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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원인(北京猿人) 발굴지
-주구점(周口店)은 어디인가?
1.
북경(北京)에서 서남쪽으로 50km떨어진 곳에 서산(西山)이라는 산이 있고 그 서산(西山) 동남쪽 산기슭에 있는 작은 동네가 바로 주구점(周口店)이다.
북경원인(北京猿人)의 화석(化石)은 스웨덴의 지질학자(地質學者)인 안데르손(Johann Gunnar Andersson, 1874-1960)과 오스트리아의 고생물학자인 즈단스키(Otto Zdansky, 1894-1988) 등이 1923년에 최초로 발견해, 1926년에 학계(學界)에 보고하였고, 1927년 캐나다 출신의 고인류학자 블랙(Black)은 북경원인(北京猿人)이 새로운 선사(先史)인류임을 주장하며 ‘시난트로푸스 페키낸시스(Sinanthropus pekinensis)’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1929년 큰 눈이 내리던 날의 어느 오후, 석회와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북경인의 두개골이 중국의 고인류학자인 배문중(裵文中,1904-1982)에 의해 발굴되었다. 완전한 형태의 머리뼈였다.
북경원인(北京猿人)의 생존시기는 약 70~20만년 전으로 추정(推定)되며 자바원인(Java Man)과 함께 원인(猿人)단계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를 대표한다. 주구점(周口店)의 북경원인(北京猿人) 발굴유적은 1987년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국(中國)의 고인류학자(古人類學者)이자 제4기 지질학자(地質學者)인 가란파(賈蘭坡, 1908-2001)는 1936년 11월15-26일까지 11일 동안 북경인의 두개골 세 점을 추가로 발견하여 다시 한번 세계를 경천동지(驚天動地)시키는데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하여 일본군(日本軍)이 북경(北京) 협화의학원을 점거했을 때 미국인들이 <북경인 화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하는데 이후 <북경인 화석>의 행방이 묘연해 졌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주구점(周口店)의 유적 발굴에 대해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거금을 지원했으며, 많은 서양인 학자들이 참여했음을 기록은 또한 전해주고 있다.
2.
지질학자(地質學者)이자 고고학자(考古學者) 또한 탐험가(探險家)로 1874년 스웨덴에서 출생한 안데르손은 1914년 중국정부의 초청장을 가지고 중국 탐사여행을 떠나오게 된다.
그런데 안데르손이 북경(北京)을 찾아오는 노정(路程)을 살펴보면 그가 찾아온 북경이 지금의 대륙 북경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그는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서 출발하여 인도(印度)에 도착한 후, 다시 신강(新疆)지역의 타림분지로 들어가고, 이어 타리무(塔里木) 강을 따라 중국내륙으로 들어왔다고 하며 이때가 1914년4월의 어느 날 오전이었다고 한다.
안데르센이 남극(南極)에서 탐험중이던 1901년 봄 스웨덴의 지질학자(地質學者)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 1865-1952)은 타림분지에 위치했던 로브노르(Lob Nor, 羅布泊)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 서부를 밟게 된다.
로브노르 호(湖)를 최초로 탐사한 유럽인은 19세기말의 러시아 육군장교 프르제발스키(Nikołaj Michajłowicz Przewalski, 1839~1888)이며, 그는 타림강 하류를 두 번에 걸쳐 탐사한 후, 로브노르에 대한 기존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그가 발견한 타이터마(台特馬)호수가 역사에 나오는 진짜 로브노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로브노르 호는 1863년 동치(同治)2년에 간행된 대청일통여도(大淸一統輿圖)에 처음으로 나포박(羅布泊-로브노르)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다.원래는 중국의 청해(靑海)호 다음으로 큰 내륙호수였는데, 중공정부의 마구잡이식 개간과 상류에서 다른 곳으로 물을 유출시키는 바람에 1972년 모두 말라버렸다고 하며, 최근 신강(新疆)정부가 천산(天山)에 터널을 파서 이리하(伊犁河)수계의 물을 타림강으로 끌어들여 나포박(羅布泊)을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다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중공정부의 원자폭탄 실험과 무관치는 않을 일이다.
유명한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은 프르제발스키의 발견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 이유는 프르제발스키가 주장한 호수는 담수(淡水)호이며, 원래의 로브노르는 염호(鹽湖)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스벤헤딘은 1901년9월말경에 타림강에 다다랐고, 3개월간의 탐험 끝에 로브노르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 지역에 산재한 10여개의 호수가 바로 염택(鹽澤)이었음을 알고, 그중 가장 큰 호수가 바로 나포박(羅布泊)이고 염호(鹽湖)였음을 발견하게 되며, 28년후 사실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스벤헤딘의 탐사를 통해 로브노르 서북부 일대에 1천년동안 사람들에 의해 잊혀져 있던 누란(樓蘭)의 고성(古城)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3.
17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유럽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중국대륙으로 몰려들어 고대 문화유적지들을 마구잡이로 파헤쳐 고대 석조(石造)와 분묘(墳墓)등 대량의 고건축과 고대 유적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성립과 더불어 정부의 적극적인 문화재(文化財) 보호정책을 통해 비로소 문화재 약탈과 파괴행위가 금지되었고, 스웨덴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북양(北洋)정부(1912-1928-북경에 존재한 군벌정부)의 초청으로 안데르손이 1914년5월16일 중국 북경에 도착하여 농상부(農商部)에 부임하게 되었다.
안데르손은 스벤 헤딘이 3개월에 걸쳐 탐험했던 타림강지역을 1개월 넘는 탐사를 마무리한 후 북경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위의 기록에서 안데르손이 타림지역에 도착했을 때가 1914년4월의 어느 날이라고 했으니, 그가 도착한 북경(北京)은 타림강의 끝자락에서 약 한달거리에 존재한 지역이 되어야 논리적으로 타당성을 얻게 된다.
위 지도를 통해 보게 되면 나포박(羅布泊)에서 구한말(舊韓末)의 북경(北京)으로 비정되는 주천(酒泉)까지의 거리는 돈황(燉煌)을 통해 거쳐가는 길이 약 700km에 이르며 이를 타림강까지로 연장하면 무려 900km에 이르는 길이다. 안데르손이 이 길을 그냥 걸어갈리는 없는 일이고, 이를 탐사(探査) 하면서 북경까지 갔다고 본다면 한 달 이상이 걸리고도 남을 거리임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1945년 이전 한족(漢族)의 북경(北京)은 현 대륙 감숙성(甘肅省) 기련산맥(祁連山脈)의 좌측 주천(酒泉)지역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상 연(燕)나라의 수도였다는 연경(燕京)은 조작된 역사통설에서 말하는 북경(베이징)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현 대륙 알타이산의 서남쪽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어야 우리조선민족의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연행록(燕行錄)의 행적과 일치하며, 또한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나오는 <북경(연경)에서 한양(漢陽)까지 오는데 하루 51km의 거리를 45일동안 걸어와야 했다>는 설명과, 미국의 소설가이자 러일전쟁의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이 말한 한양(漢陽)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 수천킬로미터에 달했다는 기록을 통해, 1904년 당시의 북경(北京)으로 불리운 지역이 조선사 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의 서남쪽에 존재했음을 명확히 간파해 낼 수 있다. 따라서 1912년 감숙성(甘肅省)의 주천(酒泉)지역에 존재한 북양(北洋)정부의 수도가 북경(北京)으로 개명되어 불리운 것이고, 이후 1949년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정부가 무주공산의 대륙조선의 강역을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차지한 후 커다란 유적도시를 세운 후 지명과 역사의 흔적까지 모조리 이주시켜 북경(北京)이란 이름을 붙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즉 북경(北京)이란 용어는 시대에 따라 또한 역사적 격변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고 덧붙여지고 중복되었던 그래서 우리가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를 연구하고 한족(漢族)의 북경(北京)위치를 찾아내는데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던 것임을 이제는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1860년10월, 제2아편전쟁에서 영국,프랑스의 연합함대에게 패해 함락되었던 북경과,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운동을 통해 파괴되어 서양인들에 약탈되었던 북경(北京)은 현 감숙성(甘肅省)의 주천(酒泉)이 아니라 현 알타이산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고, 주천(酒泉)지역의 북경은 북양(北洋)군벌들이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새롭게 터전을 잡고 북경(北京)이라 명명한 지역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1911년을 기점으로 북경(北京)의 위치가 변경되었음과 다시 1945년 이후에 현 대륙 북경(北京)지역으로 재차 이전시켜 변조되었던 북경(北京)이주역사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4.
북경원인(北京猿人)의 발굴지인 주구점(周口店)의 역사를 검토하다 보면 1928년 현재의 북경(北京)이 감숙성(甘肅省)지역에 위치했음을 확증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항을 발견하게 된다.
안데르손의 주구점(周口店) 유적 발굴은 1차 완료된 후, 1928년4월부터 2차 발굴이 한족(漢族) 배문중과 양종건등이 참여하고 록펠러 재단의 풍부한 자금을 기반하여 시작하게 된다.
당시 한족(漢族)의 상황을 보면 1926년부터 남경(南京-현 사천성 宜賓)에 기반했던 장개석(蔣介石)의 북벌이 시작되었고, 1928년6월4일 북양군벌의 강자 장작림(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암살되면서 북양군벌은 해체되고 당시의 북경(北京)은 장개석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때 장작림이 암살당한 지역은 봉천(奉天)지역으로 현 알타이산의 좌측 어느 지역이 된다고 비정할 수 있게 되며, 1928년 이전에 현 감숙성(甘肅省)의 주천(酒泉)지역은 이미 장개석의 판도에 들어갔고, 북양정부는 이미 궤멸되어 만주(滿洲)지역인 알타이산 이북으로 철수한 뒤가 된다.
록펠러 재단의 1928년 자금지원 이후, 4월부터 시작된 주구점(周口店)발굴단에 중국정부는 두 명의 학자를 파견하게 되는데, 이 파견대의 명칭이 놀랍게도 서북과학고찰단(西北科學考察團)이 된다. 이 얼마나 엄청난 단어의 나열이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북경원인이 발굴되었다는 현 북경(北京) 서남쪽 주구점(周口店)에 보내는 유적발굴단이 어찌하여 서북과학고찰단(西北科學考察團)이 된단 말인가?
분명 현재의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본다면 서남(西南)과학고찰단이 되어야 정확한 언어의 사용이라 할 일이지만, 분명 당시의 중국정부는 서북과학고찰단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단어를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이를 통해 고찰해 보건대, 당시 남경(南京)정부는 현 사천성(四川省)남쪽 양자강 상류인 의빈(宜賓)시에 위치해 있었기에, 북양군벌의 원세개(袁世凱)에 의해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 주천(酒泉)지역의 북경(北京)이 남경을 기준했을 때 정확히 서북(西北)지역이기에 서북과학고찰단(西北科學考察團) 이라 명명되었음을 우리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지도그림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5.
이상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면, 북경원인(北京猿人)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던 주구점(周口店)은 1928년 당시 북경으로 명명되었던 현 감숙성(甘肅省) 주천(酒泉)의 서남쪽 50km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지점은 현 기련산맥(祁連山脈)의 북쪽 기슭이 된다.
간악한 중국 공산당(共産黨)의 모택동은 이리와 같은 심성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조선민족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세계적인 폭력과 비열함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어부지리(漁父之利)로 거대한 조선민족의 강역을 갈취한 뒤 조선민족의 후예들이 알지 못하고 찾지도 못하게 대륙 서쪽에 위치했던 초라한 한족(漢族)의 강역과 역사를 대륙 전체로 확대하면서 조선민족이 수천년에 걸쳐 축조하고 관리해온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물(遺物)유적(遺蹟)을 철저히 파괴하고 한족(漢族)의 역사강역으로 모든 사서(史書)를 교열,조작하여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역사조작에도 불구하고 얽힌 실타래를 풀 듯이 한올씩 한올씩 벗겨내다 보면 반드시 그 조작의 증거와 오류가 발견되는 법이니 스웨던 고고학자(考古學者) 안데르손과 배문중(裵文中,1904-1982)의 발굴여정에 나타난 서북과학고찰단(西北科學考察團) 의 존재는 1928년 현재 북경(北京)의 위치가 감숙성(甘肅省) 서쪽지역에 존재했고, 따라서 북경원인(北京猿人)이 발굴되었던 주구점(周口店)의 위치 또한 감숙성 기련산맥(祁連山脈) 기슭, 주천(酒泉)에서 서남방향 50km 지점에서 일어났던 일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현 대륙 북경 서남방에 이름지어진 주구점(周口店)은 1949년이후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주구점(周口店)임을 명확히 인식하자. 현 주구점(周口店)이 위치한 지역은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지역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
2022.03.07.松溪-주구점(周口店)은 어디인가?
첫댓글 1911년 以前 北京이 현 알타이산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면 1858-1860년 2차아편전쟁때 영국, 프랑스 艦隊가 어느 물길을 타고 어찌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1911년 以後 1945년 무렵까지 北京이 현 甘肅省 酒泉이었다고 하면, (당시 南京政府가 宜賓에 있었는지 여부도 밝혀져야 하는데) 宜賓으로부터 서북방향이었다는 것 以外에도 그 추정근거가 보다 폭넓게 갖추어져야 하지않을까 싶습니다.
漢族이라는 族名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 사뭇 의문이 듭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유전학적으로도 서지적으로도 漢族이란 개념 자체가 허구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쇠로 만든 배는 1870년이후 영국에서 처음으로 건조됩니다. 제너럴 셔먼호를 비롯해 1870년 이전의 배들은 모두 목조의 소형배들입니다. 현 중경에서 가릉강을 통해 2천킬로를 내륙으로 이동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바로 내륙운하입니다. 또한 조선사오천년의 백두산을 찾아내고 반도구성에서 6천리거리의 대륙평양을 찾아내게 되면 분명 거기에는 운하와 커다란 물길이 존재했을 터이니..그것을 온전히 밝혀내는 것은 우리와 후학의 몫일 것입니다. 모든것이 변조되었습니다. 남경은 의빈으로 비정되지만 어떤 지도에도 기록에도 현 사천성지역이란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개봉부가 사천성의 중경이나 그 이북쪽에 존재했을 것을 기록을 통해 고증하듯이 우리는 이런것들은 날줄과 씨줄로 엮어 밝혀가는 어려운 여정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곤명에 위치한 미군공군부대가 대만에서 중경을 폭격하는 비행기를 육안으로 보고 교전하러 나갔다고 하는데 현재의 대만과 중경을 놓고 본다면 실소를 금할 황당한 말이겠으나. 그 대만을 해남도로 옮기고 중경을 곤명위쪽의 판츠화로 옮기면 기록은 정확해 지지요.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독립투사들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그 가증스런 조작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첫걸음을 걷고 있다 보시면 오히려 편할듯 합니다. 열정과 관심으로 하나씩 접근해 가다 보면 많은 것을 밝혀낼수 있을 것입니다. 한족이란 개념도 처음에는 없었겠으나 후대에 오면서 역사학자나 정치인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겠죠. 하지만 현재 그 개념은 명확히 자리잡아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즉 민족주의가 점점 강화되어 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것을 똑바로 바라보면 우리 조선민족이 어찌 가야 할지 방향성이 나타날 것입니다. 5천년을 공부해야 비로소 100년의 미래를 구상하고 바로 이끌수 있다고 하니...열심히 공부해서 하나씩 찾아가길 기대해 볼 뿐입니다.
주구점이 현북경옆이 될 수가 없을 것 같네요…대륙은 서고동저 지형이라 고대로 갈수록 현북경은 물바다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 물바다에서는 원숭이 인간이든 누구든 살기가 힘들었겠죠…
주구점은 서쪽에서 지명이동 됐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로 보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의 이동된 가짜 주구점은 50만년전이면 물바다 였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것을 잊지 마세요.제도권의 학자들 처럼 정확한 자료나 근거없이 '비정된다,추정된다' 란 말을 많이 사용하면 오해를 받지요.지도와 지명은 역사서의 보조자료 일뿐 주자료가 아닙니다.역사를 비롯해 모든것의 진실은 단순합니다.복잡하고 장황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기록이 가짜일 경우입니다. 우리의 역사서는 모조리 교열되고 변조되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면 결국 답은 반도로 귀결됩니다. 이것이 우리 대륙조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 서지상의 기록과 기타 기록들을 비교하여 역사적 지형 또는 고유명사를 밝히게 되면 오히려 문제는 쉽게 접근할수 있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