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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
勢力盡箭還墜하니 招得來生不如意로다 세 력 진 전 환 추 초 득 래 생 불 여 의
모양[相]에 머무는 보시는 행복을 누리더라도 한정이 있기 때문에 허공에 쏜 화살이 힘이 다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복이 다하면 내생에는 뜻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삼생(三生)에 원수라 했습니다. 금생(今生)에는 모양에 집착한 복을 닦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생(來生)에는 금생에 닦을 복을 받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래생(來來生)에는 복이 다하면 타락하여 고(苦)를 받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양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은 삼생의 원수라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양에 머문 보시가 삼생의 원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모양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모양에 머무름이 없는 보시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양변ㆍ변견을 다 버려버리는 것이 참다운 보시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이렇게 해야만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 수도인이 되어서 삼생의 원수인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달마(達磨) 스님이 양무제(梁武帝)를 만나니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짐이 만승천자가 되어 절도 많이 짓고 경전도 많이 펴고 탑도 많이 세우고 보시도 많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라고 달마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양에 머문 보시이기 때문이니 당신이 실제로 불법을 위하여 공덕을 쌓으려거든 자성을 깨치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치는 이것이 참공덕이라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삼생의 원수이니만큼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삼생의 원수는 맺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혹 이리도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상승법을 바로 알아서 그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행난행(苦行難行)하는 것은 모양에 머무는 보시가 아니라 최상승법을 빨리 성취시키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고불고조(古佛古祖) 무상대도를 성취시키기 위해 신심을 조장시키는데 있어서는 모든 고행난행(苦行難行)을 해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갔습니다. 왜그런가 하니 가섭존자와 같이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공부해야만이 이 무상대법을 깨칠 수 있다는 근본 표본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섭존자의 고행난행은 자성을 깨쳐서 모든 모양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전체가 모두 대기대용(大機大用)의 현발입니다.
예전의 총림에서 큰 스님네들이 공부하는 사람이 최상승법을 모르고서 다만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는 것만을 배격하였지, 그 이외의 최상승법의 성취를 위한 고행난행은 누구에게든지 장려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백장(百丈) 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고 하여 구십평생을 호미를 들도 살았듯이, 이 고행난행을 하지 않고 공부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에 머무는 보시와 예전 큰 스님네들의 조도방편(助道方便)을 혼동하면 큰 오해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종문에서 하는 공부는 모양에 머무는 보시도 아니고 삼생의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고행난행을 하여 신심이 고양되어 최상승법을 하루 빨리 깨치게 하는 것이 그 근본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어느 큰 스님이든지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섭수해 나갔지 이것을 배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상승법으로 들어가서 모든 모양을 떠난 공부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_(())_
<출처 : 성철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강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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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
잘 읽었습니다. 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