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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별빛문학회
산고수장(山高水長) 도처유청산(到處有靑山)
1.어린 시절 김 명 중
나는 오곡백과가 영그는 가을에 시골에서 태어났다. 머슴이 끌어주는 소등을 타고 풀피리 불며 들에 나가 소에게 풀도 뜯기며 자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 때 해방과 정부수립 6.25전쟁을 겪었다. 대학재학중에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이 일어났고 대학 졸업 하고 군복무 마친 후 공직생활 41년 했으며, 11년 전 퇴직하고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아버님은 일본 유학 하신 후 일본인 스승과 목포에서 치과의원을 하셨다. 그 당시 발생한 만주사변으로 민심은 흉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의 식민정책이 극에 달해 일본인이 조선 사람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시국이 어려울 때는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주변의 권유로 고향으로 오셨다.
어머님은 누님을 잉태중이어서 외가 별채에 와 계셨는데 그때 아버님이 난리를 피해 오신 것이다. 부모님은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외가에서는 사는데 지장 없을 만큼 재산을 줄 테니 치과 그만 하고 고향에서 살기를 원 했다고 한다. 어릴 때 내 사진을 보면 양복차림의 단정한 모습으로 재봉틀 솜씨가 좋은 어머님이 직접 만드 신 옷이다. 내 딸은 이 분야의 박사로서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어 내림의 피가 손녀에게 까지 전해진 것 같다. 외사촌도 중국에서 재봉틀이 5만대가 넘는 아동복 세계 1위의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본사는 미국에 두고 한국 등 여러나라 에 지사를 두어 성업 중이어서 외가의 피를 받았다고 들 한다.
아버님은 넓은 농토를 경작하고 관리하는 일이 많아서 일본인스승이 귀국 하면서 맡긴 치과의원을 후배에게 맡겼다. 그 당시 아버님이 경영하는 농장은 상주일꾼이 50여명이나 되는 꽤 규모가 큰 농장 이었다.
나는 학교 갈 나이가 되어 읍내로 이사 왔고 아버님은 치과의원을 다시 개업 하였는데 지금도 우리 집을 치과 집이라고 한다. 아버님은 치과병원을 영리목적 보다는 계몽 차원에서 운영하시고 처신도 잘 하셔서그런지 주변의 평판이 좋아 지방자치제도를 처음 시행할 때 초대 의회의장에 당선되시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25사변이 발발 했는데 지주(地主)여서 그랬는지 친가 쪽엔 학도병으로 군에 간 삼촌만 살아남고 전 가족이 학살당했다. 외가 쪽도 도시에 살던 분들만 살아남았고 고향에 있던 분들은 모두 학살당했는데 우리 집은 인심을 잃지 않았던지 다행히 학살을 모면 했다.
사람은 망망대해에서 탄 배가 조난하여 역경을 당할 때 그 진면목이 나타난다고 한다. 6.25를 겪으면서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의 마약에 빠져 자기가족을 고발하고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 밀고하여 불구대천지원수가 되고 친구가 친구를 잡아다가 고문 하는 등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자행 됐으니 통탄할 일이다. 좌우로 나뉘어 이념이라는 허구에 매몰되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의 비극은 같은 민족으로서 반성해야 할 일이다.
지금도 노사갈등 빈부격차 계층 간 갈등, 오만한 소수와 한 맺힌 다수간의 갈등등 이 심화된 작금의 사회 현실을 볼 때 사회통합과 화합이 하루속히 이루어져야겠다.
2. 학창시절
나는 6.25전쟁 중에 무장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일합방 전인 1907년 개교한 이 학교는 도산 안 창호 선생이 세운 대성학교와 남강 이 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 와 같이 설립되어 109년이 된 학교다. 안 창호 선생은 ‘나라를 잃은 것은 국민이 무지 몽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라를 찾으려면 모두가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 독립운동가다. 한일합방 이후에 일제가 세운 관립학교는 식민통치를 위한 학교로 그 설립목적이 현격히 다르다. 당시에 좋은 학교는 북쪽에 오산고보 남쪽엔 고창 고보여서 전국 각지에서 많이 유학 왔고 많은 인재를 배출 했다.
중학교에 진학 할 때 본 전국일시연합고사 성적이 좋았다. 초등학교 6년 동안 1등 반장 어린이회장도 했다. 누님 둘은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했고 형은 대학 1학년 7남매 모두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어서 주위에서는 치과 집 아이들을 닮으라는 부모들의 채근이 심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때 우리 집에 비운이 닥쳤다. 우리가문의 희망이었던 형이 갑자기 죽은 것이다. 부모님은 망연자실 비통함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식음을 전폐, 나도 많이 울었다.
어머님은 상록수 소설의 채 영신 같은 분으로 고향의 청년 처녀들에게 영농법과 요리 가정관리와 육아법 등을 주1일 점심을 같이 먹으며 가르쳤고 그 공로로 포상도 받았다. 자식들 말도 듣지 않던 부모님이 이들의 성화에 털고 일어났으나 예전 같지 않았고 이때부터 우리 집 가세는 어려워졌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원서 마감일이 닥쳤는데 초상집이라 담임선생님이 전주 북중학교에 원서를 접수 합격하여 친척 집에서 다니고 있었는데 장손이 된 나는 집에서 다녀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고향의 중앙대학부속 영선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다녔다. 당시 전북일보 편집국장이던 친척이 학교를 추천 했는데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같이 1900년에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전주신흥 고등학교는 교수진이 좋아서 교육을 잘 시키고 있고 또 내 성품이 목사님감이며 그동안의 우수했던 성적과 우수한 가문의 자랑할 만한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전주 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이때 친척이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이때부터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각 급 학교에서 문예 부장을 맡아 글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금년으로 개교 116주년이 된 이 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도 다니게 되고 친척 말대로 교육을 잘 시킨다고 느끼게 됐으며 지금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때 아예 서울로 진학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버님께서 대학진학상담 결과 전남대의대로 결정 했다고 하셨다. 누님이 담임 선생님 만나 서울대 의대 갈 실력은 안 되느냐고 문의 결과 실력은 되는데 전남대 의대 가면 수석도 기대 할 수 있으니 학비 면제 받으며 다니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셨단다. 교감 선생님은 고등고시를 권하셔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의대를 말씀하시고 서울이냐 전남이냐는 선생님과 상의 하라 하셨다.
나는 당시 유 달 영 교수의 강의와 이 분의 ‘인생 노오트’ ‘유토피아의 원시림’등의 저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본인 농장에서 말을 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딘, 록. 허드슨 등이 출연한 영화로 30년간에 걸쳐 전개되는 한 텍사스목장 주 일가의 이야기인 “자이언트“ 영화 등은 넓은 목장에서 펼쳐지는 감동적인 장면 들이 감수성이 강한 청년이 된 나에게 강한 인상과 마력이 되고 있었다. 농장경영을 하면서 작가가 되어 인류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글을 쓰고 노벨 문학상에 도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과 더불어 일하는 수의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서울대의대로 써준 원서를 서울대 수의대로 다시 써서 합격했다. 대학생활은 무척 바빴다. 10년 이상 공부해야 되는 학문인데 4년제여서 토요일도 7시간씩 수업 했고 어떤 때는 공휴일에도 수업했다(현재는 6년제) 그러니 창작 활동은 생각 할 수도 없었고 한동안은 가정교사도 해야 했다. 방학 때는 농장경영을 실습하기 위하여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에서 한 달씩 실습을 했다.
그때 R,O,T,C,제도가 생겨 제1기로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2년 복무하고 예편했다.
3. 직장 생활
군 예편 후 영어교사를 하다가 농협에 입사 했다. 농협은 비영리 공익단체로 이익나면 농민 조합원에게 환원 하도록 법제화 되어있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임직원수와 점포 수, 가장 많은 국내자본을 보유한 기관이다. 또한 다른 직장과 달리 주유소 장례식장 까지도 운영 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취급하고 있어 금융기관은 물론 기업체의 연수원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농협 임직원은 농민과 농촌의 소득증대와 생활개선을 선도하는 농촌운동가이다.
농협중앙회 젖소개량 부 근무 시 ‘우유 생산량 증대방안 연구프로젝트’연구원으로 선발되어 축산 선진국인 미국 캐나다 호주 덴마크 등에서 연구를 했고 우수 인자로 ‘인공수정’을 하여 F1을 생산 단계적으로 젖소의 체중과 우유 생산량을 늘리는 등의 연구결과 보고서가 채택 되었다. 젖소는 유방이 발달해야 우유 생산량이 많은데 당시 한국의 젖소는 400-500kg 체중에 유방도 빈약 하여 선진국 우유 생산량의 절반도 못 미치는 실정 이었다. 선진국 젖소는 1000kg이 넘고 유방도 크고 발달 하여 우유 생산량이 많았다. 선진국의 우량 수컷을 수입해서 인공수정을 하는 등 연구에 몰두한 결과 우유 생산량과 품질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 하는데 성공했다. 혼자 아닌 공동 연구가 성공하여 공로상과 포상금도 받은 조직의 성공인 것이다.
수의사는 많은 종류의 동물을 진료하는데 인간과 달리 의사소통이 어려울 경우가 많다. 또 수의사는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 광우병 등 가축법정전염병이 발호하면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는 경제동물을 취급하고 있어 그 책무가 막중하다. 신흥개발 국가 1위를 달리던 대만이 몇 해 전 구제역으로 국가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저앉았다고 한다. 중국요리의 주종이 돼지고기여서 돼지를 많이 사육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물을 통해서 사람에게 오는 각종 전염병이 많을 뿐 아니라 사람과 동물의 공통 전염병도 많고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인간과 동물은 불가결의 관계여서 선진국 에서는 식품관련 기업엔 수의사 배치를 의무화 하고 있고 사업의 성패도 달려 있어 수의사가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교육홍보 부 근무 시엔 1R667 통일벼 육종의 성공으로 쌀 생산이 많이 되어 민족의 고통인 보릿고개가 해결 되었으나 보관할 창고가 없어 농민들이 일시에 시장에 내다 팔므로 가격이 폭락 생산비도 못 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부에 적정가 수매를 건의 했으나 재정자금이 없어 농협자금으로 수매 했는데 수매한 벼를 보관할 창고가 없어 난관에 봉착 했다. I,C,A,(국제협동조합연맹)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무이자 지원을 받아냈다. 이 자금으로 전국 각지에 I,C,A,창고를 많이 건립하여 난관을 해결 공로상을 받았다.
당시 농촌에선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가격이 비싸 살 수 없었고 전화도 동네에서 한집 정도 있던 시절이었다. 이를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찾던 중 특별소비세가 공장도 가격보다 많아서 비싼 것을 확인하고 농촌 생활물자사업으로 농민에겐 특별소비세를 면세해 줄 것을 건의 하여 공장도 가격으로 공급 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농촌 농민을 위하는 일에 헌신적이었음을 자부하며 보람을 느낀다. 농협은 방대한 기관이다. 은행지점이 국민은행과 비슷하게 1200여 지점 지역농협 지점이 4500여개 판매장이 2300여개 도합 8000여개의 점포가 있다 보니 농협 사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5.16 군사혁명직후 군 출신 서울시장이 농협이 도시에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해서 시장에게 브리핑한 일이 있었다. 경제 환경이 열악한 농촌을 돕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 한데 재정지원이 충분치 못하므로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이 몰려있는 도시의 자금을 모아 저리로 농촌을 지원하면 싼 농산물이 생산 되어 결국 도시 소비자들이 혜택을 입게 되는 결과라는 요지로 설명을 했더니
‘내가 무식 했어’ 하고 솔직하게 군인다운 말을 들었을 때 농촌 농민을 위해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또 5.16혁명직후 마을마다 OO리 협동조합이 조직 되었으나 조합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므로 자본금이 미미하여 농민 조합원을 위한 어떤 사업도 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 하기위해 면 단위로 합병작업을 하는데 조합장 감투 때문인지 무척 힘들었던 일 결국 면 단위 군단위로 합병하여 적정규모로 경영 하게 되어 오늘의 지역 농협이 지역사회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은행 지점을 가장 많이 개설한 지점장으로(지점개설 6개) 한국은행 편람에 게재 되는 영광을 얻었다.
은행생활을 돌이켜 보면 평생직장 보장 되고 자녀 학자금도 줘서 업무에 몰두 할 수 있었고 최선을 다 한 것 같다. 반면에 무사안일에 빠져 모험심이 없어 도전하지 못해 더 발전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은행원들이 모두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지점장 재직 시 야간에 대학원에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런 노력들이 결실이 되었는지 실물 경제에 대한 논문으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최우수 논문상의 영광도 함께 받았다.
은행을 막상 퇴직하니 남은 것은 2남매 박사학위 받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으나 결혼을 못 시켰고 재산이라곤 단독주택 한 채가 전부였다.
은행 지점장 재직 시 거래기업체에서 회장 사장 혹은 이사로 영입 제의가 있었으나 가지 않았다. 1997년 퇴직하던 해에 I,M,F,를 당해 많은 기업이 도산됐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침 대우그룹 ㈜고려에 가게 되어 이곳에서 이제까지의 경영철학을 최선을 다해 발휘해 보고 2005년에 퇴직하니 41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한지 11년이 되었다.
㈜고려는 내가 원하면 평생 다닐 수 있게 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는데 동창 중에 명망 있는 박사 한 분이 어려운 처지가 됐는데 내 직장을 양보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동창들의 고언이 있어 내 자리에 그 동창을 취임케 하고 퇴임 했더니 동창사회에 미담으로 소개 되어 지금도 이 말들을 한다고 한다.
4. 사회생활
은행을 퇴직한 분들이 그간의 지식을 활용 퇴직금으로 증권투자 하다 퇴직금을 날린 분이 있었다. 나도 유혹이 있었으나 살고 있던 단독주택을 재건축하여 위층에 살고 아래층은 세를 놓아 노후연금 구실을 하고 있다. 당시 재건축은 큰 모험 이었다 I.M.F때라 난관이 많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주위의 만류에도 집을 지었다. 재건축 한다 했더니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은행 지점장 이라 해서 경제통인 줄 알았는데 순 깡통 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물 짓다가 망한 사람도 있고 분양도 안 되고 세 들어 올 사람도 없다는 것으로 주위 분들이 많이 걱정해주었다.
아내는 당신 결정은 항상 옳았고 당신 결정에 따른다고 응원 했지만 난감 했다. 이때 ‘위기는 기회’라고 신혼부부나 분가 하는 분은 새집을 찾을 것이고 모두들 안 지으니까 희소가치가 있어 분양이나 세가 나갈 것이다. 비장한 각오로 재건축을 결심했다. 이제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가 고민 이었다. 큰 건설회사 들도 줄줄이 부도를 당하여 도산하고 있어 어떤 건설회사가 제대로 공사하고 준공할지 걱정 되었다. 은행지점 여럿을 개설 하면서 인테리어를 맡긴 경험을 생각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而 不如一見)이라고 외관도 멋진 잘 지은 주택과 아파트, 모델하 우스와 건축백화점을 아내와 함께 몇 달을 다녔다.
은행지점 개설시 인테리어 업자 선정할 때 입찰하든 수의계약하든 내정가격은 일정 하므로 이윤을 조금 먹고 꼼꼼하게 시공하면 계속 일을 맡게 되더라는 말이 있어 맡겼더니 결과가 좋았다. 내집지을 업자를 상담 하면서 이 지역 100호를 맡으려면 이윤을 조금 먹고 우리 집을 모델 하우스로 잘 지어 놓으면 너도 나도 지어 달라고 하게 된다고 전에 들은 말이 있어 그 분에게 맡겼다. 과연 집을 잘 지어 놓으니까 섭외 안 해도 지어 달라고 하였고 이 업체는 이 지역에서 70%이상을 맡아 큰 성공을 거뒀고 이것을 토대로 재벌급 건설회사로 성장 했다.
이런 실례는 무슨 일이든 성심성의를 다해서 하면 반듯이 좋은 보상이 온다는 교훈을 얻었다. 재건축한 주택이름을 내 딸이 NEO VILL.(새마을)이라고 명명하여 주택 명패를 붙이는데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박수를 쳐주었다. 이 지역 100호중 제일 먼저 지어서 선구자니까 번영회장도 해야 한다고 또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간의 고생도 잊었는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루떡과 막걸리 돼지고기로 준공식이 마을 잔치가 됐다. 집을 잘 지어준 재진종합건설 회장과 임직원 여러분, 도움 준 직장후배, 친척 친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때는 감개무량 했다.
나의 성공사례를 듣고 이를 요청한 친지를 도와준 일이 있었는데 내덕에 노후가 걱정 없게 되었다고 감사해 하는 분도 있고, 한 동창은 직장에 들렀기에 이 근처에 땅 사놓으면 좋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그날로 땅 계약을 한 것이 지금은 큰 빌딩의 주인이 되었다. 이런 분들이 자연스럽게 상부상조 하다 보니 ‘지역경제 회’ 모임이 되어 자주 만나 우의를 다지고 있다.
5. 가정생활
가정의 중심은 효(孝)와 애(愛)로서 나의뿌리를 존중하는 것이고 사랑은 용서로서 사랑이 없는 인간은 동물보다 못하다. 사람은 정신(혼)으로 말하고 동물은 사(死)해서 고기로 말한다. 가까울수록 더 관심 갖고 소중히 해야 한다. 가정에 삼정(三正)운동이 필요하다. 정심(正心)정행(正行)정언(正言)이다. 마음이 반듯해야 행동도 반듯 하고 말도 바르게 한다고 부모님께서 말씀 하셨다.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부모님!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여서 고생도 많이 하셨다.‘너는 잘 할 수 있어, 나는 너를 믿는다.’고 힘주어 일깨워 주시던 부모님! 이제 내가 그 부모가 되고 보니 평생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신 부모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는 아내에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농협중앙회 서기 때 아내를 중매로 만났는데 아내는 충남대학 의과대학 강사를 하며 간호학과 기숙사 사감도 맡고 있었다. 힘든 살림을 하며 남매를 낳고 둘 다 박사까지 가르치는데 열성을 다 했으며 손 자녀도 둘씩 두었으니 내조의 힘이 컸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에게 직장을 그대로 다니게 했으면 유명교수가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식들도 좋은 직장 다니며 저희들이 좋아한 배필 만났고 자부와 사위도 고등학교 교사로서 손 자녀도 둘씩 두어 양육 잘 하고 모두 충실하고 우수해서 제몫을 다하고 있어 고맙고 자랑스러우며 행복 하다. 나는 자식이 불효자라는 후회의 굴레를 쓰지 않도록 자식을 일깨우고 기회를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내가 저질렀던 실수를 자식에게는 반복시키지 않겠다는 다짐도 한다.
나에게 큰 버팀목이 돼 주신 두 매형 내외분께 감사한다. 서울대학 미대 졸업, 미대 학장하고 국전 초대 작가인 석정(石丁) 화백과 중앙대학 학장 대학원장 거쳐 명예교수인 현산(玄山) 박사, 서울은행 지점장 등을 거쳐 작가 활동의 죽원(竹園) 매제와 세경흥업 영화사 경리부장 등을 거쳐 호주 한인회 회장인 동생, 서울은행 지점장등을 거쳐 오피스텔 사장인 동생에게 감사 한다. 이분들의 조언과 도움을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사업상 대출금이 많아 금전적인 도움을 못 주었고 장남으로서 여러 형제들을 추슬러 주지 못한 일들이 항상 내 어깨를 짓눌렀으나 모두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어 감사 하다.
6. 맺는 말
산고수장(山高水長)하니 도처유청산(到處有靑山)이라! ‘산이 높아 긴 강이 흐르니 이르는 곳마다 좋은 일을 만 난다’는 뜻이라면, 나의 인생은 분명히 도처유청산의 삶을 지금도 살고 있다.
이 세상의 많은 만남들!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식탁 앞에 앉을 때, 차나 와인을 아내와 같이 마실 때, 자연의 부름을 받고 변기위에 앉을 때, 적당한 온도의 욕조에 몸을 담글 때‘ 여보’라고 부르면 ‘예’라고 대답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을 때 등 집안의 하루에서만도 수많은 도처 유청산을 만난다.
별빛문학회에선 좋은 선생님 강의 듣고 문우들과 시낭송하고 문우들의 작품 감상 하며,한국 수필가협회 주관의 국내외 문학 심포지엄에 참가 하여 한국문학의 품격을 높이고 있고, 어떤 날은 합창 반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며, 또 어떤 날은 자연속 등산길에서 즐거운 대화 속에 산행을 같이하는 허물없는 동창들을 만나고, 어떤 날은 직장 선후배들이 만나 회고담을 꽃피우며, 동네길이나 공원에선 아름다운 나무 밑에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들과 만난다. 이런 만남에서 나는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만유를 아름답게 보고 기쁨으로 만나는 도처유청산의 삶을 살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한번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시간 말 기회’이고 ‘사랑 친구 자신감’이 우리가 지녀야할 가장 고귀한 가치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동안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최소한 3번은 온다고 한다. 이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하고 참 바보같이 고 지식 하게 살아 왔다. 나는 도전이나 모험을 못 하고 쉬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는 금언을 후대에 전하고 싶다.
나는 내 식솔들에게 ‘인생은 일일(一日) 일생(一生)’으로 순간순간을 사는 것이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쌓여서 하루가 되고 일생과 인생이 된다.’ ‘항상 먼저 다가가고 먼저 배려하고 먼저이해 하라’고한 빌게이츠의 명언과 ‘뭐든 그냥 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겨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으며, 즐겨서 하는 사람은 미쳐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 는 공자님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겨 두라고 강조 하겠다.
태어나고 죽는 것과 같이 진학이나 결혼이나 직업을 갖는 것까지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 이 자리가 내 자리이니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어떠한 상황이든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은 결국 내가 뿌린 씨앗에 의해서 싹튼 것이니 원망하기 보다는 감사 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아무리 베풀어도 부족한 자식 사랑, 마음은 있으나 미루다가 행하지 못한 효도도, 지나온 것들에 대한 회한에 메이지 말고 이 시간부터 좋은 씨앗을 뿌려 더욱 튼실한 열매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현대 심리학의 거장 알프레드 아들러의 ‘사람은 현재의 목적을 위해 행동 한다는 목적론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 하다는 것이며
즉 자유도 행복도 모두 용기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후반부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내 일생을 결산해 보는 자전적 에세이를 쓰면서 반성과 다짐을 한다. 우선 간결한 자서전을 쓴 것이다.
프랑스의 ‘로망롤랑’은 ‘인생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출발 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인생은 편도 열차다. 일단 떠나게 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교훈 삼아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다. 우리는 한번뿐인 인생, 지나간 세월은 되돌아오지 않고 사람이 이 땅에 머물다 떠나면 흔적을 남기는데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세상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라는 묘비명 중에서 영국의 극작가이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호 ‘버나드 쇼’는 그의 묘비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적고 있다. 95세까지 살다 간 ‘버나드 쇼’ 옹도 이러 할진데,
나의 묘비명에 좋은 말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가
‘삶의 과정은 결과 여하를 불문하고 선택의 과정이다’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길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나에게 주어진 지금 ‘최선을 다 하는 것뿐’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나의 좌우명인 ‘정직, 신의, 성실, 최선’을 생활화 하고,
가훈인 ‘건강하고 화목하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인내하며 최선을 다 하자‘ 를 실천하는데 나름대로 노력하고자 한다.
*김 명 중 약력
미래시학 수필 등단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
별빛 문학회 부회장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졸업
한남대학교 대학원 수료 경제학 석사
농협중앙회 지점장. 농협대학교 교수
e-mail: mjkim1004@gmail.com
첫댓글 자서전
훌륭합니다. 멋진 삶이고 도전하는 정신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