닥 영채방에서 도망쳐 나오는 송주.
'너 이리 안와?' 그 뒤를 바로 쫒아 나오는 영채.
그렇게 뛰어나오다가 영채모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는 두 아이.
두 아이 모두 헝크러진 머리, 삐죽삐죽 튀어나온 옷들...
영채모 (사태를 파악하고 하얗게 질려서) 너...너...이,이게,지금 무슨,
송주 (수치심으로 두 눈 질끈 감고)
영채모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가) 아으으... (쓰러지는데서)
S#32 영채집 부엌방(n)
한쪽 구석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송주.
송주의 짐을 싸주며 훌쩍이고 있는 보성댁.
보성댁 지 새끼 괴물인건 생각 못허고, 생사람 헌티 덤탱이 씌우는 것이지 뭣이여 이것이.(짐 싸던 것 멈추고, 송주의 손 잡으며 안쓰러워서)
불쌍해서 워쪄, 우리 송주 불쌍해서 워째야 쓰까이?
송주 ...
보성댁 한 번도 지 뜻대로 살아보덜 못허고오오..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고오오...응응응. 하늘도 무심허지이이..하늘도 무심혀어어...한참 이쁜 나이에 뭔 죽을죄를 지었다고 폐병쟁이 수발 보낼까...이? 응응응...(문 쪽에 대고)에이, 잔인한 인간들, 에이 상종 못헐 인간들.
송주 ... (이 앙 다물고 눈물 꿀꺽 삼키는)
S#33 영채집 앞(D)
기다리고 있는 서의원의 차. 짐들고 나오는 송주와 보성댁.
송주 훌쩍이는 보성댁의 손 한 번 잡아주고 차에 오르려는데,
문득 저만치 껄렁하게 걸어오던 영채, 송주를 발견하고 멈칫 서는.
영채 (짐짓 껄렁하게 웃으며) 지금 가냐? (오는데)
송주 (원망과 경멸의 눈빛으로 보는)
영채 (어쩐지 그 눈빛에 멈칫 하고)
보성댁 ... (보다가 송주 어깨에 손 올리고는 차에 태우는)
송주, 눈물 차오른 얼굴로,
이 앙다물며 영채를 노려보다가 차에 오르면 곧이어 출발하는 차.
영채 어쩐지 멍하고 허전한 기분이 되어 멀어지는 차를 바라본다.
S#34 산 아래 차 밭 풍경(D)
이제 막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는 찻잎들이 싱그러워보이는....
S#35 차밭일각(D)
인하가 요양하며 머무는 차밭.
먼데 확 트인 산. 맑은 산새소리.
한 손에 책 들고 창백한 얼굴로 걸어오는 인하 (28세)
준하 (e) 형!
보면, 서의원과 준하 서있다.
인하 (미소로) 오셨어요?
서의원 (얼굴에 안쓰러움 생기며) 어디 책 읽다가 오는 길이냐?
인하 네. 오시지 말라니까 왜 자꾸 오세요.
S#36 집일각(D)
얘기나누며 올라오는 인하 일행.
인하 선하게 웃다가 어떤 느낌에 집쪽을 보면,
저쪽 끝에 앉아 먼데 산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송주.
인하 ! (보고)
송주 ... (느껴지는 시선에 무표정한 얼굴로 인하 쪽을 돌아보는)
인하 ... (알아보고 어색하게 미소 짓는)
송주 ... (애써 조금 웃어보이다가 다시 슬픈 표정으로 시선 돌리는)
인하 ... (무거워져서 보는 위로)
인하 (E) 그럴순 없어요 아버지.
S#37 인하의 방(D)
책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 책꽂이,
앉은뱅이 책상 하나와 이불이 전부인 방안.
서의원과 인하가 마주 앉아있다.
인하 나 편하자구 다른 사람 까지 잡을순 없는 거잖아요. 저 애 아직 젊어요 아버지. 이 산 속에서, 그것두 병 걸린 남자랑 단 둘이,
그럴순 없죠. 그래서는 안되는 겁니다. 내려보내세요 네?
서의원 (안쓰런) 너두 젊다. 너두 아직 젊어 인석아.
인하 (달래듯) 저 혼자가 편해요 아버지. 도와줄 사람 필요 없어요. 저 혼자서두 괜찮다구요.
서의원 (속상해서 터지며) 내가 안 괜찮아 인석아!
인하 ! (보는)
준하 형, 아버지도 쉽게 내린 결정 아니야.
서의원 너 혼자 이 후미진 곳에 팽겨쳐두구 잠이 안 와서 그래 내가. 젊은 눔이 이 산 속에 쳐박혀서, 그 나이 먹두룩 여자 한 번 품에 못 안 아 보구, 그렇게 외롭게 살다 가는 거, (차마 말 잇지 못하고 울컥 했다가) 내가 못 보겠어서 그래.
인하 아버지이...
서의원 니가 알어 인석아? 자다가두 벌떡벌떡 일어나 내가. 그때 젊은 혈기루 나대던 니 녀석, 다리 몽둥이라두 분질러 주저앉힐 걸 왜 못했을 까, 하루면 수천번두 더 가슴 뜯으면서 후회해 내가 알어?
인하 ... (그 맘 알지만) 그럼 저애는요. 저애 부모님은요 아버지...
S#38 송주의 방(N)
어두운 방안.
무릎 두 팔로 감싸안은 자세로 멍하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송주. 그 모습 위로
인하 (E)내 아이 아니라구, 부모 없는 아이라구, 저 아이 인생까지 우리가 맘대루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돌려보내세요. 저 정말 괜찮아 요 아버지...
가만히 맨 바닥에 눕는 송주...
먼데 구슬프게 들려오는 산새소리...
천천히 눈을 감으면 맺혀있던 눈물 주욱 흐르는...
S#39 인하의 마당
이른 아침.
책 한권 들고 나오는 인하.
마당 한쪽에 걸터앉아있는 송주를 본다.
인하 ... (무거운 심정으로) 일어났니?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듯 어제 옷차림 그대로 앉아있는 송주.
인하 (대답 없자 무겁게 한숨 쉬고는, 담담하고 편하게 이야기하는)우리...언젠가 한 번 본 적 있지? (미소로)처음에 널 봤을 때 말야..무표 정하고 어두워 보였지만 잠깐 웃던 그 웃음이 기억 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았어. 넌 니 맘 속 어딘가에 숨겨둔 웃음이 이쁜 아이야. 그 동안 별 웃을 일 없이 힘들게 살아왔다는 거 알아. 여기 있으면, 그나마 웃는 법을 잊게 될 지도 몰라..난 니가, 니 인생을, 그리구 웃 음을 찾을 수 있게 되길 바래..(일어나며) 나 지금 산책 나가는 길이야...돌아왔을 때 니가 없으면, 내 진심을 이해한거라구 생각할 께...(송주 한 번 보고 나가는)
멍하니 앉아있는 송주,
가만히 인하가 간 쪽을 바라보고는 세워논 무릎 사이로 얼굴 파묻는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어느 순간 결심한 듯 고개 드는데서,
(이하 S#42 까지 몽타쥬의 느낌으로)
S#40 인하의 광(D)
송주 팔 걷어부치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가며,
수세미로 광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다.
물받아 놓은 대야에 걸레를 빨아가며...
한쪽 구석에 있는 LP 플레이어를 발견한다.
S#41 인하의 방(D)
송주 가만히 문 열어본다. 선뜻 들어가지지가 않는.
결심한 듯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안으로 들어가는 송주.
쓰다 만 원고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인하의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문득 바닥에 떨어진 원고용지 줏어드는 송주...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 아래 적힌 이름 '서재준'...
송주 ... (보다가 내려놓고 이번엔 이불 겉감을 뜯기 시작한다)
S#42 인하의 마당(D)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빨아놓은 이불 겉감이며 인하의 옷가지 등을 널고 있는 송주.
손등으로 이마의 땀 닦아내며 열심이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인하,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본다.
떠나지 않은 송주를 보며 무겁게 한숨 쉬는.
S#43 인하의 마당 일각(D)
빨래줄에 하얗게 빨아 널어놓은 이불 겉감과 와이셔츠...
그 사이로 빈 빨래통 들고 나오는 송주, 그 앞에서 선 인하를 발견한다.
인하 이거... 너무 하얗게 빨지마.
송주 ?
인하 (빨아놓은 빨래 매만지며 조금 웃는) 이러면 좀 우울해져...
송주 ... (보는)
인하 생각 만큼 그렇게 쉽게 전염되는 병이 아니야. 기분이 영 찜찜해서 조심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웃으며) 이 정두 까지 안해두 돼.
송주 ... (어쩐지 조금 미안해지는)
인하 여기서 나랑 같이 있는 거... 안 무서워?
송주 무서워요.
인하 (웃으며) 근데 왜 안 내려갔어?
송주 도망가볼까두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갈 데가 없어요. (피식 웃으며) 그리구 어짜피 도망가두 끈질기게 쫒아올 텐데요 뭐.
인하 뭐가?
송주 불행이요. (혼잣말처럼 되뇌이듯) 불행...행운이나 행복의 반대말...
인하 ... (보는)
송주 (짐짓 가볍게) 내 인생에 달린 꼬리가 무지 긴가봐요. 도망가두 꼭 밟혀요. 아줌마 말이 맞았어요. 인생이라는 게 맘먹은 대로, 하구싶 은 대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봐요. 그냥 대충 쓸어덮고, 포기하고 사는 것두 괜찮을꺼 같아요...
인하 ... (보다가) 너... 산나무로 끓인 차 마셔봤니?
송주 ? (보는데서)
S#44 인하의 마당(D)
화로 속에 담긴 작은 산나무 가지들이 타오르고 있다.
그 화롯불 위에 하얀 김을 내며 끓고 있는 찻주전자.
인하 (주전자 들고 잔에 찻물 따르며) 산나무 가지로 차를 달이면 찻잔에 산냄새가 담겨 차맛이 더 좋아져. (첫잔을 송주에게 내밀며) 한 번
마셔봐.
송주 (선뜻 받지 못하고)
인하 (웃으며) 괜찮아. 한 번두 안 쓴 찻잔이야.
송주 아니... 그게 아니구요. 한 번두 마셔본 적이 없어서.
인하 지금 마셔보면 되잖아.
송주 ... (받고, 조심스레 한모금 마셔보는)
인하 (반응 살피며) 어때?
송주 (쓰다. 얼굴 찌푸려지는)... 쓰구 떫떠름해요.
인하 (웃으며) 첨엔 다 그래. (자기 잔에 찻물 따르며) 차에는 쓴맛, 떫은맛, 신맛, 짠맛, 단맛...이렇게 다섯 가지 맛이 담겨있는데 첨엔 그 맛을 잘 몰라. 그저 쓰구 떫은 맛만 느껴지지.
송주 ... (보는)
인하 근데 한 번 잘 음미해 봐. 그 네가지 맛이 합쳐지면서 결국 혀 끝에는 쌉싸름한 단맛만 남게 되거든? 첫맛이 쓰다구 뱉어버리면 영 차 맛을 못 배우게 돼. (송주 보며 의미 있게) 인생도 마찬가지야. 쓴맛을 음미 할 줄 알아야, 단맛을 배울 수 있어.
송주 ...
인하 흔히들 찻잔 속엔 인생이 담겨있다구 하잖아. 맞는 말인 거 같아. 인생의 쓴맛, 떫은 맛, 짠맛, 신맛이 다 이 안에 들어있구, 단맛을
맛 보려면 오랜 시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되는 거... 인생이랑 많이 닮지 않았니?
송주 ...
인하 (미소로) 그래서 나는 차를 마셔. 기다리는 법을 배우려구. 기다리는 법을 배우면, 의미 없는 고통, 의미 없는 시간들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되니까... (웃고 마시는)
송주 ... (보는데서)
S#45 차 밭(저녁무렵)
석양이 깔릴 즈음의 차밭 풍경...
인하 (E) 옛날 중국의 '운이'라는 여인은 작은 비단 주머니에 엽차를 싸서 저녁에 연꽃 속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 샘물에 끓여 마셨 대. 그 여자 스스로 만들어낸 다도법이였지.
언덕 즈음에 앉아 차밭을 바라보고 있는 송주...
인하 (E) 살아가는 방법두 마찬가지야. 정해져 있는건 아무 것두 없어. 자기가 선택해서 나만의 방법으로 꾸려가면 되는 거야...이 곳에 있 는 동안 한 번 생각해봐...난 어떤 방법으루 살아갈까..어떤 향을 지닌 사람이 될까...그럼 덜 두려워질 꺼야 이 곳에서의 시간들이...
차밭을 바라보는 송주의 입가에
어느 순간 편안한 미소가 생긴다. F.O
S#46 인하의 마당(다른날/D)
마른 빨래 걷고 있는 송주. 인기척 들리자 현관 쪽으로 가본다.
인하, 웬 낯선 사내(인하 또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탈고한 원고 뭉치를 사내에게 건네는 인하.
두툼한 봉투를 인하에게 건네는 사내.
두 사람 악수 나누고, 사내 산 아래로 내려간다.
송주 ...
S#47 인하의 방(D)
책상 앞에 앉아 봉투를 열어보는 인하.
그 안에서 나오는 두툼한 새 원고 뭉치.
이때 밖에서 기척내는 송주.
송주 (E) 큼큼. 저기... 점심상 봐왔는데요.
인하 어. 그래. (일어서고)
송주 (밥상 들고 들어오면)
인하 (받아서 내려놓으며) 앞으로는 그냥 문 앞에 내려놔. 괜히 이 방 왔다갔다 하면 안 좋을 수두 있잖아.
송주 ... (괜히 미안해지는데, 문득 책 꽂이에 꽂혀있는 책에 시선 가는)
인하 ? (그 시선 따라가 봤다가 웃으며) 왜에? 읽구 싶은 책 있어?
송주 (어색하게 웃으며) 읽고는 싶은데...전부 어려운 책들 같아서...
인하 (일어나서 적당한 책 한권 골라서 주며) 이 책 아직 안 읽어봤지? 한 번 읽어봐. 좋아할 꺼야 아마.
송주 (받고) 고맙습니다.
인하 아, 또 줄꺼 있다.
송주 ? (보면)
인하 (새 원고 뭉치에서 원고지 반 뚝 잘라서 내미는)
송주 이게... 뭐예요?
인하 원고지. 글을 지을 때 쓰는 종이.
송주 ... ? (보면)
인하 읽고 쓸 줄 알지? 그럼 글도 지을 수 있어. 그 네모칸 안에 하고 싶은 말을 하나 하나 적어 넣어 봐. 그럼 느낌이나 마음이 그 원고지 안에 갈무리 되거든.
송주 ... (보면)
인하 (미소로) 공기 좋구 조용하잖아. 한 번 써봐. (웃는데 쿨럭쿨럭 나오는 기침, 얼른 손으로 막으며 고개 돌리는) 기침 나온다. 얼른 나 가봐. 상은 내가 내 놓을께.
송주 ... (짠해져서 보는)
S#48 송주의 방(N)
책상 위에 인하가 준 원고지와 책을 올려놓는 송주.
원고지를 가만히 손으로 쓸어본다.
한쪽에 잘 놔두고 이번엔 책장을 넘겨보는 송주.
책 곳곳에 쳐져 있는 밑줄...
그렇게 책장을 넘겨보다가 멈칫 하는 송주.
마지막 빈 페이지에 적혀있는 '서인하'라는 이름...!
띵해져서 보는 송주의 모습 위로 짧게 플래시컷되는 26씬.
- 빈 페이지에 적혀있는 '서인하'라는 이름을 손끝으로 만져보며
혼잣말로 누구세요....? 묻던 송주의 모습에서,
송주 ... ! (쿵, 하는 심정으로 인하의 방 쪽을 돌아보면)
인하 (방 쪽에서 들리는 기침소리)
S#49 인하의 방(N)
어두운 방안.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달빛...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고 누워 끙끙 앓고 있는 인하.
간간이 가픈 기침소리...
그런 인하의 이마 위에 가만히 얹어지는 손...
인하의 앞에 앉아 창백한 인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송주...
뭉클한 심정으로 인하를 바라보는 송주의 눈가에 서리는 연민과 애정...
S#50 차 밭 풍경(이른 아침)
아직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의 차 밭 풍경...
S#51 차밭길(D)
새소리. 산책하고 있는 송주.
인하 (E) 일찍 일어났네?
송주 ? (보고) 어디 다녀오세요?
인하 (깨끗한 흰 천으로 덮인 작은 소쿠리 들고오며) 차밭.
송주 그건 뭐예요?
인하 햇차를 만드는 계절이잖아. 찻잎 따가지구 오는 길이야.
송주 아직 어린 싹일텐데 그걸 벌써 다 따면 어떡해요?
인하 이렇게 어린 찻잎을 따줘야 나중에 좋은 차를 수확할 수 있는 거야. 어때? 지금부터 햇차를 만들 생각인데 좀 도와주지 않을래?
송주 ... (피식 웃는데서)
S#52 몽타쥬(D)
-마당에 커다란 가마솥 꺼내놓고 화롯불 위에 달구고 있는 두사람.
-인하, 뜨겁게 달구어진 가마솥에 찻잎 넣고 덖기 시작하고.
-송주 피어오르는 연기에 켁켁대고, 인하 그런 송주 보며 웃고.
-소매 걷어 부치고 한번 덖어진 찻잎을 손으로 부시고 있는 두 사람.
얘기 나눠가며 간간이 환하게 웃기도 하고...
인하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송주...
애매한 감정이 생기려는 순간, 애써 시선 돌리는...
S#53 인하의 마루(초저녁)
다기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는 두 사람.
방금 만든 햇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두 잔의 차를 만드는 인하.
송주에게 한잔 내밀고, 자신도 한 잔 손에 드는.
두 사람 마주보고 조금 웃었다가 동시에 차맛을 본다.
인하 (마시고) 어때?
송주 (고개 갸웃했다가, 웃으며) 맛있는데요? 성공인거 같아요.
인하 이제 제법 차맛을 아는구나. (웃으며 마시는)
송주 ... (그런 인하 바라보다가) 뭐 하나 물어봐두 돼요?
인하 뭔데.
송주 왜 가명을 써요?
인하 (본다)
송주 서재준이라는 이름, 가명이죠? 본명은 서인하... 아닌가요?
인하 ... (조금 웃으며 차 마시는)
송주 아직...(시선 다른 곳으로 돌리며) 위험한 글 쓰구 있는 거...맞죠? 그래서 가명이 필요했던 거 아니예요? 신분이 노출되면 안되니까..
인하 솔직히 말하면...(잠시 사이. 피식 웃으며) 부끄러워서야.
송주 ? (본다)
인하 병 핑계 대구 도망쳐 나와, 숨어서 쓰는 글이 부끄러워서 이름 뒤에 숨은 거야. (웃으며 짐짓 가볍게) 그래서 가명이 필요했어.
송주 어쩔 수 없었잖아요... 몸이 아픈데...
인하 ... (보는)
송주 당신두 피해자예요. (독백처럼 담담하게) 병 걸려가면서 그런다구 쉽게 변할 세상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쉽게 변할 세상이었다면 그렇 게 많은 사람들이 아플 이유두, 괴로워할 필요두 없이 벌써 변했겠죠...
인하 내 병은... 기다리는 방법을 몰라서 생긴 병이야.
송주 ? (본다)
인하 기다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지치지 않아. 고통스럽지도 않아. 사랑하면서 기다리는 법을 아는 사람은 강인해. 난... 기다리는 방법을
몰랐어. 사랑하지두 않았어.
송주 누굴요? 누굴 기다리구... 누굴 사랑하지 못했는데요?
인하 내 인생을,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을... (피식 웃으며) 진심으루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한 만큼 변해주지 않는 세상 에 화가났어. 화가 나니까 지쳤구, 지치니까 도망가구 싶어졌어.
송주 ...
인하 내 병은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됐구, 소원대루 이젠, (피식 웃으며 짐짓 가볍게)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됐어.
송주 ... (그 말에 마음이 아픈)
인하 ... (입가에 쓴 미소 달고 먼데 산을 보는)
송주 ... (안쓰럽게 보다가) 저기요... 나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인하 ... ? (보는데서)
S#54 광(N)
플래시 불빛과 함께 계단을 올라서는 인하와 송주.
송주, 손에 플래시 들고 구석구석을 비추며 뭔가를 찾고 있다.
인하 도대체 여기서 뭘 봤다는 거야? 여긴 아무 것도 없는데...
송주 (혼잣말로)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서 봤는데...? (후래쉬 이리 저리 비춰보다가 마침내 어느 한곳에 멈추며) 아. 저깄다!
송주의 후래쉬가 만들어내는 노란 공간, 그 안에 담기는 낡은 전축.
S#55 인하의 방(N)
꺼내온 낡은 전축 손보고 있는 인하.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고치는 거 보고 있는 송주.
대충 손 봤는지, 꺼내온 LP판 중에 하나를 꺼내 레코더에 걸어보는 인하.
바늘을 올리기 전에 잠깐 송주를 바라보면, 잔뜩 긴장해서 고개 끄덕이는 송주.
인하, 조심스레 바늘을 올리면 이어 흘러나오는 음악.(S#4에서와 같은)
순간 입가에 미소 생기는 두 사람...
S#56 인하의 마당(N)
(시간 경과- 음악은 계속 이어지고)
마루 이쪽과 저 쪽 끝에 나란히 앉아 달바라기 하고 있는 두 사람.
잠시 그렇게 말이 없는데...
송주 (그 침묵을 깨고) 저기요...
인하 ? (보면)
송주 나한테 쭈욱 책 보내줬던 거... 고마웠어요.
인하 ... (미소로 보는)
송주 책 뒤에 써 있는 이름만 보구, 누군지 모르지만 서인하라는 사람이랑 나, 참 많이 친해진 느낌이 들었었어요.
인하 ...
송주 당신이 책에 밑줄 쳐 논거 보면서, 같이 얘기하고 있는 듯한 착각두 들었어요. 이 글 참 좋다 그럼, 어김없이 그 곳에 밑줄이 쳐져있는
거예요. 그거 보면서 이 사람, 나랑 참 많이 닮았겠다 그런 생각두 했어요.
인하 (웃는데)
송주 (불쑥) 당신 병... 못 고치나요?
인하 ? (보면)
송주 그 병... (혼잣말처럼) 고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인하 ... (아릿하게 보는)
달과 음악과 산새소리가 있는 두 사람의 밤풍경에서...
S#57 인하의 마당(다른날/D)
마당에 불피워놓고 인하의 약 다리고 있는 송주.
방에서 산책 차림으로 나오는 인하. 그 동안 많이 수척해진 모습.
송주 (자리에서 일어나며) 산책 나가시게요?
인하 어.
송주 약 드시구 가시지...다 됐는데...
인하 갔다 와서 마실게.
송주 어디루 가시는데요?
인하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바다가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송주 네에... (시무룩해져서) 다녀오세요.
인하 (나가다 말고 멈추는, 돌아보며) 송주야.
송주 (보는)
인하 같이 갈래?
송주 (순간 환해져서 고개 끄덕이고는) 잠깐만요. (집 뒤켠으로)
인하 ? (보면)
송주 (위에 걸칠 만한 옷 하나 들고 나오며) 봄은 봄인가 봐요. 빨래도 금새 마르네요.
인하 ?
송주 바닷바람 쐬면 또 기침할지 모르잖아요. (웃으며 걸쳐주고)
인하 ... (따뜻해져서 보는)
S#58 바닷가(D)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두 사람.
인하 책을 읽다가 문득 송주 쪽을 돌아보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귀 뒤로 넘겨가며 책을 보고 있는 송주.
인하, 그런 송주보며 애잔해지는데...
준하 (E) 형.
인하,송주 ? (돌아보면)
준하 (웃으며 다가오는)
인하 (일어서며 반가운) 준하야. 여긴 어쩐 일이야 니가.
S#59 차밭길-마당(D)
이야기 나누며 들어서는 세 사람.
송주 무슨 얘기 끝인지 밝게 웃다가 그 자리에 멈칫 굳어 선다.
인하 ?해서 송주의 시선 따라가 보면,
마루 끝에 앉아있다가 일어서는 영채.
인하 (의외다) 영채야.
준하 (웃으며) 형 한 번 보구 싶다구 하길래 같이 왔어.
영채 미안해요 형. 온다 온다 맘만 먹고는 이제서야 오게 되네요.
인하 미안하기는. 잘왔어. 들어가자.
송주 (굳은 채로 보고)
영채 (그런 송주 보며 비식 웃는)
S#60 인하의 마당(또는 마루/D)
인하, 준하, 영채 찻상 두고 앉아 이야기 중이다.
준하 (찻잔 내려놓으며)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셔. 그래서 말인데 형,(말 꺼내려는데, 인하의 약 들고 들어오는 송주, 잠시 말 끊기고)
송주 (약 그릇 주며) 드세요.
인하 어... 고마워. (마시고)
송주 (손수건 들고 있다가 주면)
인하 (받아서 입 닦고)
송주 (빈 그릇 쟁반에 챙기며) 약 먹었으니까 차 드시지 마세요.
인하 (따뜻하게 웃으며) 알았어. 그럴께.
영채 ... (그런 두 사람 보며 웬지 심사가 꼬이고)
준하 (송주 나가면 말 잇는) 그래서 말인데.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병원으로 들어가서 제대루 된 치료를,
인하 준하야. (미소로) 난 여기가 좋아. 공기두 좋구 조용하구 아주 편해.
준하 형.
인하 나 혼자 여기에 두구 가족들 내 걱정 많은 거 아는데, 나 그냥 여기 있고 싶다. 여기 생활이 좋아.
준하 ... (무겁게 한숨 쉬는데)
영채 그러지 말구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형.
인하 ? (본다)
영채 제 짧은 머리로 생각 해봐두 병원으루 가시는 게 좋을꺼 같은데요 뭘.
인하 (웃으며 짐짓 가볍게) 병원이 필요할 만큼 그렇게 희망적이지가 않아서 그래 임마.
영채 그래두 여러 사람 편해지잖아요. 형 본인은 물론이구, 가족들두 한시름 놓을테구, 또 송주를 생각해봐두 그렇죠.
인하 (순간 보는)
영채 막말루 송주 재 인생 지금 형한테 저당 잡혀 있는 꼴이잖아요. 아마 말은 안해두 저 순해 빠진 게 속으루 맘고생 엄청하구 있을 껄요?
인하 ! (굳는)
영채 그 뿐이 아니예요. 재가 또 사람 한테 텀벙텀벙 잘 빠지거든요. 그런 애가 나중에 이 산 속에서 혼자 그 큰 일을 어떻게 감당,
준하 (O.L) (순간 무섭게) 주영채. 너 말이 좀 심하잖아 임마.
영채 아니 난... 형이랑 송주가 걱정이 되서 하는 말이지.
인하 ... (어두워지고)
영채 (슬쩍 그런 인하 살피며 차 마시는)
S#61 차밭 (D)
오후의 햇빛.
소쿠리에 찻잎 따내 담고 있는 송주.
영채 (E) 여기서 아주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그래?
송주 ? (돌아보면)
영채 (찻잎 손끝으로 만지며)영채형 밥상두 됐다가, 약사발두 됐다가 찻잎 따는 머슴두 됐다가, 밤엔...(비싯 웃으며)또 다른 일두 하나 봐?
둘이 아주 좋아보이던데?
송주 (표정 굳어지는)
영채 여기 붙어있는 조건으루 뭐해 준다든? 이 차 밭 남겨준다 그러든? 하긴 떨어지는 콩고물 하나 없이, 폐병장이 옆에서 웃음 팔기가 쉽지
않,(하는데)
송주 (영채의 뺨을 치는)
영채 ! (보면)
송주 사람이 사람 옆에 있구 싶은 이윤 그런 천박한 이유루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영채 야... (기막힌 웃음) 차송주. 많이 컸다 너?
송주 (O.L) 콩고물 찍어 먹자구 여기 붙어있을 만큼 나 그렇게 시시한 애 아니구 그 사람, 웃음 아니라 뭘 갖다 팔아두 진심이 아니면 안 받 는 사람이야. (강하게) 세상을 니 천박한 눈으로 보지마. (가고)
영채 ... (아랫입술 잘근 씹으며 보는)
S#62 인하의 집 외경(N)
밤... 텅빈 마당 위로 밝은 달빛.
그 위로 인하의 방에서 들려오는 가픈 기침소리.
S#63 송주의 방(N)
잠들어 있는 송주.
옆방에서 들리는 인하의 기침소리에 몸을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뜨는 송주.
점점 심해지는 기침소리가 심상치가 않은...
일어나서 후다닥 밖으로 뛰어 나가는 송주.
S#64 인하의 방(N)
이불 위에 꼬꾸라진 채 가슴을 쥐며 괴롭게 기침하고 있는 인하.
송주 (e) 나예요. 괜찮아요?
후다닥 들어서는 송주.
송주 (다가와 인하를 붙들며) 괜찮아요? (일으켜 세우며) 일어나 봐요. 잠깐 나 좀, (하다가 어쩐 일인지 그대로 멈칫 굳는)
인하를 붙들고 있던 손 천천히 떼내고 펴보는 송주.
그 손 안에 흥건이 고여 있는 피!
송주 하얗게 굳어서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를 켜보면,
인하의 객혈로 흥건히 젖어있는 흰 와이셔츠와 이불!
송주 ! (겁에 질려 손으로 입을 막는)
인하 (기침 멈추고 가픈 호흡으로) 불 꺼...
송주 (어느 순간 정신 수습하고 얼른 수건 들어 인하의 입가를 닦아 주는)
인하 (외면하고, 손 가볍게 떼내며) 괜찮아... 떨어져 있어.
그런 인하 보며 마음이 아파오는 송주.
외면하고 있는 인하의 얼굴 천천히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닦아준다.
송주의 눈 바로 보지 못하고 가만히 시선 비끼는 인하.
송주, 울컥하는 심정으로 피에 젖은 인하의 와이셔츠 단추 끌러내린다.
단추를 풀어나가는 송주의 손끝이 인하의 맨가슴을 스친다.
외면한 채 앉아있는 인하의 심장이 한순간 저릿해져 온다.
감정 복잡해지려는 순간, 송주의 두 손을 쳐내는 인하.
송주 ! (한순간 놀라서 인하를 보고)
인하 너... 지금이라두 내려가.
송주 ... (담담해져서 보는)
인하 못 알아들었어? 내려가! 당장 내려가라구!
송주 ... (눈가 그렁해지고)
인하 (아프게 외면하는데서)
(시간 경과)
방안.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새 이부자리 위에 인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고,
저만치 방 한구석에 무릎 감싸쥐고 앉아있는 송주.
인하 송주야.
송주 ... (보면)
인하 나 요즘... 옆에 누가 있는 게 성가셔. 예전 처럼... 혼자였음 좋겠어.
송주 ...
인하 너 똑똑하구 사리분별이 바른 아이야. 뭐든 혼자서 잘 할 수 있을 꺼야. (보며)내일 내려가. 내려 가서 잊어. (애써 웃으며)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송주 ... (시선은 정면에 둔 채 멍하니 고개 젓는)
인하 (안타까운) 송주야.
송주 (멍하니 앉아 독백처럼 담담하게) 나 있잖아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두 내 뜻 대루 된 적이 없었어요. 그런 세상에 나두 별 욕심
낸 적 없었어요. 근데 나... 지금 처음으루 욕심이 내구 싶어져요.
인하 ... (보면)
송주 (천천히 눈물 차오르며)가벼운 애라구 생각해두 좋아요.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욕심낼께요..(그렁해진 눈으로 인하 돌아보며) 나... 당신을 갖구 싶어.
인하 ... !
송주 (눈물 뚝 떨어지며) 당신 병 까지 내가 갖구싶어.
인하 ... (아프게 보고)
송주 (인하 가까이로 와서) 그럼... 안돼요? 그냥 옆에, 가까이에만 있을게... 그것두 안돼요?
인하 ... (잠시 울컥해서 외면했다가 웃는 얼굴로 보며) 널 사랑하는데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다만, 이제 널
사랑해서, 널 혼자 남겨두구 가기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남아있는지...그게 두려울 뿐이야.
송주 ...
인하, 한 손으로 조심스레 송주의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 맞추는데서... (F.O)
S#65 마당(D)
문가에서 S#47의 그 사내와 얘기 나누고 있는 인하.
소포 꾸러미를 건네고 인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내려가는 사내.
소포 들고 평상으로 와서 앉는 인하.
'다솔사'라는 절이름과 '수연'이라는 법명이 적혀있는 포장.
포장을 뜯어보면 차와 함께 나오는 편지.
편지 대충 훑고는 미소 지으며 차의 향기를 맡아보는 인하.
송주 (E) 뭐예요?
인하 (돌아보고) 대학 때 친구가 차를 보냈어. 자기가 직접 만든 차래. 향기가 아주 좋아.
송주 (옆에 와서 앉는)
인하 (편지 내용 보며) 눈을 녹인 물이나 매실이 익을 때 내리는 빗물로 끓여야 제 맛과 향이 난대.
송주 ... (웃는)
인하 이 친군 눈이나 비가 오면, "야~ 하늘에서 찻물이 내리네" 이렇게 표현을 해.
송주 찬물이요?
인하 찬물이 아니라, 찻~물. 차끓인 물이란 뜻이야...
송주 (웃으며) 그럴듯하네요...
인하 (미소로 보며) 눈오는 날 끓여마시자.
송주 ... (끄덕이고)
인하 이제 금방이야.
송주 ... (아프게 보는데)
준하 (E) 형.
송주 ... (돌아보고 어두워지는데서)
S#66 산 아래 길(D)
세워져 있는 차에 인하의 짐을 실는 준하.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인하와 송주.
준하 (차 뒷문 열어주며 인하에게) 추워. 얼른 타요.
인하 ... (차로 가려다가) 금방 돌아올 거야. 아직 날 쌀쌀하니까 감기조심하구.
송주 ... (애써 웃어보이고) 네.
인하 ... (웃어주고 차에 올라탄다)
송주 ... (아프게 보는데)
준하 (E) 기다리지... 마세요.
송주 ... (보는)
준하 (맘 아픈, 시선 산 쪽으로 돌리며) 못 돌아올지도 몰라요.
송주 ... (고개 숙이고는, 작게 끄덕이는)
준하 갈께요. (보조석에 올라타고)
송주 ... (창가로 가서 인하에게 손 흔드는)
인하 (창문 내리고 웃으며) 줄게 있는데 잊을 뻔 했다. (하며 뭔가를 꺼내 손 안에 쥐고 내미는)혹시...좀 오래걸릴 지도 모르거든...나중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그 사람 줘.
송주 ? (받아서 보면 낡은 차씨주머니) !
인하 (애써 웃으며) 이제...간다?
차문 천천히 닫히고 출발하는 차.
멀어지는 차를 보며 얼어붙은 듯 서있는 송주의 모습 위로,
-플래시컷 22씬-
스무살의 인하와 열두살 송주의 첫만남...
'그 책... 좀 어렵지 않니? 좀 더 쉽구 재밌는 책을 읽지 그러니?'
'읽을게 이거 밖에 없거든요'
-현재.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송주의 눈가에 천천히 눈물 맺히는.
-플래시컷 22씬-
차씨 주머니를 내밀던 송주, 이게 뭐야? 묻던 인하.
'기침하는데 뜨거운 차가 좋데요. 키워보세요 한 번...'
송주의 말에 따뜻하게 웃던 인하.
-현재.
멍한 표정 그대로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는 송주.
그 동안 눌러왔던 감정 터지며 끅끅 소리내서 우는데서
S#67 인하의 빈 마당(D)
두 사람이 함께 차를 끓여마시던 화로.
손보지 않아 낡아진 그 스산한 모습 위로 낙엽 몇 개 뒹구는.
S#68 인하의 마당 일각(D)
빈 빨랫줄...
S#69 인하의 광(D)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다시 구석에 쳐박혀 있는 낡은 전축.
S#70 인하의 마당(D)
봄... 이제 막 초록색 움을 틔우기 시작한 봄 산...
카메라 천천히 마루 쪽으로 이동하면, 거기 마루 기둥에 머리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먼데 산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송주.
송주 (N) 그가 떠나고 여러 날이 지났다. 나는 그 곳에서 그를 기다렸다. 다시 그가 떠난 봄이 되었다. 그리고...
송주, 문득 멈칫해서 하늘을 본다.
거기 나풀나풀 떨어지기 시작하는 눈송이.
송주, 내리는 눈을 쳐다보며 아련히 미소 짓는 위로,
송주 (N)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이 내렸다. 봄이었는데 눈이 내렸다. 아마도... 그가 온 거 같았다.
송주 ... (손 내밀어 눈 받아보며 혼잣말) 이봐요... 보구 있어요? 하늘에서... 찻물이 떨어져요. (눈가 붉어져서 미소 짓는데서)
S#71 다설록 안(현재/N)
(S#4에서 이어지는)
LP 플레이어 보이다가 천천히 이동하면,
예의 그 찻잔과 원고지가 놓여있는 테이블.
원고지에 무언가를 적다가 펜을 놓고 찻잔을 드는 송주.
그리고 예의 그 낡은 차씨 주머니... 카메라 쭈욱 훑어가는 위로...
인하 (E)차에는 말야. 다섯 가지 맛이 담겨있어..처음엔 그 맛을 잘 몰라. 그저 쓰고, 떫고, 시고, 짠맛만 느껴지지..하지만 잘 음미해 봐.. 그 네가지 맛이 모두 합쳐지면서 결국 혀끝에는 쌉싸름한 단맛만 남게 되거든...? 인생도 마찬가지야. 쓴맛을 음미 할 줄 알아야, 단맛 을 배울 수 있어. 천천히 음미하면서 기다려봐... 혀 끝에, 인생에, 심장에...쌉싸름한 단맛이 밸 때 까지...
송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간다.
창밖에 내리는 눈... 그 위로
송주 (N)(51세의 목소리로)(원고지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다실(茶室)에 붉은 동백과 매화를 들여놓고 눈을 기다리겠습니다. 눈이 오면 그 하 늘샘으로 차를 우려내고 소나무 꽃가루로 빛깔고운 송화다식을 만들겠습니다. 나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그대, 사랑하면서 기다 리는 법을 가르쳐준 고마운 그대... 그대 가슴에도 이 훈훈한 차향기가 닿고 있는지요...
S#73 다설록 외경(N)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다설록 외경.
그 위로 환상처럼 내리는 눈....
LP 음악 흐르면, 스크롤 흐르면서. 엔딩.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