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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부터 올 4월 30일까지 공모한 `아라홍련 단편소설` 박정원 씨 `연화` 대상
700년의 잠에서 깨어나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 아라홍련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함안군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4월 30일까지 공모한 아라홍련 단편소설에서 박정원<사진>씨의 `연화`가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연화`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오연화 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재를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형상화하면서 한편으로 1500년 전 아라가야와 700년 전 고려시대를 대담하고 박진감 넘치는 환타지로 구사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
특히 아라가야의 왕족이 나라가 망하면서 집안에 태어나는 딸들에게 연화라는 이름을 대대로 물려주면서 나라의 의미를 아라홍련과 동일시하고 마침내 아라홍련이 피 면서 연화가 그 동안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아라가야도 부흥한다는 내용이 문학적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으며 심사위원이 일치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또 연화와 끝까지 선두 다툼을 벌인 `안라홍련`도 아라가야 시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왕이 다스려야 하는 불의 힘과 흙과 물, 나무와 쇠를 다스리는 신녀의 힘을 결합해 아라홍련에 선명하고 강렬한 전설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함안을 찾는 관광객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스토리를 전해주고자 마련한 이번 공모전에는 경기 28, 경남 27, 서울 21, 부산 13, 인천 9, 경북 7, 대구 5, 충청 4편 등으로 광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123편이 응모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군은 스마트시대에 글을 쓰는 사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전국에서 수준 높은 단편소설이 123편이나 응모된 것은 아라홍련의 브랜드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며 한편으로 소설의 저변이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심사위원으로는 국제펜클럽 한국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원로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등 한국문단의 원로로서 창원문인협회, 가락문학회, 함안문인협회를 결성해 경남문학의 태동을 이끈 홍진기 시인이 참가했다.
또 1995년 동아일보에 사막의 달로 등단한 후 소설집 `물의 정거장`, 장편소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풀밭 위의 식사`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문학감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전경린 씨와 동아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함안지역어 음운변동현상 연구, 함안방언의 음운적 특징 등 함안지역의 방언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로 삼광한글학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구현옥 교수도 심사를 맡았다. 박우식 부군수와 제명철 군의회의원을 비롯해 함안문인협회 소속으로 지역 문학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조평래 씨와 조정모 씨, 함안의 고대사에 전통한 전정렬 관광해설사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는 문장의 구성능력과 아라홍련의 부각성, 시대구분, 스토리텔링과의 연계성, 드라마 제작 등의 수월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우수 작을 선정했는데 박정원(61ㆍ부산시 해운대구) 씨의 `연화`가 700점 만점에 659점을 받아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우수상에는 박진영(28ㆍ경기도 오산시 양산동) 씨의 `안라의 홍련(아라홍련)`, 서명순(42ㆍ창원시 마산합포구) 씨의 `부활하는 꿈, 아라가야`, 이정화(45ㆍ구미시 고아읍) 씨의 `아라홍련, 천년의 미소`가 뽑혔으며 가작으로는 권우상(71ㆍ부산시 북구) 씨의 `아라홍련의 전설` 외 10명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심사평을 맡은 전경린 씨는 "이번 공모전은 기적처럼 돌아온 아라홍련을 부각시킨다는 취지가 분명했던 무척 특별한 공모전이었다"라며 "아라가야의 최후항전을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가 많았고 더러는 토기나 거문고를 홍련에 연결시킨 작품, 순장이야기 속에 홍련을 형상화한 작품도 있는 등 작품수준이 높은데 놀랐고 특히 연화는 공모전의 취지에도 맞을 뿐 아니라 한편의 소설로서도 빛나는 수작이기에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당선작으로 뽑았다"고 밝혔다.
대상을 수상한 박정원 씨는 "부족한 작품임에도 대상에 수상돼 영광이다"라며 기뻐하면서 "이번 공모전을 통해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아라가야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알게 돼 뜻 깊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씨는 영남일보신춘문예상, 심훈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실력자로서 장편 `수남이`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수혜자로 선정된 바 있다./김인교 기자 |
백년간의 침묵의 작가 박정선 선생의 단편소설을 올립니다.
아주 의미있는 작품으로 회원들에게 소개 합니다.
연화
말이산 능에서 때 아닌 까치가 울었다. 옛 산성 터 하늘에서는 흰 구름이 꽃모양을 그렸다. 연꽃을 피운 듯했다. 산성 터 주변에서 연일 포크레인의 굉음이 진동하더니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포크레인의 큰 손이 땅속을 더듬어 내려갔다. 벌레들이 사는 곳을 지나 깊고 어두운 세계가 층층이 드러났다. 층층이 흙의 색깔과 공기가 달랐다. 천년 쇳물에 절인 흙에서는 검붉은 쇠 냄새가 풍겼다. 옛 가야 땅은 철의 왕국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매캐한 백골 냄새도 섞여있었다. 이미 여러 석실에서 순장된 백골을 발굴해냈으므로 그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몇 가지 유물을 수습하면서 포크레인은 계속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쇳물도 침범하지 못한 곳, 기계가 갈 수 있는 마지막 깊이에서 진흙바닥이 드러났다. 거기서부터 공기는 영하에 가까울 지경으로 시렸다. 주황빛 호박 살 같은 진흙이 단단하기가 철벽이었다. 포크레인의 쇠끝이 떨었다. 진흙에 닿을 때마다 쇠끝이 자꾸 빗나갔다. 수십 번 헛손질 끝에 겨우 쇠를 박고 힘을 가했다. 쇠의 팔뚝이 휘어질 지경으로 힘을 준 다음에야 철벽으로 무장한 세계가 열렸다. 비밀요새 같았다. 거긴 공기 한 방울 들지 않았을, 아직 그 무엇도 범하지 않은 원시의 땅이었다.
그곳으로 세상의 빛과 바람이 흘러들었다. 포크레인이 잠시 일손을 멈추었다. 모든 것이 잠시 정지된 듯한 시간……, 생전처음 남자를 받아들이는 여자처럼 처음으로 세상의 빛과 바람을 만난 흙빛이 붉어졌다.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한 일꾼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고사를 지극정성으로 지냈는데 무슨 변고가 있을라고.”
다시 일을 진행했다. 이제부터는 포크레인의 손이 진흙 속으로 척척 파고들었다. 무엇이 당긴 듯도 하고 무엇에 이끌려 들어간 것도 같았다. 한참 동안 파헤쳤을 때 한 일꾼이 헉 하고 넘어지려했다. 다른 일꾼이 붙잡아 세웠다. 미끄러질 자리가 아닌데 미끄럽다고 했다. 일꾼은 갑자기 달려든 어지럼증 탓이라고 했다. 일꾼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걸음을 떼려던 순간 허리를 굽혔다. 진흙더미에서 까만 것이, 흘러든 햇살에 콩알만 한 씨앗이 ‘스륵’ 몸을 움직였다.
“옳아, 내 발에 밟힐까봐 이 작은 것이 나를 밀어냈군.”
넘어질 뻔 했던 일꾼이 신기해하며 씨앗을 응시했다.
“어, 눈물방울이잖아?”
일꾼이 눈물방울이라고 소리쳤다.
“호, 그러게 눈물방울이네!”
다른 일꾼이 따라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이건 씨앗이지.”
또 다른 일꾼이 씨앗이라고 주장하며 어이없어했다.
“틀림없이 눈물방울인 걸. 내 눈엔…….”
일꾼들 말대로 그건 눈물방울이었고 씨앗이었다.
연구실 창밖으로 멀리 계룡산이 보였다. 산은 5월의 기운이 한창이었다. 산이 드러낸 표정이 엄숙했다. 바라볼 때마다 동학사를 품은 계룡산은 큰 말씀 같았다. 세상이 개벽을 하는 일이 있어도 평상심을 잃지 말라는 듯도 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특성분석센터 연구실, 연구원들이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심혈을 쏟고 있었다. 최종 결론을 앞두고 오연화 박사는 산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 가득 차 있는 뜨거움을 퍼냈다. 며칠 전 꿈이 선명했다. 3일 동안 꿈을 꾸었고 꿈은 기승전결로 이어졌다. 첫날엔 사람들이 옛 성터를 파헤치고 있었다. 둘째 날엔 천둥이 울고 비가내리더니 큰 연못이 생겼다. 연못에서 해가 떠올랐다. 셋째 날엔 연못의 해를 돌며 청초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여인의 청초함은 가엾고 신비롭고 다정함이었다.
실은 땅 속 것에서 과거를 캐는 지질연구자들은 평소 그런 꿈을 자꾸 꾸었다. 땅을 파는 포크레인의 굉음이 이명으로 들리는 것도 예사였다. 처음엔 영문 모르고 병원엘 다녔다. 의사는 포크레인의 굉음 같은 이명을 가진 환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직업병일 거라고 했다. 의사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매일 하는 일이 땅속에서 찾아낸 보물(출토 물)을 들여다보며 연대를 측정해내는 것이고 또 필요하면 현장을 답사하는 일이 많은 탓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연대를 측정해서 통보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지고한 역사는 예외 없이 연구자들의 감성을 흔들었다. 수많은 상상을 부츠기면서 때로는 아픔을 요구하고 눈물을 징수하기도 했다.
3년 전 윤 씨 부인의 미라를 발견했을 때도 꿈을 꾸었지만 이번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한 여인이 산을 내려와 도시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어디선가 땅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일이 발생하고 연대측정 의뢰가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중견 연구원으로서의 예감은 늘 적중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특별한 무엇이 올 것이라는 기대에 몇 날을 보냈다. 3년 전처럼 윤 씨 부인의 미라 같은 특종감이거나 아니면 어떤 시대 왕비의 두개골이나 뼈 중에 가장 단단한 복사뼈 혹은 무릎이나 종지뼈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콩알만 한 씨알을 만났다. 함안의 옛 아라가야 땅 산성터 인근에서 출토된 연씨가 보내져온 건 2주 전이었다. 연구실은 2주 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시료번호 602번 연씨에서 700년의 나이를 나타냈다. 시료 번호 603번 연씨에서는 760년 전 나이를 나타냈다. 700년 전이라면 고려시대 중기였다. 고려 연씨와 성격과 나이가 꼭 일치했다. 50번을 되풀이해도 50번 다 똑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럴 수가!”
“700년 전 고려 연씨가 어떻게 남쪽 끝에서 나올 수 있지?”
“연씨가 땅속으로 헤엄이라도 쳐 갔단 말인가?”
“이건 미스터리야.”
연구진들이 웅성거렸다. 700년 전 고려 연은 개경시대 궁궐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가까운 강원도나 경기도를 뛰어 넘어 머나 먼 남쪽지역 경남에서 700년 후에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연씨가 나라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고려뿐만 아니었다. 신라에서도 그랬고 멀리 고대 이집트나 인도나 중국의 수많은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의 꽃이라고 높이 숭앙하며 왕과 함께 받들었고, 인도나 중국 송나라에서는 태양을 품은 우주로 본 꽃이었다.
다른 연구원들은 그저 놀랄 따름이었지만 오연화의 감정은 전혀 달랐다. 갑자기 찾아온 수백 년의 시간 앞에 말문이 막혔다.
“오 박사님은 아예 넋이 나갔군요.”
동료 연구원들의 말대로 오연화는 아직 꿈속을 헤맨 것 같았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어떤 금기에 묶인 듯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혹은 누구와 말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제야 연화라는 이름에서 해방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는 외가로 연화라는 이름이 대를 이어오고 있었다. 엄마 이름도 연화였고 외할머니의 이름도 연화였고 외할머니의 외할머니 이름도 연화였다고 했다. 그렇게 대를 이어온 연화라는 이름이 싫었다. 중학교 때까지도 아이들이 연꽃이라고 놀려댔다. 세상 사람들이 연꽃은 다른 꽃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처럼 연은 꽃이라기보다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조심스러운 것 거룩하고 특별한 것이었다. 부처님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가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연꽃 앞에서 엄마는 남달리 옷깃을 여몄다. 목소리도 낮추었고 때론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엄마도 부처님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와 딸 이름이 똑같다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중학교 때 아이들과 모여 별명으로 꽃 이름 짓기를 했다. 백합 목련 장미 등등 자기가 좋아하는 갖가지 꽃 이름이 나왔지만 아무도 연꽃이름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넌 연꽃이니까 그냥 연꽃이라고 하면 되겠네.’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장미꽃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장미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점점 철이 들수록 이름이 자신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달라고 졸라댔지만 엄마는 잠잠했다. 계속되는 불만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야 엄마가 이름을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넌지시 말해주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언젠가는 옛 아라가야 땅에서 연꽃이 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연꽃이 필 때까지 연화라는 이름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허무맹랑한 소리는 어느 새 ‘나’ 오연화로 굳어져있었고, 엄마처럼 언젠가는 옛 아라가야 땅 어디선가 연꽃이 피기를 기다려졌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굴레이며 숙명이라고 인식되어졌다.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생리적으로 굴레니 숙명이니 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고 싫었다. 연화라는 이름을 ‘나’ 오연화에서 끝내버려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결혼하지 않으면 그 이름의 대가 끊어질 것이었다.
연구원에서 최종 결론을 정리하여 의뢰처에 결과를 통보해주었다. 씨앗이 꽃으로 피어날 것인지 어떨지는 미지수였지만 씨앗은 살아있었다. 꼭 살아나야 할 것이었다. 오연화는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평소 자주 들리는 동학사로 갔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 절을 올렸다. 두 팔로 허공을 그려 모아 합장을 하며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댔다. 이마를 바닥에 댈 때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인간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먼 곳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백년인지 천년인지 모를 무한대의 흐름이었다. 부처님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자대비가 그런 것인가 싶었고 고행 끝에 연꽃을 바라보며 맨 처음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가 그런 것인가 싶었다. 부처님의 미소를 따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났다. 연꽃은 꿈속의 가엾고 신비롭고 다정한 그 여인이었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속의 연화……, 그 연화였다.
연화, 이른 새벽 네 마리 말이 개경의 궁을 빠져나왔다. 네 마리 말이 다섯 사람을 태우고 송악산을 뒤로 하고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은 고려 무장 두 명과 시녀 한 명과 인종의 후궁 연화와 연화의 어린 아들 환이를 태웠다. 아이는 겨우 서너 살이었다. 왕은 사람을 많이 붙여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도망가는 데는 너무 많은 사람도 위험한 탓이었다. 말은 질풍노도로 산길을 달렸다. 산속은 깊고 바람이 드셌다. 하늘에선 까마귀가 울고 나뭇가지에 휘감기는 바람소리가 우후후, 우후후, 귀신소리를 냈다. 바람이 더 세차게 불 때는 휘익, 휘익, 하는 무서운 채찍소리를 냈다. 가죽 채찍으로 등짝을 내리치는 듯했다.
이자겸에게 붙잡히면 그렇게 쇠가죽 채찍에 맞아 등짝이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이었다. 아니면 청동화로의 이글거린 숯불에 발을 올려놓아야할 것이었다. 아이는 송악산 까마귀 계곡에 던져질 것이었다. 갈수록 산길은 험하고 시녀 품에 안긴 아이가 겁에 질려 울었다. 연화도 시녀도 아이 울름소리에 가슴이 쓰라렸다. 아팠지만 가엾어 할 틈이 없었다. 한시 바삐 개경을 벗어나야 했다. 이자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환이를 죽이기 위해 추격대를 풀었을 것이고 그들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이자겸의 칼날이 환이에게 뻗쳤구나. 환이를 데리고 네 조상의 나라 남쪽으로 가거라. 거기까지 설마…….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전하께서도 부디 목숨을 부지하셔요.”
왕과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었다. 왕의 떨린 목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가엾은 왕은 어찌 되었을까? 남으로 남으로 말을 몰며 연화는 왕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왕은 아버지 예종이 죽자 열네 살에 왕이 되었다. 나이도 어리지만 외할아버지 이자겸이 아버지 예종 때부터 왕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외가사람들 대부분이 왕족이었고 모두 무서웠다. 궁에서 왕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은 궁녀 연화뿐이었다. 왕과 연화는 동갑내기였고 연화는 대전의 궁녀였다가 17세에 후궁이 되었다.
왕은 연화를 비로 맞이하고 싶었지만 이자겸이 있는 한 어림없는 일이었다. 후궁으로 맞은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이자겸은 왕이 열여섯 살이 되자 자기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왕은 왕비와 동침하지 않았다. 후궁 연화는 아들 환이를 낳았다. 아들을 낳자 왕은 연화 거처를 연화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겉으로는 연화의 이름을 딴 것같이 하고 속으로는 진짜 연꽃을 뜻한 것이었다. 연은 왕보다 위거나 버금간 것이었으므로 왕은 연화를 왕비로 여긴다는 속뜻이었다.
“전하, 연화당보다는 연씨를 주시어요.”
궁궐엔 연못이 곳곳에 있고 연못마다 연이 피어 있었다. 어느 날 왕과 함께 연꽃을 구경하던 연화는 대뜸 왕에게 연씨를 달라고 청했다. 연씨는 수백 년 수천 년을 간다고 했다. 천년수명을 가진 것으로 바다에 거북이가 있다면 땅엔 연이 있었다. 나라가 천년만년 장수하기를 바라는 고려에서 연씨는 종묘사직과 똑같이 엄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부디 연씨를 주시어요.”
연화는 왕을 만날 때마다 연씨를 달라고 보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누가 들으면 어쩔 테냐.”
사람들은 연씨를 원했다. 그걸 간직하거나 자기 집에 심으면 가문이 융성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궁궐의 연을 더러 훔쳐내기도 했다.
궁에는 종자감이 있고 연씨를 관리하는 종자감의 수장은 이자겸이 임명하고 해임했다. 종자감을 드나들자면 왕을 제외하고는 수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연씨를 방출하는 것은 외적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수장은 날마다 연씨 숫자를 확인하고 이자겸에게 보고했다.
고려에서 연씨를 훔치거나 어떤 이유로든 연씨를 갖고 있는 자는 3대를 멸했다. 남자는 목을 치고 여자에게는 사약을 먹였다. 그런데 연화는 왕에게 그 무시무시한 연씨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연씨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그러느냐.”
“결코 들키지 않을 것이니 갖다만 주시어요.”
“너를 위해서라면 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만…….”
왕은 걱정을 하면서도 연화에게 연씨를 한 개 씩 훔쳐다주었다. 연씨를 줄 때마다 사약을 주는 것만 같았다.
왕이 연화를 가까이 하고 왕비를 멀리하자 이자겸이 번쩍 정신이 들었다. 왕비는 이자겸의 셋째 딸이었고 왕과 동침한 적이 없어 아이를 갖지 못했다. 연화가 아들 환이를 낳자 이자겸은 서둘러 넷째 딸을 둘째 왕비로 들였다. 왕은 둘째 왕비와도 동침하지 않았다. 이자겸은 왕의 아버지인 예종에게도 둘째 딸을 왕비로 삼게 했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이 왕이었다. 두 이모가 첫째 왕비 둘째 왕비가 된 것이었다. 나이도 예닐곱 살 위인 이모들과 금침을 덮고 살肉을 섞으며 사랑을 속삭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왕과 아들 왕에 걸쳐 세 딸들을 시어머니와 며느리들로 얽혀놓은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 겸 장인이었다. 자연히 고려가 그의 손 안에 있었고 이자겸의 권력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왕의 아버지 예종 위로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이자겸의 증조할아버지 이자연의 딸이 목종의 왕비자리를 차지할 때부터 내려진 견고한 뿌리였다.
“그런데 연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 가슴에다 심을 것입니다.”
“가슴에다 심다니?”
연화는 왕에게 연씨를 받을 때마다 가슴속에 품었다. 가슴속에 주머니를 숨기고 거기에 연씨를 받아 고이 넣었다. 조상의 나라를 생각했다. 연꽃을 그 땅에 심으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조상의 나라에 심을 수 없다면 정말 가슴속에라도 심고 싶었다.
연화는 궁에서 신라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아라가야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나라, 할아버지의 나라, 수백 년 전 남쪽에는 조상의 큰 무덤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연화에게 그 나라의 이름을 외우게 했다. 어려서부터 날마다 주문을 읊듯이 아라가야, 아라가야, 하고 외워야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아라가야 마지막 왕의 후손이라 했고 연화의 가슴속에는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라를 잃은 것은 땅이 아니라 나라 이름을 잊은 것이라고 했다. 땅이 있어도 가슴에 그 나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으면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땅은 잃었을지라도 가슴에 자기 나라 이름이 새겨져 있다면 언젠가는 싹이 튼다고 했다. 그것은 씨앗이고 씨앗은 때를 만나면 싹이 트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가야가 망할 때 악사 우륵이 신라 이사부에게 투항한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했다. 우륵은 살아서 가야의 소리를 살렸고 그 소리는 신라천지를 울리다가 이제 고려 천지를 울리고 있으니 가야는 소리로 살아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은밀히 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신라에게 결국 대가야 아라가야까지 망했을 때 신라는 아라가야의 연을 탐냈다.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연을 없애야 했지만 아라가야 연이 너무 아름다워 차마 없앨 수가 없었다. 신라 진흥왕은 아라가야 연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만약 누군가가 아라가야 연을 한 뿌리라도 건드릴 때는 엄벌에 처할 것이란 경고도 함께 내렸다. 전쟁에서 이긴 전승국으로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했다. 진흥왕은 연을 보기위해 사흘이 멀다 하고 아라가야로 행차를 했다. 그때마다 신라에서 아가가야까지 먼 길을 따라야하는 신하들은 할 짓이 아니었다. 어느 신하가 생각다 못해 차라리 연 밭을 통째로 가져오자고 진언했다.
“연 밭은 물과 흙이니라. 무슨 재주로 연 밭을 통째로 가져온단 말이냐?”
“신라와 가야백성들을 동원하면 될 일입니다.”
신라는 연 밭을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연을 캐어 옮기고 연씨가 묻혀있을지 모를 진흙까지 모조리 파 옮겼다. 진흙 한 줌 남기지 않았다. 아라가야에 연씨를 말려버리고 말았다. 연이 사라지고 나자 백성들은 힘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하고, 나라의 녹을 먹던 사람들은 신라에 아부하며 충성하려고 애썼다.
왕족들은 달랐다. 언젠가는 나라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다졌다. 마지막 왕족은 빼앗겨버린 연 대신 딸들에게 연화라는 이름을 지어 대를 잇기로 했다. 백년 후든 천년 후든 다시 나라를 찾을 때까지 그것이 나라를 대신할 것이라 믿었다. 연화, 연화, 연화……, 연화는 그렇게 가야가 망한 후 신라를 거쳐 고려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연씨를 네 조상의 나라에 묻거라.”
어느 날 왕이 느닷없이 외쳤다. 연씨를 금나라에 내주었고, 이자겸이 왕이 되고 싶어 한 탓이었다. 왕은 차라리 연씨를 몽땅 연화에게 주고 싶었다. 아들 환이가 있으니 그런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연씨를 금나라에 내준 것도 치욕이었다. 2년 전 인종이 왕이 된지 4년 만이었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복하면서 중국 전역을 모두 정복할 야심으로 주변 나라들에게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고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금의 눈치를 보던 북송 휘종이 은밀히 고려에게 힘을 합쳐 금에 맞서자고 했다. 고려가 선뜻 나서지 않은 채 주저할 동안 북송이 금나라에 바치기로 약속한 세물을 바치지 않은데다 고려에게 그랬듯이 그 전에 요와 밀통한 것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금나라 태종이 당장 북송을 정복하고 휘종 흠종 두 부자父子 황제를 포로로 잡고 다른 나라들에게 겁을 주었다. 다른 나라들이 모두 떨었다. 고려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금의 침략을 받을 수 있었다. 고려는 연씨를 금에 보냈다. 금 태종이 흥감해 입이 벌어졌다. 연씨를 보낸 것은 금을 상국으로 받들겠다는 것을 의미한 탓이었다.
왕은 떨고 이자겸은 역성혁명을 꿈꾸었다. 두 딸이 왕비임에도 왕자는커녕 왕의 성은조차 입지 못할 바엔 차라리 자기가 왕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후궁 연화의 아들 환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었다. 예언자를 내새워 ‘李’라는 글자를 풀어놓은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외치게 만들었다. 이 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이었다.
이자겸은 왕을 죽여 버릴 생각도 했다. 왕비인 딸들을 시켜 독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집에 며칠 동안 감금하기도 했다. 왕은 무서웠다. 이자겸에게 한시바삐 왕좌를 내줘버리고 싶었다. 제발 왕위를 내줄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자겸은 이제 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며 환이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둘째 왕비는 마음이 선해서 환이를 많이 사랑했다. 환이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연화를 불렀고 연화는 지체 없이 아이를 데리고 달려갔다. 이자겸이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둘째 왕비의 시녀에게 환이를 죽일 독을 쥐어주었고 시녀가 아이가 먹는 음식에다 독을 섞어 내왔다. 아버지 이자겸을 잘 알고 있는 왕비는 아버지가 왕을 독살하려 했으므로 아이도 죽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왕비는 아이가 먹을 음식을 꼭꼭 살폈다. 그날도 수저로 음식을 떠 검식을 하기위해 자기 입으로 먼저 가져갔다. 그때 시녀가 벼락같이 달려들어 수저를 든 손을 내리쳤다. 놀란 왕비가 연화와 환이를 한시바삐 궁에서 멀리 떠나보내야 한다고 왕에게 말했다. 왕은 서둘러 충직한 무장 두 명을 골랐다. 그들은 여러 번 전쟁을 경험한 노장들이었다. 무술이 고려 제일이었고 지리에 밝았다.
길은 산을 넘으면 다시 산이 나왔다. 말은 태백산 등줄기를 따라 달렸다. 달리면서 연화는 가슴에 품은 연씨를 생각했다. 품을 더듬어 보았다. 연씨 주머니가 저고리 품안에 고이 숨어있었다. 무사히 조상의 나라에 당도한다면 연씨를 묻을 것이었다. 반드시 꿈을 이루어 환이가 조상의 나라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이자겸 추격대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알 수 없지만 금강을 넘었으므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천천히 말을 몰았다.
땀이 식을 무렵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가 들렸다. 말갈기에 나뭇가지가 꺾이고 휩쓸리는 소리였다. 곧 군마의 거친 말발굽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짐작대로 이자겸의 추격대였다. 무장 두 사람이 추격대를 맞서 칼을 뽑았다.
“마마님, 소백산맥을 타십시오.”
무장이 칼을 뽑아들며 급히 길을 일러주었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를 등 뒤로 하고 연화와 환이를 안은 시녀는 사력을 다해 말 엉덩이에 박차를 가했다.
무장들과 떨어져 달리는 길은 무서웠다. 몸이 땅으로 떨어지고 말 것 같았다. 새를 생각했다. 목에 쇠로 만든 새가 걸려있었다. 아버지는 새가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었다. 아버지가 두드리는 쇠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대장장이는 윗대부터 내려온 가업이었다. 아라가야 왕족들은 대장장이로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했다. 한때는 신라를 속국으로 삼은 적이 있었던 자존심과 신라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였다. 가야의 철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대장장이로 가업을 삼은 것은 왕족으로서 마지막 지조였다. 가야는 두 번에 나누어 망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김구해가 신라로 투항해버린 뒤에도 대가야를 중심으로 뭉친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소가야는 불가항력의 순간까지 30년을 더 버텼고 그것이 끝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철을 만질 때마다 쇠붙이가 아니라 피붙이라고 했다. 따뜻한 살 같고 뜨거운 피 같다고, 불속에서 꺼낸 쇠를 모르대 위에 올려놓고 센메질을 할 때마다 떠르릉, 떠르릉, 하고 울리는 쇠 소리가 꼭 조상들의 울음소리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쇠로 예쁜 새를 만들어주면서 쇠는 가야 땅의 것이니 그것을 항상 지니라고 일렀다. 위험하고 힘들 때 그것이 지켜줄 것이라고 하면서 새 꼬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줄을 꿰어 목에 걸어주었다. 새는 말이 뛰는 것과 함께 눈앞에서 부지런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새를 생각하자 힘이 솟구쳐 올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무장이 추격대를 물리치고 연화 뒤를 따라잡았다. 무장은 한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은 이자겸의 부하에게 죽었다고 했다. 슬퍼할 겨를 없이 계속 남으로 남으로 산길을 달렸다. 소백산맥 하부를 지나 길은 영남과 호남으로 갈려 있었다. 무장은 영남으로 길을 잡았다. 다행히 추격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령을 넘어 낙동강을 만났다. 강을 따라 한없이 달렸다.
“여기서부터 마마님 조상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게 참말이오?”
“옛 대가야 고령을 지났고 낙동강도 하부쯤이니 남도 땅으로 쑥 들어와 있습니다. 남강을 만나면 드디어 아라가야에 발을 딛게 되지요.”
“남강을 만나면?”
“그렇습니다.”
“아, 아라가야!”
연화가 탄식했다. 땅은 벌써 촉촉하고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산봉우리는 둥글고 들녘은 넓었다. 산에는 목백일홍이 지천으로 피어 붉었다. 낙동강은 끝없이 길고 맑았다. 강에서 사람들이 배를 띄워놓고 고기를 잡고 있었다.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연화도 시녀도 환이도 강물에 발을 담갔다. 무장도 얼굴을 씻었다. 물과 살이 만나자 모든 시름이 풀리면서 마음도 풀어졌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물이 좋았다.
강물을 타고 구름이 흘러가고 바람도 스쳤다. 바람에 강물이 흔들리면 구름도 흔들렸다. 그런데 강물이 크게 흔들렸다. 말을 모는 그림자가 강물에 어른거렸다. 무장이 추격대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추격대 세 사람이 강을 지나 달려가고 있었다. 무장이 빨리 서둘러야한다고 독촉했다. 무장을 따라 자리를 뜨기가 무섭게 추격대가 다시 강가로 돌아왔다. 말똥을 확인하며 연화 일행을 찾았다. 쫓고 쫓기는 질주가 시작되었다. 양쪽의 말발굽소리가 허공에서 서로 부딪쳤다. 추격대의 칼바람소리가 벌써 등 뒤에서 휙, 하고 허공을 갈랐다. 칼바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장이 말머리를 돌려 가로 막았다.
“마마님, 앞만 보고 달려가세요. 부디 천지신명께서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무장이 소리치며 연화와 환이와 시녀가 탄 말 엉덩이를 힘껏 후려쳤다. 두 마리 말이 미친 듯이 달렸다. 목에 걸린 새가 부지런히 날아올랐다. 연화는 새를 생각하며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장은 혼자 세 사람을 막았다. 이자겸의 사병 승덕부 군사는 고려에서 가장 날쌘 자들이었고 추격대 세 사람은 그중에서 가장 날쌘 자들이었다. 무장도 고려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였다. 이자겸의 사병은 젊고 무장은 노장이었다. 세 사람 추격대가 한 사람 무장을 쉽게 베지 못했다. 무장이 곧 추격대 하나를 베고 둘을 막았다. 무장이 다시 하나를 베고 몸을 돌릴 때 나머지 한 명의 장검에 부딪친 햇살이 눈을 찔렀다. 단 이삼 초, 눈을 감은 순간 추격대가 번개같이 휘돌아 무장의 허리를 벴다. 무장은 말에서 떨어지면서 추격대를 향해 마지막 칼을 휘둘렀지만 살엔 미치지 못했다. 추격대는 땅에 떨어져 누운 무장의 목을 치고, 다시 말을 몰아 연화와 시녀를 쫓았다.
연화와 시녀의 말은 강을 건넜다. 무장이 말한 남강이었다. 강을 지나자 나지막한 야산이 시작되었다. 말은 야산을 달렸다. 옛 산성 터를 만났다. 아라가야 땅이었다. 알싸한 쇠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지던 쇠 냄새와 똑같았다. 연화는 ‘여기가 조상의 땅이구나!’ 라고 속으로 소리쳤다. 성은 무너지고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돌담만 남아있었다. 말이 뛰어넘기에는 조금 높았다. 말이 앞발을 꺾어 올리며 몇 번을 시도했지만 허물어진 돌담을 넘지 못했다. 말이 다리를 꺾어들고 몇 번을 안타깝게 울었다. 추격대의 말발굽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하늘에선 버섯구름이 퍼지면서 검게 변하기 시작하고 바람이 몰려왔다. 연화는 하늘을 바라보며 결단했다.
“환이를 데리고 나에게서 멀어지거라.”
“아니 되옵니다. 마마님, 어서 우리랑 도망치시어요.”
“여긴 내 조상의 땅이다. 나는 여기에 누울 것이다. 환이는 살려야 한다. 어서 가거라. 어서!”
“마마님을 두고는 가지 못합니다.”
“어서 가지 못할까!”
연화가 시녀에게 명령했다. 시녀가 울면서 연화와 멀어졌다. 연화는 환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 자리를 뜨지 않고 돌담주변을 돌았다. 그때 휘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추격대의 칼날이 연화 어깨를 내리쳤다. 연화가 말에서 떨어져 돌담 아래 누웠다. 연화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며 멀리 퍼져나갔다. 시녀의 귀에 연화의 비명소리가 스쳤다. 추격대가 두리번거렸다. 시녀는 말에서 내려 환이를 후미진 언덕 아래 숨기고 말안장에 짐을 얹은 채 멀리 쫓아 보냈다. 말은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말에서 사람이 떨어져버렸고 짐만 남은 것처럼 볼 것이었다. 말을 발견한 추격대가 말을 쫓아 그리로 달려갔다.
시녀는 환이를 업고 성터로 갔다. 연화는 돌담 아래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마마님!”
시녀가 절규했다.
“환이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연화라고 이름을 지어 내 뒤를 잇게 해다오.”
연화는 유언을 남기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서둘러 연화의 시신을 치워야 했다. 추격대가 되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연화의 목을 가져갈 것이었다. 시녀는 산성 터 돌담 아래를 팠다. 연화를 묻기 위해 마지막으로 몸을 안았다.
문득 환이에게 엄마의 흔적을 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에 걸린 새를 벗겼다. 시녀는 잠시 생각 끝에 다시 연화의 목에 새를 걸어주었다. 새는 연화의 분신이었으므로 죽은 연화를 지켜 줄 것이었다. 옷고름 한 짝을 뜯어냈다. 옷고름이 풀리자 저고리 품이 벌어지면서 품에 숨어있던 연씨 주머니가 보였다. 주머니를 열어 본 시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삼족을 멸하고 사약을 먹인다는 고려 연씨가 들어있었다.
“아, 마마님!”
시녀가 흑, 하고 눈물을 쏟았다. 연화의 심정을 알만했다.
“고려 연씨를 훔쳐서라도 조상의 나라에 묻고 싶구나.”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설사 연씨를 훔쳐낸다 하더라도 무슨 수로 조상의 나라에 묻을 것입니까. 새가 물어다주면 모를까. 꿈도 꾸지 마셔요.”
“새가 물어다줄지 누가 아느냐.”
연씨는 스무 알이 채 못 되었다. 열아홉 알이었다. 연화와 함께 묻어주기로 했다.
“조상님 땅에 마마님과 함께 묻어 드릴게요. 부디 소원성취 하시어요. 연씨는 천년만년 땅속에 묻혔다가도 때를 만나면 세상 밖으로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시녀는 환이를 업고 봉분 없는 연화의 무덤을 밟으며 ‘부디 먼 훗날 때를 만나거든 연꽃으로 피어나셔요.’ 라고 빌었다.
시녀는 연화 옷고름을 아이 손에 쥐어주고 아이는 엄마 옷고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시녀는 환이를 업고 아라가야를 맴돌았다. 말이산에서 높은 능을 만났다. 왕릉일 것이고 연화의 조상일 것이었다. 환이에게 보여주며 어쩌면 네 엄마의 조상이고 네 외가조상인지 모른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마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까딱해보였다. 무성한 여름풀이 우거진 능에서 잠을 잤다.
아침마다 능에서 산까치가 울고, 한 노파가 아침저녁으로 능 앞에서 절을 하고 갔다. 시녀는 아이를 데리고 3일 동안 능에서 잠을 잤고 노파는 계속 절을 하고 갔다. 4일째 되는 날 노파가 시녀를 바라보았다. 시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아이를 살피던 노파의 눈이 경이롭게 빛났다. 그때 추격대가 말이산을 돌고 있었다. 추격대 세 명이 능으로 성큼 들어섰다. 노파가 느닷없이 시녀에게 환이를 빼앗아 안으며 “우리 생이를 낫게 해 주소서! 우리 생이를 어서 낫게 해주소서!” 라고 능을 향해 큰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추격대가 아이와 노파를 살폈다. 추격대들은 마을을 뒤져 환이 또래 아이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는 중이었다. 추격대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능을 내려가고 말았다. 능 밖에서 추격대 대장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을 다 뒤졌으니 이제 개경으로 돌아간다.”
“아이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 겁니다. 말이 짐 보따리만 싣고 달렸으니까요. 그런데 연화당 시신을 찾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시녀와 아이가 탄 말을 쫓다 다시 돌아와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지 뭡니까.”
그때 연화를 내리친 추격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짐승이 물어갔겠지. 연꽃처럼 예뻤으니 말이야.”
“참, 그렇군요. 짐승도 예쁜 여자라면 초를 다퉈 물어가니까요.”
그들의 말을 들은 시녀가 부들부들 떨었다.
노파는 무당이었다. 대대로 내려온 무당 가문인데 아라가야시절 왕실무당이었으므로 왕릉에 매일 아침저녁 절을 올린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그러셨나요?”
시녀는 고맙다는 생각보다 환이를 구해준 이유가 더 궁금했다.
“능에 계신 왕조께서 아이를 지켜주라 하셨네.”
“아, 마마님! 마마님의 조상께서 환이를 지켜주셨답니다.”
시녀가 감격하며 울었다.
“여기서는 아이 명을 보존할 수가 없으니 당장 여길 떠나게. 이름도 바꾸어야 하고.”
시녀는 노파가 갑자기 둘러댄 대로 아이 이름을 생이라고 바꿨다. 생이는 마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믿으며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시녀는 떠나기 전 연화 무덤 앞에서 노래를 지어 불러주었다.
여항산 높은 봉에 맴도는 흰 구름아
성산성 동문 밖에 산까치 울거든
가엾은 연화 눈물인 양 고이고이 닦아 다오
여항산 동쪽에 아침마다 뜨는 해야
아라가야 어딘가에 붉은 연꽃 피거든
가엾은 연화 혼인 양 따뜻하게 비춰다오
오연화는 일 년 내내 연화에게 사로잡혔다. 작년처럼 창문 밖으로 산을 바라보았다. 계룡산에 초여름 빛이 돌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조바심을 벗어나지 못했다. 과연 씨앗을 발아하는데 성공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패했습니다. 라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웠다. 만약 발아에 성공했다면 지금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넓고 건강한 연잎 중심에서 튼튼한 꽃대가 올라왔을 것이고, 꽃대는 푸른 하늘을 향해 입술을 꼭 다물고 개화할 날을 기다릴 것이었다. 그쯤 상상하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오 박사님, 지금 무슨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행복해하세요?”
“노처녀가 혼자 웃는 건 시집갈 징조라고 하잖아.”
동료들이 농담을 하는 동안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오연화가 먼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를 집어든 손이 평소보다 빨랐다.
“저거 보세요. 뭔가 있다니까요.”
“잘 된 일이지. 오 박사가 올해는 꼭 시집가는 걸 봐야한다구.”
“맞아요. 처녀나이 43세가 뭐냐구요.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지만.”
동료들이 낮게 속삭이고 발신자의 말을 듣고 있던 오연화가 ‘그게 정말이세요?’ 라고 소리쳤다. 연씨 열다섯 개 중 세 개가 발아에 성공하여 개화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고려 연씨가 개화를 앞두고 있다구요? 그것도 세 개나!”
오연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게 정말이냐?’고 되풀이하여 묻고 또 물었다. 연구원들도 모두 일어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이 벌어졌다.
“야, 이래서 역사는 미래의 꽃이라니까.”
“이 위대한 기적이 세상을 한바탕 강타하겠구만.”
“아이를 낳은 기쁨이 이런 건가?”
개화일을 잡았으며 그날 개화축제를 할 거라고 했다. 개화일에 꼭 와달라고 했다. 연구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모두 함안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오연화는 하루 전에 함안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생각하자 가슴이 쓰라렸다. 함안 땅에 발을 디딘 건 처음이었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꼭 가봐야 한다고 일렀고,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처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고 대전 연구소로 오기 전까지는 서울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도 늘 고향은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아주 오래전에 고향을 떠났다 귀향한 것처럼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연화가 죽어 묻혔을 성산 산성 터로 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엄마가 해준 이야기와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해가 떠오른 연못도 있었다. 마침 산성 터에서 개화전야제로 제祭를 올리고 있었다. 제주가 축문을 읽고 군민들이 술을 올리고 향을 사르며 절을 올렸다. 오연화도 그렇게 했다. 절을 올리며 속으로 “당신이 당부한 연화라는 이름이 나에게까지 이어졌으니 이제 기뻐하셔요.” 라고 말했다. 하얀 소복을 차려입은 무당이 연화 넋을 위해 지전을 들고 춤을 추었다. 한참 춤을 추고 난 무당이 소지를 올리며 제를 마무리했다. 그때 산성 동문 쪽에서 산까치가 맴돌며 울어댔다. 말이산 능에서도 산까치가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변이며 좋은 징조라고 입을 뗐다.
함안의 하늘과 대지, 산과 바람과 물 등 모든 것이 700년 만에 깨어나는 연화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다. 높은 산의 협곡과 협곡사이에 호수를 이룬 입곡저수지는 거울 같은 명경수를 더욱 맑게 다스려놓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여항산 등줄기를 타고내린 별천계곡도 설렘에 들떠 한층 물소리를 높였다. 남강을 끼고 끝없이 뻗어나간 둑길은 연화가 오는 길을 예비하듯 길고 긴 둑을 따라 삼색 코스모스를 피워놓았다. 아라왕궁지, 남문외, 말이산에 자리 잡고 있는 20여 기 능들은 멀고 먼 시간을 돌아온 딸을 맞이하는 감격과 설움을 주체하지 못한 듯했다.
연구원들 말대로 기적이 전국을 강타하고 뉴스를 듣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연화를 향해 겹겹이 늘어섰다. 남강은 물안개를 쓸어오고 초여름 여항산 서리봉에는 산안개가 자욱했다. 아침부터 는개비가 꽃가루처럼 내렸다. 연이 마지막 꽃 입술을 뗄 때는 반드시 는개비가 온다고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았다. 첫날밤에 신랑이 새 각시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주듯이 는개비가 꽃잎을 한 잎 한 잎 떼어준다고 했다. 해는 숨고 바람은 멈춘다고 했다.
개화를 위해 스님이 독경을 시작했다. 낭랑한 독경소리가 개화를 재촉했다. 잠잠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잎은 모두 열두 장이고 열한 장은 입술을 살짝 뗀 상태였다. 마지막 열두 번째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을 개화라고 했다. 사람들 말대로 문득 남강이 숨을 멈추었다. 바람이 멈추고 안개가 물러가고 는개비도 뚝, 멈추었다. 스님도 독경을 멈추었다.
고요한 순간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땅이 진동하듯 크게 울렸다. 마지막 열두 번째 꽃잎이 입술을 뗀 것이었다. 열두 잎이 마주보며 둥근 선을 이루었다. 해가 불끈 산위로 솟아올랐다. 투명한 첫 햇살이 열두 꽃잎에 떨어지면서 멀리 온 누리로 빛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선홍색 꽃잎이 투명하게 빛났다.
“700년만의 아침이라니!”
사람들이 탄식하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떨린 목소리로 다시 염불을 시작했다. 오연화의 합장한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오연화는 연화, 연화, 연화, 라고 거듭 연화를 불렀다. 연화는 비로소 조상의 땅 아라가야 품에 안겨 마음껏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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