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육사 문학관
뙤약볕이 아직 가시지 않은 8월 13일 이날은 봉화 산골 집에서 한비문학 여름 캠프를 갖기로 예정되었던 날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유로 가을 어느 날로 미루기로 하고 서울에서 안사람 그리고 서울산업대 학생 두 명과 봉화를 거쳐 안동으로 향했다. 영주 선비촌과 소수 선원을 거치고 선비의 본고장이라고 일컫는 안동의 도산서원과 이 육사 문학관을 찾았다. 선비의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안동 그 중심에 바로 퇴계 이황선생의 도산서원이 있다.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도보 길은 잘 다듬어진 돌 축대와 안동호를 끼고 다다른 도산서원 앞에 서니 아 ~ 솔향과 함께 다가오는 퇴계선생의 체취 마음과 몸으로 푹 적시고 6킬로 떨어진 이 육사 문학관으로 향했다. 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퇴계 종택과 이황 묘비를 잠시 돌아본 뒤 현대 입체적으로 지어진 이 육사 문학관 앞에 도착했다. 이 육사 문학관은 육사 탄신 백 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2004년 7월 이 육사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 건립했다.
이육사 문학관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 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2300평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 입구에 들어서니 선생의 흉상이 반기고 있었으며 육필원고 독립운동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 되였고 표창장, 건국포장 애족장, 문화훈장 등이 육사선생의 업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선혁명 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등도 재현해 놓아 후세를 사는 우리에게 역사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충분했다.
국내 유명 시인들의 육사을 기리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은 낙동강 상류가 굽이쳐 흐르고 선생의 생가인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영상실과 세미나실 시상(詩想)전망대 그리고 선생의 시를 직접탁본 할 수 있도록 탁본 실이 있어 육사 선생에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수록 배려되어 있었다.
전시장 내부
육사의 시와 생애를 돌아보는 동안 배경음악이 깔리고 육사 선생의“청포도”“광야” “절정” 등 육사 선생의 시가 나레이이션으로 낭송 되어 관람하는 동안 겨레의 얼과 정서를 시로 빚어 겨레의 마음에 희망을 불어 넣어준 시인이며 우국지사인 선생의 시 정신, 나라에 대한 열정을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육사 선생 본명:원록 호 :육사 작명:활 조부 치헌 이 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격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 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벌였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 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 활동을 펼치고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1년 7개월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로 지었다. 1930년 중외 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첫 시 [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 1월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순국하였다.
육사 최초 시집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육사의 사회 활동은 민족 해방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문학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모국어를 부려서 쓰는 시인으로 등장했다. 육사의 시와 문학은 그 출발에서부터 인간과 시대 상황에 상관관계를 맺고 이루어졌다 실제 민족운동에 앞장선 투사이며 정치에 시와 문학을 수용할 줄 알았고 역사와 현실을 넣을 줄 아는 전 인격적인 문학이었던 것이다. 초기작품에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 말들로 노래했고 [황혼, 교목, 호수]
일제 암흑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저항의 의지를 담은 것이 되었다. [절정, 광야, 꽃]
육우당 앞에서 필자
문학관을 나와 뒤편으로 육사 생가인 육우 당(육 형제가 살던 집을 의미)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육사는 수필에서 집(육우당)을 회상하며 “은촉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懸額)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하다고 표현했었다. 육우당 마루에 잠시 앉아 주변을 살펴보니 문학관 건물에 육우당은 완전히 가려져 육우당 모형이 전혀 보이지 않고 주변에 제대로 된 나무 한그루 없는 것이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처럼 설렁하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청포도 샘을 향했다.
청포도 샘
청포도 샘 위로 청포도 나무를 심어 났는데 열매도 없고 앙상하게 잎사귀 몇 개 붙어 있는 모양새가 선생의 시 청포도를 연상할 수 없는 초라함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청포도 샘 옆 정문 쪽에 절정의 시비와 함께 정갈한 외모의 육사 선생께서 앉아 계셨다. 육사 선생의 정갈한 모습을 뵈니 신석초 시인께서 육사선생에 대해 쓴 글을 생각게 했다. “언제나 철마다 새 옷을 갈아 입고 언제나 옷매무새가 단정하고 여름에도 타이를 풀지 않은 예의바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본래의 성격보다도 어느 필요성에서 각별히 신경 쓴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육사 선생의 말술과 여자에 관하여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꼭두새벽에(요정에서 나와서) 해장을 하게 되었는데 육사는 곱빼기로 연거푸 아홉 사발을 마시고도 끄덕하지 않았다고 했다.
육사는 조용히 말술을 마셨고 요정 기생들에게 담담한 주객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구국 지사로서의 정신단련에 필요했던 계율이었던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육사에게도 단 한 사람의 비밀스런 여성이 있었다 작품 반묘(斑猫)와 해후 (邂逅)등은 그 영원한 여인에게 준 꽃다발이었다고 한다.
육사 동상 과 "절정" 시비
절 정 [絶 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자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육사는 우리 현대시에서 가장 뚜렷하게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시인이라면 그의 삶은 바로 절정에서 구국적인 시적 표현을 얻은 셈이다. 한 발자국의 후퇴나 양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운 계절 (겨울) 즉 상황 자체에서 황홀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황홀은 단순한 도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철과 같은 차가운 비정(非情)과 날카로운 결의를 내포한 황홀이었다.
[김종길 교수 -이 육사 시에서]발췌 서릿발 칼날진 그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등 위기감이며 극한의식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 자의가 아니 타의에 의해 북방으로 내어쫓긴 사람이다 일제 암흑기의 극악한 상황을 가리키는 은유 형태이다.
[김용직 교수 시와 역사의식 논문에서 발췌]
육사 백일장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이 육사 문학축전이 한국 예총 안동지부와 이 육사 기념 사업회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 등 주관으로 안동 박물관에서 7월 27부터 31일까지 행사명 : 광야에서 부르리라 가 성황리에 열렸다. 육사선생의 시 정신 나라에 대한 열정을 후세에 알리기 위한 문학축전은 강 건너간 노래[노래와 시를 하나로 묶은 시 노래와 시낭송] 이 육사 문학 토론회, 제1회 육사 시낭송 대회, 제27회 육사 백일장, 이 육사 문학기행 캠프, 무대공연 지원사업 연극공연 [광야에서 부르리라] 이 육사의 초인적 정신이 깃들어 있는 시낭송 비극적 생애를 마친 이 육사의 삶이 현재 시점에서 조망되었다 한다.
생가터 청포도 시비 우리 일행은 절정의 시비를 뒤로하고 이 육사 묘소 가는 길 앞에 섰다. 원래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고향 원천리 문학관 뒷산 정상에 이장 되었다 육사선생 묘소까지는 두~세 시간은 걸린다고 하니 지금 시각 6시가 다되어 가고 아쉽지만 묘소 가기를 포기하고 길 건너 생가터로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청포도 시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밖에 “절정을 낳은 칼선대 광야의 시상이 떠오르는 쌍봉 윷판대 는 이 육사 기념관 위 앞쪽 낙동강 건너 왕모산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해는 떨어지고 점심때 도산서원 입구 상가 내 분식집에서 비빔밥에 허기를 채운 터라 많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봉화 산골 집으로 향했다. 안동, 이 육사문학관을 뒤로하고 봉화로 돌아오는 길가에 포도원이 가끔 눈에 띈다. /내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내가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다 먹으면/두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위의 "청포도"는 우리 겨레의 심금을 울리는 명시 가운데 하나이다. 육사 생존 당시 안동은 물론 전국에 포도밭이 매우 드물었다. 더더욱 청포도는 찾아보기 힘들어 포도밭에서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면 육사는 어디서 '청포도'의 시상을 떠올렸을까? 지금은 해병대 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포항 송도 쪽 동해면 도구리에 그 당시 15만 평에 이르는 "삼륜 포도원"이 있었는데, 독립운동으로 일경의 감시하에 거듭된 체포와 옥살이로 병마를 얻은 육사는 1937년 그곳 송도와,1938년 경주 남산 삼불암에서 각각 요양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쓰인 시가 '절정' '청포도' 로 39년과 40년 '문장' 지에 각각 발표됐다.
영일만 호미곳 해맞이 공원 청포도 시비
당시만 해도 포도원 둔덕에 오르면 흰 돛 단 배들이 영일만을 오가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상황이어서 이곳에서 육사와 영일만의 만남이 이루어져 '청포도' 가 탄생함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문인협회 포항시지부는 이들의 만남을 기리기 위해 1999년 겨울 영일만이 펼쳐보이는 포항시 대보면 호미곶 해맞이공원 내에 '이육사 시비'를 세웠다. 영일만을 찾은 고달픈 손님들에게 청포도를 대접하듯 서 있다고 포항 문인들은 말한다 선생께서는 큰 꿈을 꾸고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광야라는 시에서 뿌렸습니다. 그가 뿌린 씨앗이 움을 터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김지하 시인이 평소 가장 좋아한다는 [광야]를 다시 한 번 노래해 보련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호로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취재 류중천 시인 (한국 한비문학 작가협 수석 부회장) |
첫댓글 육사 고색창연한 가을 향이 묻어 나는 고귀한 민족의 영혼을 일깨운 시인이라고 칭송 해야 되겠지요. 잘 보았습니다
가 을향이 묻어있는 곳이기에 흠뻑 적시고 가네여 ....감사히잘 보고 가네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