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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부용지(芙蓉池),서향각(書香閣),어수문(魚水門),
주합루(宙合樓) 그리고 영화당(暎花堂) >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로 알려져 있다.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옥류천 영역이 펼쳐지며, 왕가의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자연풍광을 느끼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물론 과거시험을 비롯한 각가지 야외행사도 열렸다고 한다.
후원으로 가는 언덕을 넘으니 제일먼저 아름답고 수려한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부용지와 주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속에 에워싸인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아 왔는데 막상 직접 대하니 때가 때인지라 많은 수목들이 나뭇잎이 다져버린 잔가지 사이로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다 들어나 수수하고, 소박한풍경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닥아 왔다.
다만 부용지(芙蓉池)의 부용정(芙蓉亭)이 보수공사중이라 가림막이 쳐져있어 완벽한 모습을 보려던 나에게 아쉬움이 안겨주었다.
< 부용지 옆에서 , 멀리 어수문과 주합루가 보인다.>
부용지 일원에 있는 주합루(宙合樓)는 어수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데 2층 누각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에는 왕실직속 도서관 규장각을, 2층에는 열람실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그 옆에 있는 서향각도 도서관이다.
그리고 주합루(宙合樓)는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이고 어수문(漁水門)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이라고 한다.
< 어수문 앞에서, 뒤에는 조합루 >
< 어수문 우측모퉁이에 있는 최근 복원한 우물 >
< 부용지에 가림막이 쳐진 부용정 >
두 번째 정원 의두합은 1827년(순조27년)에 효명세자가 서재와 공부방으로 쓰던 곳이다. 단출하고 단청도 없는 아주 소박한 건물이다.
그래서 군자의 성품을 닮은 건물로 평한다.
공부방 운경거는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앞쪽에는 애련지가 있다.
< 불로문(不老門) >
돌로 만든 불로문은 의두합과 애련지(愛連池)사이에 위치해 있다.
< 좌측이 의두합(倚斗閤), 우측이 운경거(韻磬居) >
애련지(愛連池)는 1692년 (숙종18년)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섬은 없고 애련지와 애련정(愛連亭)만 있다.
애련정은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애련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연못에 비친 풍경이 일품이다>
우리는 애련지를 지나 연경당으로 가는데 그사이에 연못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는 어수당 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연못만 있었다. 연못에 비치는 풍경이 일품이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거울처럼 아름답게 풍경이 비친다.
연경당(演慶堂)은 사대부집을 본떠 만든 조선후기 접견실이다.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하여 1828년(순조28년)경에 창건 하였으나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연경당은 사대부집을 본떠 만들었으나 120칸으로 일반 민가(民家)가 99칸으로 제한된 것에 비해 차이가 난다.
<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문 >
< 왕의 사랑채 >
< 왕비의 안채 >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가 분리되어 있으나 내부는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 안채 내부모습 >
정사각형 속에 정사각형, 한국의 미(美)가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이곳은 연회를 베풀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곳에서 G-20 정상회의 시 각국영부인을 초청 한복패션공연을 하였다고 한다.
< 정자는 농수정(濃繡亭)이고, 우측은 선향재(善香齋)>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날렵한 모습이다, 외국사신과 독대하던 정자라고 한다. 그리고 선향재는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모습이며 도서관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고한다.
<존덕정(尊德亭)이 특이하게 관람지에 걸 터있는 모습이다. >
이곳 존덕정(尊德亭)은 1644년(인조22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리고 연못은 원래 네모 또는 둥근 모양이었으나 1900년대 이후에 하나의 곡선형의 연못으로 바꾸고 , 지금은 관람(觀纜池)라고 부른다고 한다. 관람정과 승재원은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 존덕정(尊德亭) 천정에는 2마리의 용이 있다 >
존덕정(尊德亭)은 여느 정자와 다른 모습으로 특이하게도 겹 지붕으로 되어 있고 일부가 관람지(觀纜池)에 걸 터 놓여 있었다.
<폄우(砭愚)사 내부 창으로 본 승재정(勝在亭) >
폄우(砭愚)사 내의 창문으로 본 승재원(勝在亭)은 마치 날아갈 듯, 날렵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승재정(勝在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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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과 관람지(觀纜池) >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으로 안에 앉아서 관람지를 바라보면 마치 배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관람지는 존덕정의 연못도 석교를 통해 이곳과 하나의 연못으로 되어있었다.
< 옥류천(玉流川)으로 가는 언덕길 >
우리는 창덕궁 마지막 네 번째 정원 옥류천(玉流川) 일원으로 가기위해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맑고 쾌청한 날씨지만 아직도 봄의 시샘으로 차가운 공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새싹들을 멈칫거리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운 순서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逍遙亭),태극정(太極亭) >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이곳에 1636년(인조14년)에 취한정(翠寒亭),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猗亭), 농산정(籠山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만들어 어느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 소요정(逍遙亭)과 태극정(太極亭) >
< 소요암(逍遙巖) 깎아 옆으로 곡선형의 수로를 만들었다 >
< 소요암(逍遙巖)과 주목>
소요암(逍遙巖)에는 인조의 친필 ‘옥류천’이 새겨져있고, 그 옆에 있는 나무는 주목이었다. 소요암(逍遙巖)을 깎아 내고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드려 작은 폭포를 만들었고, 곡선형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 청의정(淸猗亭) >
청의정(淸猗亭)은 유일한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조그만 한 논이 있는데, 벼농사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설마 임금님이?
< 태극정(太極亭)에 앉아서 >
각 정자마다 앉아서 바깥 경치를 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나는 그때의 그 시대의 풍류에 젖어본다.
< 태극정(太極亭) 천정 모습 >
이곳 옥류천 일원에 있는 4개의 정자 천정에는 각각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곱고 아름다운 단청에 한국의 미를 다시 한 번 느껴본다.
< 옥류천(玉流川) 일원을 마지막으로 다음 행선지로 향하고 있다 >
옥류천을 나오며 가을이나 숲이 우거져 있을 때는 더 멋들어지는 그림이 펼쳐질 것 같았다.
아기자기 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정자를 세운 구도의 배치는 조선시대의 왕가와 사대부들의 풍류의 일면을 볼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의 후기 몰락과 함께 왕가의 한과 외로움도 동시에 나를 슬프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리는 마음은 왠지 모르게 허전함을 느껴진다.
우리는 창경궁으로 가기 전에 그 옆에 위치한 낙선재(樂善齋) 일원에 들렸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친왕의 비(妃)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기거한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慶嬪)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王妃)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 낙선재 일원을 배경으로 >
뒤에 보이는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옆의 석복헌(錫福軒)은 경빈(慶嬪)의 처소였으며, 그 옆에 수강제(壽康齋)가 있는데 수강재에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였다고 한다.
< 낙선재(樂善齋) 후원에 있는 육각형정자 상량정(上涼亭) >
< 낙선재(樂善齋)로 들어가는 장락문 (長樂門) >
< 헌종의 사랑채인 낙선재(樂善齋)의 모습 >
사부대가의 집과는 다른, 단청을 하지 않아 더 소박하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낙선재가 평소에 검소하고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다던 그의 면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정면에서 본 낙선재(樂善齋) >
낙선재(樂善齋) 바로 옆에는 후궁이지만 지극히 사랑했던 경빈(慶嬪)을 위한 석복헌이 있었다.
< 정면 낙선재 행랑채 밖의 마당에서 >
우리는 마지막으로 창경궁으로 갔다.
창경궁은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창덕궁 후원 가는 길옆에 있는 함양문으로 들어갔다.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데는 또 다시 입장료 천원을 더 내고 표를 사야 했다.
창경궁은 잘 알다시피 일제하에 궁터에다 조선의 왕가를 무시하고 창경궁을 창경원이라 격하시켜 동물원과 놀이터를 만들고, 창경궁 남쪽으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가 이어져 있었으나 종묘와 끊어지도록 도로를 내는 등, 유럽의 히틀러도 프랑스 문화제에 손을 데지 않았는데, 무지한 일본은 왕가의 맥을 끊으려고 의도적으로 훼손한 곳이다.
70년대에는 나는 창경원(창경궁)에서 동물원과 벚꽃을 보고, 놀이터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놀았던 생각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이 앞서 창경궁에 들어가기가 민망스러워졌다.
다행이도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을 1983년에 창경궁으로 환원하여 복원공사가 끝나고, 오늘에서야 찾게 된 것이다.
함양문으로 들어온 우리는 자경전 터에서 여러 궁을 내려다보며 잠시 쉼터에서 쉬었다. 마침 쉼터 옆에 자경전 터였음을 알리는 푯말이 서있었다.
< 창경궁 자경전 터에서 본 통명전의 뒷 모습 >
자경전은 정조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었다.
정조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창경궁 건너편의 함춘원(지금의 서울대병원부근 )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고쳐 짓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궁궐 내 언덕에 자경전을 지었던 것이다.
< 통명전(通明殿)에서 >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중심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희빈장씨가 통
< 뒤에는 통명전이 보이고 앞 좌측은 경춘전이고, 우측은 환경전이다 >
통명전을 중심으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이는 여러 전각들이 모여 있는데,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 명정전 앞에서 >
< 창경궁 중심 궁전인 명정전 내부 >
통명전을 나와 경춘전과 환경전 사이를 지나 창경궁의 중심 궁전인 명정전으로 갔다. 명정전은 다른 전각과는 다르게 동쪽 방향으로 보고 있었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 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단층지붕에 아담한 궁전이지만 궁궐의 정전(政殿)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 명정전 앞 홍화문이 보인다.>
홍화문 뒤에 있는 좌측에 있는 현대식 건물은 서울대병원이다.
조선시대에 왕들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으나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항 찬반을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주며 기쁨을 함께 했다고 한다.
< 문정전 내부, 어전회의도 여기서 열렸다 >
< 왕의 독서와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
명정전 가까운 주위에는 왕의 일상 업무나 어전회가 열리는 문정전, 독서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 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 했다고 한다.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 좌측이 경춘전이고 우측이 환경전이다, 그 앞이 숭문당이다 >
그림에서 보는 봐와 같이 관청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으나 명정전은 동쪽을 향해 있다. 명전전은 숭문당 우측에 소나무에 가려져 안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우측이 동쪽 방향이다.
그 이유는 남, 서, 북, 쪽이 구릉이고, 동쪽은 평지인 지세라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하고 있단다.
그리고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 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라 한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많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창경궁에서 일어난 현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나는 서 있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 온 것과 때를 맞추어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궁궐 권위를 격하시키기 위해서였다한다.
지금은 그 자리에는 헐어낸 전각들은 복원이 안 되었고 , 과거에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왕이 집적 농사를 지었다는 ‘내농포’라는 논이었는데 일제가 파헤쳐 큰 연못으로 만든 것을, 1983년 이후에 전통양식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지금의 춘당지로 만들었으며,
그리고 대 온실이 있는데 이는 이미 1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여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자생화를 심어 가꾼 자생화단이 조성 되어 있다고 한다.
아쉽지만 우리들은 이곳 복원되었다는 현장을 직접 둘러보지 못하고 먼발치로만 보고 오늘의 일정을 끝내기로 하였다, 아침10부터 쉬지 않고 지금까지 점심도 걸은 채 돌아다녔으니 이미 지쳐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벌써 15시5분이었다. 다시 우리는 처음 들어왔던 길로 창덕궁을 거처 돈화문으로 나왔다.
< 돌아가는 길에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
돌아가는 길에 마침 창덕궁 희정당 앞을 지나가는데 잘 조성된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창덕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하여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 창덕궁 밖에서, 좌측이 매표소이고 우측이 창경궁 돌담이고
그 중간 멀리보이는 곳이 북촌이다. >
< 주변에 있는 설렁탕 집에서 일정을 끝내고 한잔! >
15시10분 모든 일정을 끝내고 주변에 있는 설렁탕집으로 가서 소주한잔으로 배 고품을 달래고 피로를 풀었다.
서울 가까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찾지 못했던 북촌 한옥마을과 창덕궁과 후원 그리고 창경궁까지 둘러본 지금 오길 잘 했다는 생각뿐이다.
어딜 갔었으나 마찬가지 생각이지만 정말로 일상이 반복되는 생활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길을 떠나 본다는 것은 새로운 환경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깨달게 되는 것이 이 얼마나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것이 아니어도 향수가 느껴지고, 옛 추억이 묻어나는 그리움이 깃든 곳 이라면 어디든 계획을 세워 찾아보는 것도 일상을 벋어나 삶의 질을 살찌게 하는 것이 아닐 런지?
일상은 우리들이 벋어날 수 없는 삶이지만 잠시 한번쯤 벋어나 보는 것도 그 일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오늘 목요산행팀이 북촌과 고궁을 찾아 올린, 이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혹시라도 이곳을 찾게 될 때 조그만 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3월25일 염영호 올림.
끝.
참고로 고궁에 관한 글은 가이드와 안내책자를 참고하여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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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촌 한옥마을과 창덕궁 창경궁 1부에이어 2부를 집에서 편히 선명한 사진과 맛갈나게 쓴 기행문으로
현지가서 직접 보는것 보다 더 구경한번 잘 하고갑니다 경로우대 무료 감사합니다 ,,,
않은 관심을 주셔서 힘이납니다. 열심히 올리겠습니다.