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정둘시
요란하던 봄꽃들의 잔치가 끝났다. 아파트 담벼락의 장미꽃들이 시들어 가고 있다. 꽃이 머물렀던 자리는 유월의 태양 아래서 녹음으로 짙어져 간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해가 갈수록 여름은 빠르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긴소매 옷을 쉽사리 벗어 던지지 못하고 망설일 때, 갑작스레 내려쬐는 뜨거운 햇살과 예상치 못한 높은 기온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갑작스런 더위 앞에서 쩔쩔매다 때 이르게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낸다. 고정된 나사를 풀어내고 날개와 철망으로 된 가리개까지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씻는다. 물기를 닦아낸 선풍기는 곧장 둥근 날개 짓을 하며 파란 바람을 쏟아낸다. 나는 해마다 여름의 초입이면 의식을 치루 듯 선풍기 손질에 정성을 기울인다.
단추 하나면 작동되는 에어컨을 두고, 애써 선풍기를 손질하는 것은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아릿한 기억 때문이다. 학생이었던 남편과 결혼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 나름의 기준에 도달하거나, 각자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 결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가슴속 저울들은 작동을 멈추어 버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도리어 빈곤함을 선택하는 것이 올곧은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부끄럽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호기롭던 날들이었다.
현실적으로 살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철없는 새댁이 된 것이다. 단칸방의 옹색한 살림살이와, 손가락에 달랑 하나 끼워진 실반지 마저도 눈부시게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밀월의 시간도 잠깐, 나의 단꿈들은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졸업 후에도 남편의 취직은 쉽지 않았고, 임신을 하게 된 나 역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어야 했다.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안간힘을 쓰는 남편이 안쓰러워 생활의 곤궁함은 내색도 못하고 속을 태웠다. 언제 꽃들이 피고 지는지도 모른 채 신혼의 봄날은 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결혼 후에 처음으로 맞이한 어느 여름날이었다. 인기척에 방문을 열어보니 연락도 없이 시어머님께서 문 앞에 서 계셨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등에 업은 채, 당신 키만큼이나 되는 큰 상자를 머리에 이고 서 계신 것이 아닌가. 어디서부터 이고 오셨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른 짐을 받아 풀어보니 파란색 날개를 가진 새 선풍기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코딱지만한 방에 창문까지 높게 달려 있으니, 바람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라 염려가 되셨던 모양이다. 변변치 못한 아들 내외가 더운 여름을 어떻게 날지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선풍기를 사서 직접 이고 오셨을까.
쉬지 않고 흐르는 어머님의 땀방울과 선풍기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아 시선을 돌려야 했다. 눈물은 감추려던 마음과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급기야 소리까지 내며 엉엉 울고 말았다. 당황하신 어머님이 나의 등을 두드려 주시는 바람에 울음은 더 큰 서러움이 되어 복받쳐 올랐다. 그런 나에게 시어머니는 고달픈 생활이지만 조금만 참아내고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고부간의 갈등이 나라고 왜 없었을까. 서운하고 원망스런 마음의 끝자락에서는 땀범벅이 되었던 어머님의 얼굴을 만나곤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식을 위해서 머리에 이신 것이 어디 선풍기 뿐 이었을까. 평생 농사를 지으셨으니 보릿단이며 볏단도 수없이 머릿짐으로 나르셨다. 장날이면 야채와 과일을 목이 휘도록 이고서는 동구 밖을 나서던 당신의 모습을 떠 올리면, 편협한 나의 속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수그리고 마는 것이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서러움과 뜨겁게 솟아나던 격정의 순간이 엊그제인양 생생한데 벌써 삼십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슴 속에 어떤 응어리도 녹일 수 있는 강렬한 사랑의 기억 한토막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곤궁과 결핍 사이로 파고든 따스한 불빛이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고단한 삶이 녹아내릴 수 있도록 꿋꿋한 심지가 되어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기도 하다.
머리에 물건을 이고 나르던 일은 이제 아득한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물자가 풍족하다 못해 넘쳐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선풍기는커녕 에어컨을 갖다 주어도 감동 따위는 없지 싶다. 아등바등 아끼고 모아서 자식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한 부모 치레로 아는 세상이다. 어느 새 남편이 결혼하던 때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어버린 아들을 두고 생각해 본다. 미래의 며느리에게 나는 어떤 불씨 하나라도 지펴줄 수 있을는지.
이렇게 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 날이면, 선풍기를 이고 뙤약볕에 서 계시던 어머님이 떠오른다. 그날의 땀방울이 자식에게는 푸른 희망이 되었으며, 포기하지 않는 용기가 되었다. 또한 제대로 부모 되는 법을 말없이 가르쳐 주셨다고, 선풍기가 웅얼웅얼 윙윙 시원한 바람을 쏟아내고 있다.
첫댓글 수필반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썼던 작품입니다.
2년반을 묵혀 두었다 새로 써 보았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일단 써서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교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못보신 선생님들 고견 기다립니다~~
선풍기라고 어찌 바람만 만들어 내겠습니까
선풍기를 통해 고부간의 관계 삶의 관계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작품 입니다
빈곤함속에 인간적인 따스함이 돋보여 더욱 호감이갑니다
저는 언제나 선생님의 답글에 홀딱 반합니당~~
감사합니다.
샘 번개합평회때 감동의 물결으로 일렁이던 그 작품이군요. 묵혀야 더 깊은 맛이 나는 작품이였네요
가깝지만 표현하기가 제일 어려운 가족. 새삼 저도 마무리가 잘되지 않았던 글을 좀 더 숙성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하는 작품입니다. 여리고 복잡했던 과거와 현재를 잘 표현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일단 써보는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시간은 이유없이 흐르지 않습니다.
빠른 시간내에 좋은 글 기대합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모습이 참 보기도 좋네^^
감사합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감상이겠지요.
잔잔하게 써 그려가는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감동도 있었구요~~~
멋집니다.
글감을 찾는게 많이 어렵네요~~
교수님이나 샘처럼 뚜렷한 자기만의 영역을 가지신 분이 부럽습니다...
지난번 읽을 때는 나지 않았던 나의 눈물이, 다시 읽어 보는 오늘 핑그르 눈물이 고입니다.
따뜻한 사랑이야기 참 좋습니다.
자식을 챙기는 마음과 그 마음을 고마워 하는 착한 심성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쯤 되면 세상 살아가는 보람이 느껴집니다.
선풍기하나로 이렇게 글을 쓰실수있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선풍기의 웅얼웅얼 소리는 아마도 어머님의 사랑과 추억의 소리 일지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빠른 시간내 선생님 글도 볼 수 있겠지요?
늦었지만, 이 글을 읽습니다
내용도, 구성도 좋습니다
예쁜 마음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갑자기, 선풍기가 돌아, 한 군락의 바람을 남기고 가는듯 합니다
감동, 거듭 감동~~~
선생님
잘 지내시죠
방학이라 뵙기 힘드네요
요즘은 글을 거의 못쓰고 있는데
선생님의 갑작스런 칭찬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 보겠습니다
방학이 끝나면
선생님의 멋진 글 폭탄 맞을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